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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선무공신(宣武功臣)과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

 

 

 

선무공신(宣武功臣)과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

 

 

선무공신(宣武功臣)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웠거나 명(明)나라에 병량주청사신(兵糧奏請使臣)으로 가서 성과를 거둔 문무 관원에게 준 훈호.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청난공신(淸難功臣)과 더불어 결정되었는데, 18명을 3등으로 구분하였다.

 

1등은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 등 3명으로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孝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2등은 신점(申點)·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이억기(李億祺) 등 5명으로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3등은 정기원(鄭期遠)·권협·유사원(柳思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 등 10명으로 효충장의선무공신이라 하였다.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훈된 사람들에게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발급한 공신 증서. 1604년 선무공신에 들지 못한 사람들 중 1605년(선조 38) 9060명을 녹훈한 것이며, 문서도 이때 발급되었다. 첫머리에 문서의 명칭이 있고 문서를 발급받는 개인의 신분과 성명을 기재하였다. 다음에는 선조가 공신도감에 내린 선무원종공신 녹훈의 전지(傳旨)를 실었다. 여기에는 3등공신까지의 명단과 신분이 기록되어 있는데, 종친으로부터 노비까지 사회 모든 계층이 망라되어 있다. 각 등급의 공신 명단 끝에는 이들에게 내리는 특권이 기재되어 있다. 각 등급의 공신에게는 관직을 한 계급씩 올려주고 그 자손들에게는 음직(蔭職)을 주게 하였고 또, 그 부모에게는 봉작(奉爵)하고, 죽은 자에게는 추증하고, 기왕의 범죄는 탕감하고 노비들은 면천(免賤)하여 양민(良民)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끝에는 공신도감 관원의 명단(이항복,이효민등)을 수록하였다. 내용이 많아 활자로 인쇄된 책자이다.



[ 운영자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선무원종공신록권(자료찾기 참조)


번호 표제 저작자 발행자 발행년도 언어 청구기호 자료이용하는곳 구분 목차 원문 선택


1 宣武原從功臣錄券 宣武功臣都監 編 [刊寫者未詳] 宣祖38(1605) chi 일산古2513-29 개인문고실 고서


2 宣武原從功臣錄券 [발행자불명] 1976 2515-97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3 宣武原從功臣錄券 宣武功臣都監 ; 李源轍 編修 胎敎硏究社 1981 chi 古5181-1 고전운영실 고서


4 宣武原從功臣錄券. 單 [宣武錄勳都監 편] 一萬壬亂功臣宣揚準備委員會 1988 911.0553-일865ㅅ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5 恭靖大王類附錄 국립중앙도서관 1996 kor M古1-1996-504 고전운영실 고서


6 宣武原從功臣錄券 국립중앙도서관 1996 kor M古1-1996-505 고전운영실 고서


7 宣武原從功臣錄券 국립중앙도서관 1998 kor M古2-1998-68 고전운영실 고서


8 宣武原從功臣錄券 功臣都監 編 慶州金氏系譜硏究會 2000 chi 古2513-414 고전운영실 고서



 

 

조선 14대 선조 때 공신도감 이항복 등이 작성한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은 표지외 104장으로 되어 있고, 매장은 한면에 세로로 11칸으로 줄을 그어서 매장이 2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맨 첫장 제1칸에는 宣武原從功臣錄券으로 두 번째 줄에는 다음과 같이 녹권을 교부받는 折衝金軸(절충김축), 僉正金希璡(첨정김희진), 部將金斗南(부장김두남), 部將金志南(부장김지남) 등 원종공신의 이름을 기록하고 그 위에 옥쇄가 찍혀있다. 임란시 사망한 원종공신에 대하여는 그 자손에게 록권이 교부되었다.


세 번째 줄부터 다음과 같은 서문이 기록된다.


萬曆三十三年四月十六日 行都承旨臣申欽敬奉 傳旨

만력 33년(1605년) 4월 16일, 행도승지 신 신흠[1]이 경건하게 임금의 뜻을 받들어 전한다.

[1]신흠(申欽, 1566~162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


國多難而靡定爾旣宣力於中興功無徵而不酬予乃推恩於原從誕擧新典式尊舊章言念

나라가 많이 어지럽고 쓰러지려 할 때에 모두들 힘을 합쳐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은 세웠으나 거두지 못하고 보답을 못하여 나(임금)는 이에 원종공신으로 녹훈(推恩)하고자 하며, 옛날의 제도와 말과 이념을 존중하여 새 법을 만든다.


南寇之陸梁致有西土之播越縱橫豺虎慘見 宗社之蒙塵跋涉山川忍說君臣之中露天欲興唐而父母拯己人猶戴晋而大小忘身

남쪽의 왜구(南寇)들이 제멋대로 날뛰어(陸梁)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하였으며(播越) 늑대와 호랑이들이 전국을 누비니(縱橫) 참혹한 광경이었다. 종묘사직과 임금은 피난길(蒙塵)에 올라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跋涉) 어려움을 견디고, 군신들은 노천에서 생활하면서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대하였으며, 부모님을 받들 듯이 자기의 처지를 생각하며 크고 작은 희생을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幸戡亂而回鑾遂策勳而銘鼎惟爾卿士大夫曁士庶人或揚我武烈或助我軍需執殳驅馳或有損軀之士提兵戰伐或有獻馘之徒悉錄

다행히 난리가 평정되고(戡亂) 어가(鑾)가 환궁하기에 이르렀으니, 사대부 및 선비나 서인들의 공훈을 조사하여 그 공적을 기록하여 새기도록 하라. 혹 무공을 세웠거나, 혹 말이나 수레를 가지고 군수품을 지키고 옮기는 것을 도왔거나, 혹 몸을 다쳐가며(捐軀)적과 싸워 무찌르고, 혹 도둑의 목을 베어왔거나 그 밖에 모든 공을 세운 사람들을 기록하라.


於玆 永傳於後惟輕惟重分一時之功勞爾子爾孫享萬世之安樂故玆敎示想宜知悉

그리고 영원히 후세에 전하여 그 공의 작고 큰 것을 분별하여, 한 때의 공로로서 그들의 아들과 손자들이 만세에 걸쳐 행복과 영광을 누려야 하니 이를 교시하여 마땅히 모든 것을 알리도록 하라.


그리고 13번째 줄부터 다음과 같이 원종공신들의 이름이 나열된다.


臨海君珒 定遠君琈 順和君珪 仁城君珙 義昌君珖 贈左贊成金千一 贈判書高敬命 兵使金應瑞 折衝金軸 鰲城府院君李恒福 延陵府院君李好閔 左參贊朴東亮等乙良宣武原從功臣一等 兵使申格 判官吳壽聃 部將金斗南 部將金志南 松山君金渭 佐郞朴垣等乙良宣武原從功臣二等 判官李今石 都事朴璘等乙良宣武原從功臣三等 爲等如施行爲只爲下吏曺爲良如敎(浩漫不盡騰梓)

임해군진, 정원군부, 순화군규, 인성군공, 의창군광, 증좌찬성김천일, 증판서고경명, 병사김응서, 절충김축, 첨정 김희진, 오성부원군이항복, 연릉부원군이호민, 좌참찬박동량 등으로 선무원종공신일등

병사신격, 판관오수담, 부장김두남, 부장김지남, 송산군김위, 좌랑박원 등으로 선무원종공신이등

판관이금석, 도사박인 등으로 선무원종공신삼등

등급에 따라 시행하되 단 그 이하는 이조에서 명령한 대로 할 것(너무 많아 다 쓰지 않음)


그리고 뒤쪽 103페이지 부터는 다음과 같은 전지(傳旨)가 기록되어 있다.


萬曆三十三年四月十六日 行都承旨臣申欽敬奉 傳旨

만력 33년(1605년) 4월 16일, 행도승지 신 신흠[1]이 경건하게 임금의 뜻을 받들어 전한다.


宣武原從功臣 一等乙良各加一資子孫承蔭宥及後世父母封爵

선무원종공신 1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고, 그의 자손들은 조상의 음덕을 이어받아 후세에 전하도록 하고 부모에게는 봉작을 주라.


二等乙良各加一資子孫承蔭有及後世子孫中從自願加散官一資其中無子孫者兄弟婿姪中從自願加散官一資

2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고, 자손에게는 음덕을 이어받게 하여 후세의 자손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면 직무가 없는 벼슬(散官)을 하나 주고, 만일 그중에서 자손이 없는 자에게는 형제나 사위 및 조카 중에서 원하는 사람에게 직무가 없는 벼슬 하나를 주라.


三等乙良各加一資子孫承蔭宥及後世爲乎矣

3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고, 자손들에게는 선조의 음덕을 이어서 후세에 전하게 하라.


各等通訓以上乙良子孫兄弟甥姪女婿中一人從自願加散官一資物 故人乙良各依本等施行爲旀各追贈一資

각 등급의 통훈대부이상에게는 그의 자손, 형제, 생질, 사위 중 한사람에게 그가 원하면 직무가 없는 벼슬(散官)을 하나 주고, 고인(故人)에게는 각각 본 법에 의하여 시행토록 하며 품계를 한자리씩 추증하도록 하라.


爲齋犯罪作散人乙良並於本品叙用爲齋永不叙用人 乙良許通仕路爲齋職牒收取人 乙良幷只還給爲齋妾子乙良限品安徐爲齋 公私賤口乙良幷只免賤爲齋係干逆黨及因逆賊公事間事被罪者乙良官爵一款擧行安徐爲只爲下吏曺爲良如敎

지은 죄가 사하여졌거나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散人)은 본 법으로 다시 임용(敍用)토록 하며, 영원히 재 등용할 수 없는 사람은 벼슬길(仕路)에 나아가도록 허락해 주라. 직첩(벼슬 임명장)을 회수당한 사람은 단지 반환해 줄 것이며, 첩의 자식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구제해 주고,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종(賤口)으로 부리고 있는 사람은 다만 종의 신분을 면제해주게 하라.

역당에 관련이 있었거나 역적으로 인하여 공개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벼슬자리 하나를 마련하여 서서히 쓰도록 하게하고 이조로 하여금 시행토록 하라.


맨 뒤쪽 104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선무원종공신록권을 작성한 신하들 7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宣武原從功臣都監

선무원종공신도감


堂上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効節竭誠協策扈 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鰲城府院君 臣 李恒福 등

당상 추충분의평난충근정량효절갈성협책호성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오성부원군 신 이항복 등 7명(李好閔, 朴東亮, 權 悏(협), 金 權, 申 黙?, 朴桂男)

 

 

 

** 추가 1

 

선무원종공신(1605년宣武原從功臣)은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우신분들에게 [문무 관원.백성등에게] 1604(선조 37)준 훈호입니다

이교지는 1604년 선무공신에 들지 못한 사람들 중 1605(선조 38) 9060명을 녹훈한 것이며,


 

선무원종공신 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

문서도 이때 발급되었다. 첫머리에 문서의 명칭이 있고 문서를 발급받는 개인의 신분과 성명을 기재하였다. 다음에는 선조가 공신도감에 내린 선무원종공신 녹훈의 전지(傳旨)를 실었다. 여기에는 3등공신까지의 명단과 신분이 기록되어 있는데, 종친으로부터 노비까지 사회 모든 계층이 망라되어 있다. 각 등급의 공신 명단 끝에는 이들에게 내리는 특권이 기재되어 있다. 각 등급의 공신에게는 관직을 한 계급씩 올려주고 그 자손들에게는 음직(蔭職)을 주게 하였고 또, 그 부모에게는 봉작(奉爵)하고, 죽은 자에게는 추증하고, 기왕의 범죄는 탕감하고 노비들은 면천(免賤)하여 양민(良民)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조선 14대 선조 때 공신도감 이항복 등이 작성한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은 표지외 104장으로 되어 있고, 매장은 한면에 세로로 11칸으로 줄을 그어서 매장이 2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맨 첫장 제1칸에는 宣武原從功臣錄券으로 두 번째 줄에는 다음과 같이 녹권을 교부받는 折衝金軸(절충김축), 僉正金希璡(첨정김희진), 部將金斗南(부장김두남), 部將金志南(부장김지남) 등 원종공신의 이름을 기록하고 그 위에 옥쇄가 찍혀있다. 임란시 사망한 원종공신에 대하여는 그 자손에게 록권이 교부되었다.

그리고 13번째 줄부터 다음과 같이 원종공신들의 이름이 나열된다.

臨海君珒 定遠君 順和君珪 仁城君珙 義昌君珖 贈左贊成金千一 贈判書高敬命 兵使金應瑞 折衝金軸 鰲城府院君李恒福延陵府院君李好閔 左參贊朴東亮等乙良宣武原從功臣一等 兵使申格 判官吳壽聃 部將金斗南 部將金志南 松山君金渭 佐郞朴垣等乙良宣武原從功臣二等 判官李今石 都事朴璘等乙良宣武原從功臣三等爲等如施行爲只爲下吏曺爲良如敎(浩漫不盡騰梓)

 

임해군진, 정원군부, 순화군규, 인성군공, 의창군광, 증좌찬성김천일, 증판서고경명,

병사김응서, 절충김축, 첨정김희진, 오성부원군이항복, 연릉부원군이호민, 좌참찬박동량 등으로 선무원종공신일등


병사신격, 판관오수담, 부장김두남, 부장김지남, 송산군김위, 좌랑박원 등으로 선무원종공신이등

판관이금석, 도사박인 등으로 선무원종공신삼등

 

등급에 따라 시행하되 단 그 이하는 이조에서 명령한 대로 할 것(너무 많아 다 쓰지 않음)

 

그리고 뒤쪽 103페이지 부터는 다음과 같은 전지(傳旨)가 기록되어 있다.

 

萬曆三十三年四月十六日 行都承旨臣申欽敬奉 傳旨


 

만력 33(1605) 4 16, 행도승지 신 신흠이 경건하게 임금의 뜻을 받들어 전한다.

宣武原從功臣 一等乙良各加一資子孫承蔭宥及後世父母封爵


선무원종공신 1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고, 그의 자손들은 조상의 음덕을 이어받아 후세에 전하도록 하고 부모에게는 봉작을 주라.

 

二等乙良各加一資子孫承蔭有及後世子孫中從自願加散官一資其中無子孫者兄弟婿姪中從自願加散官一資

 

2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고, 자손에게는 음덕을 이어받게 하여 후세의 자손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면 직무가 없는 벼슬(散官)을 하나 주고,

만일 그중에서 자손이 없는 자에게는 형제나 사위 및 조카 중에서 원하는 사람에게 직무가 없는 벼슬 하나를 주라.

 

三等乙良各加一資子孫承蔭宥及後世爲乎矣


3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고, 자손들에게는 선조의 음덕을 이어서 후세에 전하게 하라.

 

各等通訓以上乙良子孫兄弟甥姪女婿中一人從自願加散官一資物故人乙良各依本等施行爲各追贈一資

 

각 등급의 통훈대부이상에게는 그의 자손, 형제, 생질, 사위 중 한사람에게 그가 원하면 직무가 없는 벼슬(散官)을 하나 주고, 고인(故人)에게는 각각 본 법에 의하여 시행토록 하며 품계를 한자리씩 추증하도록 하라.


爲齋犯罪作散人乙良並於本品用爲齋永不用人 乙良許通仕路爲齋職牒收取人 乙良幷只還給爲齋妾子乙良限品安徐爲齋 公私賤口乙良幷只免賤爲齋係干逆黨及因逆賊公事間事被罪者乙良官爵一款擧行安徐爲只爲下吏曺爲良如敎

지은 죄가 사하여졌거나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散人)은 본 법으로 다시 임용(敍用)토록 하며, 영원히 재 등용할 수 없는 사람은 벼슬길(仕路)에 나아가도록 허락해 주라. 직첩(벼슬 임명장)을 회수당한 사람은 단지 반환해 줄 것이며, 첩의 자식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구제해 주고,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종(賤口)으로 부리고 있는 사람은 다만 종의 신분을 면제해주게 하라.

 

역당에 관련이 있었거나 역적으로 인하여 공개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벼슬자리 하나를 마련하여 서서히 쓰도록 하게하고 이조로 하여금 시행토록 하라


 

 

** 추가 2

임진왜란 선무공신의 기준 - 정기룡 전란기(선조~인조)

또 신들은 끝내 마음에 불안한 점이 있어 번독스럽지만 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왜한 무장 중에 녹훈된 사람은 단지 4인뿐인데,
- 공신 책봉 중에 나온 말 -

1등 이순신·권율·원균
2등 신점·권응수·김시민·이정암·이억기
3등은 정기원·권협·유사원·고언백·이광악·조경·권준·이순신·기효근·이운룡

선무공신. 왜군과 싸워서 이긴 공을 세운 공신들입니다. 선조를 호위했다는 호성 공신에 비하면 참 초라한 숫자죠. 잘 보면 이들이 선정되는 데에는 큰 기준이 있습니다.

- 명군 부른 공 > 싸워 이긴 공
신점, 권협, 유사원 모두 싸운 적 없는 사람들이고, 정기원 혼자 남원성에서 싸우다 전사한 사람입니다. 그나마 정기원 역시 명군을 부른 공이 있죠. 남원성에서 전사한 자들 중 유일하게 공신에 오른 것, 즉 이들의 공은 모두 명나라에서 원군을 요청한 거죠.
- 문관 > 무관 (제대로는 안 드러나는데 요런 느김이 많이 남 -_-a)
- 임진왜란 > 정유재란
- 의병 개무시
- 승병 개무시 (이거야 뭐 조선이 그랬으니 -_-)


원균이 1등에 오른 이유야 선조가 자기 잘못 감추려 한 거랑 이순신 견제하려 한 거라는 건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겠죠.
신점, 정기원, 권협, 유사원 모두 잘 싸운 공이 아니라 명군 부른 공이니까 제외합니다.
이억기, 권준, (입부) 이순신, 기효근, 이운룡 모두 수군이었으니 내세울 공이 있었죠. 역시 제외합니다. (기효근은 원균 따라서 넣어 준 면이 큽니다)

그럼 남는 건...
김시민, 권응수, 조경, 이정암, 이광악, 고언백이죠. 권율은 도원수 쭉 유지했는데 뺄 수 없을 테니까요.

김시민의 경우 진주대첩으로만 알려졌지만, 그 이전에도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인정.
조경은 행주대첩 때 권율 휘하에 있었죠.
권응수 역시 임진왜란 때부터 많은 공을 세웠죠. 이정암은 왕을 따라 피난 + 연안성 전투가 있고, 이광악은 김시민 전사 이후 싸운 공과 그 이후에도 여러 전공을 올렸습니다.
고언백의 경우 공은 있지만 선무공신에 오른 결정적인 이유는, 적이 왕릉을 범하려 할 때 맞서 싸워서 훼손되는 걸 막은 공이 컸습니다.

당시에 장수들의 공을 평가하는 기준은 겨우 이 정도였던 겁니다.

정기룡에 대한 글들이 심심하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를 이 기준에 맞춰 볼까요?
일단 임진왜란 당시 벼슬도 낮았고, 무공은 있었지만 김시민, 권응수 정도의 (성을 뺏고 적을 막는) 임팩트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활약한 건 정유재란 때였죠. 1년 동안 심심하면 올라오는 적을 천 명도 안 되는 소수로 막고, 때로는 왜성 코 앞까지 진격해서 게릴라전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걸 위에서 알아줄 리가 있나요 -_-; 병력이 없으니 공을 세울 수 없고, 혼자 악착같이 버텨봤자 선조는 천조국, 대국의 은혜 이러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명나라의 명령을 따라야 될 뿐이었죠. 이런 상황에서는 눈에 보이는 전공을 세울 수 없습니다.

다른 장수들도 다 마찬가지였어요. 곽재우가 화왕산성에서 버텼던 5일은 적의 진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지만, (그가 못 버텼다면 이순신이 수군을 수습하지 못 했을지도 몰라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김응서가 항왜들을 가지고 정기룡과 비슷한 일을 많이 벌였지만, 역시 알려져 있지 않죠.
선무공신에 오른 장수들, 이광악, 권응수도 임진왜란 전체에 걸쳐 많은 공을 세웠지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정기룡이 무슨 차별이나 피해를 받아서 제대로 안 알려진 게 아니라, 원래 그 때 장수들에 대한 대접이 그 정도였던 겁니다. 이순신은 너무 잘났었구요. 육군으로 여기에 비교하려면 수백 명의 병력 가지고 만 명이 넘는 공격을 막고 적 총대장까지 부상시킬 정도로 큰 피해를 줘야 됩니다. 거기에 자기의 능력과 명성으로 명나라 장수들을 가지고 놀 수 있어야 되죠.
정기룡은 물론 다른 조선 장수들도 이 정도 능력도 없었고, 그 능력을 펼 기회도 없었습니다.

후에 그가 오른 공신은 저 위에 있는 것과 같은 등급이 아니라 원종공신, 한참 낮은 단계입니다. 그 수만 해도 9060명이었어요. 여기에는 곽재우 같이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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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는 조금 평가하는 방식이 바뀌었죠. 문제는 여기서도 [명장]이 아니라 [충신]을 위주로 뽑습니다. 현대에 알려진 사람들을 좀 살펴보죠.

조헌, 고경명, 김시민, 최경회, 김천일, 김덕령 등등...

이순신, 권율, 곽재우처럼 눈에 딱 트일 정도로 공이 있지 않는 한, 나머지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전사했죠.

이들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명장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충신이라고 해야죠. 열심히 싸운 거지 잘 싸운 게 아니거든요. 계백처럼 아예 막다른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들은 굳이 죽을 필요 없는 상황으로 뛰어들었고, 전사했습니다.
물론 이들을 위인으로 존경하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그런데... 그 때문에 다른 부류는 잊혀졌습니다. 역시 이것을 가르는 기준이 있습니다.

1. "임팩트 있게" 전사할 것
2. 교과서에 넣어도 될 정도로 큰 전투일 것
3. 조정과 관군은 무능했다고 써야 되니까 최대한 의병으로
4. 임진왜란 >>> 정유재란

한 싸움에 전사한 사람이랑, 여러 싸움에서 계속 싸운 거랑 임팩트 차이는 너무 크죠. 정기룡은 여기서도 미달됩니다. 그가 1년 동안 고립무원이나 다름 없는 상황에서 열심히 싸웠어도, 전사하지 않았기에 별로 주목할 필요가 없는 거죠. 거기다 그가 주로 활약한 때는 정유재란이었구요.

김덕령도 그래요. 그는 의병을 모으는 게 너무 늦어서 제대로 된 공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컸고, 선조가 죽였죠. 다른 장수들보다 김덕령이 더 많이 알려진 것 역시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저도 2차 진주성 전투나, 조헌, 고경명 등을 얘기할 때는 눈물 나오게 감동적으로 얘기합니다. 반면 곽재우나 정기룡 등을 얘기할 때는 신나게 얘기하죠. 이 둘의 임팩트 차이는 너무 큽니다. 이순신의 경우 정말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라서 이런 한계를 뛰어 넘은 것이고, 곽재우 역시 신나게 얘기할 것들이 많으니 많이 얘기하는 거죠. 나머지, 열심히 싸운 장수들은? 자기들이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물 나게 전사한 것도 아니니 잊혀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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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에 썼던 글 재탕.

진짜 이렇게 보면 공신이고 뭐고 별 의미가 없어요. 원균 얘기 할 때마다 나오는 공신 어쩌구, 정기룡의 원종공신 왜곡 -_-; 뭐가 그렇게 좋다고 공신 공신 거리는 걸까요.

수도 적고, 그나마 명군 요청한 이들을 끼워 넣은 상황에서 임진왜란을 얘기함에 있어 공신이 되고 안 되고를 기준으로 두는 것은 참 의미 없죠, 그래도 좀 허탈하네요 -_-a

사실 요거 하나면 다 끝날 일이죠 ( ..)

"이번 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 나라 장사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일찍이 제 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은 행주에서 승첩을 거두어 약간 나은 편이다.  

그리고 중국 군대가 나오게 된 연유를 논하자면 모두가 호종한 여러 신하들이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