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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영화보다 극적인 빅토리호의 기적

영화보다 극적인 빅토리호의 기적

정치 나누리/그때 그 사건 2010/05/11 08:06

1912년경 4만톤의 한 여객선은 영국 사우샘프턴항에서 미국 뉴욕항으로 대서양을 건너던 중 부류빙산과 충돌하여 승선자 2,200여명 중 1,500여명의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당시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이 <타이타닉>입니다. <타이타닉>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아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영화로서 실제로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과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배에 남아 목숨을 희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는 그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국회에서는 <6·25전쟁 사진전>이 열렸습니다.
이 사진전을 통해 기적 같은 역사의 한 장면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 한국전쟁 직전의 38선의 모습입니다.
폭풍 전야를 연상시키듯 고요하고 적막한 느낌을 줍니다.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은 단 3일만에 서울에 입성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당시는 휴일인데다 휴가로 많은 병력들이 빠져나가 있었기 때문에
뒤늦게서야 국군이 전장에 투입되기 시작했습니다.


▲ 삽시간에 경상도 일부를 제외하고 한반도 전체가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갔고,
국군과 뒤에 합류한 유엔군은 대구 인근을 마지노선으로 필사적인 방어에 나서야 했습니다.


▲ 다부동 전투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교전들로 인해 낙동강은 아비규환의 장소로 변했습니다.


▲ 한국전쟁을 두고 '동족상잔의 비극'이라 할 만큼 죄 없는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었습니다.


▲ 남한을 돕기 위해 참전한 유엔군 역시 전쟁의 고통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이 넘쳐난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 낙동강 저지선에서 시간을 벌고 있던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었습니다.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곧 '수도 서울의 수복'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치열한 전란으로 인해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습니다.
사진 우측은 아프리카 어느 빈국의 아이가 아닙니다. 불과 50여년전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기세 좋게 북진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뜻밖의 복병을 맞이했습니다.
살을 애는 듯한 강추위 속에 대규모로 중공군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 중공군이 밀려오자 다시 피난민들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곳(위 사진) 흥남 부두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공업이 발달한 흥남은 현대화된 부두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 수많은 인파로 흥남 부두는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 피난민들은 배를 오르기 위해 필사적인 몸부림을 쳐야 했습니다.



▲ 유엔군에겐 상부로부터 많은 장비들과 무기들도 함께 싣고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 그러나 피난민들이 탈 수 있는 배는 턱없이 부족했고,
배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은 발을 동동 굴러야 했습니다.
이제 북한군과 중공군이 흥남 부두에 당도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60명이 정원인 수송선인 메러디스 빅토리호 역시 임무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47명의 선원이 승선하고 있어서 13명의 피난민을 추가로 태울 수 있는 여력이 생긴 것이죠.
그러나 수많은 피난민들을 생각하면 13명이란 숫자는 너무나도 부족해보였습니다.


▲ 당시 미 육군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고문으로 있던 한국인 의사 현봉학씨가
피난민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철수 작전 이후 미군이 싸우기 위해서는 무기를 실어야만 했습니다.


▲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 결국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배에 실은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들을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피난민들 역시 더 많이 배에 오르기 위해 최소한의 물품을 제외하곤 모두 바다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철수가 완료되자 국군과 유엔군은 흥남항을 향해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부두의 각종시설과 함께 버리고 간 무기들과 군수품들을 파손시켰습니다.
추격하는 북한군과 중공군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 결국 메리더스 빅토리호에 승선한 피난민은 1만4천여명에 이르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정신 없는 전쟁통 속에서도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탄생했다는 겁니다.
마침 이 때가 크리스마스 전후여서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잊어선 안 될 것은 흥남 철수 작전 속에 많은 피난민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을 자처한 많은 국군과 유엔군의 사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수많은 피난민을 구하기 위해 결단을 내린
메리더스 빅토리호의 선장과 선원들의 용기도 함께 빛났던 것이죠.




한국전쟁이 끝난 1958년에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좌)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을지무공 훈장을 수여받았고, 상급선원 로버트 러니(우)를 비롯한 선원들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많은 피난민의 생명줄이 된 이 배는 미국 의회에서 갤런트상(Gallant Award)을 받은 몇 안 되는 배 중의 하나였으며, 미국 교통부(DOT)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을 한 기적의 배'라고 선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배는 훗날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담은 라루 선장의 회고 내용을 전합니다.
(참고문헌 : 위키백과)


"나는 쌍안경으로 비참한 광경을 봤다. 피난민들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들었고, 그들 옆에 닭과 겁에 질린 아이들이 있었다"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리도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신은 나에게 분명히 메세지를 보내왔다. 신께서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있던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