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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문화유적

김녕김씨 유두문중 사상구 문화유적 해설을 맡으면서

 

사상구 문화유적 해설을 맡으면서

 

지난 주 6월9일(2011년) 송숙희 사상구청장과 김진홍 사상문화원장을 비롯하여 문화원 관계자 38명은 사상구인의사연구제단, 운수사, 냉정샘, 강선대 등 사상구의 대표적 문화유적을답사하고 내고장 문화유적의 이해와 애향심을 고취하였다.평소 주 1회,지역 아동을 위한 문화유적 설명을 하고 담당하고 있었기에이날의 행사에 있어문화유적 해설을 맡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주대상자의 대부분이 사상문화원과 직간접적으로 업무가 관련있어 지역문화유적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따라서 문화유적의 상세한 배경과 이로인한 지역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해설의 질을 최대한 높혀전달하려고 노력하였다.

 

 

첫 방문지인 냉정샘터 주위를 둘러 보고 있는 일행

 

냉정은 냉정우물, 냉정샘터등으로 불리는데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2동 185번지에 위치한 사상구 명소 중 하나이다.이 샘물은 옛부터 냉정고개를 왕래하는 행인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귀한 쉼터였을 뿐만 아니라 부산장, 동래장, 하단장, 구포장, 김해장 등을 왕래하던 사람들에게 물좋은 샘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조선숙종(1714년)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 보면 조선13도중 물이 청냉하고 감미로운 곳이 3-4개소가 있는데 냉정동의 물맛이 천하일품이었다고 한다. 일본 막부시대(幕府時代)에 지방의 제후들이 다도(茶道)에 심취하여 다용수(茶用水)를 조선국까지 와서 구해가며 가야산의 물이 좋다고 찬탄하였는데 이 가야산이 주례동 동쪽의 가야리 뒷산이며 이 산의 다용수가 바로 냉정동의 물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역의 노인들에 의하면 50년전까지만 해도 탁주양조장과 콩나물 공장이 냉정일대에 있었으며 1980년대 상수도가 들어 오기전까지 식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도시로 개발되어 대규모 학교와 주택단지가 들어서면서 지하수가 오염되고 물의 성분이 달라져 주민들의 빨래터로 이용되고 있으며 사상구에서는 1999년 샘터를 새롭게 정비하고 정화사업을 펼쳐 깨끗이 단장해 놓고 있다.

 

사상구인의사 연구제단에서 비석뒷면에 새겨진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임진왜란때 부산진과 다대진을 함락한 왜군들이 동래성까지 점령한 후 낙동강을 따라 쳐들어 왔을 때 사상출신의 젊은이들은 관군이나 의병으로 출전하였고, 7년간의 전쟁이 끝나 싸움터에서 생환해 온 아홉 분이 9인계(九人契)를 조직, 향리를 복원하면서 전쟁에서 몸을 바친 이웃분들의 명복을 비는 위령제를 팔경대가 있는 회산(晦山)에서 올렸다고 한다. 그 뒤 9인의 뜻을 이어 받은 후손들이 연구계(戀舊契)를 결성하여 연구제단을 설치하고 사상면민의 제향으로 400년 가까이 봉행하여 왔다.연구제단은 1974년 회산이 깎여 없어지면서 사상역 뒷편 산으로 옮겨졌고 1988년 제단의 비석을 새로 세우고 해마다 동래성이 함락되었던 음력 4월 14일이 되면 지역 주민들이 모여 나라를 지키다 숨지신 선조들의 얼을 기리고 있다. '사상9인의사(義士)에 대한 문서분실로 역사적 사실이 입증되지 못한점은 아쉽지만 임란때 사상지역 주민들이 고난을 ㄱㄲ고 이겨냈던 조상의 얼을 기리는 행사로 400년 넘게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은 전국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일로 평가되고있다.

현재 연구제단보존회에는 사상구인계와 그 뜻을 물려받은 연구계에 대한 기록과 사상 향약 등 조선 중기 서민들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고문서20여종이 보관되어 있다.

 


 

운수사에서 대웅전의 구조, 특징, 문화재 종류등 설명하고 있다.

문화유적 탐방 기념사진

운수사는 우리고장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사찰로 기록에 의하면 1592년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헌종 1년(1660년)에 중건하였다. 운수사의 창건연대는 임진왜란 훨씬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운수사 대웅전은 부산에서 유례가 드물 만큼 잘 정제되고 뛰어난 기법의 목조건물이다. 특히 조선중기의 잘 정제된 건축기법을 두루 갖추고 있는 특이한 건물로서 건축사적으로 크게 주목되며, 문화재적 가치도 뛰어난 소중한 건축물이다. 아울러 임란 이전 목조건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부산지역에서 가장 오래 전의 건물로서 문화재적 가치는 어느 것에 비할 바 아니라 할 수 있다.정면 3칸, 측면 3칸, 주심포계 맞배집으로 내부는 1고주 5량가이며, 측면 가구는 2고주 5량가 형식이다. 조선중기 이래 부산 지역에서 유행하던 실용주의적 건축제도를 잘 보여 주며, 소규모 건물임에도 사찰의 주 불전으로서의 장엄과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대웅전 건축 당시는 부산 지역에서 조영이 가장 왕성하게 펼쳐지던 시기였고, 운수사의 공역 여건과 기반도 상당한 수준에 달했던 시기였다. 특히 대웅전에서 발견된 대웅전 조영연혁을 기록한 송판에 보이는 승인 공장(僧人 工匠)과 민간 공장 중에서는 1770년대에 이루어진 범어사 대종(大鐘) 주조불사, 동래향교 대성전 중수공사, 범어사 종루 이건공사 등에도 참여한 사람이 확인되어 18세기 부산지역 공장(工匠) 연구에도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 건물은 부산에서 유례가 드물 만큼 잘 정제되고 뛰어난 기법의 목조건물이다. 특히 조선중기의 잘 정제된 건축기법을 두루 갖추고 있는 특이한 건물로서 건축사적으로 크게 주목되며, 문화재적 가치도 뛰어난 소중한 건축유구이다. 아울러 임란 이전 목조건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부산지역에서는 가장 오래 전의 건물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부산지역 288개의 당산중 원형보존이 가장 잘되고 경치가 아름다운 강선대

 

동래부사 송덕비


강선대(降仙臺)는 사상구 덕포동 579, 712번지 일대에 두 개의 바위로 형성된 독산(獨山)으로, 그 위에 고목(古木)이 우거져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당산(堂山)이 있다. 당산이 있는 곳을 강선대라 전하는데 도로의 동쪽에 있는 것은 하강선대, 서쪽에 있는 것을 상강선대라고 부른다.

이곳 강선대에서는 매년 음력 11월 1일이면 신선이 하강하여 목욕을 하고 쉬어 갔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강선대의 암대(岩臺)는 아득한 옛날 물 속에 있었으나 융기작용으로 육지가 되었다. 그러나 신선이 내려와서 목욕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 전설이 생길 무렵에는 강선대가 섬이었거나, 주위에 맑은 물이 흐르면서 생겨난 연못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선대는 상·하강선대가 있으며, 큰 암석이 있어 그 사이로 고목의 숲이 우거져 있고, 두 곳에 수령이 300년이 된 느티나무는 당산나무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관리하고 있다. 상강선대 당산을 할배당산, 하강선대 당산을 할매당산이라 하며, 진선회(津船會) 회원들이 매년 음력 12월 1일 밤 자정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곳 강선대 경내에는 사상지역에 조선시대 치수를 위한 제방을 쌓아 안전하게 농사를 짓게한동래부사 송덕비가 3기가 있어 귀중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비문에는 제방쌓기의 면적과 참여인원수, 제방쌓기로늘어난 농토면적, 제방을 쌓은 부사에 대한 고마움을 기록하고있다. 아울러 강선대에서 보관하는 고문서에는 농사를 짓기위해 배를 띄워 관리하던 내용과 당제를 지내기위한 송아지를 도살을 요청하는 글이 기록되어 조선시대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자료가되었다.

이곳 당산은 1700년경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빌기 위하여 세웠다고 전하나 그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당집은 덕포동의 상징이자, 자랑할 만한 경승지이다. 상강선대는 도시화 이후에도 잘 정화 관리되고 있어 도심속의 소공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사상팔경대 기념비

지난날 중국의 소상팔경을 닮았다는 사상팔경대는 사상역앞 회산(晦山)에 있었다고 동래부지(1740)에 기록되어 있다. 사상팔경대는 부산의 경승지인 팔대(八臺)중의 한곳이었으나1970년 중반 사상공업단지 조성시 매립토로 회산의 흙을 사용함에 따라 사라짐에따라 회산 근처인 이곳에 기념조형물을 세웠다. 사상팔경의 아름다운 풍경은 현재 부분적으로 남아있지만 기념조형물에는 팔경의 내용과 이미지를 형상화 해 놓았다.

처음 갖인 지역 문화유적 답사의 기회를 통하여 내고장 문화유적에 대한 관심가 이해가 높아지는 기회가될뿐만아니라 지역 문화유적을 아끼고 보호관리에 보다 적극적이길 바라는 마음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