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궁동 이야기-1] 장군샘, 큰샘, 보호수와 노거수
엄궁동은 엄광산(嚴光山)의 서쪽 기슭의 높은 언덕위에 산을 등지고 자리를 잡은 마을로 해뜨는 시간이 매우 늦고 겨울에는 낙동강의 세찬 바람이 불어 닥쳐 주거지역으로서는 부적합한 마을로 여겨진다. 그러나 갈대가 우거져 있는 낙동강변을 내려다보며 갈대지붕에 토담집을 지어 평화롭게 모여 살며 농사와 어업에 종사해 온 강안(江岸)의 빈곤한 마을이었다.
엄궁동은 사상에서 가장 남쪽 끝에 위치한 동리로 학장동에 이어져 있으며, 남쪽은 사하구, 당리동, 하단동과 경계하고 있다. 서쪽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으며 강의 한 가운데가 대저2동과 경계선을 이룬다.
엄궁동의 동명에 관하여 현지 주민들은 낙동강에서 바라본 동리의 모양이 활과 같아서 활궁(弓)을 붙여서 엄궁(嚴弓)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궁(弓)」은 그렇다 치더라도 「엄(嚴)」에 관하여는 설명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일설에는 엄광산은「엄비치산」으로 해가 먼저 비치는 산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엄궁(嚴弓)은 엄광산(嚴光山)의 엄광(嚴光)이 와전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설(說)은 엄광산(嚴光山) 기슭에 있는 마을이라 「엄광(嚴光)」일 것인데, 이것이 잘못 전하여 「엄궁(嚴弓)」이 되었다는 견해이다.
엄궁동 이야기 첫번째는 장군샘, 큰샘, 보호수와 노거수를 싣는다.
1. 장군샘(將軍井)
장군샘은 예전에 엄궁교 위에 살던 산동네 15가구가 주로 길러 먹던 엄궁에서 제일 좋은 샘으로 이 물을 먹으면 장수처럼 튼튼해진다고 붙여진 이름인 전설의 <장군샘>이 있었는데 이 물을 먹으면서 작은 산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곳이 산 중턱이었지만 주택단지로 바뀐 지금은 동네 한 가운데가 되었다. 장군샘터는 20여년 전부터 복합상가건물로 바뀌어 지금은 장군샘은 마을 토박이들만이 그 내력을 알고 있을 뿐이다. 상가내 샘과 관련된 것으로 장수샘 사우나가 있을 뿐이다. 복합상가로 바뀐 장군샘 자리는 엄궁로 1-79번길 늘행복요양병원, 농협서부산지점이 있다. (엄궁초 남쪽)
장군샘터에 자리잡은 상가건물
이 건물에 장수샘사우나가 있는 것은 옛 장군샘의 후예라고 애써 연결지어 본다.
건물의 아래에는 돌담이 일부 남아있어 장군샘 주변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해 본다.
2. 큰샘
큰새미걸은 엄궁파출소 옆(엄궁동 350번지, 대지 152m2)에 있던 샘터로 엄궁동민이 걸러 먹던 샘이 있던 곳이다. 큰샘은 1980년 상수도의 보급과 함께 우물의 사용이 금지되어 발걸음이 끊기었으나 샘터의 원형은 지켜오고 있다
최근 지역의 발전분과위원회에서 큰샘을 복원하여 주민을 위한 소통과 화합을 위한 사랑방공간으로 개발하고 하는 열의로 차있다. 이러한 주민의 숙원은 2012년 10월이뤄졌다.
위 길에서 내려다 본 모습
큰샘은 엄궁파출소옆, 낙동대로변에 있어 접근성이 아주 좋은 장소이다.
큰샘의 모습.
슬레이트 지붕으로 설치되어 있고 우물은 덮개로 덮혀져 있다.
지역분과위원회의 큰샘복원을 위한 PPT자료
정비공사된 큰(2012년 10월)
엄궁동의 공동샘을 찾아서
1. 장군샘(將軍井)
지금은 사라진 장군샘은 예전에 엄궁교 위에 살던 산동네 사람들이 주로 길러 먹던 엄궁에서 제일 좋은 샘이었다. 조선시대 이 물을 먹으면 장군처럼 튼튼해 진다고 해서 ‘장군샘’ 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 전설을 갖고 있다. 이러한 <장군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여 엄궁 산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곳이 산 중턱이었지만 주택단지로 바뀐 지금은 동네 한 가운데가 되었다. 장군샘터는 20여 년 전부터 복합 상가 건물로 바뀌어 지금은 장군샘은 마을 토박이들만이 그 내력을 알고 있을 뿐이다.
2. 큰샘
엄궁동 큰새미걸 이라고도 부르는 큰샘은 엄궁파출소 옆(엄궁동 350번지, 대지 152m2)에 있던 샘터로 엄궁동민이 두레박으로 길러 먹던 공동우물이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우물가는 아낙네들이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하고,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낙네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해 마시고 가는 곳이기도 했다. 일반 공동우물이 그렇듯, 큰샘 역시 생활용수의 주공급원에다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이자, 마을의 중심이었다
특히, 논과 밭이 부족했던 엄궁 마을의 남정네들은 주로 배를 타고 낙동강에서 재첩을 잡았으며, 아낙네들은 큰샘의 물을 길러, 재첩을 씻어, 재첩국을 끓인다음, 새벽녘이면 재첩국을 양동이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학장을 지나 구덕고개를 넘어 대신동 지역에 팔러 다녔다 한다.
엄궁의 공동샘으로 삶의 터전 한 가운데 있었던 큰샘은 1980년대 초반에 상수도가 보급되면서 차츰 폐허되었다. 30년이 흐른 뒤 엄궁동민의 뜻을 모아 2012년 10월에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 공사를 마쳤다.
사라진 장군샘 대신 홀로 남아있는 큰샘은 엄궁동민의 애환담긴 삶의 실타래속에 풍성한 스토리텔링을 찾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3. 엄궁동 팽나무
1980년에 지정된 수령이 약 300년된 엄궁동 팽나무는 골목길의 주택담벼락에 뿌리를 내린 격으로 주변의 주택으로 인해 가지가 제대로 뻗지 못하는 안타까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 팽나무는 당산목(할배신목)으로 엄제당 당산제를 지낼 때 신목제(神木祭)를 지낸다.
위치는 부산은행 엄궁동지점 뒷편으로 엄궁북로4번가길로서 영미용실과 양푼이동태찌게 사이의 골목입구에 있다.
보호수인 엄궁동팽나무를 살펴보고 있는 프린지 역사문화회원들
잎이 무성하였을 때의 보호수
4. 노거수
큰샘 오른쪽 아래 50여 미터 지점에 있는 팽나무로 위 보호수와 수령은 같게보이나 나무의 높이가 크고 나무의 형태가 왕성하게 가지를 뻗고 있어 보호수보다 훨씬 가치있게 보인다. 하지만 보호수로 제외되어 노거수로 마을 지켜주는 당산목(할매신목)으로 말없이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이 노거수는 하루속히 보호수로 지정될 가치있는 팽나무로 판단된다. 나무의 수령으로 보아 오랜 세월동안 이 마을 지켜 온지 온 당산목으로 지금도 매년 신목제를 지내오기 때문이다.
위치는 엄궁중로 8번길과 낙동대로 7-2-2번길 사이에 있으며, 주위 건물은 운수장 뒷편과 빌라셀 왼쪽앞이다.
엄궁동 노거수인 팽나무
같은 엄궁동 팽나무이건만 보호수로 지정되지 못하고
비운?의 노거수로 남아 있다
팽나무의 가지는 튼튼하며 가지의 잎은 무성하고 나무 전체의 형태가
엄궁동보호수보다 훨씬 좋다는 것을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다.
가지 사이로 건너편 롯데마트의 건물이 보인다.
엄궁동의 유적을 답사 조사한 사상프린지 역사문화회원들이
노거수앞에서 담은 증명사진 한컷!
팽나무 서쪽 아래에 있는 민간기도처로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공간이다.
마을 지켜 온 당산목인 영험한 팽나무의 기를 이용하고 있다
아침마다 촛불과 향을 피우며 주민들의 소원을 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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