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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스크랩] 연제구를 빛낸 인물들-정서(鄭敍)

제 1장 연제구의 위치와 자연환경 제 2장 연제구의 지역특성과 지명유래 제 3장 연제구를 빛낸 인물
제 4장 연제구의 역사와 문화재 제 5장 한국사 속의 부산역사와 문화재  
제 3장 연제구를 빛낸 인물들
 
1. 정서 2. 김득인 3. 문시환
4. 이도윤 5. 이문곤
 
 
연제구를 빛낸 옛사람, 우리 연제구의 선조들을 찾아 그들의 훌륭했던 행적들을 밝혀 홍포해야 하는 것이 후손들의 도리이겠기에 이 장을 열게 되었다. 연제구의 자랑스런 선조들이 한 두명이 아니겠지만 근거자료가 없고 또 굳이 근거자료를 남기려 하지 않았던 우리 옛선조들의 지고지순한 인품 때문에 선정인물이 많지 않지만 이들의 행적을 통해 우리 후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삶이 바람직한 삶인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고 이로 인해 또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되어 연제구를 빛내주고 사회에 공헌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연제구를 빛낸 인물로 고려 12세기경 정과정곡의 가사를 남긴 정서(鄭敍), 조선초 15세기 경의 효자 김득인(金得仁), 한말 일본강압통치기의 항일운동가 문시환(文時煥), 이도윤(李道胤), 이문곤(李文坤)을 선정하였다.

1. 정서(鄭敍)

정과정(鄭瓜亭)의 '과정(瓜亭)'은 고려시대 정서(鄭敍, 1115∼1171?)의 호이면서 정서(鄭敍)의 유배지 부산에 건립했다는 정자의 명칭이다. 또 정서(鄭敍)가 지은 가사에 악곡을 붙인 것을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 한다. 정서(鄭敍)의 본관이 동래(東萊)이고 증조부(曾祖父) 정문도(鄭文道)의 묘소가 현재 부산진구 양정 1동 469 화지산에 안장되어 있으나 문제는 정서(鄭敍)가 유배생활 중에 자적(自適)했다는 정자터가 어디냐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본장에서는 정서의 가문, 정서의 동래유배의 배경, 정서의 처가와 왕실과의 관계, 정과정곡의 가사내용 등을 먼저 고찰하고 제4장에서 정과정 옛터를 다루고자 한다.

1) 정서(鄭敍)의 가문(家門)

정서(鄭敍)는 부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동래 정씨 가문 태생이다. 『동래정씨가록(東萊鄭氏家錄)』에 의하면 동래 정씨의 원조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정회문(鄭繪文)으로부터 시작되나 고려시대의 확실한 실존인물은 정목(鄭穆, 1040∼1105), 그의 아들 정항(鄭沆, 1080∼1136), 정항의 아들 정서(鄭敍)이다. 이들의 묘지(墓誌)가 발견됨으로써 동래 정씨의 시조는 정지원(鄭之遠)으로 밝혀졌다. 이에 동래 정씨는 1대 정지원(鄭之遠)-2대 정문도(鄭文道)-3대 정목(鄭穆)-4대 정항(鄭沆)-5대 정서(鄭敍)로 이어지나 정문도를 동래지역 시조로 모시고 화지산에 분묘를 쓰고 있다.

(1) 정서(鄭敍)의 본관

정(鄭)씨의 본관은 210본, 또는 247본이라고 하나 현재는 동래 연일 해주 진주 하동 초계 온양 경주 청주 봉화 등 30여 본이 전하고 있다. 이 정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신라시대의 지백호(智伯虎)로 알려져 있다.(3-1 ①②) 12세기 중엽에 찬술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유리왕 9년(A.D 32)에는 6촌을 6부로 고치고 성씨를 하사하였고, 13세기 말에 찬술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6촌에 성씨를 하사하였다. 이 두 사서를 정리해 보았더니 뜻밖에도 『삼국유사』에는 지백호가 "최(崔)"씨로, 『삼국사기』에는 "정(鄭)"씨로 나왔다.<표 3-1

  
(3-1 ①②) 경주 鄭씨 시조비(경주)

물론 정씨 문중에서는 정씨 성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지백호(智伯虎)이고 이 분을 시조로 받들고 있어 논란이 될 문제는 아니나 혼란을 우려해서 여기 밝혀둔다.

위의 사실을 통해서 본관을 경주에 둔 경주 정씨가 이른바 "종가댁" 즉 모든 정씨의 "큰집"임이 확인되었다.

지백호 이후 정씨 가문의 인물들은 기록상에 별로 떠오르지 않다가 고려시대 정목과 정항 묘지가 고려 수도였던 개경 장단군(長湍郡) 묘소에서 발견되어 동래 정씨 가계가 명백해졌다. 이들 묘지에 의하면 정지원-정문도-정목-정항-정서로 이어지는 가문을 <표 3-2로 정리하고 이들을 그 시대상과 결부시켜 개별적으로 전기적 일생을 서술한다.

<표 3-1 신라 6부와 6성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


{삼국사기}권1 신라본기1 유리왕 9년

{삼국유사}권1 신라시조 혁거세왕

6부개명이전

6부개명이후

6촌

촌장

강림지

6부

경주

1

梁山部

梁部

알천양산촌

謁平

표암봉

及梁部


2

高墟部

沙梁部

돌산고허촌

蘇伐都利

兄山

沙梁部

3

大樹部

漸梁部

무산대수촌

俱禮馬

伊山

漸梁部

(일명 모량부)

4

于珍部

本彼部

자산진지촌

智伯虎

花山

本彼部

동남

5

加利部

漢祗部

금산가리촌

祇?

명활산

漢岐部


6

明活部

習比部

명활산고야촌

虎珍

금강산

習比部



 

<표 3-2 동래 정씨 가문 세계(世系)

 

(2) 동래정씨 선조-정회문(鄭繪文), 정지원(鄭之遠), 정문도(鄭文道)

{동래정씨가록(東萊鄭氏家錄)』에 의하면 동래 정씨 원조가 되는 정회문은 신라인으로 사신(使臣)에 보임(補任)되자 고구려(高句麗)가 육로(陸路)를 차단하니 동생 가솔(家率)과 함께 배를 타고 어떤 섬에 대기케 하고 단신으로 사행(使行)에 나섰다가 귀환하자 배를 타고 동래(東萊)에 솔가하여 형은 호장(戶長)이 되고 동생은 연일 호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 내용에서 고구려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인 듯 하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정항(鄭沆)의 증조부 정지원과 조부 정문도는 정문도의 아들 정목과 손자 정항의 묘지명에서 동래군의 호장이었다고 하니 시대적으로 고려초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지금 부산진구 화지산(和池山)의 동래정씨 묘소에 묻힌 분은 동래 정씨 시조 정문도라 한다.(3-2) 호장은 향직(鄕職)의 우두머리로서 고려 초기에는 신라 하대의 호족들을 무마하는 정책으로서 이들에게 호장, 부호장의 향직을 내리고 지방 통치를 일임하였다. 신라 하대란 중대 무열왕통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소위 부활 내물왕통시대로서 37대 선덕왕(善德王, 780-785)에서 마지막 56대 경순왕(敬順王, 927-935)까지를 일컫는다. 이 하대사회는 최고신분인 진골귀족연합세력이 나타나 왕위를 무력으로 쟁탈하고 골품제도가 그 권위를 상실하는 등 중앙정계가 불안했으며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대두하여 신라사회의 모순들이 노정된 시기였다.


(3-2) 동래 鄭씨 시조 鄭文道묘소(부산진구 화지산)

호족(豪族)이란 지방의 유력한 토착세력으로서 광대한 사유지를 소유하고 사사로이 토착민을 지배하는 토호들로서 신라하대의 호족은 여러 부류가 있다. 중앙의 권력투쟁에서 탈락한 몰락귀족,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지방 촌주 출신의 불만세력, 장보고와 같은 군진(軍鎭) 세력이면서 당(唐)과 일본(日本)과의 해상 무역 세력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6두품 출신의 유학자와 선사(禪師)들을 우대하여 이들의 이념을 수용하고 민생에 허덕이는 촌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개선하면서 결국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든 세력이다. 이들 호족 중에서도 전국적으로 산재하여 고려 건국의 중심세력이 된 호족은 촌주출신의 호족이었다. 7세기 말에 작성된 촌락문서(村落文書)에 의하면 신라시대의 지방 촌락은 대략 10여 호 가량의 혈연집단을 기준으로 3-4개의 촌락에 한 사람의 촌주(村主)를 두고 중앙에서 통치하는 체제였다. 왕권이 강력하던 중대 사회는 중앙에서 이들 촌주에게 촌주위답(村主位沓)을, 촌민에게는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을 분배하고 촌의 크기, 촌의 면적, 과실나무수, 가축수 등을 3년 주기로 철저하게 조사하여 조세를 거두었고 장정수와 남녀 연령별을 구분하여 군역과 역역(力役)을 동원하는 빈틈없는 중앙집권체제가 실시되었으나 하대사회는 이러한 강력한 중앙 지배력이 미치지 못한 시대였다. 이러한 혼란기사회에서 촌주는 중앙지배력을 벗어나 호족화의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촌민을 동원하여 농토를 개간 농장을 확대하고 성곽을 쌓고 촌민을 사병화하여 자신을 성주(城主) 또는 장군(將軍)이라 자처하였던 것이다.

  
 (3-3 ①②)개경지도와 개경행정구역

궁예를 축출한 후 고려를 건국하고 개경에 도읍한(3-3 ①②) 왕건은 예성강구의 해상무역 호족으로서 경기도의 강화도, 황해도 일대의 상인 무장들과 연결하고 지방 각지의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혼인정책으로 결속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왕건은 통일 후에 지방에 반(半) 독립세력으로 잔존하고 있는 지방호족들을 포용하기 위해 이들에게 호장(戶長), 부호장(副戶長)의 직위를 주어 그 지역통치를 일임하기도 하고 사성정책이나 왕족 또는 귀족간의 통혼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에 귀부하거나 정복한 지명의 개정과 부(府) 혹은 주(州)로 승격시키기도 하였으나 지방 통제력은 미비한 상태였다. 이 무렵 이후 동래 정씨의 확실한 시조 정지원과 정문도가 동래 지역 호장으로 등장하였다. 고려 4대 광종때 과거제 실시, 5대 경종 때 전시과 실시 등으로 차차 국가체제를 정비하다가 드디어 6대 성종에서 8대 현종에 이르는 시기에 중앙과 지방 관제를 경기, 5도(道), 양계(兩界)로 정착하고 그 하부에 4경(京) 4도호부(都護府), 8목(牧), 15부(府), 129군(郡), 335현(縣), 29진(鎭)으로 확립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주현에 중앙관을 파견한 것은 아니었다. 중앙관이 파견되지 못한 속현(屬縣)은 중앙관이 파견된 주현(主縣)에서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체제여서 속현의 호장 부호장의 영향력은 그대로 지속되었을 것이다.

귀족관료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11대 문종에서 18대 의종에 이은 시기는 고려의 문신 귀족문화가 매우 발달하였으나 의종 24년(1170) 무신난이 발발하자 기존의 문신 중심 귀족관료 체제는 무너지고 무신집권시대가 도래한다.

11세기∼12세기는 동래정씨 가문의 정목과 그 아들 정항, 정항의 아들 정서(鄭敍)의 3대가 고려관계에서 명망을 떨친 시기이다.

(3) 신라·고려시대의 동래와 하부행정구조

① {삼국유사}에 31대 신문왕 때의 재상 충원공이 683년에 장산국(곧 東萊縣이니 또는 萊山國이라고도 한다)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 동지 들에 이르러 쉬었다 라는 자료에서 부산이 동래군이란 지명을 받기 전부터 경주 신라인 상류층들이 해운대나 동래온천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겠고 이러한 사실들은 신라 경주 정씨가 부산의 동래 정씨로의 뿌리내림의 길이 트인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② 12세기 중엽의 사서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때 동래라는 지명을 처음 갖게 되었다고 한다.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군(居柒山郡)이다. 신라 경덕왕(742-765) 때 이름을 고쳐 동래라는 지명이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였으니 8세기 중엽 이후로는 신라 경주인들이 부산지역에 대거 왕래할 기회가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③ 조선초-중종 25년(1530)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동래현은 옛날의 장산국(??國) 또는 내산국(萊山國)인데 신라가 이를 취하여 거칠산군을 두었으며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④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현 산천조에 동래 온정(溫井)이 소개되고 있어 신라 경주인들의 왕래가 잦았다는 것이다.

⑤ 『고려사(高麗史)』1. 태조 7년 8월

후백제 견훤이 절영도(영도)의 명마(名馬) 한 필을 고려 왕건에게 바쳤다는 내용은 부산지역이 한때 후백제 영역이었던 것 같고 후백제가 고려에게 멸망한 이후 부산은 고려시대를 맞게 된다.

⑥ 고려초에 현재 부산에 해당하는 동래현은 울주에 소속되고 동평현과 기장현은 양주(양산)에 소속된 속현이었다. 속현이란 울주와 양주의 주현의 현령이 중앙 정부의 정령, 조세, 공부의 수취, 역역의 징발 등 중요 업무를 직접 받아 속현을 간접 통치한 현이라는 뜻이다. 위의 내용들을 <표3-3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목(鄭穆)의 생몰연대를 참고하여 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치면 정목의 부친 정문도(鄭文道)의 생년(生年)은 1010년경이고 정목의 조부(祖父) 정지원(鄭之遠)의 생년은 980년 경이 된다.

정항(鄭沆)의 증조부 정지원과 조부 정문도가 고려 조정의 군장(혹은 戶長)이 된 시기는 대략 6대 성종(981-997)에서 8대 현종(1009-1031) 무렵이란 계산이 되어 이들을 고려초에 정리하였고 정목 정항 정서(鄭敍)의 생몰연대는 묘지와 문헌에서 정확한 연대가 확인되므로 고려 문신 귀족관료 시대에 정리하였다.

그렇지만 정지원과 정문도가 동래 군장이 될 수 있었던 어떤 여건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을 찾을 수는 없다. 고려 태조(918-943) 연간에 본관(추정,성씨의 本貫)은 당시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족단을 기반으로 제정되었다는 연구결과를 따른다면 동래 정씨 가문이 고려 태조 이전에 이미 동래지역에 기반을 잡았던 유력한 족단이었던 것 같고 당시에 동래를 본관으로 하는 송(宋), 왕(王), 정(丁), 조(曹)씨 가문과 함께 역시 토착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 같다.

고려초에 이들 지방세력을 회유하면서 호장 부호장의 향직을 내려 지방통치를 일임하다가 현종 9년(1018)에는 각 주의 장정수에 따라 호장수를 한정하였다.

즉 1000정 이상-8명

500정 이상-7명

300정 이상-5명

100정 이상-4명

이니 앞서 동래 정씨도 동래를 본관으로 하는 송, 옥, 정, 조씨 등과 함께 동래를 지배했던 유력 호장 가문이었던 것 같다.


<표 3-3 부산 고지명과 동래정씨의 활동시기


신 라

부산지역 고지명과 부산지역의 역사

동래정씨

신라상대

(1)혁거세(전57-후4)

(2)남해차차웅(4-24)

(3)유리니사금(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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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진덕여왕(647-654)

①거칠산국(남구 황령산)이 있었다 함

②장산국(해운대 장산) 또는 내산국이 있었다고 함

유리왕 9년(32) 6촌을 6부로 고치고 6성을 하사함 즉 경주 정씨 시조 智伯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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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정씨가록} 권2에 의하면 정회문형제가 동래지역에 정착하여 동래정씨 원조가 되었아고 하나 뚜렷한 사료의 의한 것은 아닌 듯 하다.

신라중대

(29)태종무열왕(654-661)

(30)문무왕(661-682)

(31)신문왕(682-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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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경덕왕(742-765)

(36)혜공왕(765-780)

무열왕통 확립

683년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 또는 내산국 온정에서 목욕

장산국 또는 내산국을 거칠산군으로 두었다가 동래군(동평현, 기장현)으로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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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하대

(37)선덕왕(780-785)

(38)원성왕(785-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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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경애왕(924-927)

(56)경순왕(927-935)

부활 내물왕통

중앙:왕위쟁탈전으로 정계불안 왕권약화되고 귀족연합세력대두 돌품제도의 모순과 지배층의 수취체제 강화

지방:중앙정치에 불만을 가진 지방호족세력대두, 이들은 선종9산의 선승과 6두품출신 유학자들의 이념을 수용하고 중앙의 가혹한 수탈에서 농민을 보호하며 반신라세력이 되고 후에 고려건국의 주체세력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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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초기

(1)태조(918-943)

(2)혜종(943-945)

(3)정종(945-949)

(4)광종(949-975)

(5)경종(975-981)

후백제 견훤이 절영도(영도) 명마 한필을 고려태조 왕건에게 바침

고려초기는 지방통치를 지방호족에게 일임하고 이들에게 호장 부호장 칭호를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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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관료시대

(6)성종(981-997)

(7)목종(997-1009)

(8)현종(1009-1031)

(9)덕종(1031-1034)

(10)정종(1034-1046)

(11)문종(1046-1083)

(12)순종(1083-1083)

(13)선종(1083-1094)

(14)헌종(1094-1095)

(15)숙종(1095-1105)

(16)예종(1105-1122)

(17)인종(1122-1146)

(18)의종(1146-1170)

(19)명종(1170-1197)

선종-현종간의 지방편제
경상도-동경(경주)-영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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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울주-동래현, 헌양현
   속군4 +- 예주
  속현10 +- 금주
             +- 양주-동평현, 기장현

의종24년(1170) 무신난, 유배후 살해됨

명종(의종의 弟) 즉위(1170):무신집권기

정지원(정목의 祖父)

정문도(정목의 父)

(이상 두 분은 성종-현종무렵의 동래호장?)

정목(1140-1105):정항의 父 문신학자

정항(1080-1136): 정서의 父 문신학자

정서(1115?-1171?):정항의 子 정과정

의종5년(1151) 5월 동래로 유배당함 1157년 2월 거제도로 이배, 명종즉위로 정서의 30여년간 유배생활 청산 개경으로 귀환하였으나 그 이후의 생활은 확실하지 않음

(4) 정목(鄭穆: 정서의 祖父)

정목 묘지가 아들 정항 묘지 보다 무려 300여 년 뒤 1928년 3월 고려 수도 개경 근처 경기도 장단현 장도면 상리의 대덕산 기슭에서 발견됨에 따라(3-4) 지금까지 정항 묘지에만 의존하던 동래 정씨 가문 내력이 더욱 객관성을 띠게 되고 가문의 영광은 더욱 빛나게 되었다. 정항 묘지는 김용선(金龍善)이 오자를 바로 잡고 탈자라고 생각되는 것은 ( ) 속에 넣고 결락된 것은 복원, 혹은 추정이 가능하면 □ 속에 넣어 보완 정리한 것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묘지 전문과 그 해석문을 여기 게재한다.


(3-4)정목과 정항의 묘지가 발견된 경기도 장단현의 위치

정목은 자는 없으나 본관이 동래이고 대부는 정지원이며 부는 정문도이다. 이들 조부와 부친은 모두 군장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으며 정목은 18세에 당시 고려 수도였던 개경에 올라가 열심히 노력한 끝에 27세 되던 문종 20년(1066)에 성균시에 합격하여 명성이 자자하자 당시 검교장작감광릉직에 있었던 고익공(高益恭)이 정목이 남보다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고 32세 되던 1071년 자신의 딸을 정목에게 출가시켰고 그 다음해 문종 26년(1072) 33세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하자 여러 관직을 제수받게 되었다. (제4장 다. 7-2)의 명당 화지산과 시조 정문도 묘터 전설 참고).

정목은 성품이 편안하고 후덕하여 사람들과 두루 잘 사귄 탓에 시기하고 이간질 하는 사람이 없었고 자녀들도 아버지가 몇 마디로 훈계해도 곧 깨달을 만큼 적절하고 설득력있는 문장이나 고사를 잘 인용하였다. "벌레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독이 없어야 하고 나무는 타고난 수명을 얻기 위해서는 재목감이 되어서는 안된다"(詩經)고 한 가르침이 그러한 것이다. 정목은 13대 선종 1년(1084)에 영청현(永淸縣)을 다스리게 됨에 피(볏과의 한해살이 풀)가 많아 보리를 심지 못하고 묵히는 농토를 손수 현 서쪽에 있는 덕지원(德池原)이란 곳을 과감하게 불로 태운 후 이 곳에 보리를 심어 많은 양을 수확하게 했다고 하니 아마 병충해와 잡초를 제거한 새로운 농법(農法)을 현민(縣民)들에게 가르친 것이라고 보여진다.

또 정목이 전중내급사에 배수되어 금주를 지키게 되었을 때 이곳에 부임한 전직관리들이 귀신이 씌여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는 말을 듣고 처자들이 두려워하여 돌아가기를 호소했으나 정목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신은 총명하고 정직하여 함부로 벌을 주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과연 3년이 되었으나 무사하였다.

누천하여 형부예부시랑에 이르고 녹봉을 받는 날이 되면 그 때마다 내외 친척과 동네의 가난하고 천한 사람에게까지 녹봉을 나누어 주었다.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연등불사를 열어 정목의 수복을 기원하였다.

숙종 10년(1105)에는 3품관에 제수되었다가 1105년 5월 19일에 66세로 사망하고 화장(火葬)하였다. 화장(火葬)에 대한 장례 관계는 정목의 아들 정항과 같이 별도로 언급하려 한다.

<정목묘지명

<全面

榮陽鄭大夫墓誌(前面題額)

朝散大夫檢校禮賓卿行攝大府卿賜紫金魚袋榮陽鄭公諱穆無字本東萊人 大父諱之遠爲郡長 父諱文道或爲郡長 公十八歲辭親游學 辛勒奮志 以克樹立 抵咸雍二年丙午 擧中于成均 旣而名聞曄曄 與□大蘇幹?許齊名時有志于場屋者翕然 稱之外舅檢校將作監廣陵高公諱益恭聞公之秀穎 良用惜之 越咸雍七年辛亥以一女妻之 明年春 聖考文宗親較士于廣殿 賜額曰止水鑑形詩 仲尼爲百王師賦 上先自親製 是詩有云書窺天子日夜孕庶民星 公與英?輩偕赴比其進呈與 御製一句相合 上尤歎之 賜公以丙第拜秘書省校書郞同正 其預籍仕版□□文武百抗比比相面 公一以和與諒接之 不爲崖岸斬絶之行 卒莫與公有猜忌者 其在族姓亦罔間言 是皆公之所有樂易之性 ?厚之德也 越大康二年丙辰 授以軍器主簿通判高州 喚政滿携家造京 今相國魏繼廷尹公瓘與公雅好有忘勢位之交 自是公間詣幕府必促席均禮??歡笑以爲已眞知也云 嘗誦白傳詩盤全性命因無毒 木得天年爲不材之句 以敎兒息又以詩誡之云爲言三四小兒童達已登朝路 不同爲吏固遵房杜術業儒終究 孔姬風在家 必意皆成孝報國無忘其盡忠 汝若依行 余所訓此生何 必致?窮 越大康十年甲子 出?永淸縣其年海內旱民無聊生 轉於溝壑者 往往有之 公下車旣不數月 縣之西有德池原火燎幾許里 民始懼焉 會麥禾登 熟有稗不種 離離厥原 公因使人刈獲得實五十餘石 以爲軍儲 或爲民所獲者 又不知其幾 逮二年冬 大遼國封冊使副一行人 來歸本朝 次宿縣之東迎德驛 公率縣寨吏 迎將焉 禮文尤縟? 供館候 又可佳者 遼人有云縣非永淸 卽榮城也 其時接伴前相國邵公褒薦于朝召拜直史館有遺愛政 抵今二十年間 縣人有饋苞?者 綿不絶焉 則羊公緖餘 其可尙矣 又烏知縣人不竪碑於峴首也 公修宣宗實錄一卷附于史典 其遺藁家有傳焉 越大安九年拜監察御史 其年春夏東民

<裏面

榮陽鄭大夫墓銘(裏面題額)

飢? 宣宗命公授爲春夏番東北面兵馬判官甲仗別監兼宣撫于高和長平寧仁興元現德靜邊凡七州以穀□一千八百七十餘石 醬鹽三百一十餘石以濟窮無告者 凡九千九百九人 公言余雖給以公儲 實亦惠于斯民不少焉 未幾 又拜殿中內給事出守金州 厥受命初閭巷 親舊有告言曰 某州在祀典之神 凡幾百位威靈 慘酷致夭於人 每有刺史戾至例不踰月卽遭虐罰聞是語己 妻?懼然日夜皆憚其歸 公無變色 且曰神其聰明正直 無所濫罰于人 稱□必無患哉 自下車比及三載無有黃態臺?之崇 召拜左拾遺知制誥 此神所佑正直也 必矣累遷至殿中侍御史 公立朝無□容左右之□以直誠從事 謹愼自規其云爲操守卒無敗戾 越壽昌三年丁丑 又拜起居郞 其年秋 今主上御宣政殿親定海內罪名命宰相近輔進侍焉 公獨昻然 秉筆?上直書君言 是亦古所謂左史 謹識之分也 累遷至刑部禮部侍郞 每受俸之 日惠及內外親姻與閭巷賤小及除是官 凡所分賚三十五石 以是里人不敢有忽?聚家戶 營爲佛事燃燈 路傍以祈公之福壽 越乾統五年春 又拜三品官 公□數年已來 有疾不發藥餌不絶 及是年三月疾革 二子漸侍側有憂色 公云道之將行命也歟 道之將廢命也歟 兒何憂焉 五月乙卯卒于龍興寺德海院 是月辛酉依佛制火葬于寺之西崗 其祖送?飾莫非如儀 庚午拾骨假安于帝京東北安佛寺 又其年十月九日癸酉 權知太史監候郭子仁卜宅兆來告吉甲申遲明歸葬于弘護寺西南原 春秋六十六 有子四人 長曰濟以吏術就仕 卽今衛尉主簿通判靈光郡守 次曰漸衛尉主簿同正 次曰澤入內侍雜織署丞 季曰沆尙州司錄兼掌書記衛尉主簿 漸以下三子?以進士登第 顯達于世 昔人有云有其德者 宜有後眞不誣矣 遂以平生事誌之餘 在碑與行狀云 其銘曰 承傳之易 創始之艱 有嗣繁衍 肇蹟孤寒 昔聞貞諒 善壽以安 今其何謬 奄向幽關 嗚呼已矣 泣涕?瀾

乾統五年 十月 日 沙門膺亮 上石

정목 묘지명 번역

<전면

조산대부 검교예빈경 행섭대부경 사자금어대영양 정공의 이름은 목이고 자는 없으며 본관은 동래인이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지원으로 군장이었고 아버지 문도도 혹 군장이었을 것이다. 공의 나이 18세에 아버지에게 유학할 것을 말씀드리고 부지런히 하여 뜻을 떨치니 능히 다다름을 이룰 수 있었다. 함옹 2년 병오에 과거를 보아 성균관에 들어갔으니 이미 명성이 자자함은 소식과 더불 수 있었으며 글의 체제 또한 일가를 이루었다. 그 때 과거에 뜻을 둔 자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는데 장인이 되었던 검교장작감 광릉 고익공이 공의 뛰어난 재능을 듣고 그를 아꼈다. 함옹 7년 신해에 그 딸로서 처를 삼게 했다.

명년 봄 돌아가신 문종이 친히 광전에서 선비와 견주었다. 제목을 내리기를 '지수감형(止水鑑形, 고인 물에 비추어진 형상)이라는 시(詩)와 '중니위백왕사(仲尼爲百王師, 공자를 모든왕의 스승으로 삼는다.)라는 부(賦)였다. 임금이 먼저 제술하니 이 시는 천자는 밤낮으로 서민을 생각한다라는 뜻이 엿보인다고 할 수 있다. 공과 더불어 뛰어난 자들이 모두 함께 나아가 바쳤고, (공의 글이) 왕이 제술한 일구와 서로 부합되니 왕이 이를 칭찬하면서 공에게 병과로써 등제하게 하고 친히 비서성교서랑동정직을 내리고 미리 사판에 등재시켰다. 문무백관을 자주 상면하였는데 공을 화와 량으로써 제일로 대접했다. (공은) 사람들과 두루두루 장 사귀어서 마침내 공을 시기하는 자가 없었고 족성에 있어서도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다. 이것은 전부 동의 편안한 성품과 농후한 덕에 연유하는 것이었다.

대강 2년 병진에 군기주부로써 고주 통판에 제수되고 기한이 다 차서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왔다. 지금 재상 위계정과 윤관이 공과 더불어 아름다운 교제가 있어 권세가 있는 사람과의 교제도 게의치 않았다. 이로부터 공은 간간히 막부에 이르면 반드시 자리를 가까이 하여 예를 다하고 호언장담하면서 환소하니 참된 지식에 이르렀다고 생각이 든다. 일찍이 외워서 말하기를 시경에 전하기를 '벌레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독이 없어야 하고, 나무는 천년을 얻기 위해서는 재목이 되지 말아야 한다'라는 구절로써 어린 자식들을 가르치고 또 훈계했다고 한다. 서 너 마디의 말을 하면 자식들은 곧 깨달았다.

이미 조정에 나아가서 관리되는 것이 같지 않았으나 굳이 방두의 학문을 따르고 유를 깊이 연구하니 공자와 주공의 풍이 집에도 있었다. 반드시 그 뜻은 모두 효를 이루고 국가에 보답하는 것이니 충을 다함이 이와 같이 잊지 않으니 너머지도 또한 교훈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일생이 어찌 반드시 억매어져 있다고 하겠는가.

대강 10년 갑자에 나아가 영청현을 다스렸는데 그 해는 국내가 가뭄이 들어 백성이 평안히 살지 못했고 굶어 죽는 자가 왕왕 있게 되었다. 이에 공은 부임하고 얼마되지 않아 현의 서쪽에 있는 덕지원을 불로 몇 리쯤 태워버리니 백성이 비로소 두려워 하였다. 그 때 마침 보리이삭이 바야흐로 익을려는 때였으나 피가 있어 심지를 못했다. 그러나 이 원에서는 풍년이 들었다 공은 사람을 보내어 베어서 50여 석을 얻어 군량미로 삼게 하고 나머지는 백성이 가져가게 하니 백성이 가져간 것은 얼마인지를 알 수 없었다. 2년이 지난 겨울에 대요국의 봉책사가 일행을 데리고 본조에 돌아가려고 현의 동쪽에 있는 영덕역에 머무르게 되었다. 공은 현의 건리를 데리고 장차 맞이했는데 예를 다함이 정성으로 하고 망루에 음식을 가져다 바쳤으니 또한 가히 아름다운 것이었다. 요인이 말하기를 현을 이르기를 영청이 아니고 곧 영성(城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라 했다. 그 때 접반사인 전 상국 소포에게 천거되어 조정에 불려져서 직사관에 배수되고 국왕의 총애가 있은 것이 대개 20년간이다. 현인은 뇌물을 보내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공은 (뇌물을 준 자)를 찾으니 가히 숭상할만 하다. 그러니 어찌 현인이 산꼭대기에 비를 세우지 않겠는가. 공은 선종실록 일권을 개수하여 사전에 부치니 그 유고는 집에 전함이 있다. 대안 9년 감찰어사에 배수되었다.

<이면

기를 피한다. 선종이 공에게 명하여 춘하번 동북면 병마판관 갑장별감으로 삼고 아울러 고, 화, 장평, 영인, 흥원, 현덕, 정변의 7주를 선무하게 하고 곡식 1870여 석과 장염 310여 석으로써 불쌍하고 도와줄 곳이 없는 자를 구제하게 하니 무릇 9909인이나 되었다. 공은 말하기를 "나는 비록 국가의 저축미로써 주는 것이니 사민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적지 않다"라고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전중내급사에 배수되어 나아가 금주를 지키게 되었는데 명을 받들자 처음에 마을의 친척과 친구들이 말하기를 모주에는 사전의 귀신이 있는데 무릇 기백위에 달한다. 位靈들이 참혹하게 사람을 일찍 죽게 하니 자사들이 예에 따라 이르면 몇 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이런 귀신들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처노들이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돌아가기를 호소했으나 공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또 말하기를 "신은 총명하고 정직하여 함부로 벌을 주지 않으니 반드시 아무런 근심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부임한지 3년이 되어도 아무런 흔적이 나타나지 않자 조정에서는 숭배하고 불러서 좌습유지제고에 배수되었다. 이것은 귀신이 정직을 도운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여러 번 옮겨 전중시어사에 이르렀다. 공이 조정에 나아가면 흐트러짐이 없이 정성껏 일에 임하니 스스로 조심하여 말하기를 "수졸을 가지고 있으면 패함에 이르지 못한다"라고 했다. 수창 3년 정축에 또 기거랑에 배수되고 그 해 가을에 지금 왕이 친히 선정전에 나아가 친히 국내의 죄명을 정했는데 재상에게 명하여 가까이서 보좌하게 했다. 공은 홀로 앞으로 나아가 붓을 잡고 지대석 위에 서서 임금에게 바로 말을 하니 이것은 역시 옛날 좌사가 맡은 바의 직분이라 할 것이다. 누천하여 형부예부시랑에 이르고 녹봉을 받는 날이 되면 그 때마다 친척과 동네의 賤少에게 혜택을 미치게 하니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공에게 보답을 하지 못하니 가호들이 모여 불사연등을 경영하여 이로써 길가의 사람들이 공의 수복을 기도했다. 건통 5년 봄에 또 3품관에 배수되었다. 공은 수년동안 질병에 시달려 왔는데 약을 계속 먹어도 위독하여지니 두 번째 자식인 점이 옆에서 모시니 근심의 빛이 더했다. 공이 이르기를 "수명은 잇는 것은 무엇이고 수명을 폐하는 것은 무엇인고. 너희들은 근심하지 말라"고 했다. 5월 을묘에 용릉사 덕해원에서 죽었다. 이 달 신유에 佛制에 의거하여 사의 동쪽 언덕에 화장하고 전자를 새겨 안불사에 안치하고 그 해 10월 9일에(계유) 권지태사감 곽자인이 묘소 자리를 점치고 길일을 알리니 (갑신) 날이 밝기를 기다려 홍법사 서남 언덕에 장사지냈다. 나이는 66세이고 자식은 4명이다.큰 아들은 제이고 이술로써 관리에 나아가니 지금 위위주부통판 영광군수이고 둘째 아들은 점으로 위위주주동정이고 세 번째는 택으로 내시잡직에 들어가 서승이 되었고 막내는 항으로 상주목사 겸 장서기위위주부가 되었다. 점 이하 세 아들은 진사로써 등제하고 현달하였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뒤가 따르게 될 것이다'라 하니 진실로 꾸밀 필요가 없는 것이다. 드디어 평생의 일로써 이를 기록하고 나머지는 비와 행장에 있다.

비명에 이르기를, "계속 이어오기는 쉬워도 처음 만들기는 어렵도다 번성함을 이었으나 처음의 모습은 가난하고 한미하다. 옛날에 마음이 곧고 신의가 있으면 편안히 일생을 보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어떠한 허물도 가려져서 묘지쪽으로 향하니 아아 대단하구나 눈물이 흘러 앞을 가리는구나" (번역 김현라)

(5) 정항(鄭沆:1080-1136 鄭敍의 父)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항의 묘지는 조선 효종(1649-1659) 때 개경 장단군에서 발견되었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정항은 『고려사』에 입전되고 있을 만큼 중요 인물이므로 묘지문과 『고려사』의 내용을 수록한다.

정항은 정목의 네 번째 아들로 23세 되던 해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숙종때 복시에 제2위로 합격하여 내시로 있다가 어린 나이로 상주사록으로 현지에 부임하였으나 직무처리 능력이 뛰어나 고을 사람들이 탄복하였다고 한다. 또한 공무를 수행함에 공평정직하여 왕명의 출납이 상세하여 투명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였고 정항이 사망하였을 때는 그 집에 한 섬의 곡식도 없었다고 한다.

인종이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외조인 이자겸이 인종을 보위하며 위세를 떨치니 지방관들이 백성을 수탈하여 이자겸에게 재물을 바쳤으나 정항만은 홀로 아첨하지 않았다. 이자겸이 외손자인 인종에게 다시 자신의 3녀, 4녀를 왕비로 납비하여 국사를 전횡하였다. 이에 인종 4년(1126)에 이자겸을 축출하여 가까스로 왕권을 회복하였으나 다시 묘청, 정지상 등의 서경 천도설을 좇아 정세가 불안할 때 정항은 이자겸난 때 불탄 궁궐 일부를 수리하여 인종으로 하여금 개경에 정도하도록 청한 공로가 크다. 병이 위중할 때 지추밀원사 예부상서 한림학사 승지를 제수하였는데 왕명이 내린 이튿날 별세하니 57세였다.

정항묘지명

<전면

高麗國故禮部尙書知樞密院事鄭文安公墓誌銘

公諱沆字子臨其先本東萊郡人也 考諱穆攝大府卿 祖諱文道 曾祖諱之遠 皆爲本郡戶長 母高氏封上黨郡夫人 檢校將作監諱益恭之女也 大府府君有四子 曰濟曰漸曰澤 公則季也 濟未顯早卒 漸澤皆以文章材幹有名于朝 公幼而敏悟學若夙成 大府府君最所鐘愛年二十三擧進士及第 肅宗臨軒覆試擢眈第二人俄屬內侍出爲尙州牧掌書記秩滿 睿宗召復內侍授直史館移直翰林院轉神虎衛錄事軍器主簿 皆兼翰林院 天慶六年春 受旨爲執奏處心平直 出納惟允 俄轉將作大府主簿權知閤門祗候 明年拜右正言知制誥 論事?亮不避 權貴當途者忌之 以殿中內給事通判全州牧 召還爲左正言知制誥轉右司諫 時今上初卽位 元舅李資謙當國忌大臣不附已者 及朝中剛正之士誣罪 盡遂之下 遷公爲殿中內給事 累遷禮部員外郞復知制誥 丙午夏李氏敗 以刑部員外郞權知承宣 未幾轉禮部郎中餘?如故 明年卽眞朝廷 新去大履百事草創 公悉心獻納多所釐革 上亦倚以爲重尋加試禮賓少卿殿中秘書少監左副承宣充史館修撰 官賜金紫服 又進右承宣禮部侍郞翰林侍讀學士大子左諭德 大宋紹興三年 掌成均試遷朝散大夫左承宣吏部侍郞 又除國子祭酒翰林學士知制誥兼大子左諭德 明年同知貢擧得士之盛 前無與比 尋爲秘書監樞密院知奏事兼大子左□子 俄試國子監大司成餘?如故 公前後以恩及勞 累散官至大子保

<이면

會 朝廷多故 上欲大用 公以究其材 而病奪其命 嗚呼痛哉 公爲人學無所不通 然未嘗以氣待物聰明辯?而守之 以□剛果正直 而行之以和 遇人恂恂□ 謹而不可干以私 其在上前 持大議論 必傅珩義辨 奏?不窮 上每咨重焉 又久處近密練達朝廷規制 凡求墜典逸禮者 皆就公訪焉 旣疾 上差御醫官二人 護視比疾革下 批爲通議大夫知樞密院事禮部尙書翰林學士承旨知制誥 以示平日 欲大用之意 詔下而卒 實紹興六年十一月二十七日辛卯也 上聞之震 悼爲不視朝 賻祭有加等 贈諡文安 奧十二月十三日 火其樞于京城南彰信寺南山之麓 收遺骸權爀京北山寂炤佛寺 至明年閏十月十二日庚午 遷葬于松林山丁向之原禮也 漸刑部郎中御史雜端 澤給事中大子贊善大夫 與公皆年止五十七歲 沓其異哉 公之平生 一無所愧而行已 履德亦無蹇于道者 其遭時遇君如此 其密而年不及耆 壽位未登宰輔 使其所□不克大施于天下 凡知與不知 所以悼痛咨嗟 而未旣者以此也 公娶王氏左僕射?知政事景烈公諱國髮女也 累封江陵郡夫人 生子男四人 餘皆早夭 其季曰嗣文 以蔭爲將仕郞良?丞同正 今相國任公壻也 女三人長適侍御史知制誥崔惟淸 次適內弓箭庫判官李綽昇 次適內侍戶部員外郞金貽永 銘曰 壽吾不知 命亦偶然 胡卑之德 以薄其年 端遇于聖 位弗究焉 惟德之茂 惟聖之遇 年位薄厚 夫豈足顧 嗚呼 後之慕我 公之德者 來我玄堂之路而已

<번역문

<전면

고려국 고예부상서 지추밀원사 정문안공 묘지명

공의 이름은 항이고 자는 자임이고 그 선대는 동래군인이다. 아버지는 이름이 목으로 대부경이고 할아버지는 문도이고 증조부는 이름이 지원이다. 모두 동래군 호장이다. 어머니 고씨는 상당군부인에 봉해졌고 검교장작감인 인공의 딸이다. 대부부군은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제이고 둘째가 점이고, 셋째가 택으로 공이 막내이다. 제는 다 자라지 못하고 일찍 죽었으며 점과 택은 모두 문장의 재주로써 조정에 이름을 날렸다. 공은 어려서 총명하여 학문이 빨리 이루어지니 대부부군이 가장 총애하였다. 나이 23에 진사에 합격하고 숙종이 직접 과거를 주관하는 복시에 제2인으로 뽑히고 내시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주목으로 나가 서기를 맡게 되고 기한을 다 채우게 되었다. 예종이 다시 불려들여 내시에 들이게 하고 직사관을 제수하고 다시 직한림원으로 옮기고 신호위녹사 군기주부로 전직했다. 모두 한림원을 겸했다. 천경 6년 봄에 교지를 받고 주사로써 일을 맡아보게 되었는데 마음을 공평하고 바르게 하여 (왕명의) 출납이 오직 성심으로 이루어지니 (다시) 장작대부주부권지합문지후에 옮겼다. 다음해에 우정언지제고에 제수되었다. 일을 논함에 곧고 신의가 있어 권귀를 피하지 않으니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기피하였다. 이로써 전중내급사로써 전주통판에 나갔고 (다시) 소환되어 좌정언지제고가 되었고 우사간에 옮겨졌다. 이 때 지금의 임금이 처음 즉위하니 외숙 이자겸이 국정을 맡으니 대신들이 꺼리어 붙지 않는 자가 없었다. 조정 안의 강직한 선비들은 무고로 전부 쫓아내 버렸다. 공도 전중내급사로 옮겨지고 다시 예부원외랑으로 누천되고 다시 지제고로 되었다. 병오 여름에 이씨가 패하자 형부원외랑 권지승선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부낭중 여병여고가 되었다.

다음해 조정을 새롭게 하고 큰 도둑을 없애고 모든 일을 새롭게 할려고 하니 공이 성심으로써 대부분을 고치고 혁파할려고 하니 왕 또한 의지하여 더욱 중용하였다.

이에 시예빈소경전중비서소감 좌부승선에 더해지고 사관수찬관에 충원되고 금자복을 받았다. 또 우승선 예부시랑 한림시독학사 태자좌유덕에 승진되었다. 소흥 3년에 성균관시험을 관장하고 다시 조산대부 좌승선 이부시랑에 옮겨지고 또 국자제주 한림학사 지제고 겸 태자좌유덕에 제수되었다. 다음해 동지공거가 되어 많은 선비들을 얻으니 전과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이에 비서감 추밀원지주사 겸 태자좌서자가 되고 또 국가감 대사성 여병여고가 되었다. 공은 전후를 은혜로움과 근면함으로써 하니 산관에서 여러 해 있었으나 태자태보에 이르렀다.

<이면

마침 조정에서 많은 어려움으로 임금이 공을 널리 중용하여 그 재목됨을 궁구히 할려고 하였으나 병이 그 생명을 빼앗았다. 아아 슬프구나. 공의 사람됨은 학문에는 통달하지 않은 바가 없었고, 일찍이 기분대로 사물을 대우하지도 않았다. 총명으로 근심을 바로 잡고 입을 굳게 다뭄으로써 지켜내고, 과단성이 있고 정직하여 조화로움으로 행하니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신실하게 하고 오직 삼가니 사사로움으로 간섭할 수 없었다. 임금 앞에서 의논할 때도 반드시 경의를 도우고 판주에 밝아 막힘이 없으니 임금이 매우 중히 여겼다. 또 오랫동안 가까이 있어 조정규제에 숙달하여 무릇 어지러워졌거나 잃어버린 전례는 구하려면 전부 공에게 나아가 물어보았다. 이미 병이 있어 임금이 의관 2인을 보내어 간호하게 하니 날이 갈수록 병이 위독해지자 통의대부 지추밀원사 예부상서한림학사 승지 지제고를 내리고 평소처럼 크게 기용하려는 뜻을 보였다. 조서가 내리자 마자 졸하니 소흥 6년 11월 27일 신묘이다. 임금이 이를 듣고 매우 애도하며 조회를 정지하고 제의에 부조함이 더함이 있었다. 시호를 문안으로 추증하였다. 12월 13일에 경성의 남쪽 창신사의 남산의 언덕에 화장하고 유해를 거두어 경성의 북산 적소불사에 권안했다. 다음해 윤10월 12일 경오에 이르러 송림산의 남쪽의 언덕에 옮겨 장사지냈다. 점은 형부낭중어사잡단, 택은 급사중태자찬선대부가 되어 공과 더불어 함께한 것이 57년째이다. 아아 다르구나 공의 평생은 어느 하나 부끄러운 것이 없고 행동함은 이미 덕으로 하니 또한 살아가는데도 저촉됨이 없었다. 마침 그때에 임금을 만나도 이와 같이 하고 나이가 아직 많지도 않고 위가 재보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축적한 바를 충분하지 않아도 천하에 크게 베푸니 알든 모르든간에 애통하게 여겼다. 아아, 다 없어지지 않은 것이 이와 같구나. 공은 왕씨에게 장가들었는데 왕씨는 좌복야참지정사 경렬공으로 국모의 딸이다. 여러 번 봉해져 강릉군부인이 되고 아들 4명을 낳았는데 나머지는 일찍 죽고 막내가 사문으로 음직으로써 나가 장사랑양온승동정으로 지금 상국 임공의 사위이다. 딸은 3인으로 장녀는 시어사지제고 최유청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내궁전고판관 이작승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내시호부원외랑 김이영에게 시집갔다.

명문에 이르기를, 목숨은 우리가 알지 못하니 명 또한 우연인가. 어찌하여 남에게 주는 덕은 그 햇수가 짧아도 오직 성스러움으로 나아가니 지위는 없어지지 않는구나. 오직 덕의 무성함과 오직 성스러움의 만남은 나이와 지위의 후함과 박함으로써 어찌 돌아볼 수 있겠는가. 오호라 호손의 추모함이 우리 공의 덕인 것이니 우리의 그윽하고 당당한 길에서 일 뿐이랴. (번역 김현라)

정항도 부친 정목과 같이 화장하였으므로 이를 별도로 언급하기로 한다.

(6) 정목·정항 부자의 화장(火葬)

정목과 정목의 아들 정항이 모두 불교의 장례인 화장을 채택하고 있다. 고려말에 주자가례가 여행되어 불교장례를 금지하기 전까지는 고려 귀족들은 화장을 매우 선호했다. 당시 불교는 인간의 사후 생활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현세의 삶 보다 훨씬 안락하고 고통없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제시하고 있어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이곳의 주존불인 아미타불에의 귀의를 염원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였다. 사후 극락정토에의 왕생은 전생에 지은 악업을 해소해야 하므로 악업의 온상인 육체는 화장으로 태워 없애 깨끗한 영혼과 분리해야 가능하므로 화장은 바로 극락왕생의 첩경이었던 것이다.

필자가 마침 고려 귀족의 화장과 화장골장용석관 선각화에 대한 연구 논문을 낸 바 있으므로 정목과 정항 부자간의 화장에 특별한 관심을 둔 바 있었다.

고려시대 화장된 피장자 35명을 대상으로 화장의 절차와 그들의 화장유골을 납입한 1미터 내외의 조립식 석관에 선각한 사신(四神), 비천, 12지신, 성수(星宿), 화지문들을 파악하게 되었다. 이에 의하면 정목과 정항 부자의 묘지를 발견할 때 이들의 화장유골을 납입한 석관도 분명 수습되어야 하나 묘지만 알려지고 있을 뿐 석관에 대한 것은 확인할 길이 없고 동래 정씨 본가도 이를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고려 귀족의 묘지와 석관들이 유리된채 수습된 자료 중에 혹시 정목과 정항 부자의 석관이 혼재하고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정목과 정항 부자의 화장을 <표 3-4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3-4 묘지(墓誌)에 나타난 정목·정항 부자의 화장(火葬) 절차

火葬된 인물

死亡年月日

사망

빈소

火葬年月日

拾骨日

火葬遺骨의 權安地

埋骨年月日

장 례 기 간

火葬

용어

埋骨용어

사망지

火葬地

拾骨用語

매장지

死-火

火-埋

死-埋

權安用語

1

정목

1105.5.19 기묘

龍興寺 德海院

66세


7일후 辛酉

寺之西岡

1105.6.5

庚午, 拾骨

假安

帝京東北

安佛寺

1105.10.9

歸葬

弘護寺

西南原

6일

132일

4개월

12일

138일

4개월

22일

火葬

歸葬

2

정항

인종14(1136.11.

27), 57세


1136.12.13.

京城南

彰信寺

南山之麓

收遺骸

權爀

慶北山

寂炤佛寺

인종15(1137.윤10.12)

松林山

丁向之原

16일

330일

11개월

10일

11개월

15일

火其樞

遷葬

3

정서

명종 1171년? 이후











정목이 66세에 개경에서 타계할 때 타계한 곳이 사제(私第)가 아니고 용흥사 덕해원이었다. 필자가 고려시대 화장 인물 35명의 묘지와 문헌들의 내용을 고찰해 보았더니 이들 사망지를 명기하지 않은 인물이 14명, 사제에서 사망한 인물이 10명, 사찰에서 사망한 인물이 4명 기타 7명이며 사망 후 빈소를 사찰에 둔 인물이 3명이고 화장 후 사찰에 유골을 임시 봉안한 인물이 11명이나 된다. 이외에도 화장지가 사찰과 가깝거나 유골을 석관에 납입하여 매골한 곳도 사찰 근처였다. 이렇듯 고려 귀족의 장례는 불교사찰과 연관되어 있었다. 정목의 사망지가 용흥사 덕해원이란 것은 오늘날과 같이 누가 무슨 종합병원 몇 호실에 입원했다가 사망하자 그 병원 영안실 몇 호에 빈소를 차렸다는 상황과 비슷하다. 정목이 사찰에서 일생을 마친 점은 불교사찰과 갚은 연관이 있을 듯 하다. 예를 들어 정목이 운명한 용흥사 덕해원이 정목의 가문에서 기진해서 운영되는 사찰이던지, 아니면 단순히 정목의 질병치유와 휴양처로 물색한 곳일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공무나 개인 용무로 먼 길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일종의 국영 또는 사영 숙박시설을 운영하였는데 이를 원(院)이라 하였다. 이 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숙식은 물론 우마의 먹이를 제공받고 여행 중에 지치고 병든 자를 쉬게 하고 치료하는 인술과 약제까지 준비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특히 정목 같은 고려 상류층 귀족관료는 사찰에서 운영하는 이러한 원을 이용하면서 불승들의 극진한 치병불공에 의존하고 자신 역시 아미타부처가 주관하는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고통없는 안락한 사후 생활을 염원했을 것이다. 기록은 생략하였으나 정목 사망 후 빈소도 역시 용흥사 덕해원 그 자리에 두고 망자를 애도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였을 것이다. 정목의 사망연월일은 예종 원년 1105년 5월 19일 기묘였는데 사망 후 5일 만인 1105년 5월 25일에 '절의 서쪽 언덕'에서 화장했으니 이 때 사찰이란 역시 용흥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즉 용흥사 서쪽 언덕에서 불교장례로 유체를 태웠다. 이 때 유체를 태우는 고려시대 용어는 무려 15종이나 된다. 그 중 가장 많이 사용된 용어는 '다비(茶毗)'와 '화장(火葬)'이었다. 또한 화장 후 유골을 사찰에 봉안할 때는 영구적이 아니고 '잠시 봉안한다' 또는 '임시로 봉안한다'는 뜻의 '가안(假安)'과 같은 의미의 용어로써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용어는 '권안(權安)' '권조(權爀)'가 있다. 이 때 '권(權)'이란 역시 '임시'의 뜻이므로 '임시로 봉안한다' '임시로 둔다'는 뜻이 되겠다. 이 유골을 용기(容器)에 납입하고 사찰에 임시로 봉안함은 49재와 같은 의례를 통해서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명당이 될 묘지를 물색하며 유골을 담을 내용기와 석제 외용기를 제작하는 등 본장에 대비하는 기간이 되겠다. 전통장제에서 보통 일차장이 되는 자연육탈장은 부모 사망 후 3년상 기간을 지키므로 일차장 기간이 24개월이후라는 장기간이 흐른 이후 육탈된 유골을 세골하여 바로 매장하는 본장을 치르므로 전통 자연육탈장은 일차장기간이 24개월이후라는 장기간이 소요된다. 이에 비하여 인위적 육탈장인 화장은 일차장 기간이 매우 짧다. 즉 사망후 보통 7일 이내에 일차장으로 화장하여 고열에 소독된 인골을 용기에 담아 사찰 명부전 등에 임시 봉안했다가 길일을 받아 매골하면 본장이 끝난다. 정목의 화장 유골을 안불사에 임시 봉안한 기간은 약 4개월 12일이 된다 왜냐하면 화장유골을 습골한 1105년 6월 5일에 바로 안불사에 임시 봉안하였다가 4개월 여가 흐른 1105년 10월 9일에 호법사 서남들에 매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전통적인 자연육탈장의 상례기간이 26개월이 걸린 반면 인위적 육탈장인 화장은 6배나 단축된 4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또한 자연육탈장이 시신 그대로를 목관에 납입한 채 들판에 초가지붕을 덮어 3년상 기간을 지키면서 자연적으로 육탈될 때까지 봉안하는 것과 달리 인위적 육탈장인 화장은 시신을 곧 불에 태워 깨끗해진 유골을 사찰에 임시 봉안함으로 사찰 봉안 기간이라는 독특한 장례기간이 설정된 것이다. 사찰 임시 봉안이란 즉 사찰의 불승에게 의뢰하여 영혼의 극락왕생을 기원한 장례절차에서 자연육탈장이 들판이나 산야에 유체를 안치하고 후손들이 맹수로부터 유체를 지키며 애도하고 무당의 씻김굿을 통해 본장을 치른 과정과 차이점을 드러낸다.

정목의 묘지에서 화장 유골을 땅에 매장하는 것을 '귀장(歸葬)'이라 하였다. 이는 정목이 태어나기 전의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일 것이다. 여기에는 돌아갔다가 다시 태어남을 전제로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일종의 순환적 생명, 즉 윤회전생을 의식한 용어라고 생각된다.

정목의 유골을 담은 용기는 내외 2중 용기였을 것이다. 내용기는 참종이나 고운 천(옷감)에 싸서 목기에 담고 이 목기는 견고하고 변하지 않는 석제 외용기에 납입하여 땅에 매장하였을 것이다. 이 석제 외용기는 6쪽 판석을 조립해서 만든 1미터 가량 크기의 석관이기 때문에 이를 조립식 석관이라 하였다. 이 조립식 석관 내외는 사신(四神), 12지신, 비천, 연화, 북두칠성 등을 선각하여 망자가 승천한 천상세계를 표현하고 있다.(3-5)


(3-5)고려귀족의 火葬骨藏用石棺

안타까운 것은 정목 정항 부자의 묘지석을 수습할 때 이들의 화장 유골을 납입하였던 조립식 석관도 분명히 동반 출토되었을 것이나 지금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비록 석관이 묘지석과 함께 수습되어 어디엔가 소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석관과 묘지석이 서로 유리되어 석관의 피장자를 알 도리가 없는 점도 안타까움을 더 해 주고 있다.

필자가 이들 고려귀족들의 조립식석관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정목이 사망한 1105년 보다 54년전의 유방헌(1009.8.20사망)의 1051년 개장시의 석관이 수습된 것을 보면 정목의 조립식 석관도 분명 제작되었을 것이나 확인할 길이 없다.

정항도 부친과 같이 화장으로 피장된 인물이다. 사망연월일은 인종 14년(1136) 11월 27일이고 '화기구(火其柩)'라는 날짜는 사망후 15일이 지난 1136년 12월 13일이며 개경 남쪽의 창신사 남쪽 골짜기에서 유체를 태웠다. 유해를 수습했으나 일시를 밝히지 않았고 화장한 유해는 개경 북쪽산에 자리잡고 있는 적소불사(寂炤佛寺)에 임시 봉안하였다. 불사에 권조(權爀, 임시로 둔다)했던 화장 유골은 1137년 윤월이 되는 10월 12일에 송림산 정향(남방) 들에 매골하였으니 사망 후 약 1년이 경과한 뒤의 장례였다. 정항이 인종(1123~1146) 정권을 극히 옹호한 공신이었기에 장례기간을 길게 잡아 애도한 것일까. 아니면 1137년 10월 윤달에 장례를 한 것을 보면 길일을 잡느라고 장례기간이 길어졌을지 모르겠다. 정항의 '화장유골'을 매골할 때의 용어는 '천장(遷葬)'이라 하였으니 이는 화장유골을 임시 봉안했던 적소불사에서 '송림산정향지원'에 옮겨 다시 장례를 하였다는 뜻이니 일차장으로 화장하고 본장이 되는 이차장으로 매골한 복장(複葬)을 시사하고 있다.

2) 정서(鄭敍, 1115?∼1171?)

(1) 정서(鄭敍)와 왕실과의 관계

<표 2 동래 정씨 가문 세계를 보면 정서(鄭敍)는 정항(鄭沆)의 4남3녀 중 몇 째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4남(四男) 중 막내쯤 되지 않았을까 한다. 정항의 묘지에 의하면 정항의 4자 중 삼자는 요절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막내 정서만 생존한 것 같다. 정서(鄭敍)는 부친 정항이 인종을 보좌한 공로와 청렴한 관직생활의 덕으로 쉽게 인종과 동서간이 될 수 있었다. 정서(鄭敍)의 본래 이름은 사문(嗣文)으로 처음 음서로 정계에 진출한 후 내시낭중에까지 이르렀다. 정서(鄭敍)는 17대 인종 보다 6세 정도 아래였고 인종비 공예왕후 임씨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 인종과는 동서간이며 공예왕후와는 처형이 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정서와 왕실간의 관계를 보면 <표 3-5와 같다.

<표 3-5 제17대 인종 가계와 정서와의 관계

 

위의 내용에서 인종의 둘째 아들 대녕후 경은 인종과 정서(鄭敍)의 처형 공예왕후 임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왕자이니 정서(鄭敍)에게는 처조카가 되며 정서(鄭敍)는 대녕후(大寧侯) 경(璟)의 이모부가 되는 셈이다.

<표3-5의 제17대 인종가계와 정서(鄭敍)와의 관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종은 공예왕후 이전에 이자겸의 3녀와 4녀를 왕비로 맞았으나 이자겸난으로 폐출된 바 있다. 이들 이자겸의 3녀와 4녀는 인종의 모후 순덕왕후 이씨의 친여동생이니 인종에게는 친이모가 되고 이자겸은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이었던 것이다. 신라 왕실과 고려 왕실은 왕족들의 혈통과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족간의 혼인을 거듭하였다. 특히 고려왕실은 안산 김씨 김은부가 자신의 세 딸을 8대 현종에게 출가시킨 후 친자매간에 동일 왕을 모시는 혼인 풍습이 고려시대를 풍미했고 왕실 외척이 왕권을 능가하는 사례가 잦았다. 그 사례가 이자겸의 경우이다.

이자겸의 선조 경원 이씨의 본관은 지금의 인천 땅으로 8대 현종 때 세 딸을 현종에게 출가시킨 안산 김씨 김은부에게 세 딸을 시집보낸 이허겸으로부터 부각된다. 김은부의 세 딸이자 이허겸의 외손녀 셋이 모두 현종의 왕비가 되어 이들이 낳은 왕자들이 9대 덕종(德宗), 10대 정종(靖宗), 11대 문종(文宗)으로 즉위하였고 이허연의 손자 이자연은 자신의 1, 2, 3녀를 11대 문종에게 출가시켰다. 이자연의 1녀가 10남 2녀를 낳아 12대 순종, 13대 헌종, 15대 숙종으로 즉위하였다. 이자연에게는 11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이호는 자신의 딸을 12대 순종비로 보냈고 이호의 아들 이자겸은 자신의 2녀(순덕왕후 李씨)를 16대 예종에게 시집본낸 후 정2품 문하평장사에 이르렀고 자신의 외손자를 17대 인종으로 등극시키는 후원자가 되었다.

14세에 등극한 어린 인종은 외조부인 이자겸에게 정사의 실권을 모두 맡기니 이자겸은 자신의 반대세력인 예종 아우, 왕보와 관료세력 한안인 등을 제거하고 제1인자로 군림하였다. 이어 인종 2년(1124) 8월에는 이자겸이 자신의 제3녀를, 다음해 1월에는 자신의 제4녀를 인종에게 납비하여 인종의 외조부인 동시에 장인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확고하게 다지게 된다.

이자겸의 권력남용이 왕권을 능가하자 내시 김찬과 안보린이 인종에게 이자겸을 제거할 것을 누차 간청하여 인종 4년(1126) 2월에는 김찬 안보린의 지시를 받은 상장군 최탁 오탁 등이 당시 병권을 쥐고 있던 이자겸의 사돈 척준경과 그의 동생 병부상서 척준신, 척준경의 아들 내시 척순 등이 이끄는 무장세력과 대결하여 이자겸을 체포하려 했으나 오히려 척준경이 화공(火工) 공격 중 궁궐 일부가 불타고 인종을 호위한 최탁 오탁의 궁성세력은 이자겸의 체포에 실패하고 오히려 죽음을 당하였다. 이 때 인종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여 이자겸의 사택에 감금생활을 한 후 복구된 궁궐로 환어하였다. 이무렵 이자겸은 '十八字爲王'이란 파자 참위설을 믿어 이씨가 왕이 될 것이란 헛된 망상에서 인종을 독살하려고 독약이 든 떡을, 또 한번은 독약을 먹이려 하였으나 인종 비인 자신의 4녀가 이를 알고 인종에게 알렸고 또 독약을 고의로 엎질러 인종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

한편 사돈 이자겸이 인종을 독살하려 했다는 소문이 있은 후 척준경은 이자겸을 제거해 달라는 인종의 친필을 받고 인종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 이자겸일파를 완전히 제거하게 된다. 이자겸 가족은 전남 영광으로 유배되고 이자겸은 그 곳에서 같은 해 12월에 사망하며 이때 인종비였던 이자겸의 3녀, 4녀도 폐비의 불운을 맞는다.

이자겸의 3녀, 4녀가 이자겸의 난의 실패로 폐출된 인종 4년(1126)에 그 후비로 임원후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다. 이 분이 공예왕비이다. 정서(鄭敍)는 또 다른 임원후의 딸을 아내로 맞아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인종의 후비 공예왕비는 중서령 임원후의 딸이며 문하시중 이위의 외손녀이다. 인종비로 들어온 다음 해인 인종 5년에 첫왕자 의종을 낳고 3년 후인 인종 8년에 둘째 왕자 대녕후 경을 낳고 다음 해인 1131년에 셋째 왕자 원경국사 충희를 낳고 뒤에 계속 다섯째인 신종을 낳고 4녀를 두니 왕실에서는 임원후 가문에 사람을 보내어 가문의 어진 덕을 경하하였다.

처음에 공예왕후는 첫 왕자 보다 둘째 왕자 대녕후 경을 사랑하여 태자로 삼고자 하였다가 인종의 만류로 첫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의종이 즉위하자 모후가 자신보다 동생 대녕후 경을 사랑하는 것을 질시했는지 모후를 업신여기는 말로 침능(侵陵, 모욕함)하자 모후 공예왕후가 맨발로 궁전 밖에 나가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한탄하니 갑자기 뇌우가 일어나고 전광(電光)이 번쩍이니 의종이 놀라 모후의 옷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 때 번개가 건물 기둥을 벼락치니 의종이 뉘우쳐 깨닫고 드디어 모자가 처음과 같은 관계로 돌아갔다고 하였으나 이러한 분위기가 둘째 왕자 대녕후 경이 왕위를 찬탈한다는 음모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2) 정서(鄭敍)의 동래유배 배경

<표3-5의 인종가계와 정서(鄭敍)와의 관계에서 보면 정서는 인종의 다섯 아들 중 장남 의종을 제쳐두고 둘째인 대녕후(大寧侯) 경(璟)을 추대하려 했다는 음모로 동래에 유배되었다.

이 내용을 가장 자세하게 피력하고 있는 『고려사』 종실1의 대녕후 경에 대한 내용을 게재하고 『고려사』열전, 정항(鄭沆), 정서(鄭敍)를 참고하여 정서의 동래유배의 배경을 이해하고자 한다.

대녕후 경은 의종 2년에 책하여 후를 삼으니 경은 도량이 있어 중심을 얻은지라. 환자(宦者) 정함(鄭?)이 대간을 모함코자 비밀히 산원 정수개를 꾀어 대성 및 대리 이분 등이 왕을 원망하고 경을 추대하여 왕을 삼으려 모의한다고 무고하니 왕이 그 말에 미혹하여 제거하고자 하거늘 간신 김존중이 청하여 유사로 하여금 안문하게 하였으나 과연 증거가 없는지라 수개를 묵형하여 흑산도에 유배하고 분은 운제현에 체배하였다. 함은 허물을 면코자 생각하여 다시 참소하기를 '외척 조신들이 대녕후의 집에 출입하고 있으니 진실로 무고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먼저 존중은 태후의 매서인 내시낭중 정서(鄭敍)와 후제(后弟)인 승선 임극정과 틈이 있었는데 서의 성품이 경박하고 재예가 있어 대녕후와 교결하여 항상 같이 유희하였으므로 존중과 함 등이 뜬 말을 만들어 왕에게 들리니 왕이 의심하는지라 재상 최유청 문공원 유필 등이 간관 최자영 왕식 김영부 박한 등을 거느리고 합문에 엎드려 청하기를 '정서(鄭敍)가 대녕후와 결교하고 그 집에 맞이하여 연락유희하니 죄를 가히 용서치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고 어사대도 또한 정서가 종실과 몰래 결탁하여 밤에 모여 연음(宴飮)한다고 함으로써 서와 비서정자(秘書正字) 양벽, 융기색(戎器色) 판관 김의련, 대녕부 전첨 유우, 녹사(錄事) 이시를 가두니 왕이 5인을 용서하고 대녕부를 파하고 경(暻)의 노비 김참(金璇)을 회인에 귀양보내고 악공 최예 등을 태형하여 귀양보내니 대간이 합문에 엎드려 다시 청하고 지대사(知臺事) 최윤의는 왕소(王所)에 직입하여 이를 쟁론하는지라 이분을 소환하고 정서는 동래에, 벽은 회진에, 의련은 청주에, 김첨은 복도에 장류하였다. 처음에 정서가 경(暻)을 향연할 때 유청이 그릇을 빌려주었더니 이에 이르러 대간이 또 유청은 대신의 체면을 잃었다고 논하므로 남경유수사로 내치고 잡단 이작승은 집에 있으면서 핵주에 불참하였다하여 내쳐서 남해현령을 삼으니 모두 정서의 매서였다. 얼마 후에 이부가 정서, 최유청, 이작승의 죄를 정부에 기록할 것을 청하니 제하여 가하다 하였다. 십일년에 경을 천안부에 유배하고 다시 유청을 내쳐서 충주목사로 삼고 극정을 양주방어사로 삼고 서의 매서인 우부승선 김이영은 지승평군사를 삼고 작승은 남해현령을 삼고 서를 거제도에 옮겨 유배하였다. 이 때에 최예가 서면되어 서울에 돌아 왔으나 처와 사이가 나빠 처가 무고하기를 '예는 아직 개준치 않고 대녕후의 집에 왕래한다'고 하니 왕이 최보칭에게 명하여 국문하니 증거가 없었다. 왕이 본래 도참을 믿어 여러 동생들에게 우애가 없었으므로 의심이 아직 풀리지 않아서 비밀히 간신을 시켜서 대녕후 및 극정 등의 죄를 논핵케 하고 또 태후가 이를 구원할가 두려워하여 먼저 태후를 보제사에 옮기고 거짓으로 부득이하여 윤허한 것 같이 하였다. 유시(流矢)의 변에 왕이 조서를 내려 재추들이 적을 잡지 못함을 책하니 이에 체포가 계속되었는데 대녕의 가동 나언 유성 황익 등을 의심하여 국문하기를 심각히 하니 언 등이 거짓 자백하는지라. 제왕 재추 백료 기로들이 궐에 나아가 죄인을 잡았음을 경하하고 나언 유성 황익 및 유성의 처를 참하고 또 금위가 불근(不謹)하므로 견룡 순검 지유 14인을 전리(田里)에 유배하였다.

(3) 궁중의 환자 정함(鄭?)과 대간의 정서(鄭敍) 모함

<정함의 1차 모함(의종 초)

정함이 산원(散員) 정수개(鄭壽開)를 꾀어 정서와 대성(대관 소속 관청) 및 대리(臺吏) 이빈(李?) 등이 의종을 원망하고 대녕후 경을 추대하여 왕을 삼으려 한다고 무고하니 간신 김존중이 간청하여 담당 관청에서 조사 고문하니 증거가 없음을 확인

<김존중과 정함의 2차 모함(의종 5년, 1151)

외척 조신들(내시낭중 鄭敍 등)이 대녕후 집에 드나들며 모의한다고 참소.

① 이 때의 김존중은 의종이 태자 때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정함과 내통하여 1차 정함의 모함 때와는 달리 정함의 편에 서서 정서(鄭敍)를 무고하였다. 이는 김존중이 공예왕후 여동생 남편 정서와 공예왕후의 남동생 임극정(任克正)과 틈이 있었고 정서(鄭敍)의 인물평이 경박하고 재예가 있어 처조카 대녕후와 항상 어울려 유희한다고 믿어 의종에게 모함한 것이다.

② 재상 최유청(鄭敍의 매부), 문공원(文公元), 유필(庾弼) 등이 간관(諫官) 최자영(崔子英) 왕식(王軾) 김영부(金永夫) 박한 등을 거느리고 인종 앞에 엎드려 "정서(鄭敍)가 대녕후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향연을 베풀고 유희하니 용서하지 못할 일이라"고 호응 무고하였다. 이 때 정서의 매부 최유청은 재상이라는 공직 때문에 처남 정서를 탄핵하는 자리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③ 어사대도 동조

이에 정서(鄭敍), 양벽(梁碧), 김의련(金義鍊), 유우(劉遇), 이시(李施)가 투옥되었으나 의종이 석방시킴. 대신 의종은 동생에게 내린 대녕후라는 작호를 폐지하고 대녕후의 노(奴) 김참(金璇)을 회인에, 악공(樂工) 최예(崔藝) 등을 태형하여 귀양보냈다.

④ 대간(臺諫)과 지대사(知臺事) 최윤의(崔允儀) 등이 다시 정서(鄭敍) 등의 처벌을 주장

결과 : 의종 5년(1151) 5월 8일 정서(鄭敍) 등을 유배 또는 관직 강등

내시낭중 정서(鄭敍): 동래 전리(田里)에 유배

재상 최유청(崔惟淸, 鄭敍의 매부)은 자신의 처남 정서가 대녕후를 대접할 때 그릇을 빌려주었다 하여 재상자리에서 남경(현재 서울) 유수사로 강등하고 잡단 이작승(李綽升, 鄭敍의 매부)은 집에 있으면서 핵주(劾奏)에 불참하였다하여 남해 현령(南海縣令)으로 강등 하였다.

얼마 후 이부(吏部)가 정서, 최유청, 이작승의 죄를 정부에 기록할 것을 청해 의종이 허락했다

(4) 악공(樂工) 최예(崔藝) 처가 남편을 대녕후와 왕래한다고 무고(의종 11년 1157. 2. 12)

앞의 (1)의 ③ 김존중과 정함이 대녕후, 정서(鄭敍) 등을 모함할 때 대녕후의 노비 김참과 악공이었던 최예가 귀양의 처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 최예가 귀양에서 풀렸으나 그의 아내가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자 남편을 무고하기를 자신의 남편이 아직 반성하지 않고 대녕후 집에 왕래한다고 하니 의종이 간신 최보칭(崔??)에게 명하여 국문했으나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대녕후와 정서(鄭敍) 인척을 다시 유배하고 관직을 강등하고 있다.

정서(鄭敍)-동래에서 거제도로 유배

대녕후(의종 동생)-천안부 유배

최유청(鄭敍의 매부)-충주목사로 강등

임극정(鄭敍의 처남)-양주방어사

이이영(鄭敍 매부)-지승평군사로 강등

이작승(鄭敍 매부)-남해현령

(5) 의종이 동생 대녕후 일파를 유배 강등시킴

의종이 도참설을 믿고 여러 동생들에 대한 우애가 없어 늘 동생들이 혹시 자신의 보위를 넘보지 않을까 염려하여 몰래 간신을 시켜 동생 대녕후와 외삼촌 임극정 등의 죄를 논핵케 하였는데 마침 "유시의 변(流矢之變)"이 있어 이들에게 혐의를 씌웠던 듯 하다. 유시의 변이란 의종 23년(1169) 승선 김돈중이 의종을 호위하다가 자신이 탄 말이 갑자기 날뛰는 바람에 전통에서 화살촉이 빠져나와 왕 옆에 떨어졌던 일을 의종이 의심하여 범인을 잡게 했는데도 김돈중(金敦中)이 상황설명을 하지 않아 동생 대녕후를 의심하여 대녕후의 가노(家奴) 나언, 유성, 황익 등을 국문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내니 이들을 참형하고 또 금위(禁衛)가 호위를 소홀히 했다하여 14인을 유배보낸 사실이 있다.

(6) 정서(鄭敍)의 유배를 종용한 인물들

① 의종시대의 환관 정함

환자(宦者)란 본래 남성적인 기능을 상실한 사람이 그 대상이 된다. 고려에서는 궁형(宮刑, 남자는 거세하고 여자는 음부를 유폐하는 형벌)이 시행되지 않아 죄를 지어 거세된 경우는 없고 대개 어릴 때 개에게 고환을 먹혀 성불구가 된 자 중에 궁중의 환자가 되는 자가 있었다. 이들은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고 다만 궁중사를 맡아 처리할 뿐이었다. 하지만 환자 정함이 의종의 눈에 들었던 것은 의종의 유모를 처로 삼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의종은 즉위하자 그들에게 저택 한 채를 내리고 유모에게 덕흥궁주에 봉하고 잔치를 열었는데 이 때 정함이 서대(犀帶, 물소뼈로 만든 허리띠)를 찬 것을 보고 우간의 왕식이 어사대원을 꾸짖어 말하기를 "환자가 감히 서대를 두른 것을 보고도 탄핵하지 않으니 눈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니 어사 잡단 이작승이 어사 대리 이 분을 시켜 정함의 서대를 압수하게 하였다. 정함이 왕의 하사품이라 하여 내어주지 않으려 하자 이분이 이를 강취하니 의종이 자신의 서대를 풀어 정함에게 보상해 주었다. 대간은 의종이 매우 기분이 상한 것을 보고 정함의 서대를 내시원에 돌려 주었다. 이에 의종은 다시 정함을 권지합문지후로 삼으니 대간이 환자를 조관에 참여하는 것은 고제에 없는 일이라고 만류하니 이를 거두었으나 곧 다시 정함에게 내시에 충원하였고 얼마 후에 권지합문지후를 삼고 문하성에 압력을 넣어 이를 서명케했다. 그러나 이에 불복하여 서명하지 않은 급사중 이지심과 사간 최우보 최경의는 좌천되고 평장사 최윤의 우간의 최응청 숭산직문하성 이원응 등이 서명하였다. 이로부터 정함은 권세와 총애가 날로 번성하여 친당을 만들어 참소를 꾸며 조신을 짓밟고 여항을 침탈하였고 정함의 권세가 두려워 함묵할뿐이었다. 이에 좌정언 허세보가 모두 탄식하여 말하기를 "권세가 내시에게 있도다"라고 풍자하였다.

② 내시 김존중(金存中)

김존중은 『고려사』열전 중에서 폐행(嬖幸, 왕의 총애를 받은 신하)편에 넣었을 만큼 의종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의종이 태자일 때 그 스승이 된 인연이 있어 의종이 즉위하자 내시로 발탁되었다. 그 후 승진하여 형부낭중 기거주 보문각 동제거(刑部郎中起居注寶文閣同提擧)가 되었다. 정함의 추천으로 우승선(右承宣)이 되었고 이로부터 궁중에 출입하여 국정을 도모하여 그 세력이 조야(朝野)를 휩쓸었다. 김존중은 왕(인종, 의종의 부왕)에게 아뢰기를 "태자는 어리고 종친은 번성하니 넘겨다 볼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양부(兩府)의 재상을 뽑아 동궁의 사부를 삼아 주공(周公) 곽광(郭光)의 고사를 본받을 것입니다"하니 왕이 그렇게 여겨 유필(庾弼)로 태사를 삼고 최윤의(崔允儀)로 태부를 삼았더니 얼마 안되어 유필이 졸하니 김존중이 대신 소보(少保)가 되었다. 의종은 종실 재상 문무백관에게 명하여 김존중의 저택에 가서 하례하도록 하였으며 문지기도 고급관리가 입는 자의(紫衣)를 입고 칼을 찼다. 김존중이 정함과 더불어 결탁하여 자신들에게 아부하는 자는 올리고 어기는 자는 배척하였다. 관작을 팔아 재물이 그득하고 형제 친척이 세도를 믿고 방자하였다. 의종 10년(1156)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이처럼 김존중과 정함은 의종의 왕권을 보좌하여 왕제(王弟)와 정서(鄭敍) 등을 제거하는데 앞장 선 인물이다.

(7) 정서(鄭敍)의 처가 사람들

① 처형 인종비 공예왕비 임씨

정서(鄭敍)의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1115∼1171년설, 1116∼1171년설, 1115년∼1174년설 등이 있다.

인종이 이자겸의 외손자이면서도 또 이자겸의 3녀(인종2년, 1124)와 4녀(인종3년, 1125)를 왕비로 맞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나 인종 4년 5월 이자겸의 난으로 이자겸이 척준경에게 잡혀 영광으로 유배 당해 그 해 12월에 사망하니 인종의 이모이면서 왕비였던 이자겸의 3녀와 4녀가 폐비가 되고 같은 해 인종은 후비로서 임원후의 딸을 왕비(공예왕비)로 맞이하게 된다.

부친 정항이 당시 인종이 14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외조부인 이자겸의 위세가 크게 떨치니 다투어 이자겸에게 아첨하는데 홀로 아첨하지 않았던 점이나, 묘청과 정지상 등이 인종을 서경에 오래 머물게 하려고 이자겸난 때 불탄 개경 궁궐 수리를 정지시키자 두 번이나 상소를 올려 개경 궁궐 수리를 하게 하여 환어하기를 청하니 인종이 이를 좇았다고 한 점에서 인종에게는 더없이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정서(鄭敍)는 공예왕비 임씨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 인종과 동서관계가 된다. 인종 생존년을 보면 정서보다 10여세 연장이 되니 정서가 아랫 동서가 되는 셈이다.

인종비 공예왕비 임씨가 인종비가 될 것이라는 예언적 꿈은 3가지가 전하고 있다.

【공예왕비 임씨의 외조부 이위(李瑋)의 꿈】

공예왕비가 탄생하는 날 황색의 대기(大旗)가 그 집 중문(中門)에 세워져 기 끝이 선경전(宣慶殿)의 치미(?尾)에 얽혀 나부꼈다. 외조부 이위가 "이 여식은 후에 선경전에서 놀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예왕비가 15세에 평장사 김인규(金仁揆)의 아들 김지효(金之孝)에게 시집가게 되었는데 혼인날 저녁에 신랑이 문에 이르니 공예왕비가 갑자기 병이 나서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사과하고 신랑을 돌려보냈다. 이에 점술가가 말하기를 "이 딸은 반드시 국모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 소문을 들은 이자겸이 이미 자신의 3녀 4녀를 인종에게 납비한 이후이므로 이를 미워하여 공예왕비의 부친 임원후(任元厚)를 강등하여 개성부사로 보냈다.

【개성부(開城府) 군태수(郡太守)의 꿈】

공예왕비 부친 임원후가 개성부사로 부임한지 1년이 지난 때 개성부의 군태수의 꿈에 태수청(太守廳)의 대들보가 갈라져 큰 구멍이 났는데 황룡이 그 구멍에서 나오는지라. 다음날 아침에 태수가 조복을 갖추고 임원후(당시 개성부사)에게 가서 그 꿈에 반드시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인종이 공예왕비를 맞아들이는 꿈】

인종의 꿈에 임자(荏子, 참깨) 5되와 황규(黃葵, 해바라기씨) 3되를 얻은지라 척준경에게 해몽을 의뢰하니 "임자는 임이니 임성을 후비로 들일 징조요 그 수가 다섯임은 다섯 아들을 낳을 상서요 황(黃)은 황(皇)이니 황왕의 황과 같고 규(葵)는 규(揆, 법도)이니 황왕이 도규(道揆)를 잡고 나라를 다스릴 상서로 그 수가 셋임은 다섯 아들 중 세 아들이 나라를 다스릴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인종 4년(1126)에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고 인종 2년과 3년에 맞은 왕비였던 이자겸의 3녀, 4녀를 폐출하고 임원후의 딸을 왕비로 맞아 꿈대로 18대 의종, 대녕후 경, 19대 명종, 원경국사 충희, 20대 신종의 다섯 왕자를 두었고 18대 의종, 19대 명종, 20대 신종의 세 왕자가 보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명종 12년(1182)에 넷째 아들 원경국사 충희가 죽고 명종의 막내동생 평량공(후에 신종)이 치질을 앓아 모후 공예왕후는 막내 아들도 넷째 아들과 같이 혹시 잃을 것이 아닐까하고 매우 노심하니 명종과 막내아들 평량공이 관자악과 축수로 즐겁게 해 드리니 기운을 좀 차렸다가 75세의 나이로 운명하니 순릉에 장사지내고 공예태후라 시호했다. 정서(鄭敍)와 연루된 둘째 왕자 대녕후 경이 형님 의종의 의심을 받아 의종 11년(1157)에 천안부로 유배된 뒤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② 정서(鄭敍)의 장인 임원후(任元厚)

임원후는 정서(鄭敍)의 장인인 동시에 인종의 장인이다. 또한 임원후는 『고려사』열전에 부친 임의(任懿)에 부전(附傳)되어 있는 인물이다. 부친이 역학하여 등제한 후 13대 선종에서 16대 예종 연간에 여러 관직을 거쳤고 17대 인종은 임의(任懿)에게 중서령(中書令)을 추증하였고 아들은 원후(元厚)·원준(元濬)이 있었다.

17대 인종이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면서 이자겸의 딸들을 폐비시키고 그 해 인종 4년에 임원후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다. 이가 공예왕비 임씨이다.

임원후의 초명은 지애(之?)이니 『고려사』세가 인종조에는 원애(元?)로 나와 있다. 원후도 부친과 같이 과거에 등과하여 정계에 진출하였다. 자신의 딸이 인종비로 간택된 이후 여러 관직에 누천되었다. 마침 묘청과 백수한이 서경천도설을 주장하자 인종에게 글을 올려 화근을 근절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다가 묘청 등이 서경에서 반기를 들자 임원후와 김부식을 중군수로 삼았다가 뒤이어 개경도성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겼다. 관직이 판리부사가 되었을 때 인사관리를 매우 공정하게 하니 중국 진(晋)나라 산도(山濤)라는 인물 못지 않다고 찬사하고 있다.

외손자 의종이 즉위하자 의종은 외할아버지에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제수하였고 정안후(定安侯)를 봉하고 식읍(食邑) 2000호 식실봉(食實封) 600호를 내리고 수녕부(壽寧府)를 열어 인력을 소속시켰다. 의종 10년(1156)에 사망하니 나이 68세였다. 아들은 다섯이니 임극충(任克忠) 임극정(任克正) 임부(任溥) 임유(任濡) 임항(任沆)이 있었다.

정서(鄭敍)가 어떤 인연으로 임원후의 딸과 혼인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정서의 장인 임원후와 정서의 부친 정항의 정치노선이 서경파 묘청과 백수한을 비판하고 인종을 보필한 개경파란 점에서 양 가문의 혼사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③ 정서(鄭敍)의 처남 임극정(任克正)

임극정은 임원후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이니 정서의 둘째 처남이 된다. 『고려사』열전의 임극정의 조부 임의전에 부친 임원후와 부전되고 있다.

임극정이 정서(鄭敍)의 처남이고 인종의 다섯 왕자의 외삼촌으로써 왜 첫째 조카 의종 보다 둘째 조카 대녕후 경을 가까이 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자신의 누이 인종비 공예왕비가 둘째왕자가 첫째보다 국왕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던 그런 분위기와 궤도를 같이 한 것으로 보인다.

정서(鄭敍)의 아내가 공예왕비의 여동생이었던 만큼 임극정과 정서가 공예왕비가 둘째 왕자 대녕후 경을 총애했던 것 같이 자연스럽게 대녕후 경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이해된다.

정서가 대녕후 경을 자기 집에 맞아 연회를 베풀고 의종을 제거할 모의를 한 것처럼 비쳤기에 의종을 보좌한 세력들이 의종 5년(1151)에 정서(鄭敍)를 동래로 유배하고 그 매형들을 관직에서 강등할 때 임극정은 연루되지 않았으나 의종 11년(1157)에 의종의 동생 대녕후 경이 천안부로 유배되고 정서(鄭敍)가 동래에서 거제도(巨濟島)로 이배될 때 임극정이 호부상서에서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강등되고 다시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옮겼다가 사망하였다.

④ 정서(鄭敍)의 세 매형 최유청(崔惟淸), 이작승(李綽升), 김이영(金貽永)

<표 3-2 동래 정씨 가문에서 밝혔듯이 정서는 누나 셋, 형님 셋이 있었다. 정서의 부친 정항묘지명에는 3녀 중 첫딸이 시어사 지제고 최유청에게, 둘째는 내궁정고판관 이작승에게, 셋째는 원외랑 김이영에게 시집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세 매부는 정서와 연루되어 관직이 폄하되고 있다.

정서의 큰 매형 최유청은 묘지가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고려사』열전에 입전되어 있을 만큼 명망을 떨친 인물이다. 묘지문 머리에 쓴 관직은 고려국금자광록대부 검교태위수사공 중서□□□ 집현전대학사 상서예부사 최공묘지(高麗國金紫光綠大夫 檢校太尉守司空 中書□□□ 集賢殿大學士 尙書禮部事 崔公墓誌)로 되어 있어 종 1품에서 종2품의 고관직 문산계까지 올랐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창원군인(昌原郡人)이며 6세 최준옹(崔俊邕)이 태조 왕건을 도와 공신이 된 이후 부친 최석(崔奭)이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하여 11대 문종, 12대 순종, 13대 선종의 삼조(三朝)에서 봉직하였다.

최유청(崔惟淸)은 일찍 부친을 잃었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문을 닫고 글을 읽어 16대 예종대에 과거시험에 등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예종에게는 남동생이 여섯 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물리치고 어린 장남 (仁宗, 당시 14세)에게 양위하는데는 장인 이자겸의 공훈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인종대에 이자겸이 전권을 휘두르고 자신에게 호응하지 않는 사람은 계략을 써서 죽이고 귀양보내는 사례가 많았다. 이 때 최유청도 연루되어 실직하였다. 이러한 반이자겸 노선은 정항 임원후 가문과도 연계되어 최유청이 정항의 사위가 되었던 것일까? 이에 최유청은 이자겸이 축출된 인종 4년 이후 인종의 내시로 들어가 누천하여 좌사간(左司諫), 상주목사(尙州牧使), 시어사(侍御史) 등을 거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금(金)에 사신으로 갔을 때 금인이 최유청의 언동에 예의가 있고 공손하다하여 작록을 더해 주었다고 하니 인종은 이를 듣고 호부시랑을 제수했다. 곧 동북면병마사가 되어 변방을 편안하게 하니 또 공로를 치하하여 승선(承宣)을 제수했다.

18대 의종이 즉위하자 지주사에 승진하여 왕명의 출납을 성실히 하므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에 승진하였으나 당시 처남 정서(鄭敍)가 대녕후 경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향연을 베풀 때 최유청의 집에 기명을 빌려주었다고 대간이 탄핵하며 대신의 체모를 잃었다고 하여 인종 5년에 정서가 동래로 유배될 때 남경유수사로 폄출되었고 둘째 매형 잡단 이작승은 집에 있으면서 정서 일파의 탄핵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여 남해현령으로 폄출되었다.

의종 11년(1157)에는 의종이 그처럼 열등감을 느꼈던 동생 대녕후 경을 천안부로 유배하고 정서를 동래에서 거제도로 다시 유배시킬 때 정서의 큰 매형 최유청은 남경유수사에서 다시 충주목사로 강등시키고 둘째 매형 이작승은 그대로 남해현령으로 의종 5년에 별탈이 없던 셋째 매형 김이영은 우부승선에서 지승평군사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정서(鄭敍)의 큰 매형 최유청은 외직에 오래 머물렀으나 의연히 자처하니 의종이 그 충직함을 깨닫고 다시 평장사를 제수코자 하였으나 저지하는 논란이 있어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로 치사케했다.

무신난(의종24년, 1170)이 일어나 문신이 다 살해되는 듯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평소에 최유청의 덕망에 심복하여 부하들이 최유청을 해치지 못하게 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에 기공(期功) 친척들이 최유청의 덕향으로 화를 면하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무신의 난으로 의종이 축출되고 인종의 셋째 왕자가 왕위에 즉위하였다. 이가 바로 19대 명종이다. 의종의 첫째 동생 경은 의종 11년 천안부로 유배된 이후 행적이 기록에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명종이 즉위한 1171년 이전에 타계한 것이 아닐까 한다.

명종이 무신들에 의해 추대되고 여러 장수들이 최유청의 덕망을 흠모하였으니 무신정권 하에도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고 또 다시 수사공 집현전 대학사 판예부사(守司空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를 받았으나 명종 4년(1174)에 80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최유청은 경사자집(經史子集)에 해박하고 불교를 몹시 좋아하여 불경에 능통하니 이르는 곳마다 학생과 승려의 질문이 쇄도하였다. 그가 쓴 『이한림집(李翰林集)』, 문장수백편『남도집(南都集)』이 있었고 8남을 두었다.

최유청의 덕망으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명종 즉위년에 조정에서는 최유청의 처남 정서(鄭敍), 동서 이작승, 김이영 등을 유배에서 소환하여 모두 직전(職田)을 다시 주고 화계(畵鷄)·유시(流矢)의 일로 귀양갔던 자를 모두 개경으로 귀환하게 하였다.

정서의 둘째 셋째 매형에 대한 기록은 더 찾지 못했다.

⑤ 정서(鄭敍)의 처형 인종비 공예왕비의 아들인 18대 의종(毅宗)

의종이 18대 왕위를 계승하여 약 25년간 통치하다가 무신난으로 폐위되어 거제도로, 태자는 진도로 유배된 후 의종의 둘째 동생 익양공 호(皓)를 즉위시키니 이가 19대 명종(明宗)이다. 명종 3년(1173) 8월에 의종 복위를 시도하던 김보당이 의종을 거제도에서 계림(鷄林)에 출거시켰는데 10월에 복위시도가 발각되어 의종은 경주출신 이의민에 의해 곤원사(坤元寺) 북연상(北淵上)에서 살해되니 47세였다.

사신 김양경(金良鏡)이 후당(後唐) 명종 때 대리소경(大理少卿) 강징(康澄)이 상소한 글을 들어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에게 다섯가지 매우 두려워해야 할 일을 『고려사』에 남기고 있어 소개한다.

【다섯 가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일】

① 삼진(三辰, 日月星)의 실행(失行)
② 천상(天象)의 변현(變現)
③ 소인(小人)의 와언(訛言)
④ 산이 무너지고 내(川)가 마르는 일
⑤ 수(水) 한(旱) 충(盤) 황(蝗)

【다섯 가지 두려워해야 할 일】

① 어진 선비가 숨어 있는 일
② 염치의 도가 없어지는 일
③ 상하가 서로 재물을 탐구하는 일
④ 헐뜯고 칭찬함이 진상(眞相)을 어지럽게 하는 일
⑤ 직언(直言)을 듣지 않는 일

위의 다섯 가지 매우 두려워해야 할 일을 의종이 두려워하지 않아 결국 폐위되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의종의 모후 공예태후가 우려했던 것처럼 큰 왕자 의종은 어릴 때부터 국왕이 될 자질을 갖추지 못하여 모후는 둘째 왕자 대녕후 경을 왕위계승자로 삼으려 시도하자 인종과 정습명(鄭襲明)이 장자계승의 원칙을 고수하여 첫 왕자가 인종 21년(1143)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때 첫 왕자의 나이 17세였으니 세자 책봉이 늦은 편이었다.

이에 첫 왕자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동생 대녕후 경에 대한 열등감과 자신을 훈계하고 규제하는 주위 관료들을 벗어나 자신을 옹호하고 기생하려는 환자(宦者)와 간신들을 가까이하여 안주하려는 국왕이었다.

자신의 뚜렷한 통치이념이나 식견보다 영의(榮儀)와 같은 점궤나 풍수에 능한 인물의 말을 듣고 불교와 도교의례를 통해서 요행을 바라는 일에 국력과 정열을 낭비하였다.

또 의종은 대신들과 민간인의 집을 헐어 정자를 짓고 이곳 저곳에 자주 행차하여 환락생활에 빠져 정사에 등한하였으며 호위를 담당한 근위병들의 고달픔과 심리적 위화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 방만한 왕이었다.

3) 정서(鄭敍)의 정과정곡(鄭瓜亭曲)의 가사 내용

(1) 정서가 정과정곡을 짓게 된 배경

정서(鄭敍)는 『고려사』열전에 입전되고 있는 부친 정항에게 부전되고 있는 인물이다. 정서의 생몰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1115(1116)년∼1171년(1174년 이전)설이 있다. 이는 16대 예종 10여 년경에 태어나서 17대 인종, 18대 의종을 거쳐 19대 명종 원년 경이 아니면 맏 매형 최유청이 사망한 1174년 이전에 사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① 정서의 벼슬은 내시낭중이다.

② 정서는 인종비 공예왕비의 여동생 남편으로 동서간이 되어 인종의 사랑을 받았다.

③ 18대 의종이 즉위한 이후 정서는 의종의 동생 대녕후 경 즉 정서와 자신의 처조카와 잘 어울리고 밤에 몰래 주연을 베푸는 것은 의종에 대한 모반을 모의하려는 의도라 하여 환자 정함, 내시 김존중이 주동이 되고 대간이 탄핵하여 정서는 동래에 유배된다.(의종 5년, 1151)

④ 정서가 귀양을 떠날 때 의종이 자신의 이모부 정서에게 "오늘은 조정 여론 때문에 유배를 보내니 곧 소환하겠다"고 하였으나 정서가 동래에 귀양와서 오래 기다려도 소환하지 않으므로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노래를 지으니 가사가 극히 슬펐다. 정서가 스스로 자신의 호를 과정(瓜亭)이라 하였으므로 후인이 그 곡조를 정과정(鄭瓜亭)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정과정곡을 짓게 된 배경은 정서가 처조카 의종 주위의 참소로 동래에 귀양왔으나 의종이 자신의 무혐의를 알고 곧 소환하겠다던 그 말에 위안과 희망을 갖고 기다렸으나 끝내 소식이 없자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자신의 무죄를 가사에 곡을 붙여 거문고로 슬픔을 달랜 것이다.

(2) 정과정곡(鄭瓜亭曲)의 가사내용

성종 4년(1493)에 간행된 『악학궤범』에는 「정과정(鄭瓜亭)」이라고 하지 않고 삼진작(三眞勺)을 여기(女妓)들이 부른다고 하였으나 『고려사』 악지, 속악의 정과정(鄭瓜亭)과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는 정서(鄭敍)의 유배 내용과 정서(鄭敍)가 정과정(鄭瓜亭)의 작사자임을 밝혀주고 있다. 이 정과정(鄭瓜亭)의 고어(古語), 가사의 원상(原狀), 현대어(現代語) 세 가지를 가나다로 제시한다.

{악학궤범}

(전공) 내님믈 그리 와 우니다니
(주공) 산졉동새난이슷폁요이다
(후공) 어니시며거츠르신?아으
(부엽) 殘月曉星이아?시리이다
(대엽) 넉시라도님은한?? 녀져라아으
(부엽)벼기더시니위러시니잇가
(이엽) 過도허믈도 千萬업소이다
(삼엽)?힛마러신뎌
(사엽) 꿉읏븐뎌아으
(부엽) 니미나?폁마니믁시니잇가
(오엽) 아소님하도람드으샤괴오쇼셔

정무용(鄭武龍)

(전공) 내님믈그리 와 우니다니
(주공) 山졉동새난이슷폁요이다
(후공) 어니시며거츠르신?
(부엽) 아으殘月曉星이아?시리이다
(대엽) 넉시라도님은한?? 녀져라
(부엽)아으벼기더시니위러시니잇가
(이엽) 過도허믈도千萬업소이다
(삼엽)?힛마러신뎌
(사엽) 꿉읏븐뎌
(부엽) 아으니미나?폁마니믁시니잇가
(오엽) 아으아소님하도람드으샤괴오쇼셔

 

정무용(鄭武龍)

내가 임을 그리워 울고 지냈으니
산접동새와 나는 비슷합니다.
(님이 저를 벌하심이) 잘못이며 경솔했던 것을
아으 잔월효성이 알 터입니다
넋이라도 님께서는 같은 곳에 가고 싶어라 하셨지요
(그렇게) 우기시던 분이 누구였습니까?
아으 과도 허물고 천만 없습니다.
온통 (조작의) 말뿐입니다.
사라지고 싶을 뿐이옵니다.

정과정(鄭瓜亭) 내용을 ①∼⑫까지 주를 달아 이해를 돕고자 한다.

① 님 : 의종을 가리킨다. 혹자는 의종 축출 이후 왕위를 계승한 의종의 둘째 동생 명종을 일컫는다고 하나 의종쪽이 옳은 듯 하다.

② 접동새 : 접동새는 계모에게 구박받던 처녀가 죽어 환생한 새로써 소쩍새의 북한말이다. 옛날에 아들 아홉과 고명딸 하나를 낳은 부인이 죽게되자 후처로 들어온 계모가 전 부인 소생 고명딸을 몹시 미워하여 늘 구박하였다고 한다. 처녀가 된 고명딸은 혼기가 되어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시집갈 혼수를 장만해 놓고 계모의 구박을 못 이겨 죽고 말았다. 이렇게 죽은 처녀는 접동새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오라비와 남동생들이 슬퍼서 누이동생(또는 누나)의 혼수를 마당에서 태우는데 계모가 이를 너무 아까워하며 태우지 못하게 하자 이들은 격분하여 그 계모를 불 속에 밀어 넣어 계모가 불에 타 죽게 되고 영혼은 까마귀가 되었다고 한다. 접동새가 된 처녀는 까마귀가 무서워 밝은 낮에는 활동하지 못하고 밤이 되면 오라비와 남동생들을 찾아와 슬피 울었다고 한다.

정서(鄭敍)도 이 접동새와 같은 한을 안고 밤이 되면 억울한 누명을 쓴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하며 슬퍼게 운다고 하여 비극적인 정서를 환기하는 그런 대목이다.

접동새는 천연기념물 제324호이다. 접동새는 올빼미목 올빼미과의 새로 남한에서는 소쩍새(학명 Otus scops, 초명, Scops Owl)라 한다.(3-6) 형태는 암수가 동일하며 갈색형과 적색형이 있다. 눈은 황색이고 몸 길이는 약 20㎝이다. 숲 속 나무 구멍에 집을 짓고 살며 4-5개 의 알을 낳아 약 25일간 알을 품고, 새끼를 키우는 기간은 21일이고 밤에는 수컷이 새끼와 암컷에게 먹이를 먹인다. 습성은 우리 나라 전역에서 흔하게 번식하는 여름 철새로 낮에는 숲에서 휴식하고 주로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 조류인데 주로 5-6월에 소쩍새의 울음을 들을 수 있다. 먹이는 주로 곤충류 거미류를 먹는다. 이 소쩍새는 시베리아쪽 아무르강 유역 사할린 만주 우수리 중국 북부 한국 등지에 분포한다. 소쩍새는 접동새의 슬픈 설화와 달리 우리에게


(3-6)접동새(소쩍새)

그 해 풍 흉년을 예고하는 새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솟적"하고 울면 흉년을 예고하고 "솟적다"하고 울면 솟이 작으면 큰 솟을 준비하라는 뜻으로 풍년을 예고한다고 한다.

③ 난 이슷폁요이다

(산 접동새와)나는 비슷합니다

④ 아니시며 거츠르신?

이 뜻은 전하(의종)께서 참소인의 말을 듣고 신을 귀양보낸 일이 잘못이며 경솔했습니다.

⑤ 잔월효성이아?시리이다

잔월효성은 글자 그대로 날이 밝을때까지 남아 있는 달과 새벽에 보이는 샛별이란 뜻이므로 정서(鄭敍) 자신이 결코 의종을 제거하려는 반역 의도가 없었음을 하늘에 떠 있는 달과 샛별이 깨어 있어 깜깜한 밤에 저지르기 쉬운 인간의 죄상을 감시하듯이 정서의 행동과 양심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낱낱이 감시하였으므로 정서 자신에게 어떤 혐의도 없음을 알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⑥ 한??녀져라아으

넋이라고 님께서는 같은 곳에 가고 싶어라 하셨지요

⑦ 벼기시더니 : 우기시더니

⑧ ?힛마리신뎌 : 온통 (조작의) 말뿐입니다

?힛+말+시더+遁뎌

?힛 : 경상도 방언에 '죄다', '모두'를 '말큰', '말키'로 사용하고

말:언(言)

시더 : 서술격 조사와 높임선어말 어미로써 '이시'

遁뎌 : 감탄 종지형

⑨ 꿉읏븐뎌 : 죽고만싶도다, 사라지고 싶을 뿐입니다

⑩ 도람 : 다시

⑪ 드르샤 : 들으시어

⑫ 괴오쇼서 : 사랑하옵소서


4) 무신난에 의한 의종폐위와 정서의 개경환향

17대 인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18대 의종은 의종 5년에 이모부인 정서를 동래로 유배보내면서 곧 소환하겠다고 언약하였으나 오히려 의종 11년(1157)에는 본향 동래에서 외지인 거제도로 이배시켜 1170년 무신난으로 의종이 폐위될 때까지 거의 20년간 유배생활로 묶었다. 정서는 무신난 덕택으로 문신이면서 오히려 유배생활에서 풀리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의종이 재위기간 동안 누정 사찰 별궁 등 놀이시설을 짓고 신하들과 격구놀이를 즐기고 문신들과 술놀이판을 벌릴 때 무신들은 이들을 보호하는 호위병 노릇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17대 인종 때의 이자겸난(1127)과 묘청난(1135)에서 보듯이 문벌귀족의 성장이 왕권의 불안을 가져왔고 이로 인하여 국왕 측근에 밀착된 문무세력이 등장하여 무신란 배경이 되었다. 더구나 무신들은 문신에게 군사지휘권을 뺏기고 2품 이상으로의 승진이 제한되고 직업군인에게 주는 군인전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의종24년(1170) 8월 의종과 문신들이 보현원에서 무신들을 불러내어 수박희라는 경기를 벌렸는데 수박희 경기의 패자인 이소응 대장을 젊은 문신 한뢰가 빰을 쳐 댓돌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수모를 당하자 격분한 무신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쿠테타를 일으켜 의종을 폐위하고 9월 2일 의종의 둘째 동생을 세워 왕을 삼으니 이가 19대 명종(1170-1197)이다. 이때 의종은 거제현으로 태자는 진도현으로 유배시켰다.

명종은 10월 4일에 정서와 정서의 매형 김이영 이작승을 개경으로 소환하였고 모두 복직해 주고 직전도 지급하였다고 한다. 정서의 큰 매형 최유청은 이미 제3장 1-2)-(7)-④에서 언급한 바 같이 무신난이 발생해서 문신이 모두 주살되어도 무신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문신 최유청은 무신들의 보호로 목숨을 부지하고 그 인척들도 구제하였다. 그러나 정서는 소환된 후 활동이 전혀 없고 그 행적이 모호한 것을 보아 명종2년(1171) 무렵이나 매형 최유청이 사망한 1174년 이전까지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크나 그 최후 몰년은 확실하지 않다.

출처 : 사랑과 용서
글쓴이 : 망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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