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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조선통신사’ 실체 고민한 일본인…갈등 풀려다 양국 모두에 ‘미운털’

김시덕의 명저로 읽는 일본의 쟁점 

(8)‘조선통신사’ 실체 고민한 일본인…갈등 풀려다 양국 모두에 ‘미운털’

입력 : 2020.02.03 06:00

김시덕 | 문헌학자

아메노모리 호슈 ‘한 경계인의 고독과 중얼거림’

일본 에도시대 후기 쓰인 <에혼타이코키(繪本太閤記)>에 담긴 교토의 귀무덤(이총·耳塚)을 참배하는 조선통신사들의 모습(위 사진). 당시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이 조선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일종의 상징으로 조선통신사 일행의 귀무덤 참배를 요구했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자신의 <교린제성>이란 책에서 이를 “일본이 학문도 없고 의리도 없음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라고 탄식했다. 또 다른 일본 고문서 속 조선통신사(아래 사진 오른쪽 삽화)의 모습. 김시덕 제공

2017년 2월, 구마모토에 있었다. 한 해 전인 2016년 4월14일 발생한 지진에 따른 피해가 아직 수습되지 않은 구마모토 시내는 어수선했다. 1400년대 후반에 세워진 구마모토성도 2016년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여러 차례 개증축된 성벽들 가운데, 1592~1598년 조선 침략 당시 선봉대를 이끈 가토 기요마사가 이 지역을 다스릴 때 건설한 부분만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해 화제가 됐다. 가토 기요마사는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의 원흉으로 주로 인식되지만, 일본에서는 건설의 달인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무너진 구마모토 성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가토 기요마사 동상을 본 뒤, 구마모토 시내의 유명한 고서점인 ‘조분도카와시마서점(舒文堂河島書店)’에 들렀다. 고문헌이 일반적으로 온라인에서 거래되는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일본은 아직 오프라인에서의 고문헌 거래가 활발하다. 물론 일본에도 ‘니혼노후루혼야(日本の古本屋)’ 같은 고문헌 거래 사이트가 있어 온라인 거래가 가능하고, 일본판 이베이라고 할 야후 저팬 옥션에는 지방 구석구석의 희귀한 고문헌이 등록된다.

나같이 고문헌을 다루는 사람들은 ‘니혼노후루혼야’나 야후 저팬 옥션 같은 온라인 사이트를 평소 부지런히 살피는 한편, 어떤 지역에 가면 유명한 고서점에 반드시 들른다. 미처 온라인에 등록돼 있지 않은 고문헌이 서점에 있는 경우도 있고, 고서점 주인과 안면을 트게 되면 훗날 내게 필요한 고문헌이 나타났을 때 미리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도 1877년 개업한 조분도카와시마서점에 들렀다.

한국에서 온 고문헌 연구자라고 밝히자, 주인이 가게 안쪽에서 사과박스 한 개 분량의 고문서 뭉텅이를 가져왔다. 조선시대 후기 도쿠가와 일본에 파견한 조선통신사에 관계된 고문서들인데 30만엔에 판매하겠다고 했다. 내용을 살펴보니, 통신사 일행이 쓰시마에서 에도(오늘날의 도쿄)까지 가는 도중에 통과하는 지역에서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인력을 동원하면서 작성된 고문서들이었다. 나는 조선통신사에 대한 고문헌 연구를 주력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개인적으로 구입하기에는 저어됐고, 조선의 유명한 인물이 썼거나 그들에 대한 언급이 있는 문서도 포함돼 있지 않은 고문서 뭉텅이에 관심을 가질 만한 한국 측 기관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제안을 거절하고는 내 관심사에 맞는 다른 고문헌을 구입하고 가게에서 나왔지만,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고문서 뭉텅이는 계속해서 기억에 남아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일본 에도시대 주자학자이자 외교관인 아메노모리 호슈(왼쪽 사진)와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그의 <다와레구사(たはれぐさ)>. 호슈회 홈페이지

2017년 조선 후기 통신사 일행에 관계된 몇몇 문헌들이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이라는 타이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었다. 오늘 소개할 쓰시마의 주자학자이자 통역관 아메노모리 호슈와 관계된 문헌들도 이에 포함돼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고문서 뭉텅이는 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런 고문헌들이 아직 일본 구석구석에서 발굴되지 않았거나 연구되지 않은 상태로 무수히 존재한다. 단순히 조선 측 사절단에 포함된 유명인사와 일본 측의 저명한 인물들이 관여된 몇몇 문헌들만이 ‘조선통신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지난 십여년간 ‘조선통신사’에 대해 몇몇 학회에서 발표하거나 다른 발표자에 대한 토론자 역할을 맡아왔다. 질의응답 시간마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조선통신사에 대한 기록’이 언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될 것인지, 그리고 자기 집안·지역과 관련된 특정한 문헌도 세계유산에 등록될 가치가 있지 않은지 질문하는 청중들이 있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 자리에서 굳이 발언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아직 조선통신사에 대한 고문헌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올림픽 경기하듯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시키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생각했다.

조선·일본, 조선통신사 ‘입장차’
조선은 ‘야만인 계도’ 의미 부여
일엔 전쟁승리에 온 ‘조공사절’
12번 만남에 결론 없이 ‘동상이몽’

‘조선통신사에 대한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너무 서둘러 등록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조선통신사에 대한 수많은 고문헌이 전수조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부만 ‘조선통신사에 대한 기록’에 포함돼 버리는 바람에, 관련 고문헌들 사이에 어떤 것은 더욱 가치 있고 어떤 것은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므로 연구·수집될 필요가 덜하다는 오해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다. 조선통신사를 기리는 것이 한국과 일본의 우호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고 있다. 당장 지난해 여름 한·일관계가 냉각되었을 때,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연하는 행사가 갈등 해소에 큰 역할을 한 것 같지 않다.

조선통신사 행렬이 현대 한·일 갈등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17~19세기 조선통신사 파견도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근본적인 오해와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은 통신사 일행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조선 지배집단은 일본이 또다시 조선을 침략할 기미가 있는지 감시하고, 야만인을 주자학으로 계도한다는 의미를 사절단에 부여했다. 한편 일본 지배집단은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조선 측이 조공사절로서 통신사를 파견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조선, 류큐(오키나와), 네덜란드, 아이누 등 4개 외국 세력이 일본에 조공한다는 세계관을 그들은 갖고 있었다.

물론 조선통신사는 한국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에도시대의 한류도 아니었고, 조공사절단도 아니었다. 이처럼 조선통신사에 대한 두 집단의 생각이 너무나도 다르다보니, 조선통신사와 일본 지배집단의 만남은 대체로 동상이몽으로 끝났다. 열두 차례에 걸친 조선통신사 파견에 대한 주요 기록을 꼼꼼히 살핀 나의 지인 연구자는 씁쓸해하면서, 두 집단 소속원들은 결국 한번도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 문제 고민한 아메노모리 호슈
나가사키서 청나라 상인에 중국어
부산 왜관서 5년간 조선어 배워
국제적 감각 지닌 인물로 성장

조선통신사의 이러한 실체에 대해 당시 일본 측에서 가장 고민한 사람이, 오늘 소개할 아메노모리 호슈였다. 일본이라는 국가를 상징하는 덴노(天皇)가 거주하는 교토 인근에서 나고 자란 아메노모리 호슈는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지니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나가사키에서 청나라 상인들로부터 직접 중국어를 배웠고, 부산 왜관에서는 5년에 걸쳐 조선어를 배우면서 국제 감각을 익혔다. “뜨거운 여름날에 (초량왜관 옆) 사카노시타에서 귀가해서, 그날 배운 조선말을 베끼고 있을 때면 눈앞이 어질어질해지기도 했지만, 목숨을 5년 줄이겠다고 생각하면 이루지 못할 도리야 있겠는가 하고 밤낮없이 쉼없이 노력하던 일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이처럼 목숨을 깎는다는 각오로 외국어를 배운 결과, 그는 이 시기 동중국해 주변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국제적 감각을 지닌 인물로 거듭났다. 아메노모리 호슈의 인간됨과 그가 남긴 작품들의 가치에 대해 1798년 출판된 <속근세기인전(續近世畸人傳)>에서는 이렇게 논평한다.

그는 어학을 잘하여 중국어와 한국어에 모두 능통했다. 한국인이 이분과 이야기하며 “공은 세 나라 말 가운데 특히 일본어를 잘한다”라고 말했으니, 이는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이로써 그의 외국어가 그 나라 사람을 방불케 할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독실하며 현명한 유학자였으므로 그가 남긴 말은 정치에 도움이 되는 바가 많다. 근년에 간행된 <귤창다화(橘窓茶話)>와 <다와레구사(たはれぐさ)>(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한 경계인의 고독과 중얼거림>이다) 등은 한때의 무료함을 달래는 수필이기는 해도 이를 통하여 그의 박학다식함을 알 수 있다.

 

반면 1748년 통신사 일행에 포함됐던 조명채는 <봉사일본시문견록>에서 “시문(詩文)에 능하고 3국의 말을 잘한다 … 위인이 음험하니 섬 안의 사람이 매우 미워하였다”라는 박한 평가를 하고 있다. 조선 측으로서는 일본 측 통역관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한 아메노모리 호슈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을 터이다.

일본이 군사적으로 조선보다 우위에 있다는 상징으로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통신사 일행에게 교토의 귀무덤을 참배시키도록 아메노모리 호슈에게 명령했고, 그 의도를 꿰뚫어보고 참배를 거부하는 조선 측을 설득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 뒤, 아메노모리 호슈는 “이는 도요토미 가문이 명분없는 전쟁을 일으켜 양국의 무수한 인민을 살해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총(耳塚) 방문은 그 포악함을 거듭 드러내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일본의 화려함을 표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이 학문도 없고 의리도 없음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라고 <교린제성>이라는 책에서 한탄했다.

일본·조선·청 가리지 않고 비평조선서 “섬 안서 미움” 박한 평가일서는 좋은 평 없는 잊혀진 존재‘한 경계인…’ 소리 소문 없이 절판

이렇다보니 그는 최근까지 일본에서도 그닥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의 선배이자 조선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보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지금까지도 석학으로 일본에서 그 이름이 널리 기억되는 반면,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일본을 방문해 행한 연설에서 언급할 때까지 아메노모리 호슈는 일본 일반에서 거의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든 자기 나라를 상대화해 냉정하게 분석하고, 다른 나라의 좋은 점, 나쁜 점을 분명히 분간하는 사람은 인기가 없다. <한 경계인의 고독과 중얼거림>에는 다음에 인용하는 것처럼 일본·조선·청 세 나라를 모두 냉정하게 비평하는 구절이 많이 보인다.

일본에는 기록이 적다. 무릇 기록이란 후세의 귀감과 경계가 되도록 치란흥망의 결말을 담은 것을 높이 사는 법이며, 쓸데없는 전쟁 이야기만 적어대는 것은 실로 종이 낭비라 할 것이다.

 

중국은 이 세상 많은 나라 가운데 인의예악(仁義禮樂)이 일어난 성인의 나라이므로 “가운데 나라(中國)”라 칭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도 있는 반면, “자기 나라에서 보면 그 어디가 ‘가운데 나라(中國)’가 아니겠는가”라는 주장도 있다. 중국을 숭배하는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오랑캐가 아니라며 “동쪽 중화(東華)”라고 칭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오랑캐라 부르면 기분 나빠한다.

동서남북 각국의 언어는 모두 목적어가 먼저 나오고 동사가 나중에 나오는데, 중국어만 동사가 먼저 나오고 목적어가 나중에 나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한국어도 북로(北虜)·남만(南蠻)·서역(西域)의 언어와 다를 바 없다(목적어가 먼저 나오고 동사가 나중에 나온다)는 말에, 한시중(韓時中)이라는 한국인이 “그러니 우리 한국도 ‘오랑캐이(夷)’라는 글자를 면키 어렵다”고 답했다.

 

동중국해 연안 지역 시민들의 지적 성숙도가 높아진 오늘날에야 받아들여질 만한 이런 발언들을 300년 전에 했으니, 그가 조선과 일본에서 모두 외면받아 섬에서 고독하게 삶을 마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한 경계인의 고독과 중얼거림>도 번역서가 나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소문 없이 절판되어 버렸다. 절판된 뒤로 가끔씩, 일년에 한두 번씩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본 분들이 공감의 메시지를 온라인에 올려주신 것을 보고 감동받고는 한다. 만약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아메노모리 호슈의 영혼이 나의 번역서를 그런 마음으로 읽어주면 좋겠다.

 

■ 필자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문헌학자이자 인문저술가이다. 2010년 일본에서 간행한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가사마쇼인)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2011년 2인 공저 <히데요시의 대외 전쟁>(가사마쇼인)은 일본 도서관협회 추천도서로 선정됐다. 10여종의 단행본, 공저, 번역서 등을 출간했다.

 

출처; [김시덕의 명저로 읽는 일본의 쟁점](8)‘조선통신사’ 실체 고민한 일본인…갈등 풀려다 양국 모두에 ‘미운털’ - 경향신문 (khan.co.kr)

 

[김시덕의 명저로 읽는 일본의 쟁점](8)‘조선통신사’ 실체 고민한 일본인…갈등 풀려다 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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