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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조선여인의 멋-머리단장, 노리개, 장신구

조선 여인의 멋-머리단장, 노리개, 장신구

 

1. 조선여인의 머리단장

김여유 2022. 10. 17. 21:13

예로부터 머리단장은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수식(首飾)은 얼굴과 가장 가까운 부분으로 눈에 가장 먼저 띄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머리를 꾸미는 장신구의 성격을 뛰어넘어 상징성과 실용성, 아름다움을 두루 갖춰 시대를 반영하는 미의 산물로 여겨졌다. 또한 유교적 규범을 지키던 조선시대에는 예교에 벗어나지 않으면서 치장할 수 있던 머리장 신구가 유일한 장식이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인들의 섬세하고 여유로운 미의식은 머리장신구를 통해 자신의 미를 표현하였다. 한편 머리장식이 발달하면서 조선시대의 다채로운 장신구의 특성을 이루었고 머리모양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기본 머리모양은 기혼녀의 얹은머리, 쪽진머리, 미혼녀는 땋은머리였다. 이외에 예장용 머리모양에는 큰머리, 어여머리, 대수(大首), 첩지머리, 새앙머리 등이 있었다. 이 중 얹은머리는 고대사회부터 이어져 왔으며 조선 중기에 이르면 가체(加髢)가 성행하게 된다. 당시 가체는 비정상적으로 크고 무거워 사치의 근원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자 영조 32년(1756) 가체 금지령이 내려진다. 금지령의 내용은 쪽진머리를 장려하고 가체의 대용으로 족두리를 사용하게 한 것이다.

 

이는 정조 재위 중에는 완전히 실시되지 못하였고 순조 중엽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쪽진머리에 가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쪽이 뒤통수에 있던 것이 점차 내려와 말엽에는 저고리 위에 있게 되었으며, 그 후 개화기에 이르면 다시 머리 뒷부분으로 올라가 지금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머리장신구에는 비녀, 빗치개, 뒤꽂이, 첩지, 떨잠, 댕기등이 있다. 비녀는 조선여인의 표상이자 다채로운 조형 양식을 보여주는 훌륭한 공예품으로 머리를 수발(修髮)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나 장식의 역할도 겸하였다. 얹은머리에도 비녀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쪽진머리가 장려되면서 비녀의 사용도 일반화되었고 가체에 치중하던 사치풍조는 다시 비녀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비녀는 계절과 옷의 색깔에 따라 색채와 의장을 조화시키며 그 모양이 다양해졌다. 당시 존비 상하의 차별이 심하였던 만큼 상류층과 서민층에서 사용하던 비녀의 종류와 재료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전 계층이 필수적으로 착용하던 장신구이기도 하다.

 

쪽진머리 뒤에 덧꽂는 비녀 이외의 수식품인 뒤꽂이는 실용성을 겸하여 기능과 모양이 독특하였다. 머리에 꽂히는 첨부와 첨부 위에 여러 형태로 만들어 붙이는 장식부가 있는데, 사용자의 신분과 재력에 따라 달리 사용하였다고 한다. 첩지와 떨잠의 경우는 상류층 혹은 궁중에서 그 사용이 제한되었다. 첩지는 영조 때 발제 개혁 이후 생겨난 특수한 수식품의 하나로 주로 궁중에서 사용하였다. 떨잠은 왕비를 비롯한 상류층에서 큰머리나 어여머리의 중심과 양편에 하나씩 꽂았던 장식품으로 갖가지 기교를 다한 아름다운 수식 중 하나이다. 댕기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주로 미혼녀들이 사용하였고, 연령 또는 용도에 따라 다양한 쓰임이 있었다. 머리쓰개는 적관, 화관, 족두리를 비롯하여 머리에 쓰는 것과 너울, 쓰개치마 등 얼굴을 가리기 위한 것까지 포함한다. 이렇게 ‘옛 여인의 장신구’를 짚어보며 알 수 있듯 우리 고유의 미는 세계 어느 곳의 미와 비교하여도 결코 모자라지 않으며, 그 시절 여인들의 미적 수준에 감탄하게 된다. 앞으로 우리 문화를 지키고 이끌어갈 젊은이들에게 좀 더 깊이 있는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길 기대하며, 또한 이를 밑거름으로 온전하게 보전하고 더 발전적으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작은 바람이다.

 

족두리
족두리는 본래 몽고에서 양반 부녀자가 외출할 때 쓰던 모자로 고려 후기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궁중에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의식 때 대례복인 원삼이나 활옷에 갖추어 쓰던 관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궁중양식이었으며 말기에는 일반 상민이나 천민에 퍼져 혼례복과 함께 착용하였다. 일반적인 형태로 비단 여섯 쪽을 이어 꿰매고 안에 솜을 넣어 겉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민족두리, 상부나 중앙에 칠보나 옥, 밀화 등을 장식한 꾸밈족두리, 초상 때 사용한 흰족두리 등으로 구분된다.


화관
가장 화려한 여성의 예복용 관모로 신라 문무왕 때 전래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크기가 작아져 머리에 쓰던 관모라기보다는 미적 장식품으로 얹는 수식이 되었다. 가체금지령 이후 화관과 족두리의 사용을 장려하면서 일반화되었고, 오색 구슬로 꽃모양을 두르고 떨나비를 달았으며 활옷이나 당의를 입을 때 썼다.


빗치개
빗치개는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어 조형적인 형태는 비교적 단순하며, 표면에 음각의 장식을 하여 사용하였다. 가르마를 탈 때뿐 아니라 빗에 낀 때를 뺄 때에도 자주 사용하였고, 기름병 안에 넣어 기름을 찍어 바르는 데에도 사용하였다. 재료인 백동(白銅)은 합금의 비율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나 은과 비슷한 색깔을 지닌 금속으로 조선시대 생활용기 소재로 서민들에게 널리 사용되었다.


뒤꽂이
뒤꽂이는 쪽진머리 뒤에 꽂는 비녀 이외의 수식품으로서 장식성과 함께 실용성을 겸하였다. 머리에 꽂았을 때 보이는 부분을 장식부라고 하며 꽂히는 부분을 첩부라고 하는데, 장식부에 있는 문양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뒤꽂이의 크기와 소재로 사용자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으며, 가체가 금지되면서 더욱 발달하였다. 단순히 장식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일반 뒤꽂이와는 달리 장식성과 함께 실용성을 겸비한 뒤꽂이로 빗치개 뒤꽂이, 귀이개 뒤꽂이, 말뚝 뒤꽂이 등이 있다. 주로 은이나 동으로 몸체를 만들고 국화나 나비, 천도, 연꽃, 봉황 등을 장식하여 치장의 효과를 높였다. 또한 옥, 비취, 산호, 파란 등의 재료를 사용해서 화려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뒤꽂이는 비녀와 함께 가체금지령 이후 발달한 장식품으로서 금속공예의 미를 한껏 응용한 장식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글˚김명희 (보나장신구박물관 관장)

 

출처 : 월간문화재 2013년 09월

 

 

매듭

2. 몸단장의 멋, 노리개

김여유 2022. 10. 17. 21:11

노리개는 한복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 고유의 장신구(裝身具)이다. 몸단장에 멋으로 애용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체와 매듭, 술의 비례가 우리 한복의 저고리, 치마의 비례와 비슷하여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노리개가 있기 전 삼국시대에는 저고리의 상의가 길어 허리띠를 두르고 그 부분에 여러 종류의 장식품을 달았는데 이것을 요패(腰佩)라 하였다. 신라에서 사용되던 요패는 고려말·조선초에 와서 저고리 길이가 짧아짐에 따라 노리개의 형태로 변형된 것으로 보이며, 장식을 매듭에 걸어 저고리의 고름이나 치마 허리에 착용하였다. 계절이나 의복 착용자에 따라 노리개의 종류를 고려했으며, 재료의 촉감에 따라 시원한 촉감을 주는 것은 여름에 착용하였고, 두텁고 따뜻한 촉감을 주는 것은 겨울에 착용하였다. 노리개는 일개 사대부의 부의 상징이기도 하였고, 그 아름다움은 섬세하고 화려했다. 주체의 재료에 따른 만드는 기법 또한 다양하여 금속과 보패류(寶貝類)에는 각 재료의 특징과 파란 기법을 사용하여 다양한 색으로 화려함을 더 했고, 은 세공품에는 입체감을 가미하여 색채의 장식이 풍부하였다. 단작노리개는 평상시에 달았으며, 삼작노리개의 경우 왕의 탄신일 등의 궁중행사나 집안의 경사가 있을 시에 주로 착용하였다. 오작과 칠작 노리개는 후손에게 물려주어 대대로 집안의 가풍을 전하는 귀중품이었으며 특별한 의례에 예물이나 선물로 교환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계절 또는 의상의 종류를 고려하여 멋을 즐길 뿐만 아니라 실용성과 상징성에 기반을 두어 다양한 제작 기법으로 표현된 노리개는 옛 여인들의 정성과 염원, 생활상이 반영되어 있는 한민족 고유의 감성을 느끼게 하는 장신구의 하나였다

 

노리개의 구성
노리개는 장식을 매듭으로 엮어 옷에 착용하기 위한 것으로 그 구성은 장식물인 주체와 주체를 걸고 있는 끈목, 매듭의 긴 끈, 그리고 술이다. 매듭, 끈목, 술의 재료로는 명주실이나 무명실이 사용되었으며 노리개의 주체에 따라 그 크기, 형태 색을 달리 하여 핵심이 되는 주체의 아름다움을 보다 더 돋보이게 장식해 준다. 주체는 노리개의 주가 되는 부분으로 그 재료나 모양이 화려하고 다양했으며, 노리개의 명칭 역시 주체의 재질과 기법, 형상에 따라 결정된다. 노리개의 핵심 장식물인 주체는 금(金), 은(銀)이나 옥(玉) 혹은, 각종 보석(寶石)으로 만든 장식물을 통칭하지만, 비단에 곱게 수를 놓아 차기도 했으며 신분의 격차에 따라 가난한 일반 백성은 색색의 헝겊을 이어 바늘집, 고추, 괴불 등의 자수 장식들을 만들어 주체로 삼아 차고 다녔다. 매듭은 주체를 중심으로 상하에 있으며 그 모양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노리개에 사용된 매듭은 도래매듭, 생쪽매듭, 나비매듭, 국화매듭, 장고매듭, 병아리매듭 등이 있다. 술은 유소(流蘇)라고도 불리는데 노리개의 끝부분에 달려 있다. 술의 종류로는 만들어진 방법에 따라 봉술, 딸기술, 낙지발술(끈술)이 있고 술 역시 주체에 따라 그것에 맞추어 엮어졌다.

 

봉술은 실을 둥근 모양으로 금사(金絲)나 다른 색의 실로 묶어 정리한 것이고, 딸기술은 봉술과 비슷하나 윗부분을 직조하듯 엮은 것이며, 낙지발술은 매듭을 엮은 끈목으로 술을 만든 것이다. 예를 들어 삼작노리개의 경우 매듭, 술, 끈목의 종류는 통일 시키지만 색은 서로 다른 것을 사용하였으며 홍(紅), 남(藍), 황(黃)의 삼원색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분홍, 연두, 보라, 자주, 옥색 등도 많이 사용되었다. 끈목〔다회(多繪)〕은 매듭과 술, 주체를 연결하는 부분으로 노리개를 하나로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한다. 띠 돈은 노리개의 최상단에 위치한 일종의 걸개 장식으로 여러 개의 노리개를 걸어 연결시켜 주는 부분이며 몇 개의 끈목을 한곳에 정리를 해줌으로써 균형적으로 옷에 꽂히도록 한다. 주재료로는 금, 은, 비취옥, 백옥, 금패, 산호 등이 사용되었고, 그 형태 또한 사각형, 원형, 나비형, 화형, 사엽형으로 다양하였으며 꽃, 용, 박쥐, 불로초, 쌍희자문 등의 문양이 장식되어 아름다움에 상징적 의미까지 더해졌다. 주로 실용적인 용도의 단작노리개가 아닌 혼례(婚禮) 등의 특별한 의례(儀禮)시, 삼작노리개를 착용할 때 사용되었다.

 

<노리개의 종류>
1. 실용적 노리개

바늘집 노리개 - 바늘을 보관하기 위한 바느질 용구로 바늘이 녹슬지 않게 하기 위해 바늘집 속에 머리카락이나 분가루를 넣고 사용한 노리개이다. 바늘집 노리개는 천과 금속, 가죽, 종이나 백동의 재료로 만들어졌다. 천으로 만든 것은 천 조각 위에 꽃이나 봉황, 나비 등의 무늬를 수놓은 것이 많으며 금속으로 만든 것은 파란을 입혀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침통 노리개 - 침을 넣고 차고 다니는 것으로 응급 시에 사용되었다.


장도 노리개 - 장도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자그마한 칼로 일상생활에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몸을 보호하기 위한 호신용으로도 이용되었다. 장도는 가격이 비싸 부유층에서 주로 쓰였고 삼작노리개의 한 주체로 삼아 착용하기도 했으나 단작노리개로 꾸미어 겉에 보이지 않게 착용되기도 하였다.


향 노리개 - 여인들이 사향 같은 것을 지님으로 장식물에서 은근한 향이 풍기기도 했고 응급 시 구급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2. 장식적 노리개
수 노리개 - 직물을 재료로 하는 것이기에 서민들에게 많이 애용되었다. 여인들이 솜씨를 발휘하여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수를 놓고 봉술, 딸기술을 드리운 우아한 느낌의 노리개로 섬세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방아다리 노리개 - 방아다리는 방아를 찧는 여성 소유의 농사기구로 이를 노리개에 옮긴 것은 노리개처럼 일을 사랑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귀이개 두 개로 짝지어져 있으며 길상을 나타낸다.


호랑이 발톱 노리개 - 호랑이는 용과 더불어 옛날부터 신적인 존재로 날카롭고 예리한 부분인 발톱은 모든 나쁜 일을 막아주며 악귀를 쫓아주는 힘으로 여겼다. 호랑이 발톱은 다른 주체보다 구하기 어렵고 귀하여 그 모양을 다른 재료로 만들어 노리개의 주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투호 노리개 - 투호는 궁중에서 왕족과 궁녀들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단지 안에 화살을 넣는 놀이로 그 단지 안에 액(厄)을 담아 쫓는다는 의미를 부여하여 노리개 장식에 많이 사용되었다.


삼천주 노리개 - 불교에서 삼천대천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큰 구슬 3개를 꿰어 끈술에 단 노리개이다. 주로 왕비만 착용할 수 있었다는 삼천주는 기녀들이 은밀히 착용하기도 하였다.

 

글˚김명희 (보나장신구박물관 관장)

 

출처 : 월간문화재 2013년 08월

 

 

매듭

3. 여인의 미덕, 장신구

김여유 2022. 10. 17. 21:04

한국이 가진 미에 대한 애착은 늘 주요 관심사이다. 현 시점, 어쩌면 유별날 만큼 겉치레가 심할 정도로 성형이 판치고 유행이 넘쳐난다. 내면보다 외면에 더 고집하는 현상으로 인해 우리 모두 경각심을 가져야 함은 당연지사가 되었다. 미를 의학기술에 의존하는 현재와 다르게 과거에는 장신구의 기능이 한층 부각되고 가정의 평안을 담은 장신구를 통해 자신의 미를 발휘하곤 했다. 이렇게 옷이나 몸에 치장하는 장신구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던 구석기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랑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구석기 시대 유적지인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조개를 갈아 만든 팔찌를 장신구의 최초의 흔적으로 삼고 있다. 그 후 삼국시대 왕릉에서 출토된 금, 금동 귀걸이, 유리구슬, 또 고려시대 화려한 문양의 금, 금동, 은제 도금까지 다양한 출토 유물을 통해 시대와 재료에 따라 여러 기법을 구사한 우리 선조의 우수한 미적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의 복식제도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장신구의 모양과 형태가 중국 장신구와 상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장신구의 형태나 장신구에 사용된 문양은 그 당시의 문화나 종교의 특성을 보여 주는 중요한 기록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옛 여인들은 가정의 평안을 염원하던 마음을 담아 한 땀 한 땀 바느질하여 여러 수 장식품을 탄생시켰다. 이렇게 탄생한 장신구는, 아름답게 가꾸어 단장한 모습으로 여인의 미덕을 잘 보여 준다. 평상시에는 간소하게 치장하나 연회나 혼례 날을 맞아 좋은 날에는 더욱 곱게 단장하여 잔치를 빛냈다. 여인들의 장신구는 상류층과 기녀들에게만 상용할 수 있었던 용잠, 봉잠, 떨잠, 첩지 외에 일반으로는 노리개와 비녀, 가락지 등이 주를 이루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화사했던 장신구는 어머니에서 딸에게로 물려주는 다소 단절된 문화로, 찾아보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그동안 구하기 어려웠던 귀중한 장신구들을 한데 모아 볼 수 있도록 전시·운영하고 있는 보나장신구박물관을 설립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 관심이 많았던 장신구를 보는 안목을 믿고 장시간 수집한 노력은 장신구 문화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다. 현재 만오천 점의 진귀한 장신구를 소장하고 전시하면서 꾸준히 사랑받는 데에는 그만큼 안목을 요구하는 보기 어려운 유물이라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조선시대 장신구 문화
주로 고분에서 발견된 다양한 장신구들은 우리나라 미술공예사의 시작을 견줄 만한 공예품으로서 화려하고 뛰어난 장신구가 돋보이는 시기였다. 이에 반해 조선시대에는 복식에 대한 제약으로 장신구가 발달하지 못했지만 여인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머리 장식품과 몸의 장식품은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장신구가 상용된 이유로는 유교사상을 들 수 있는데 은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은 사용이 금지되어 발달하지 못한 반면 몸에 치장하는 노리개나 머리장식은 널리 애용되어 조선시대 장신구의 한 특성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시대 장신구들은 재료나 제작 솜씨로 볼 때 왕실의 장인들이 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왕실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의례체제를 정비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그중 세종은 예서 편찬 이전 송나라의 예서 등의 선례를 참조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초기의 관제(官制)가 대체로 고려를 따랐듯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말기의 장신구들은 중국의 당, 송, 명대와 닮아 있다. 실제로 현존하는 중국 역대의 장신구들과 조선시대 장신구는 그 형태나 제작 기법에서 유사한 면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장신구의 재료는 은(銀)이나 백동(白銅) 등으로 도금을 하거나 옥이나 호박, 산호, 마노 등 패물(佩物)노리개를 즐겨 사용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즐길 줄 알며 미를 사랑하는 민족이었다. 장신구의 전통문양의 조형미를 살펴보면 생활미술의 한 부분으로 우리 민족의 미적 정서가 잘 표현되었다. 뚜렷한 개성과 화려한 공예문화를 지니고 있어 우수한 우리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장신구를 되짚어 보면서 선조가 물려준 문화의 우수성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서구의 무분별한 문화적 홍수 속에서 우리의 문화적 자의식을 갖고 또 다른 우수한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신구에 쓰인 다채로운 재료


황금 - 찬란히 빛나는 아침 햇빛이라는 의미를 가진 황금은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발견된 금속이다. 금의 주요 특성으로는 색깔이 변하지 않고 금색 광택을 유지하여 전연성이 풍부하다. 다른 금속과 합금을 만들 수 있고 전기도금도 가능하다. 두께를 얇게 하여 금박을 만들 수 있는데, 얇은 금박을 유리판 사이에 끼어 햇빛을 통과시키면 녹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 옥은 석기시대와 삼국시대에 걸쳐 점차 성행하였다. 옥의 성질을 보면 진품에는 옥색을 띤 여러 종류가 있는데 청색을 띠운 백옥, 조옥, 황옥 등이 있다.


산호 - 산호는 산호충의 연골로 탄산석회가 주성분이며 해저 암초암석 위에서 발육한다. 산호는 산호잠, 삼작노리개, 칠보단장에 들어가고 산호지환 등 여러 가지 장신구의 장식에 쓰인다.


호박 - 호박은 광물성보다는 식물성에 가까운 소나무과의 식물 화석이다. 색은 황색을 나타내고 그 속에 적색, 갈색, 백색을 띨 때도 있다. 투명한 것이 있는 반면에 불투명한 것도 있다.


칠보 - 칠보는 일곱 가지 보물이라는 뜻으로 옛 선조들이 물건에 색상을 넣던 방법 중에 ‘파란’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유약의 색이 파란색인 것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 로마에서 중국을 거쳐 삼국시대에 들어와 조선조에 와서는 황색, 감색, 벽색(파랑과 녹색의 중간색), 보라 계열의 네 가지로 발전하여 비녀 등의 공예품에 널리 사용되었다.


 - 은은 금 다음으로 사랑받았던 재료로 적색 혹은 자색을 띠나 은백색이고 천연색으로 채집되는 은은 회색, 청묵색을 띠고 있다. 은은 산출량이 많은데 특히 비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세공성이 쉽고 아름다운 광택이 유지되면서 전연성도 좋아 칠보공예에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글˚김명희 (보나장신구박물관 관장)

 

출처 : 월간문화재 2013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