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차에서 가족용 SUV까지…43년 '코란도' 진화의 역사
1974년 1세대 코란도© News1
코란도는 젊음의 아이콘으로 큰 인기를 모은 국산 오프로더로 쌍용자동차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차종이다. "한국인은 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한국인을 가슴 뛰게 하며 우리나라 대표 SUV 역할을 했던 코란도는 2005년 9월 단종된 지 5년여만에 제4세대의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 최근 5세대 모델로 거듭났다.
1974년 10월 출시 이후 국내 최장수 모델로 국내 기네스북에 오른 코란도의 역사는 쌍용자동차와 성장사와 궤를 함께한다. 그만큼 코란도는 63년의 자동차 역사를 자랑하는 쌍용차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쌍용차를 SUV 전문 기업으로 발전시킨 대표 차종이기 때문이다.
◇1세대 코란도(1974년 10월~1983년 2월)
쌍용자동차는 1954년 1월 하동환 자동차 제작소로 출발했다. 1967년 5월 신진자동차와 업무제휴를 시작해 1974년 4월 신진지프자동차공업을 합작설립한다. 그해 5월 AMC(American Motors Corporation)와 기술계약 체결을 통해 10월 하드탑, 소프트탑, 픽업 등 다양한 신진지프 모델을 선보였다.
신진지프는 훗날 코란도의 전신으로서 이 땅에 정통 오프로더의 초석이 된다. 1977년 하동환자동차는 동아자동차로, 1981년 신진자동차는 거화로 상호를 변경한다.
1983년 2세대 코란도© News1
◇수출길 튼 2세대 코란도(1983년 3월~1996년 6월)
거화는 1983년 3월 자체 생산하던 지프에 '코란도'라는 새 이름을 붙인다. 코란도는 처음부터 '한국인은 할 수 있다(Korean can do)'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은 아니었다.
당시 코란도는 '한국인의 의지와 힘으로 개발한 차(Korean do it)' '한국땅을 뒤덮는 차(Korean land over)' '한국을 지배하는 차(Korean land dominator)' 등의 뜻으로 작명됐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 표현한 셈이다.
1984년 12월 동아자동차는 거화를 인수하고 85년 8월 부산공장을 지금의 평택공장으로 이전해 코란도를 생산, 일본 등으로 수출하게 된다. 1986년 11월에 쌍용그룹이 동아자동차 경영권을 인수하고 1988년 3월 쌍용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하면서부터 쌍용차는 스테이션웨건형인 코란도훼미리를 출시하는 등 새로운 코란도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96년 3세대 코란도© News1 |
◇벤츠엔진 장착한 3세대 코란도(1996년 7월~2005년 9월)
1993년부터 KJ란 프로젝트로 3년간 개발해 1996년 7월 출시한 신형 코란도는 벤츠 엔진에 독창적인 스타일로 새롭게 변신, 대학생들이 가장 갖고 싶은 차로 각광을 받게 된다. 당시 코란도를 갖고 싶어 쌍용차에 입사했다는 신입사원이 있을 정도로 절대적 인기를 누렸다.
젊은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코란도는 지옥의 랠리라고 불리는 아르헨티나 팜파스 랠리, 멕시코 바하 랠리 등에서 우승하며 성능을 입증했고 한국 산업디자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꾸준하게 인기를 누리며 36만여대가 판매된 코란도는 2005년 9월 단종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며 휴식기에 들어간다.
2011년 4세대 코란도C© News1 |
◇4세대 코란도의 부활: 코란도C(2011년 2월)
새롭게 탄생한 코란도C는 우리나라 SUV의 역사를 이끈 코란도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SUV 역사를 창출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브네임 C에는 '세련된, 귀족적인'을 뜻하는 '클래씨(Classy)'와 '우수한 승차감과 정숙성'의 '컴포터블(Comfortable)', 환경친화성의 '클린(Clean) 등의 의미를 담아 디자인과 엔진에 대한 콘셉트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쌍용차는 2010년 4월 부산모터쇼 첫 공개된 양산형 코란도 C 콘셉트카를 선보이며 부활의 신호탄을 쐈다. 이후 페이스 리프트를 거친 뉴코란도 C(New Korando C)는 프리미엄 ULV(Urban Leisure Vehicle, 도시형 레저 차량)를 개발 콘셉트로 내외관을 새롭게 스타일링했다. 인스트루먼트 패널을 비롯한 운전자 공간을 신차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프로젝션 헤드램프, 통풍시트와 같은 고급 편의사양을 신규 적용하는 등 상품성을 동급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2017년 5세대 뉴스타일 코란도C© News1 |
◇가족을 위한 SUV 5세대 코란도C(2017년 1월)
5세대 코란도C는 외관과 파워트레인을 한번에 교체하는 완성차 업체들의 풀체인지 관행을 깼다. 2015년 당시 국내 디젤차의 배출가스 기준이 유로5에서 유로6로 강화되면서 당시 풀체인지 계획이 없었던 4세대 코란도C는 유로6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외관은 그대로 둔 채 엔진만 2.0에서 2.2 LET로 업그레이드 됐다.
이달 초 출시된 뉴스타일 코란도C는 엔진을 업그레이드한 4.5세대 모델에 내외관 디자인과 편의·안전사양을 끌어올린, 진정한 5세대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코란도는 5번의 새대를 거치면서 대학생들의 로망에서 가족이 편안하게 탈 수 있는 차로 변모했다. 쌍용차 라인업 중 가장 막내였던 코란도 밑에 티볼리라는 동생이 생기면서 포지셔닝을 달리 한 것이다.
kirocker@
기사 출처: 지프차에서 가족용 SUV까지…43년 '코란도' 진화의 역사 (news1.kr)
<<관련기사>>
억척으로 엮어낸 자동차산업(1)...시발, 새나라, 신진 자동차
수출 5강에 어린 땀과 눈물
글홍익희세종대 교수 |2016-10-06
해방 이후 서울 을지로에서 자동차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 혜성, 순성 3형제가 설립한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에서 미군 지프를 개조하면서 자동차산업이 태동했다.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는 미군으로부터 불하 받은 지프나 트럭 등 폐차를 재생하여 민수용으로 활용했던 ‘국제공업사’에서 비롯되었다. 폐차 처리를 하면서 기술을 익혀 한국전쟁 직후에 프레임(frame)이라 불리는 차대 제작에 성공했다.
그러다가 1955년 10월 시발 자동차를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출품하여 4만점이 넘는 전시품 가운데 이 자동차가 최우수 상품으로 선정되어 대통령상을 받았다.
시발자동차는 택시 회사에서 관심을 가지자 500대가 택시로 팔렸다. 그 뒤 1956년 군용트럭에 사용되었던 6기통 엔진을 참고로 하여 국산화에 성공하였고, 1958년에는 세단형 9인승 자동차도 생산해 냈다.
시발자동차가 인기를 누리자 버스, 트럭, 트랙터 제작에도 손을 뻗었다. 시발자동차는 인기가 높아서 생산이 수요를 늘 못 따라갔다. 얼마 뒤 시발 투기 붐까지 일어나 상류층 부녀자 사이에선 "시발계"까지 성행해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전매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958년 중앙청에서 세종로까지 도로 전경 |
그러나 이런 시발자동차에도 어둠이 닥쳤다. 5·16 이후 일본 이스즈와 제휴하여 대형버스와 트럭을 조립생산하려고 무리하게 투자하는 바람에 회사가 위기에 처했다. 그 뒤 정부보조금이 중단되었고 1962년 1월 '시발'에 지원키로 예정되었던 정부융자마저 무마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군사정부가 '자동차공업 보호육성법'을 제정하여 공포하였음에도 국산차 키우기를 택하지 않고 일본 자동차의 조립, 생산을 택한 것이다.
1951년 전쟁 통에 정부는 피난민 수송을 위해 60여 대의 버스와 트럭을 이용한 운수영업을 허가했다. 고속도로도 없던 시절 꼬불꼬불 국도를 타고 험한 고개를 넘나들어 서울 부산을 잇던 그 고생길의 요금은 3만 4천환이었다. 쌀 한 가마니에 8만환 할 무렵이었으니 요즘의 비행기 값 정도로 비쌌던 셈이다. 미군이 버리고 간 트럭을 개조하고 두드려 맞춰 만든 버스가 귀한 대접을 받으며 거리를 누볐다.
박정희 의장의 새나라자동차 공장 준공식 참석 |
옛 국산자동차 공장을 부지로 해서 공사가 착공되기도 전에 정부는 새나라 자동차에 닛산 블루버드 완제품 400여대의 면세수입을 허가했다. 400대중 150대는 외국인관광용, 250대는 일반관광용으로 면세 수입되었으나 당초 목적과 달리 들여와서는 전량 택시로 전환되었다.
이 수입 차는 모처럼 우리 손으로 자라나던 국산 자동차산업을 붕괴시키는 부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새나라 자동차는 제3공화국의 4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지목되면서 크게 사회문제가 되었다. 당시 공화당을 창당한 군사정권은 정치자금 조달 목적으로 새나라자동차에게 한국 내 자동차 판매에 대한 특혜를 약속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새나라자동차는 1년 만에 퇴장당하는 비운의 차가 되고 말았다. 1963년 5월까지 2천700여대를 생산했다.
신진자동차가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기술제휴로 1966년 5월 처음 생산한 승용차 코로나는 나오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차 값은 83만 7,000원으로 당시 대통령 월급이 7만 8,000원, 쇠고기 한 근 200원, 택시 기본요금 60원 다방커피 40원이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비쌌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디자인이 예쁘고 한국의 도로사정에 잘 맞는 자동차로 부각되면서 국내 승용차 시장을 싹쓸이했다. 코로나는 1966년 5월 ~ 1972년 11월까지 44,248 대가 생산되었다.
그 뒤 신진자동차는 도요타자동차의 자체 개발1호로 유명한 중형차 "크라운" 을 조립, 생산하여 우리나라 고급차 시장의 문을 열었다. 소형차 "코로나"를 최고의 차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보다 차체가 크고 고급스러운 크라운은 큰 화제였다. 특히 1967년의 뉴크라운은 디자인을 네 번이나 바꾼 마지막 모델로 그야말로 부와 신분의 상징이었다. 집 한 채 값이 70 ~ 80 만원 하던 시절에 차 값이 무려 310만원이었다. 디자인이 당시로서는 초현대적이어서 재벌총수, 장관, 국회의원 등의 자가용으로 인기가 높았다. 1967년 5월~1972년 7월까지 총 3,840대가 생산되었다.
기사출처: 조선펍 (chosun.com)
'사랑방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캐나다로 입양된 ‘주례’는 왜 빗자루와 걸레부터 들었을까 (0) | 2022.07.17 |
---|---|
우리나라 석유산업의 역사 (0) | 2022.06.29 |
안중근 조카 안원생 '김원봉 비판', 김원봉'윤봉길 의거 비판' (0) | 2022.04.30 |
만화CEO열전 (0) | 2022.04.26 |
등산하기전 준비운동 (0) | 2022.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