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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지프차에서 가족용 SUV까지…43년 '코란도' 진화의 역사

 

지프차에서 가족용 SUV까지…43년 '코란도' 진화의 역사

(서울=뉴스1) 박기락 기자 | 2017-01-23 17:30 송고 | 2017-01-24 11:01 최종수정
 

                                                                          1974년 1세대 코란도© News1


코란도는 젊음의 아이콘으로 큰 인기를 모은 국산 오프로더로 쌍용자동차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차종이다. "한국인은 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한국인을 가슴 뛰게 하며 우리나라 대표 SUV 역할을 했던 코란도는 2005년 9월 단종된 지 5년여만에 제4세대의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 최근 5세대 모델로 거듭났다.

1974년 10월 출시 이후 국내 최장수 모델로 국내 기네스북에 오른 코란도의 역사는 쌍용자동차와 성장사와 궤를 함께한다. 그만큼 코란도는 63년의 자동차 역사를 자랑하는 쌍용차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쌍용차를 SUV 전문 기업으로 발전시킨 대표 차종이기 때문이다.

◇1세대 코란도(1974년 10월~1983년 2월)

 

쌍용자동차는 1954년 1월 하동환 자동차 제작소로 출발했다. 1967년 5월 신진자동차와 업무제휴를 시작해 1974년 4월 신진지프자동차공업을 합작설립한다. 그해 5월 AMC(American Motors Corporation)와 기술계약 체결을 통해 10월 하드탑, 소프트탑, 픽업 등 다양한 신진지프 모델을 선보였다.


신진지프는 훗날 코란도의 전신으로서 이 땅에 정통 오프로더의 초석이 된다. 1977년 하동환자동차는 동아자동차로, 1981년 신진자동차는 거화로 상호를 변경한다.

1983년 2세대 코란도© News1


◇수출길 튼 2세대 코란도(1983년 3월~1996년 6월)

거화는 1983년 3월 자체 생산하던 지프에 '코란도'라는 새 이름을 붙인다. 코란도는 처음부터 '한국인은 할 수 있다(Korean can do)'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은 아니었다.

당시 코란도는 '한국인의 의지와 힘으로 개발한 차(Korean do it)' '한국땅을 뒤덮는 차(Korean land over)' '한국을 지배하는 차(Korean land dominator)' 등의 뜻으로 작명됐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 표현한 셈이다.

1984년 12월 동아자동차는 거화를 인수하고 85년 8월 부산공장을 지금의 평택공장으로 이전해 코란도를 생산, 일본 등으로 수출하게 된다. 1986년 11월에 쌍용그룹이 동아자동차 경영권을 인수하고 1988년 3월 쌍용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하면서부터 쌍용차는 스테이션웨건형인 코란도훼미리를 출시하는 등 새로운 코란도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96년 3세대 코란도© News1


◇벤츠엔진 장착한 3세대 코란도(1996년 7월~2005년 9월)

1993년부터 KJ란 프로젝트로 3년간 개발해 1996년 7월 출시한 신형 코란도는 벤츠 엔진에 독창적인 스타일로 새롭게 변신, 대학생들이 가장 갖고 싶은 차로 각광을 받게 된다. 당시 코란도를 갖고 싶어 쌍용차에 입사했다는 신입사원이 있을 정도로 절대적 인기를 누렸다.

젊은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코란도는 지옥의 랠리라고 불리는 아르헨티나 팜파스 랠리, 멕시코 바하 랠리 등에서 우승하며 성능을 입증했고 한국 산업디자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꾸준하게 인기를 누리며 36만여대가 판매된 코란도는 2005년 9월 단종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며 휴식기에 들어간다.

2011년 4세대 코란도C© News1
 


◇4세대 코란도의 부활: 코란도C(2011년 2월)

새롭게 탄생한 코란도C는 우리나라 SUV의 역사를 이끈 코란도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SUV 역사를 창출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브네임 C에는 '세련된, 귀족적인'을 뜻하는 '클래씨(Classy)'와 '우수한 승차감과 정숙성'의 '컴포터블(Comfortable)', 환경친화성의 '클린(Clean) 등의 의미를 담아 디자인과 엔진에 대한 콘셉트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쌍용차는 2010년 4월 부산모터쇼 첫 공개된 양산형 코란도 C 콘셉트카를 선보이며 부활의 신호탄을 쐈다. 이후 페이스 리프트를 거친 뉴코란도 C(New Korando C)는 프리미엄 ULV(Urban Leisure Vehicle, 도시형 레저 차량)를 개발 콘셉트로 내외관을 새롭게 스타일링했다. 인스트루먼트 패널을 비롯한 운전자 공간을 신차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프로젝션 헤드램프, 통풍시트와 같은 고급 편의사양을 신규 적용하는 등 상품성을 동급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2017년 5세대 뉴스타일 코란도C© News1
 


◇가족을 위한 SUV 5세대 코란도C(2017년 1월)

5세대 코란도C는 외관과 파워트레인을 한번에 교체하는 완성차 업체들의 풀체인지 관행을 깼다. 2015년 당시 국내 디젤차의 배출가스 기준이 유로5에서 유로6로 강화되면서 당시 풀체인지 계획이 없었던 4세대 코란도C는 유로6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외관은 그대로 둔 채 엔진만 2.0에서 2.2 LET로 업그레이드 됐다.

이달 초 출시된 뉴스타일 코란도C는 엔진을 업그레이드한 4.5세대 모델에 내외관 디자인과 편의·안전사양을 끌어올린, 진정한 5세대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코란도는 5번의 새대를 거치면서 대학생들의 로망에서 가족이 편안하게 탈 수 있는 차로 변모했다. 쌍용차 라인업 중 가장 막내였던 코란도 밑에 티볼리라는 동생이 생기면서 포지셔닝을 달리 한 것이다.

kirocker@

기사 출처: 지프차에서 가족용 SUV까지…43년 '코란도' 진화의 역사 (news1.kr)

 

지프차에서 가족용 SUV까지…43년 '코란도' 진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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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척으로 엮어낸 자동차산업(1)...시발, 새나라, 신진 자동차

수출 5강에 어린 땀과 눈물

 


글홍익희세종대 교수   |2016-10-06

 
[수출 5강에 어린 땀과 눈물]
 
억척으로 엮어낸 자동차산업(1)
 
지난해 우리나라는 프랑스를 제치고 수출 5강에 안착했다.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세계 4위이다.  6․25전쟁의 잿더미에서 맨손으로 출발한 우리 경제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중심에 자동차가 있었다.
 
1976년 7월 에콰도르에 다섯 대의 포니 수출을 시작으로 우리 자동차산업은 수출의 역군으로 커왔다. 지금은 세계에서 자동차 생산 톱 5에 올랐지만 그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많은 우여곡절과 어려움이 있었다. 자동차산업의 출발과정부터 살펴보자.
 
 
시발 자동차의 등장
 
우리 자동차산업 역시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출발했다. 전쟁이 끝난 뒤 솜씨 좋은 한국인들에 의해 자동차 재생사업이 활기를 띠었다. 미군이 버리고 간 파괴된 자동차들의 부품을 활용해 운행 가능한 자동차를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미군이 버린 드럼통을 망치로 펴서 자동차 외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미군이 버린 폐기된 차에서 쓸만한 엔진과 부품을 골라내어 재생하고. 모자라는 나머지 부품들은 직접 제작하여 우리 손으로 차를 만들어냈다. 겁도 없이 망치 들고 자동차를 만든 격이다. 외국인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한국인의 손재주 하나만은 알아주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최초의 자동차 이름은 ‘시발자동차’였다. 자동차 생산을 최초로 시작했다는 뜻으로 ‘시발’(始發)이라 명명했다.
 
 
 

해방 이후 서울 을지로에서 자동차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 혜성, 순성 3형제가 설립한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에서 미군 지프를 개조하면서 자동차산업이 태동했다.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는 미군으로부터 불하 받은 지프나 트럭 등 폐차를 재생하여 민수용으로 활용했던 ‘국제공업사’에서 비롯되었다. 폐차 처리를 하면서 기술을 익혀 한국전쟁 직후에 프레임(frame)이라 불리는 차대 제작에 성공했다.
 
그 뒤 엔진 제작에 착수하면서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로 바꾸고 민수용 차량을 만들면서 1955년 8월에 ‘시발’자동차 제작에 성공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첫 자동차인 시발은 2도어 4기통 1.323cc 엔진에 전진3단, 후진1단 트랜스미션을 얹었다. 엔진은 일본에서 엔진을 공부하고 돌아온 김영삼이 제작했다. 그가 없었다면 시발자동차도 없었을 것이다. 폐기 처리된 미군 지프의 부품들을 떼어다 갖다 붙이고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일일이 망치로 두들겨 가며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한 대 만드는데 4개월 정도 걸렸다.
 
사장 최무성은 “주요부품을 미군 차량에서 가져왔지만 실린더 헤드 등 엔진부품을 한국기술자가 공작기계로 깎아 만드는 등 국산화율이 50%가 넘어 국산차의 원조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정비회사가 을지로2가 공터에 있었다. 천막을 쳐서 공장으로 삼고, 사무실은 미군이 버린 버스를 개조해 사용했다. 워낙 열악한 환경에서 차를 만들다 보니 초기에는 천막에서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런 환경에서 사장 최무성은 전 재산을 차량제작에 투자했다. 하지만 시발 차의 가격이 8만환으로 비싼 편이어서 사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1955년 10월 시발 자동차를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출품하여 4만점이 넘는 전시품 가운데 이 자동차가 최우수 상품으로 선정되어 대통령상을 받았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이 자동차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당시 상공부 장관으로 하여금 매주 시발자동차의 제조와 판매 현황을 보고토록 했다. 이렇게 대통령이 이 차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자 신문에 크게 보도되면서 구매를 문의하는 전화가 전국에서 걸려왔다.
 
을지로 입구에 있던 천막공장에는 시발 차를 사가려는 고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가격도 하루아침에 30만환으로 뛰어 올랐다. 한 달도 못되어 1억 환 이상의 계약금이 들어와 이 돈으로 주물공장을 인수하여 양산의 발판을 마련하고, 회사를 서울 종로구 관수동으로 옮기고, 공장은 용산구 문배동 외 3개소로 늘렸다. 제법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 양산체제로 돌입했다.
 
시발택시의 등장
 
 
 

시발자동차는 택시 회사에서 관심을 가지자 500대가 택시로 팔렸다. 그 뒤 1956년 군용트럭에 사용되었던 6기통 엔진을 참고로 하여 국산화에 성공하였고, 1958년에는 세단형 9인승 자동차도 생산해 냈다.
 
 

시발자동차가 인기를 누리자 버스, 트럭, 트랙터 제작에도 손을 뻗었다. 시발자동차는 인기가 높아서 생산이 수요를 늘 못 따라갔다. 얼마 뒤 시발 투기 붐까지 일어나 상류층 부녀자 사이에선 "시발계"까지 성행해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전매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시발자동차의 몰락
 
                                                                    1958년 중앙청에서 세종로까지 도로 전경

그러나 이런 시발자동차에도 어둠이 닥쳤다. 5·16 이후 일본 이스즈와 제휴하여 대형버스와 트럭을 조립생산하려고 무리하게 투자하는 바람에 회사가 위기에 처했다. 그 뒤 정부보조금이 중단되었고 1962년 1월 '시발'에 지원키로 예정되었던 정부융자마저 무마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군사정부가 '자동차공업 보호육성법'을 제정하여 공포하였음에도 국산차 키우기를 택하지 않고 일본 자동차의 조립, 생산을 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1962년 재일교포가 설립한 '새나라자동차'가 닛산에서 수입, 조립한 산뜻한 모델을 내놓자 시발자동차는 경쟁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정부에 제출한 외자유치 건의도 반려되면서 결국 1963년 5월에 문을 닫았다. 그때까지 시발자동차 3천여 대를 만들어 팔았다.
 
 
오원철 공장장 경제수석으로 발탁되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 개발한 기술과 기술자들은 훗날 우리 자동차산업의 주춧돌이 되었다. 특히 오원철 공장장은 1960년에 국산자동차주식회사 공장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이듬해 5.16 군사정변 당시 관료로 발탁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에 취임했다. 그 뒤 1971년에는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어 방위산업 육성의 총책을 맡았다.
 
 
하동환 버스의 등장
 
 
 

1951년 전쟁 통에 정부는 피난민 수송을 위해 60여 대의 버스와 트럭을 이용한 운수영업을 허가했다. 고속도로도 없던 시절 꼬불꼬불 국도를 타고 험한 고개를 넘나들어 서울 부산을 잇던 그 고생길의 요금은 3만 4천환이었다. 쌀 한 가마니에 8만환 할 무렵이었으니 요즘의 비행기 값 정도로 비쌌던 셈이다. 미군이 버리고 간 트럭을 개조하고 두드려 맞춰 만든 버스가 귀한 대접을 받으며 거리를 누볐다.
 
최무성이 드럼통으로 짚차를 만들 때 드럼통으로 버스를 만들던 사람이 있었다. 당시 ‘드럼통 버스 왕’이라 불렸던 하동환이 그 주인공이다. 1955년 쌍용 자동차의 모체인 '하동환 자동차제작소'가 설립됐다. 자동차 정비공장의 기술자로 일하던 하동환은 미군이 쓰다 버린 군용트럭을 개조하여 드럼통과 망치, 재생부품을 이용해 버스를 만들었다.
 
 하동환자동차제작소는 규격화 된 버스를 대량 생산해 1960년대 국내 제일의 버스메이커로 성장했다. 그가 만든 버스는 당시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1968년 한국 역사상 최초로 베트남에 버스 20대를 수출했다. 하지만  지프 및 버스 등에만 사업영역이 국한되었던 하동환의 동아자동차는 성장이 부진하게 되면서 1986년 쌍용에 매각되어 쌍용자동차의 밑거름이 되었다.
 
 
1962년 새나라 자동차
 
                                                                 박정희 의장의 새나라자동차 공장 준공식 참석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사정부는 국가재건 방안의 하나로 ‘자동차공업 보호육성법’을 제정, 공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말만 보호육성법이지 정반대로 시행되었다. 자동차공업 보호육성법에 명시된 외산자동차 및 부품의 수입금지가 골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해외자본의 국내투자라는 명목으로 재일교포 박노정에게 닛산 자동차를 반제품으로 수입하여 조립, 생산하는 새나라 자동차의 설립을 허가했다.
 
 

옛 국산자동차 공장을 부지로 해서 공사가 착공되기도 전에 정부는 새나라 자동차에 닛산 블루버드 완제품 400여대의 면세수입을 허가했다. 400대중 150대는 외국인관광용, 250대는 일반관광용으로 면세 수입되었으나 당초 목적과 달리 들여와서는 전량 택시로 전환되었다.
 
이후 ‘새나라 자동차’는 일본 닛산과 손잡고 1962년 8월 경기도 부평 지금의 GM자동차 공장 부지에 연산 6천 대의 생산능력을 갖춘 조립공장을 세웠다. 현재 한국GM의 전신이다. 여기에서 1962년 11월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새나라는 닛산의 블루버드 부품을 도입해 조립한 차였다.
 
 

이 수입 차는 모처럼 우리 손으로 자라나던 국산 자동차산업을 붕괴시키는 부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새나라 자동차는 제3공화국의 4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지목되면서 크게 사회문제가 되었다. 당시 공화당을 창당한 군사정권은 정치자금 조달 목적으로 새나라자동차에게 한국 내 자동차 판매에 대한 특혜를 약속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새나라자동차는 1년 만에 퇴장당하는 비운의 차가 되고 말았다. 1963년 5월까지 2천700여대를 생산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완성된 일본산 자동차 2천 여 대를 관세 없이 수입해 시중 업자에게 팔아 넘겨 이익을 취하는 방식이었다. 수입 가격은 1대에 13만원인데 25만원에 팔아 약 2억 5천만 원의 이익을 취했다. 물론 이 돈은 공화당 정치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이 새나라 사건이 자동차산업에 미친 부작용도 컸다. 오원철에 따른면, "자동차공업도 수공업적으로나마 버스나 '시발'차가 국산화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니, 이것을 기초로 해서 서서히 발전시켜 나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차를 완제품으로 들여왔으니 국내에는 일감이 없어져 버렸다. 이 일로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은 완전히 일본에 내주어야 했고 우리나라는 상당기간 자동차산업의 불모지가 되어 버렸다."
 
결국 '새나라'에 악전고투하던 '시발'마저 같은 해에 회사 간판을 내리게 되어, 이후 기술자립의 싹이 잘린 한국 자동차산업은 1990년대 초.중반까지 기술 의존의 길을 걷게 된다. 이로써 '새나라'자동차는 한국 자동차산업의 악역이었다는 오명을 안게 된다.
 
 
신진자동차
 
신진자동차는 1955년부터 1984년까지 존재한 최초의 대규모 자동차회사였다. 1955년에 김제원-김창원 형제에 의해 부산 신진공업사로 시작하면서 미군으로 부터 불하받은 폐차 새시를 재생하여 버스를 만들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1960년에는 전포동 버스공장을 완공했으며, 1962년에 나온 신진 25인승 마이크로버스는 일명 노랑차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엄청난 판매고를 자랑했다.
 
1963년에 미군 지프 폐차 부품을 이용해서 새나라 자동차의 닛산 블루버드 외형을 모방하여 만든 ‘신성호’라는 세단은 신진자동차 최초의 승용차였으나 재생부품을 사용하다보니 조악한 품질과 새나라 자동차보다 비싼 가격으로 판매가 매우 부진했다.
 
이후 신진자동차는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특혜 시비로 망하면서 한일은행의 관리 하에 있던 새나라 자동차의 인천공장 곧 지금의 한국GM 인천공장을 1965년에 인수했다. 그곳에서 도요타자동차와 기술제휴로 코로나(1966년), 크라운(1967년), 퍼블리카(1967년) 같은 승용차를 생산했다.

신진자동차가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기술제휴로 1966년 5월 처음 생산한 승용차 코로나는 나오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차 값은 83만 7,000원으로 당시 대통령 월급이 7만 8,000원, 쇠고기 한 근 200원, 택시 기본요금 60원 다방커피 40원이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비쌌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디자인이 예쁘고 한국의 도로사정에 잘 맞는 자동차로 부각되면서 국내 승용차 시장을 싹쓸이했다. 코로나는 1966년 5월 ~ 1972년 11월까지 44,248 대가 생산되었다.
 
 

그 뒤 신진자동차는 도요타자동차의 자체 개발1호로 유명한 중형차 "크라운" 을 조립, 생산하여 우리나라 고급차 시장의 문을 열었다. 소형차 "코로나"를 최고의 차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보다 차체가 크고 고급스러운 크라운은 큰 화제였다. 특히 1967년의 뉴크라운은 디자인을 네 번이나 바꾼 마지막 모델로 그야말로 부와 신분의 상징이었다. 집 한 채 값이 70 ~ 80 만원 하던 시절에 차 값이 무려 310만원이었다. 디자인이 당시로서는 초현대적이어서 재벌총수, 장관, 국회의원 등의 자가용으로 인기가 높았다. 1967년 5월~1972년 7월까지 총 3,840대가 생산되었다.
 
그러나 중국이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는 나라와 관계를 맺는 나라까지도 거래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주은래 4원칙"을 발표하자 중국 진출에 뜻을 둔 도요타자동차가 1972년 우리나라에서 철수했다. 이로 인해 기술과 부품공급이 끊어지면서 신진자동차는 더 이상 도요타의 차를 만들 수 없었다. 외국 메이커에 의존한 기술은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기회였다. 그때 도요타자동차가 철수하지 않고 계속 우리 시장에 남아있었다면 우리 자동차산업이 지금처럼 독자적으로 꽃피기 힘들었거나 많이 지체되었을 것이다

기사출처: 조선펍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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