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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안중근 조카 안원생 '김원봉 비판', 김원봉'윤봉길 의거 비판'

취재파일 특파원이 전하는 월드리포트

 

[단독][월드리포트] 안중근 조카 안원생 '김원봉 비판' 문건 공개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 '임시정부 사료'①

 

김지성 기자 작성 2022.04.12 17:17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입니다. 올해는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세워진 지 103주년 되는 해입니다.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맞아 중국 베이징대 역사학과 김동길 교수가 이끄는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가 새로운 사료들을 다수 공개했습니다. 이번 연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해외 한국학 중핵대학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됐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사료들은 1940년대 자료들인데, 이 중에는 임시정부의 내부 분열을 보여주는 문건들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에는 백범 김구 계열의 한국독립당과 약산 김원봉 계열의 조선민족혁명당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두 세력은 항일 노선과 사상적 차이,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제공하는 활동 자금 배분 등을 놓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

 

안중근 조카 안원생 "김원봉의 관심사는 권력 쥐는 것"

 

이런 갈등은 1943년 안원생과 미국대사관 서기관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안원생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의 아들로,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긴 이후 임시정부의 외무부·선전위원회 소속으로 대외 업무를 맡았습니다.

 

안원생과 미국대사관 서기관의 대화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1943년 3월 15일 중국 충칭에 있던 미국대사관에서 만났습니다. 논의 주제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과 정당 재편이었습니다. 당시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당으로 개편된 이후였으며,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도 임시정부에 참가한 상태였습니다. 안원생은 한국독립당 소속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조카 안원생의 어린 시절 모습 (출처=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원생은 이 자리에서 김원봉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누구도 조선민족혁명당의 총서기인 김약산(김원봉)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소비에트 노선을 따라 조직됐고 정당의 명목상 당수는 김규식이지만 실제 통제권은 총서기인 김약산에게 있다", "김약산의 주 관심사는 자기 손에 권력을 쥐는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안원생 "김원봉, 극우 비밀 조직 지원받아…기회주의자"

 

안원생은 임시정부 내부의 당파 분열도 미국대사관 측에 소개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은 중국 국민당의 지지와 원조를 받고 있는 반면, 김약산 조직과 조선민족혁명당은 중국 군(軍)의 지지와 원조를 받고 있다"고 안원생은 전했습니다. 안원생은 이어 중국 군 조직 중에서도 '남의사(藍衣社, Blue Shirts Society)'를 김약산에 대한 자금줄로 지목했습니다. 남의사는 중국 국민당 산하 비밀 정보기관의 이름입니다. 국민당 반대파에 대한 백색 테러와 숙청, 암살 등의 임무를 자행했는데, 국민당 제복의 색깔이 짙은 푸른색이어서 남의사라고 불렸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엔 '삼민주의 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됐습니다. 이 조직은 철저하게 우파 정신으로 무장돼 있었으며 중국 공산당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안원생은 "김약산은 공산주의자거나 적어도 공산주의자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김약산(김원봉)이 남의사의 지원을 받은 데 대해 "기회주의자"라고 몰아붙였습니다.

 

▲ 안원생과 미국대사관 서기관의 대화록 일부. 안원생이 김원봉에 대해 "기회주의자"라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출처=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

 

안원생은 "진정한 목표는 대한민국의 독립이기 때문에 두 정당(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이 차이를 덮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통합의 장애물로 두 정당이 서로 다른 중국 조직의 지원을 받고 있는 점을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한 통합은 이뤄질 수 없으며 중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했는데, 이럴 경우 "김약산 조직은 활동 기반을 잃게 되고, 필연적으로 중국 후원자들의 지지를 잃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안원생은 그러나 "임시정부가 언제 김약산과 그 소속 정당(조선민족혁명당)에 동등한 발언권을 내줄 것인가"라는 미국 서기관의 질문엔 "김약산 측은 동등한 권위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통제권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말해, 김구 계열이 김원봉 계열에 동등한 권한을 주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습니다. 두 세력의 갈등의 골이 깊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 약산 김원봉

 

김원봉 연구학자들 "김원봉은 실용적 민족주의자"

 

김원봉 연구학자들은 김원봉이 남의사의 지원을 받은 사실에 대해 "김원봉은 조국 독립만 쟁취할 수 있다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실용적 좌파 민족주의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해방 때까지 소련이나 중국 공산당과 연계를 가지지 않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에서 항일 투쟁에 유리한 현실적인 정치 행보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중국 공산당으로 합류할 때, 김원봉은 본진을 데리고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 들어간 것도 김원봉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한 사례로 꼽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안타깝게도 국제 사회의 승인을 받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습니다. 승인을 받았다면 해방 직후 한반도의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당시 중국과 미국 정부의 자료에는 임시정부의 내부 분열이 한 원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분열하지 않았어도 국제 정세장 승인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주된 해석입니다. 다만, 이런 내부 분열이 열강들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을 빌미를 제공했을 수는 있습니다. 열강들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이유, 임시정부 내 다른 내부 갈등 사례와 이에 대한 김원봉 연구 학자들의 입장에 대해선 또 다른 사료를 통해 다음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네이버로 공유하기 SNS 공유버튼 더보기 이 기사의 덧글 보기 0 이 기사 좋아요 하기 2 김지성 기자 다른 기사 보기 > 기자님 좋아요1291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711088&plink=SEARCH&cooper=SBSNEWSSEARCH&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국제 [월드리포트]

김원봉, 윤봉길 의거 비판 vs "통합 위해 노력"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 '임시정부 사료' ②

김지성 기자 이메일 보내기 작성 2022.04.13 15:29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맞아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소장 김동길)가 공개한 사료 중에는 약산 김원봉이 1944년 중국 정부 실력자와 만나 나눈 대화 기록이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김원봉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의열단을 조직하는 등 무장 투쟁에 앞장섰지만 해방 후 월북한 전력 때문에 논란이 돼 왔습니다.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의 이번 사료 공개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해외 한국학 중핵대학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인데, 김원봉의 대화 기록에서는 당시 임시정부 내 당파 갈등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의열단 초기 단원들 사진. 맨 오른쪽이 김원봉 (출처=국사편찬위원회)

 

김원봉, 윤봉길 의거 비판…"진정한 혁명가는 쓰지 않는 수단" 김원봉이 만난 중국 정부 실력자는 국민당 중앙비서장이던 오철성(吳鐵城, 우톄청)입니다. 우리의 여당 사무총장 격인데, 오철성은 그 당시 대한민국 독립 문제를 담당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교섭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난 건 1944년 2월 28일입니다.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임시정부에 들어와 광복군에 합류한 상태였고, 임시정부의 군무부장(국방장관)을 맡기 두 달 전입니다.

                                    중국 국민당 중앙비서장을 지낸 오철성 (출처=바이두)

김원봉은 오철성과의 대화에서 백범 김구가 주도하고 있던 임시정부를 비판했습니다. 김원봉은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는 반일 황족 정권을 계승한 것도, 망국 후 민족 해방 운동가들이 공동으로 조직한 자유 정부도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독립당 소수가 장악하고 있는 정치 기구로, 소수의 한국 교민을 대표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독립당은 백범 김구 계열의 한국독립당을 말합니다. 당시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과 김원봉 계열의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김원봉은 이어 "20여 년 동안 독립당은 광복 운동에 대해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전체적인 혁명 전략도 없었다"고 폄하했습니다. "일제 시라카와 대장 폭사 사건이 한때 파문을 일으켰지만, 이는 교묘한 수단으로 이익을 취하는 행동으로 진정한 혁명가는 쓰지 않는 수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라카와 대장 폭사 사건은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제의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이던 시라카와 대장이 죽은 사건을 말합니다. 윤봉길 의사는 백범의 부탁으로 거사에 나섰는데,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김원봉이 비판한 것입니다. 김원봉은 "일본은 조직적인 국가로, 중요 인사 한두 명이 암살됐다고 국책을 바꾸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김원봉과 오철성의 대화 기록. 김원봉이 '시라카와 대장 폭사 사건', 즉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언급하며 "교묘한 수단으로 이익을 취하는 행동"이라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출처=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창설해 23차례나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주도했던 인물입니다. 영화 '암살'에도 등장했듯 일제 요인 암살의 시조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김원봉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비판한 이유는 뭘까요.

 

김원봉은 오철성에게 임시정부의 인사 문제와 자금 배분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이 조선민족혁명당 인사들을 중용하지 않고, 중국 국민당 정부가 지급한 자금을 조선민족혁명당에 나눠주지 않고 있다는 취지입니다. "독립당은 중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기고만장하다"라는 표현까지 썼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속한 조선민족혁명당에도 별도의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오철성에게 요구했습니다.  

 

김원봉 연구 학자 "통일되고 조직된 힘 필요성 강조한 것"

 

김원봉과 오철성의 대화 기록에 대해 김원봉 연구 학자 중 한 명인 밀양 독립운동사연구소 최필숙님이 입장을 보내왔습니다. 아래는 입장문 전문입니다.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외교적 노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 통치 청원이 알려져 국민대표회의(1923년)가 열렸다. 임정 개조, 임정 폐지까지 논의되면서 많은 단체와 사람이 임정을 떠났고, 임정은 작은 독립운동 단체로 전락하여 명맥만 유지하였다. 1932년의 이봉창,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원조로 경제적 어려움이 나아졌을 뿐이었다. 중일전쟁 후 충칭에 정착하며 5인의 집단 지도 체제가 아닌 주석제(김구)로 전환,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조소앙·지청천 등과 연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설하였다. 이후 민족혁명당의 김규식, 김원봉의 세력이 1942년에 통합, 임시정부의 세력도 확대되었다.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 약산 김원봉

 

오철성과의 대화의 요지는 그 이후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간의 통합이 처음 논의된 것처럼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통합을 위해 김원봉이 오철성에게 도움을 요청한 내용이다. 윤봉길 의거에 대한 약산의 발언이 의거를 폄하하는 듯하나, 이는 의열단을 통해 몇몇의 희생으로 일제가 무너지지 않음을 깨달았기에 윤봉길과 같은 공격으로는 일본이 붕괴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한국독립당의 무능함과 통합 당시 거론되었던 여러 사실들에 대한 언급은 결국 민족혁명당의 입장에서 통일전선이라는 민족적 대화합을 위해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여 수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구와 한국독립당이 통합 의지를 보이지 않아(활동 자금도 민족혁명당에는 분배되지 않아 50만 위안을 빌림) 중국 국민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약산의 뜻이 대화록의 요지이다. 내부적으로도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 정당 등이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고 있어 한국독립당은 그 지도적 위치를 잃었다는 게 약산의 견해이다.

 

오철성 문건의 요지는 '약산은 여전히 한국독립당과 통합할 의사가 있고,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 사이에서 중국 국민당이 올바른 판단과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금을 운용할 때 실상을 잘 분별하고 중앙정부의 대처 방안을 통일하여 활용해야 함을 국민당에 충고하고 있다. 이들의 대화 이후 임시정부는 주석-부주석제로 전환, 약산은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한국광복군을 지휘하였다.

 

국민당은 많은 대원들을 팔로군으로 보낸 약산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금 지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산이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민족 해방 운동을 위해 통합을 추진한다는 오철성의 판단이 중국 정부에 전해졌기 때문에 1944년의 정치 체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 대화록은 약산이 김구 또는 윤봉길 의거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 해방을 위해서는 몇몇의 희생이 아닌 통일되고 조직된 힘이 필요하다는 약산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민족 운동이 통합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워 많은 양보를 하면서까지 통합 정부를 구성하려는 약산의 의지가 더 돋보인다.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으려는 약산의 노력이 처절할 정도로 느껴지는 대화록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시리즈 이어보기] ▶ [단독][월드리포트] 안중근 조카 안원생 '김원봉 비판' 문건 공개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네이버로 공유하기 SNS 공유버튼 더보기 이 기사의 덧글 보기 0 이 기사 좋아요 하기 0 김지성 기자 다른 기사 보기 > 기자님 좋아요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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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윤봉길 의거 비판 vs “통합 위해 노력”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맞아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가 공개한 사료 중에는 약산 김원봉이 1944년 중국 정부 실력자와 만나 나눈 대화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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