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후원의 문화사] <7> 부뚜막의 신, 조왕
-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 소장
- 승인 2021.04.30 16:36
- 호수 3663
조왕불공은 공양실을 신성·청정하게 하기 위함
경북 청도 운문사 조왕단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생명을 양육하는 신
부엌을 다스리는 조왕(竈王)은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일상적 섬김의 대상이 되어온 존재다. 도교·불교와 민속신앙은 물론, 유교에서도 군주가 백성을 위한 칠사(七祀)를 지낼 때 음식을 관장하는 조신(竈神)이 일곱 신 가운데 한 분으로 좌정해 있다. 또한 부엌이 있는 곳이면 민가든 사찰이든 조왕을 모셨기에 일상의 나날 속에서 섬김을 받아온 것이다. 이는 불을 신성시하고 한 집안의 불씨를 소중하게 여겨온 토착신앙이, 도교의 조왕신앙과 결합하면서 전승기반을 공고히 해온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 한국으로 눈을 돌리면, 조왕신앙은 온전히 불교의 전유물이 된 듯하다. 주거공간은 물론 삶을 지배하는 많은 것들이 변하면서 집안 곳곳을 지켜주던 가신(家神)도 함께 사라졌지만, 사찰에서는 조왕을 모시지 않은 곳이 드물다. 공양간의 모습은 달라져도 승가공동체가 꾸려가는 대중생활의 기반은 변함없이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작법귀감(作法龜鑑)>에는 산신·칠성신과 함께 조왕신을 위한 의식을 따로 정립해 두었다. 이 조왕청(竈王請)을 보면 “안팎을 길하고 융창하게 하며, 걸림돌을 벗어나 편히 머물게 하고, 온갖 질병을 없애주며, 선악을 분명하게 가려내며, 들고남에 자재하고 한곳에만 늘 머물며 집안을 보호하는 조왕”이라 하였다. 부엌은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신성한 영역이기에, 이곳을 지키는 조왕의 능력 또한 확장되어 있다. 건강하고 정갈한 음식으로 심신을 지탱하니, 질병이 없어지고 널리 안팎이 길하여 평안할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민속신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간에서는 조왕(竈王)이 삼신처럼 육아의 기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운수와 재물을 다룬다고 여겼다. 이는 음식으로 생명을 양육하고, 아궁이의 불이 재물 번성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부들은 아침마다 부뚜막 조왕중발의 정화수를 갈며 식구의 안위를 빌고, 집안에 일이 생기거나 외지에 나간 이가 있으면 따로 정성을 들였다. 명절이면 솥에 밥을 지어 식구수대로 숟가락을 꽂은 뒤 “어진 조왕님~”으로 시작되는 기도를 올렸으니, 식구와 함께 부뚜막과 밥을 공유하는 참으로 정겨운 신이다.
<작법귀감>에도 조왕단에 “옥 같은 쌀알을 수증기로 찐 음식을 경건히 차려놓고” 모신 연유를 고하도록 했다. 음식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성스러운 공양물을 올리면서, 들고남이 자재하지만 늘 부뚜막에 머물며 지켜주는 조왕의 내호(內護)를 빌었다.
안팎을 다스리는 경책의 신
조왕(竈王)은 ‘선악을 분명하게 가리는 존재’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조왕을 둘러싼 기본담론은 부엌을 삿된 침입으로부터 지키는 동시에, 인간의 행위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포박자(抱朴子)>에 “인간사를 살핀 조왕이 주기적으로 하늘에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죄를 고해 벌을 내린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하였다. 조왕의 승천시점은 매월 그믐밤으로 보다가 점차 일 년에 한 번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섣달그믐에, 중국에서는 춘절을 일주일 앞둔 섣달 23일에 집중적으로 조왕을 섬긴다.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한 해의 보살핌에 감사하면서, 아울러 선처를 바라는 뜻의 제사이다. 따라서 민간에서는 제물로 엿을 빠뜨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천상에 가서 엿처럼 달달한 말만 하기를 바라는 마음, 입이 붙어 아무 말도 못하게 하려는 마음이 두루 담겨 있다.
사찰에서 조왕불공을 올리는 뜻은, 대중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는 공양간을 신성하게 여기며 청정하게 다루도록 하기 위함이다. 공양간은 부처님께 올릴 마지와 수행자의 대중공양을 짓는 소중한 영역이기에, 조왕에게 부여된 ‘선악의 감시’는 외부의 삿된 적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삼독도 끊임없이 점검할 것을 깨우치는 가르침이다.
사찰 공양간의 조왕(竈王)은 대개 탱화로 모시고, ‘나무조왕대신(南無竈王大神)’이라는 위목(位目)을 써서 모시기도 한다. 탱화 속의 조왕은 머리에 관을 쓰고 문서를 든 모습이며, 아궁이 땔감을 대는 담시역사(擔柴力士)와 음식을 만드는 조식취모(造食炊母)를 좌우에 거느리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천제의 명으로 지상에 파견되어 인간의 일을 엄중하게 기록하는 관리의 역할이 부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왕은 남신으로 여기지만, 이른 시기의 조왕은 여신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모계사회를 반영하는 것이자 부엌을 다루는 어머니의 존재가 투영된 것으로, 이후 부계질서의 강화와 함께 점차 남신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그런가하면 민간에서는 ‘남성중심의 조상제사’와 ‘여성중심의 가신신앙’을 구분하여, 낮은 제사의 신격으로 조왕의 여성성이 부각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조왕은 성 정체성에 있어서도 시대와 의례주체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지닌 채 우리와 함께해온 신이다.
서울 진관사에서 섣달그믐 조왕불공을 올리며 주지 스님이 축원문을 읽는 모습.
조왕을 섬기는 의례
“이 공양 드시고 성불 하십시오.” 새벽4시가 되면 통도사의 반두(飯頭) 스님과 행자가 공양간 조왕단에 촛불을 밝히고, 오늘 하루의 무사를 기원하며 세우는 발원이다. 사찰 후원의 하루는 이렇게 공양간 소임을 맡은 이가 조왕님께 합장배례 하는 기도로써 열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아침밥을 다 지으면 조왕에게 기도를 올린 다음 큰방으로 들였고, 부처님께 올릴 마지도 불기에 퍼서 조왕단에 먼저 예를 갖춘 다음 내가기도 하였다. 일상으로 되풀이되는 부처님과 제자들의 공양이지만, 늘 감사한 마음으로 끝까지 소홀함이 없는 스님들의 정성을 느낄 수 있다. 사시마지 때면 조왕단에도 마지를 올리거나, 솥뚜껑을 열어놓고 절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송광사에서는 조왕단에 마지를 올린 뒤 마지뚜껑을 열고 죽비를 치면, 주방의 모든 이들이 일손을 멈추고 합장배례로써 공경의 예를 표한다.
그런가하면 매달 그믐에 조촐한 조왕불공을 올리고, 섣달그믐이면 한 해를 마감하며 본격적인 조왕불공을 올리는 사찰이 많다. 범어사에서는 신도들과 함께하기 위해 날짜를 앞당겨 섣달보름에 사천왕과 조왕을 나란히 섬긴다. 이날 저녁 천왕문에서 기도를 올린 뒤, 사부대중이 다함께 공양간으로 이동해 조왕을 향한 기도를 이어가는 것이다. 외각과 후방에 자리한 천왕문과 공양간은 자칫 소홀하기 쉬운 곳이지만,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영역과 생명을 지켜주는 존재들에게 감사함을 새기며 회향하는 여법한 의례라 하겠다.
진관사에서 섣달그믐 저녁, 공양간에 갖가지 공양물을 차려놓고 올리는 조왕불공은 참으로 정성스럽다. 조왕단에는 조왕의 위목을 모셔두고, 두 개의 커다란 가마솥이 있는 부뚜막 위에 공양물을 차린다. 그 가운데 쌀·보리·수수·팥·콩·조 등을 켜켜이 쌓아서 찐 조왕편은 이 날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떡이다. 조왕편은 시루 째 올리는데, 부엌의 신에게 오곡을 바침으로써 풍요와 오행의 조화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 불공을 마친 조왕편에는 가피가 가득하니 고루 나누어 공양하고, 몸이 아픈 분에게 약으로 챙겨 보내기도 한다.
조왕편과 함께,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조왕을 위해 부각·두부부침·녹두전을 비롯해 갖가지 나물과 과일을 올린다. 부엌을 다스리는 신의 특성과 입맛을 헤아려 정성껏 올리는 공양물이니, 그 가피가 사부대중에 두루 미칠 만하다.
제석천과 조왕
“한 톨의 쌀이 버려지면 그 쌀이 다 썩을 때까지 제석천이 눈물을 흘린다.” 스님들은 음식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대하면, 스승이나 노스님들로부터 어김없이 이 말을 들어야 했다. 민간에서 불교의 제석천을 생산신·삼신 등 다양한 신격으로 수용하여 곡식을 넣은 제석단지를 모셨듯이, 사찰에서도 곡식을 다루는 역할로 제석천이 수용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에서는 조왕이 섣달그믐에 하늘로 올라가서 대중의 선악행위를 보고하는 대상이, 옥황상제가 아닌 제석천(帝釋天)으로 설정되어 있다. 불교의 우주관으로 볼 때 제석천은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 정상의 도리천(忉利天)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곡식을 다루는 존재이기도 하니, 부엌을 다스리는 조왕이 섣달그믐 도리천에 올라 제석천께 보고하는 것은 참으로 타당하다.
한때 출가자의 삶을 살았던 시인 고은은, 효봉스님과 잠시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공양주가 병이 나 대신 밥을 짓던 중, 쌀을 일다가 낱알 두어 개를 흘렸는데 때마침 효봉스님이 그것을 보았다. 이에 걸음을 멈추고 엉엉 울면서 “내가 우는 것이 아니라 제석천이 운다. 이 쌀 낱알이 썩을 때까지 울리라”고 하였다. 고은은 이 경책에 온몸의 터럭이 일어났다고 회상했다. 시주에 의지하는 출가자라면 쌀 한 톨도 소홀함 없이 다루어야 했으니, 조왕이 눈여겨보는 것 또한 이러한 철두철미함이 아니겠는가.
그런가하면 부뚜막 위에 자리하며 일상을 함께하는 조왕님은 정겨운 존재이기도 하다. 후원 스님들은 수시로 조왕단 앞에서 크고 작은 바람을 의지했다. 동진 출가한 어느 스님은, “아직 어려서 불 때는 일은 맡기지 않으니, 아궁이 앞에 앉아 부지깽이를 목탁 삼아 두드리며 천수를 치곤 했다”고 한다. 선배 스님들이 조왕 앞에서 반찬 맛있게 해달라며 천수다라니를 외고, 밥에 돌 들어가지 않게 해달라며 천수다라니 외는 걸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새 행자가 들어오면 조왕단에 함께 절을 올려 보고하고, 아무 장애 없이 식구가 될 수 있도록 빌었다. 또한 “뒷산에 가서 단단하고 곧은 나무로 부지깽이를 만들어 부뚜막 옆에 세워놓고, 새 행자를 좀 보내달라며 조왕님께 기도드렸다”는 진관사 법해스님의 말처럼, 대중이 부족할 때도 조왕님을 찾았다. 막내 스님 첫눈에 들어오는 단단하고 미끈한 나뭇가지로 부지깽이를 올리고 기도하면, 신기하게도 참신하고 진발심한 행자가 들어오곤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조왕과 함께하는 후원의 삶은 더없이 든든했을 법하다.
[불교신문3663호/2021년4월27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찰후원의 문화사] 부뚜막의 신, 조왕 - 불교신문 (ibulgyo.com)
[사찰후원의 문화사] <7> 부뚜막의 신, 조왕 - 불교신문
생명을 양육하는 신부엌을 다스리는 조왕(竈王)은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일상적 섬김의 대상이 되어온 존재다. 도교·불교와 민속신앙은 물론, 유교에서도 군주가 백성을 위한 칠사(七祀)를 지
www.ibulgyo.com
<<관련 기사>>
30. 공양간 풍습
- 승인 2004.11.07 01:04
- 호수 152
수행 첫 단계…밥 뜸들이며 ‘초발심 자경문’ 외워
사진설명: 밥 뜸을 들일 무렵이면 스님들은 '초발심자경문'등을 외며 승가의 위의를 바로 잡는다. 공양간에서 밥짓는 모습.부처님 당시 음식은 탁발이 기본이었다. 오전 중 한 끼가 전부였다. 종류는 거의 가리지 않았다. 먹는 양이나 회수는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에 그쳤고, 음식을 탐하는 것은 금지했다. 오늘날은 사찰에서 스스로 지어먹는 것이 원칙이다. 한국불교에서 탁발은 원칙적으로 금지다. 남방불교는 아직도 부처님 당시처럼 탁발이 기본이다. 재가신자가 스님들을 초청해서 공양을 베푸는 풍습은 오늘 날에도 남아있다.
그러면 당시 부처님과 제자들은 탁발에만 의존했을 까. 스스로 지어 먹지는 않았을 까. 결론은 부처님 당시에도 부엌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분율〉 제50권 ‘집과 방에 관한 법’ 편에서 부처님은 부엌을 지으라고 했다. “그 때에 비구들이 한데에서 물을 데우는데 비가 와서 옷이 젖으니, 부처님께서 말씀 하시되, ‘물 되우는 집을 지으라’ 하셨고, 비구들이 한데에다 나무를 두었다가 비가 와서 젖으니, ‘나무광을 지으라’ 하셨다. 비구가 한데에서 밥 끓는 것을 지키다가, 비를 만나 옷이 젖고 정인의 음식 그릇을 더럽히니 부처님께서 말씀 하시되 ‘부엌을 지으라’하셨다”
율장에서도 보이듯 부처님 당시 사찰에는 화장실, 부엌, 목욕탕, 창고 등의 편의시설이 있었다. 하지만 부처님 당시 부엌이 지금과는 그 용도가 많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즉 발우를 씻거나 물을 끓이는 등의 용도로 쓰인 것이지, 밥을 지어먹는 곳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장 소금 등 기본 양념은 갖춰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분율〉 제49권 ‘비구들의 위의에 관한 법’ 편을 보자. “그는 조용한 곳에 사는 비구가 발을 씻은 뒤에는 물 그릇과 밥 씻는 돌 따위 여러 기구를 제 자리에 갖다 두어야 하며, 자기의 손을 가루 비누로 깨끗이 씻은 뒤에 남는 밥을 깨끗이 따로 남겨 두었다가, 도적이 오거든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조용한 곳에 사는 비구는 이어 그 나그네에게 밥을 주어야 하는데 그가 밥을 먹을 때에는 필요한 것을 공급하되 낙장 청락장 식초 소금 채소가 있거든 주고 더럽거든 부채질을 해주고 물을 찾거든 물을 주라. 만일 시간이 지나려 하거든 같이 먹어라”
부처님은 외딴 곳에 홀로 사는 비구가 도적으로부터 안전을 위협 당하는 일이 잦자 도적을 위해 음식을 남겨 두라고 했던 것이다. 부엌과 같은 시설을 갖추기는 해도 조리(調理)를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발을 하던 당시에도 음식을 먹는데 필요한 기본 장비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보다 2세기 흐른 마우리아 왕조 때는 사찰에서 밥을 지어먹었다는 증거가 유적을 통해 증명됐다.
중국에서는 농사와 수행을 동일시 했기 때문에 자급자족했다. 이 때부터 공양과 관련된 소임이 생겨났다.
부처님때도 물 끓이기 위해 부엌.나무광 시설 갖춰
장작불로 ‘눈물’의 밥지으며 수행 기초 자세 배워
공양을 준비하는 곳을 사찰에서는 후원이라고 한다. 즉 민가의 부엌을 절에서는 후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사찰은 모두 후원을 두고 있다. 작은 사찰은 공양을 담당하는 공양주 만을 누고 있지만 총림 등 큰 사찰은 공양을 담당하는 소임자만 해도 여러 명이 된다. 적게는 20~30명에서 많게는 백 명이 넘는 대중들의 식사를 한꺼번에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소임이 필요한 것이다. 후원관련 소임자는 총책임자격인 공양주(供養主), 쌀을 담당하는 미감(米監), 채소 담당 채공(采工), 국담당 갱두(羹頭), 반찬 담당 원두(園頭) 등이 있다. 공양을 총책임지는 소임으로 별좌를 두기도 한다. 작은 사찰은 일반 여신도가 공양주를 하지만 큰 절에서는 모두 스님들의 몫이다.
후원에서 밥을 준비하는 과정도 엄격하다. 먼저 사찰의 대중들은 스스로 경작했거나 탁발한 쌀 가운데 한 끼 분량을 미감에게 제출한다. 미감은 이렇게 모은 쌀을 공양주에게 건넨다. 원두는 반찬거리 국거리를 원주에게 건넨다. 이를 갱두와 채공이 받아 국과 반찬을 준비한다. 밥 뜸을 들일 무렵이 되면 장작불에 소금을 뿌려 환원염(還源炎)을 일으킨다. 환원염이 가라 앉으면 타오르는 아궁이에 약간의 물을 부어 그 김으로 밥 뜸을 들인다. 뜸 들이는 시간에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초발심자경〉문을 외우며 승가의 위의를 익힌다.
뜸이 들고 공양 준비가 다 되면 공양주는 조왕단에 공양을 올린 후 죽비를 치며 게송을 외운다. 조왕단 예경이 끝나면 공양주는 밥을 퍼 담으며, 이 때를 맞춰 갱두는 국을, 채공은 반찬 등을 준비해 찬상에 담아 큰 방 부전을 통해 큰 방에 들어간다. 큰 방 부전은 공양을 알리는 운판을 5번 친다. 대중들은 큰방에 들어와 대중공양을 한다.
이것이 밥을 짓고 먹는 과정이다. 밥을 먹지 않는 대중은 식당 앞에 걸린 패를 돌려놓는 방식으로 미리 알린다. 사람 수에 맞춰 밥을 짓기 위해서다.
후원생활은 처음에 산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배우는 과정이다. 채공 갱두 원두 등 중요 소임은 비구(니) 승들이 맡고 그 아래 행자들이 배속 된다. 채공 소임의 경우 채소를 다듬고 칼질을 하는 등 허드렛일을 담당한다. 공양시간이 임박하면 후원은 거의 전쟁터가 된다. 모든 일을 정해진 순서에 따라 신속하게 처리해야한다. 별좌 스님이 챙겨야할 사항을 큰 소리로 외친다. “김치 국물 확인”, “모듬 확인” , “국통준비” “ 어른 스님 반찬 확인”
사찰 마다 기간은 다르지만 후원에 배속되는 순서는 먼저 반찬을 다듬는 채공 소임을 보게하고 그 뒤 공양간으로 배속된다. 공양간은 밥을 하는 곳. 채공보다 훨씬 중요한 소임이다. 장작을 너무 적게 넣어서도, 너무 많이 넣어서도 안된다. 장작을 사용해보지 않은 신참에게는 그야말로 진땀나는 일이다. 특히 아침에 주로 먹는 죽은 불이 고르게 지펴져야 하므로 한눈 팔지 않고 지켜야한다. 때로는 졸다가 눈썹을 태우기도 하고 뜸들인 시간을 잘 재지 못해 밥을 태우거나 3층 밥을 짓기도 한다. 그럴 때는 대중공사를 각오해야 한다. 이 때문에 밥짓는 일은 고참 행자의 몫이다. 밥짓는 소임을 맡은 행자가 다음 행자에게 넘겨줄 때는 3개월간 그 비법을 전수한다. 밥이 찰지게 흐르게 하는 방법등을 세세히 전달해주는 것이다. 솜씨 좋은 공양주는 그 기술이 신기에 가까울 정도여서 하루 세 끼 밥의상태가 일정하며 심지어는 누룽지 두께까지 매일 정확하게 만들어낸다고 한다.
후원 생활은 무엇보다 고달프다. 반찬을 다듬고 밥짓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고 겨울에는 찬물에 맨손으로 그릇을 씻어야한다. 고달픈 일을 통해 인내심을 기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엌일은 신참 몫이지만 때로는 조실 스님이 자청하기도 한다. 성철스님도 생전에 선방에서 초심자들을 제쳐놓고 공양주 일을 자청했던 한 나이든 조실스님의 일화를 자주 들려주었다고 한다.
불과 30~40년(1960~1970년대) 전만해도 스님들이 부뚜막을 직접 만들었다. 스님들은 부뚜막을 잘해 놓아야 공양주 잘 살았다고 칭찬했으며, 부뚜막을 정갈하게 만들면 복이 온다며 초심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시멘트를 쓰기전 사찰은 일반 가정처럼 황토를 빚어서 부뚜막을 만들었다. 부뚜막이 굳으면 마른 황토를 곱게 빻아 고운 채로 거른 다음 물을 부어 묽은 반죽을 만들었다. 고운 반죽으로 부뚜막 갈라진 틈새를 매우고 부뚜막 전체를 분 바르듯 조심조심 바른 뒤 헌 행주에 적당히 물을 적셔 곱게 마지막 손질을 하면 부뚜막이 완성됐다. 이 부뚜막에는 오직 공양주 만이 올라갈 수 있었다.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최근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가스로 밥을 짓는 사찰이 많아졌다. 작은 사찰에서는 대부분 재가신자가 공양주를 맡고 있다. 공양주 보살은 인근 마을에 사는 여 신자가 도맡아 했는데 요즘은 공양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힘들어졌다. 그 때문에 중국에서 온 조선족 교포가 사찰 공양주일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음식 맛이 한국과 달라 스님들이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갑자기 사라져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큰 사찰에서는 여전히 옛 풍습을 지키고 있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 2078호/ 11월9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통문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조(始祖), 도시조(都始祖), 중시조(中始祖)혹은 기세조(起世祖) (0) | 2021.09.07 |
---|---|
[사찰성보문화재 50選] ⑮예천 용문사 팔상도 (0) | 2021.08.29 |
우물 (0) | 2021.08.18 |
중생구제하는 관세음보살 (0) | 2021.08.18 |
마을신앙을 부르는 명칭 (0) | 2021.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