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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민족종교 3인

민족종교 3인



세계 각국에는 나라마다의 전통종교나 자국 종교가 있다. 중국의 도교, 영국의 성공회, 일본의 신도나 천리교, 일련정종(日蓮正宗)이 이에 속한다.


우리나라에도 조정의 기강이 바로 안 서고 삼정(전정·군정·환곡)이 혼란스럽던 조선 말기에 3대 민족종교가 태동하게 된다. 즉,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에 의한 천도교,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에 의한 증산교,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 : 1891∼1943)에 의한 원불교다. 세 종교 모두 희망 없는 세기말적 현상에 민족의 자존과 구세제민(救世濟民)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이상 민족종교 3인에 대하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소개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최제우(崔濟愚)

천도교인물

 조선후기 인내천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                


최제우 초상
이칭 ; 성묵(性默), 수운(水雲), 수운재(水雲齋)
분야 ; 천도교
유형 ; 인물
성격
종교창시자
성별
출생일
1824년(순조 24)
사망일
1864년(고종 1) 3월 10일
본관
경주(慶州)
저작
논학문(論學文), 안심가(安心歌), 교훈가, 도수사
경력
동학(東學)의 교조(敎祖)
시대 ; 조선
성격 ; 종교창시자
성별 ; 남
출생일 ; 1824년(순조 24)
사망일 ; 1864년(고종 1) 3월 10일
본관 ; 경주(慶州)
저작 ; 논학문(論學文), 안심가(安心歌), 교훈가, 도수사
경력 ; 동학(東學)의 교조(敎祖)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후기 인내천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복술(福述)·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경주 출신. 아버지는 옥(鋈)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7대조 최진흥(崔震興), 생7대조는 최진립(崔震立)이다. 6대조 승사랑(承仕郞) 최동길(崔東吉)은 최진립의 4남으로, 최진흥의 후사가 되었다. 최진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워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의 시호가 내려진 무관이었으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 출신이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일찍부터 경사(經史)를 익혔으나 기울어져가는 가세(家勢)와 함께 조선 말기의 체제내부적 붕괴양상 및 국제적인 불안정이 그의 유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3세의 나이로 울산 출신의 박씨(朴氏)와 혼인하였고, 4년 뒤 아버지를 여의었다. 3년상을 마친 뒤에는 집안살림이 더욱 어려워져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며 갖가지 장사와 의술(醫術)·복술(卜術) 등의 잡술(雜術)에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세상인심의 각박함과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것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1856년 여름 천성산(千聖山)에 들어가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면서 시작된 그의 구도(求道) 노력은 그 이듬해 적멸굴(寂滅窟)에서의 49일 정성, 그리고 울산 집에서의 계속된 공덕닦기로 이어졌고, 1859년 10월 처자를 거느리고 경주로 돌아온 뒤 구미산 용담정(龍潭亭)에서 계속 수련하였다.
이 무렵 가세는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까지 기울어져 있었고, 국내 상황은 삼정의 문란 및 천재지변으로 크게 혼란된 분위기였으며, 국제적으로도 애로호사건(Arrow號事件)을 계기로 중국이 영불연합군에 패배하여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는 등 민심이 불안정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혹은 ᄒᆞᄂᆞᆯ님)의 뜻을 알아내는 데 유일한 희망을 걸고 이름을 제우(濟愚)라고 고치면서 구도의 결심을 나타냈다.
그러다가 1860년 4월 5일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되었다. 하느님에게 정성을 드리고 있던 중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여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왔다.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그의 종교적 신념은 결정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하여 1년 동안 그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고,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톈진조약 후 영불연합군이 물러가서 조선침공의 위험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심이 가라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학을 다시 탄압하게 되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고, 「논학문(論學文)」·「안심가(安心歌)」·「교훈가」·「도수사(道修詞)」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영역닫기영역열기활동사항
그가 본격적으로 종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기간은 득도한 이듬해인 1861년 6월부터 1863년 12월까지 약 1년 반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피신하며 지낸 시간이어서 안정되게 저술에 몰두할 수는 없었으나 틈틈이 자신의 사상을 한문체·가사체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처형당하게 되자 남아 있던 신도들은 그의 글들을 모아서 기본되는 가르침으로 삼게 되었는데, 한문체로 된 것을 엮어놓은 것이 『동경대전(東經大全)』이고, 가사체로 된 것을 모아 놓은 것이 『용담유사(龍潭遺詞)』이다. 『동경대전』·『용담유사』에는 두 가지 신앙대상에 대한 명칭이 나타나는데 천주(天主)와 ᄒᆞᄂᆞᆯ님이 그것이다.
천주 또는 ᄒᆞᄂᆞᆯ님에 대하여 명확하게 규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입장을 알아보려면 간접적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는데,‘시천주(侍天主)’에 대한 두 가지의 해석이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하나는 하느님은 초월자이나 부모님같이 섬길 수 있는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며, 다른 하나는 사람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그의 하느님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함과 동시에 인간 밖에 존재하는 초월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신관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 그의 종교체험이 무속적인 원천에 뿌리박고 있다는 주장과 접맥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장석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일순(姜一淳)

신종교인물

 대한제국기 여러 종교단체가 믿는 증산 사상을 개시한 종교창시자.   


강일순 영정
이칭 ; 사옥(士玉), 증산(甑山)
분야 ; 신종교
유형 ; 인물
성격
종교창시자
성별
출생일
1871년
사망일
1909년
본관
진주(晉州)
시대 ; 근대
성격 ; 종교창시자
성별 ; 남
출생일 ; 1871년
사망일 ; 1909년
본관 ; 진주(晉州)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대한제국기 여러 종교단체가 믿는 증산 사상을 개시한 종교창시자.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증산교의 경전인 『대순전경 大巡典經』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인 권씨의 태몽에 갑자기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어리가 내려와 몸을 덮고 하늘과 땅이 밝아짐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잉태하게 되어 13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출산 때에는 그의 아버지가 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산모를 간호하는 것을 비몽사몽간에 보았는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로 뻗쳐올라 7일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농가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선조들이 이조참의와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낸 것으로 보아 그는 몰락한 양반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학문적인 소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빈곤 때문에 일찍 학업을 중단하고 14, 15세 때에는 다른 지방으로 가서 남의집살이와 나무꾼생활도 하였으며, 21세에 결혼한 후 처가에서 훈장생활도 하였다.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사람들에게 “이 혁명은 실패할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하였다고 한다.
동학혁명 후에 나타난 사회적 혼란과 참상을 보고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종교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된 그는,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성종교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늘과 땅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는 유·불·선 등의 기성종교의 교리와 음양·풍수·복서·의술 등을 연구하는 한편, 신명(神明)을 부리는 도술과 과거·미래를 알 수 있는 공부를 하고 1897년부터 3년간 세상을 보다 널리 알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 기간에 충청도 비인(庇仁) 사람인 김경흔(金京訢)으로부터 증산교의 중요한 주문이 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며, 연산(連山)에서는 당시 『정역 正易』을 저술한 김일부(金一夫)를 만나 정역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1901년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던 중, 그 해 7월 하늘과 땅의 원리를 깨닫게 되고 인간의 욕심과 음란·성냄·어리석음의 네 가지를 극복함으로써 성도(成道)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원사에서 성도한 그는 집으로 돌아와 그 해 겨울 증산교 교리의 핵심인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였는데, 1902년부터 1909년까지 7년간 모악산 근방을 중심으로 하여 포교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 이외에도 전주·태인·정읍·고부·부안·순창·함열 등 전라북도 각 지역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자신이 세운 종교를 “만고(萬古)에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만 하였을 뿐, 증산교라는 명칭은 훗날 그의 호를 따서 일컬어진 것이다.
1907년 추종자 20여 명과 함께 고부경무청에 의병모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추종자들은 15일 만에, 강일순은 4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1909년 갑자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하여 사방에 흩어져 있던 추종자들을 모은 뒤 세상에 있는 모든 병을 대속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가 죽자 추종자 몇 사람이 남아 장례식을 치렀는데 그 뒤 강일순의 교단은 다시 부흥하게 되어 민족항일기에는 한때 6백 만 신도를 호칭하던 보천교 등으로 계승되었으며, 현재에도 수십 개의 교파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는 후천세계에 관해서 예언한 『현무경 玄武經』을 남겼으며, 증산교에서는 교단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신앙대상으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이상호,상생사,1926)

  • 대순전경  (이상호, 증산교본부, 1975)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노길명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증산 강일순&ridx=0&tot=76




박중빈(朴重彬)

원불교인물

 일제강점기 원불교의 전신인 불법연구회를 조직한 종교창시자.   


박중빈


이칭 ; 처화(處化), 소태산(少太山), 대종사(大宗師)


분야 ; 원불교
유형 ; 인물
성격
종교창시자
성별
출생일
1891년
사망일
1943년
본관
밀양(密陽)
시대 ; 근대
성격 ; 종교창시자
성별 ;
출생일 ; 1891년
사망일 ; 1943년
본관 ; 밀양(密陽)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일제강점기 원불교의 전신인 불법연구회를 조직한 종교창시자.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처화(處化), 호는 소태산(少太山). 원불교에서는 대종사(大宗師)라고 부른다. 1891년 5월 5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용리영촌(永村)에서 아버지 박성삼(朴成三)과 어머니 유정천(劉定天)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범상하지 않았으며 신의가 있고 탐구적인 소년이었다. 박중빈은 7세 때에 청명한 하늘을 보고 우주·자연 현상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며, 인간의 생사와 존재문제에까지 확장시켜 나갔다.
11세 때 시향제(時享祭)에 참여하였다가 산신의 권능에 대해 듣고,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 대상으로 산신을 만나기 위하여 ‘마당바위’에서 4년 동안 산상기도를 올렸다.
15세 때 영광군 군서면 마읍리의 양하운(梁夏雲)과 혼인하고, 이듬해 정월에 신년 인사차 처가에 갔다가 고대소설 『조웅전 趙雄傳』 등에 나오는 도사 이야기를 듣고, 도사를 만나기 위하여 20세까지 정성을 다하였다.
20세에 구도행각의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구도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마음 깊이 자리잡은 숱한 의문들은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 하는 한 가지 생각으로 뭉쳤다.
25세 때부터는 이 생각마저 잊고 모든 것을 떠나 삼매의 경지로 가는 일체 돈망(頓忘)의 대정(大定)에 들었다가,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 새벽에 대각(大覺)을 이루었다. 원불교에서는 이날을 ‘개교일(開敎日)’로 정하고 있다.
그는 대각의 안목으로 당시의 사회현상과 인류의 장래를 관조한 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고, 물질문명에 끌려가는 인류의 정신구원을 위한 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교단창립과 사회개혁의 첫 사업으로 그를 따르는 아홉 제자와 함께 1917년 저축조합을 만들어 허례폐지·미신타파·금주금연·근검저축 운동을 펼쳤다. 거기서 모아진 자금으로 1918년에 간척사업에 착수하였다.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시작한 간척사업은 교단창립의 정신력 결집과 함께 민중들에게 생활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게 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간척사업의 성공으로 교단의 경제 기초확립과 빈곤한 인근주민에게 농경지를 마련하게 함으로써 생산증대를 가져다 주었다.
간척사업 기간 중에도 밤에는 종교적 인격수련을 계속하여 영육쌍전(靈肉雙全) 이념을 구현시켰다. 사업이 완료된 1919년에는 무아봉공(無我奉公)의 공익정신을 다지기 위한 특별기도를 실시하게 하여 법계(法界)의 감응을 체험하도록 하였다.
이를 ‘법인기도(法認祈禱)’라 부르는데 이기심으로 가득찬 인간에게 대아실현(大我實現)의 표본을 보여준 정신적 자각운동이었다.
기도를 마친 그는 몇몇 제자들을 대동하여 봉래산(蓬萊山)에 들어가 세계와 인류를 구원할 교법을 제정하였다. 1924년에는 전라북도 익산에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을 내걸고 종교 교화활동을 시작하였다.
선원(禪院)을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과 신도훈련을 병행 실시하였으며, 상조조합을 개설하여 근검저축정신 고취, 상호협동을 통한 생활안정, 주경야독의 공동생활을 펼쳐나갔다. 전통적인 예법을 혁신하여 ‘신정의례(新定儀禮)’를 제정하는 등 교화의 기틀이 될 여러 가지의 법규도 제정하였다.
1937년에는 대각한 진리를 일원상(一圓相)으로 상징하여 신앙과 수행의 표본을 삼도록 하는 일원종지(一圓宗旨)를 선포하였다.
1943년 3월에는 기본경전인 『불교정전 佛敎正典』을 친감하여 발행하고, “나의 일생 포부와 경륜과 그 대요는 이 한 권에 거의 표현되어 있나니, 삼가 받아 가져서 말로 배우고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여 이 법이 후세만대에 전하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1943년 5월 「생사의 진리」라는 설법을 마치고 6월 1일에 열반하였는데, 세수(世壽)는 53세, 법랍(法臘) 28년이었다. 열반 후에 교단의 결의에 따라 그의 법위를 대각여래위(大覺如來位)로 받들고, 유해(遺骸)는 원불교 중앙총부의 대종사 성탑에 안치하였다.
그는 교단 창업의 기본계획을 36년 1대로 잡고 이를 다시 12년씩 3회로 나누어, 제1회는 경제기반확립, 제2회는 교서정비, 제3회는 인재양성에 역점을 두었다.
일제 말기에 불법연구회가 민족단체로 지목받아 극심한 탄압 속에서 교단 존폐위기에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그 위기를 넘게 하는 계기를 삼도록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원불교교전(圓佛敎敎典)』(정화사,1962)

  • 『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정화사,1975)

  • 『소태산대종사(少太山大宗師)』(손정윤,원불교출판사,1975)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박상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