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랑방 이야기

개항장과 삼천리 강산의 경관

신동아 2005년 1월호에 별책부록으로 펴낸 ‘100년 한국’에 있어 개항기에 관련된 ‘개항장과 삼천리 강산의 경관’을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

 

100년전 한국

100년 전의 사진을 보고 읽는 것은

빛 바랜 옛 사진을 보면 누구나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게 된다. 언제였을까, 어디였을까, 함께 사진을 찍은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 100년 전 한반도 곳곳을 담은 사진들이 있다. 세월은 사진을 역사적인 유물로 만들었고, 후세의 우리는 이 사진들을 단순히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읽어내야만’ 한다.

생생한 사진자료는 그 특성상 문자로 된 기록이 미처 알려주지 못하는 부분을 이야기해주곤 한다.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복장이며 표정, 배경과 풍광이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사진의 ‘기록성’이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며 ‘읽는’ 일이 한가한 날의 소일거리에 그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한말 우리 선인들의 일상이나 고적, 풍경, 풍속을 담은 사진들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외국인, 특히 서양의 외교관이나 여행자, 기자, 선교사들이 기록을 남기기 위해 찍은 사진들이다. 식민지 지배를 준비하던 일본인들이 한국의 사정을 조사하기 위해 찍은 것도 있다.

1860년대 이후 외국에 나갔던 한국인이 초상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1880년대 초에 이르러 개화에 관심을 갖고 있던 몇몇 인사가 직접 사진을 찍은 경우도 있지만 역시 대중화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한 세기 전 한반도의 땅과 사람들을 찍은 사진은 대부분 외국인의 손으로 촬영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번에 ‘신동아’가 공개하는 사진들은 본래 일본인이 보관하던 개인 사진첩에 담겨 있던 것이다. 사진 속 곳곳에 드러난 단서를 종합해보면 대한제국 시기, 특히 1906~10년에 찍은 사진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1880년대 풍경을 담은 사진도 일부 눈에 띄는데 그 중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일본에 소개된 사진도 있는 듯 하다.

일본에서는 한국에 관련된 사진화보집을 개항 이후 일찍부터 간행했다. 풍속이나 생활상을 담은 사진들 가운데는 연출된 작품도 없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국내에서 간행된 한말 사진집은 대개 이 무렵 일본에서 출간한 사진집을 재편집한 것이다. 예컨대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와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서문당, 1986) 같은 경우다. 서양인이 찍은 사진들을 정리한 것도 있다. ‘사진으로 본 백년 전의 한국(가톨릭출판사, 1986/1997)’ 같은 책이다.

‘신동아’가 펴내는 이 화보집에 수록된 사진은 상당수가 처음 공개되는 것이지만, 풍속이나 생활상을 담은 사진 가운데 몇몇은 앞에서 열거한 사진집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한 사진 가운데 일부는 혹 사진엽서로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공개된 사진이라고 해서 일부러 제외하지는 않았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는 어느 쪽이 원본인지 확인하기도 어렵거니와, 당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해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모두 180장 내외로, 고적·풍경, 풍속·생활, 인물·사건 관련으로 분류했다. 전국 각지의 고적과 풍경사진이 상당부분을 차지해 120점, 그 가운데 서울의 고적과 풍경을 담은 사진이 30점이다. 본 사진집에서는 이들을 재구성해 총 5부로 나누었다.

1900년대에 촬영된 사진 속 풍경이 1910년대, 심지어는 1930년대 한반도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에 의아해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우리 농촌사회에 근대화 바람이 분 것은 196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부터였다는 사실, 또 외국인의 눈은 언제나 이국의 토속적인 풍경에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라는 점이 답이 될 것이다.

각각의 사진에 부가한 설명은 여러 서적을 참고·인용한 것이다. 특히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1991년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크게 의존했다. 혹시라도 부정확한 내용이 있다면 독자의 지적을 달게 받고자 한다.

이 사진들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꼭 100년 전인 1905년, 한국은 일본의 강제에 의해 이른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한국이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출발점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한국은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었고,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는 대부분 국민의 반대 속에서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 2005년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지 100년이고, 광복 60주년인 동시에, 한일 양국이 다시 교류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따라서 올해는 우리에게 일본이라는 가깝고도 먼 나라와 복잡하게 얽힌 과거를 되돌아보고, 동시에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일 양국정부는 정상회담을 통해 국교정상화 40주년인 올해를 ‘우정의 해’로 지정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100년 전에도 한일 사이의 ‘우정’이 강조된 바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정은 언제든 깨지기 쉬운 질그릇일 뿐이다. 진정한 한·일 양국의 우정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 못지않게 뒤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두 나라 사이에는 ‘우정’이라는 말이 여러 의미로 사용된 짧지 않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긴 이야기는 필요 없을 것이다.

먼저 100년 전 사진 180점을 ‘보자’. 그러고 나서 다시 한번 사진을 ‘읽자’. 이 사진을 찍은 100년 전의 일본인들이 단순한 호기심으로 한국의 풍물과 한국인의 생활상에 카메라를 들이댄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놀라우리만큼 세밀한 조사를 벌였다.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풍속·생활 등 인문환경부터 동식물·광물 등 자연환경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몰랐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은 부분까지 조사했다.

이는 한국 통치를 위한 기초 조사이자 한국의 후진성을 부각시켜 일본 지배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측면도 있었다. 이 사진들의 이면에 일제의 한국침략 과정의 단면이 숨어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바라보자면 이들 사진, 특히 일상의 삶을 다룬 사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근대화되지 않은 상태, 혹은 가난과 불결일 것이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난 모습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한가로움과 여유, 더불어 살던 당시 사람들의 삶을 읽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한말의 역사와 시대의 아픔을 읽어내는 눈은 더욱 중요하다.

너무 무겁게 시작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가벼운 호기심으로 사진 자체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사진을 읽어내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독자들이 간도의 풍경을 담은 마지막 사진까지 찬찬히 들여다보고 책을 덮는 순간 을사조약 강제 체결 100년과 광복 60년, 한일국교정상화 40년이 되는 2005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면 이 사진들의 가치는 충분한 것이다.

최기영 (서강대 사학과 교수·한국근대사)

일러두기

1. 이 책은 대구 유컬렉션(대표 유성철)이 2003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입수한 개인사진첩에 담긴 180여장의 사진 전체를 복사촬영해 제작했다. 이 가운데 몇몇은 학계와 언론에 일부 알려진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이번에 새로 공개되는 것이다. 사진의 순서 및 배치, 크기 등은 원 사진첩을 따르지 않고 해설자와 ‘신동아’ 편집실의 판단에 따라 5부로 재분류해 구성했다.

2. 이 책 및 각 부의 제목은 조선시대와 구한말을 다룬 문학작품에서 인용·차용해 ‘신동아’ 편집실이 붙인 것이다. 예를 들어,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바람은 공산에 찬데’라는 3부 제목은 조선 초기의 무인 김종서(1390~1453)의 시조로부터 변용했다.

3. 원 사진첩에는 촬영자나 촬영일자, 제작자 이름과 같은 구체적인 정보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각 사진 옆에 손으로 직접 쓴 한문 몇 글자가 전부다. 책 본문의 사진에 달려 있는 해설 가운데 굵은 글씨는 주로원 사진첩의 표기를 옮겼고, 설명부분은 이를 바탕으로 해설자가 다양한 자료를 참고해 작성했다.

4. 각 부 해설과 사진설명을 맡은 최기영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저서로 ‘대한제국시기 신문연구(일조각, 1991)’,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일조각, 1997)’, ‘식민지시기 민족지성과 문화운동(한울, 2003)’, ‘한국근대계몽사상연구(일조각, 2003)’ 등이 있다. 한국근대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관한 논문을 다수 집필했다.

 

목 차

▷ 제1부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 격동기 민초들의 일상과 죽음


▷ 제2부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 장터와 장인(匠人), 경제생활의 풍경


▷ 제3부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바람은 공산에 찬데
- 대한제국의 끝과 통감정치의 시작


▷ 제4부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 서울과 궁궐, 평양과 성곽 이야기


▷ 제5부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 개항장과 삼천리 강산의 경관


▷ 사진첩 소장자 유성철 유컬렉션 대표

 

 

제5부 - 개항장과 삼천리 강산의 경관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 편집기획·진행: 황일도

입력2004-12-28 19:15:00

 

2005년 01월 호

제5부 - 개항장과 삼천리 강산의 경관

1/18

 

제5부에는 서울과 평양을 제외한 전국의 고적과 풍경 사진을 모았다. 수원·인천·개성·공주·충주·군산·목포·대구·부산·함흥·회령 등 큰 도시의 풍경을 담고 있으며, 개항장의 경우 관청이나 거류지 등 일본인과 관련된 사진이 많다. 강원도와 황해도 관련 사진은 없고, 전라도 역시 개항장의 사진 몇 장이 전부다.

우선 수원 화성을 공들여 찍은 사진이 여럿이다. 장안문·화서문·화홍문·방화수류정·화성장대·용연·동북공신돈이 그것이고, 건릉과 화녕전, 용주사까지 넣으면 사진의 대부분이 정조와 관련된 유적이다. 잘 알려진 대로 화성은 전통적인 축성방법에 근대 서양 건축공법을 원용해 축조한 성이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뒤주에 갇혀 죽은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며 1794년부터 96년까지 이곳에 대역사를 펼쳤다.

인천의 사진은 당시 일본인 거류지와 이사청, 부두의 풍경을 담고 있다.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1월 개항한 인천은 서울과 가까워 외국인의 출입이 잦고 외국상사도 많이 주재했던 곳이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고 조선시대에도 유수관(留守官)이 파견된 지역이다. 선죽교와 두문동비 등 고려의 충절이 서린 명소를 비롯해 태조릉과 관음사 등 고려 유적을 담은 사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인삼밭 사진도 흥미롭다. 그밖에 경기지역에 속하는 유적으로는 북한산 중흥사의 대웅전,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파주 광탄의 쌍미륵 사진이 있다.

충청도에서는 공주와 충주 사진이 몇 장 포함되었다. 공주는 공산성에서 찍은 것이고, 충주는 임경업을 기리는 충렬사와 약사, 육각정 등을 찾을 수 있다. 은진 관촉사 미륵불도 렌즈에 담겼다. 전라도는 군산과 목포의 일본인 거류지와 이사청을 찍은 사진뿐이다.



경상지역의 경우, 대구의 사진은 별로 없지만 달성공원에 세운 신사로 보이는 사진이 이채롭다. 부산을 찍은 사진은 모두 일본인과 관련된 것이다. 1876년 개항한 부산은 한국 침략을 도모하는 일본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이다. 초량을 거류지로 삼은 일제는 그 세력을 확대해나갔고, 1905년 개설되어 시모노세키(下關)와 부산을 오간 관부연락선을 통해 일본 국내와 한국을 연결시켰다. 또한 경부선 철도를 개통해 서울과의 거리를 시간적으로 크게 줄였으며 부산 연안 개펄을 매립해 시가지와 항만을 확장했다. 사진에 보이는 잔교나 매립지, 세관공사 등은 그 과정의 일면을 담은 풍경이다.

함경도 지역은 주로 함흥과 회령의 풍경을 담고 있다. 청나라 지역인 간도 두 곳의 시가지와 안둥(지금의 단둥) 부두 사진도 포함되어 있다. 함흥은 함경도의 중심도시로 함흥평야를 비롯해 역사 유적도 적지 않은 곳이다. 두만강가의 국경도시인 회령은 청국과의 무역 및 탄광지로 유명했다. 한국인이 대거 이주한 간도지방의 훈춘 및 옌지의 시가지 풍경이 일본인이 한국을 촬영한 사진집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당시 간도가 한반도 생활공간의 일부였음을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개항장 이외의 지역은 대체로 고적과 풍경을 담고 있다. 한가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소중한 사진들이다. 이제는 사라져 볼 수 없는 고적이 적지 않고, 변해버린 풍광까지 감안하면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미지들이 대부분이다. 언뜻 보기에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듯한 100년 전 고적의 모습에서 우리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가두어 가꾸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숨쉬던 고적의 풍경이 더 정겨워 보인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당장이라도 삼천리 강산 곳곳에 오늘날까지 남아 숨쉬는 고적을 찾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날 듯 하다.

 

수원 장안문(長安門) 수원 화성(華城)의 북문으로 정조 때 건축되었다. 서울의 남대문과 비슷한 형태지만 규모가 더 크고 바깥에 옹성을 갖추었다. 무지개문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양쪽 계단으로 오르게 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 후기의 2층 건물. 인조 때 남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았다. 아래가 넓은 데 비해 2층은 좁은 형태이다. 정면에 ‘수어장대’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수원 화서문(華西門) 수원 화성의 서문으로 보물 제403호. 단층 누각에 옹성을 쌓았다. 멀리 장안문이 보인다. 화성은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이 통행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화서문은 비교적 한적한 편이었다.

 

충주 관아 비석 조선시대 관아 근처에는 전임 수령을 기리는 비석이 많았다. 대개는 수령들의 치적과 무관하게 만들어지곤 했다고 한다. 사진 전면의 비석에 새겨진 희미한 글귀로 보아 어느 현감의 ‘불망비(不忘碑)’였음을 알 수 있다.

폭포 충주와 제천 사이의 어느 산속에 있는 폭포인 듯한데, 정확한 위치는 확인할 길이 없다. 바위를 끼고 쏟아져내리는 물줄기가 용의 모습을 닮았다. 여름철 피서지로 인기를 누렸을 법하다.

충주 육각당(六角亭) 연꽃이 만발한 연못 한가운데 있는 육각 정자가 운치를 자아낸다. 현재 육각정과 연못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충주교육청이 들어서 있다.

대구관찰부 관아 대구는 조선 중기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영남지방의 중심지가 되었다. 관아 건물은 1807년에 지은 것으로 정청은 선화당(宣化堂)이라고 불렀다. 현재 선화당은 대구 중앙공원에 복원되어 있다.

 

대구 거리 상점들이 즐비한 대구의 거리. 한복 차림을 한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대구 달성공원(達成公園) 달성은 본래 삼국시대의 성곽인데, 1906~07년에 성곽을 해체하고 도로를 만들어 공원으로 사용했다. 일본거류민단이 이곳에 신사(神社)를 세웠다고 하는데, 사진에 보이는 것이 그 신사로 추정된다.

부산 일본인 거리 부산의 일본인 거리. 지게로 짐을 나르는 짐꾼은 한국인이다.

부산항 부산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로 개항장이 되었다. 일제는 1905년 전후 경부선 철도 개통과 관부연락선(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던 배) 취항, 부산항 축항(築港)공사 등 일련의 사업을 통해 부산을 한국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사진은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는 아미산에서 내려다 본 부산항.

 

부산 초량 부산 용두산 아래 초량은 숙종대부터 왜관(倭館)이 있던 곳. 개항 이후 이곳은 일본인 거류지가 되었다.

부산항 매립지 부산은 연안의 땅이 몹시 좁았기 때문에 새로운 땅을 만들기 위해 1902년 개펄 매립공사를 시작했다. 매립지에 부산역 부지가 만들어지고 부두지역이 확대되어 세관과 제1부두가 완성됐다.

부산항 잔교(棧橋) 1905년 관부연락선이 취항하자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 일본인이 크게 증가했다. 이에 일제는 1906년 항만에 철도잔교를 놓아 통행을 도왔다가 1918년에 철거했다. 사진은 관부연락선에서 내려 잔교를 건너는 일본인들.

부산세관 부산이 무역항이 되면서 관세수입이 증가하자 1882년 해관(海關)이 설치되었다. 부산세관으로 이름이 바뀐 1906년 무렵 일본인들은 세관을 새로 지었다. 사진은 공사에 필요한 목재를 나르는 장면으로 보인다.

 

부산 일본군수비대 1895년 일본군이 부산에 주둔했지만, 이 무렵 한국군은 본래 있던 군진과 수영마저 폐지되고 진위대(鎭衛隊)도 파견되지 않았다. 일본군수비대는 송현산 북쪽 기슭에 병사를 짓고 주둔하다가 훗날 대신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목포이사청과 우편국 목포는 1897년 개항했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본영사관이 이사청으로 개편되었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일본 기관들이 들어섰고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군산 전경 1899년 개항한 군산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보내는 항구였다. 미곡반출의 관문이었던 것. 사진에 한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 거류지임을 알 수 있다.

목포 시가 바다가 보이는 목포 시가지. 일본인 거류지로 보인다.

 

함흥 남대문 함흥성의 정문으로 남화문(南華門)이라고도 불린 2층 누각. 왼쪽에 보이는 종각의 범종은 현종 때 주조된 것이라고 한다. 오가는 사람이 많고 상점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함흥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함흥 북문과 성천강 함경도에서 가장 넓은 평야인 함흥평야를 가로지르는 강이 성천강이다. 함흥 북문은 성천강으로 나가는 관문이었을 것이다.



함흥 만세교(萬歲橋) 성천강을 가로지른 나무다리로, 군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는 뜻에서 조선 태조가 붙인 이름이라 한다. 1905년 러일전쟁 중에 소실된 것을 일본군이 1908년 다시 세웠으나, 1928년 대홍수로 유실되자 1930년 철근콘크리트로 건설했다. 정월대보름에는 이곳에서 다리밟기 놀이를 했다.

 

함흥 향교 조선 초기에 현유(賢儒) 배향과 지방민의 교육 및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유생들이 모여 있는 누각이 제월루(霽月樓)다. 대성전과 명륜당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함흥의 한국인 마을 함흥 어딘가에 있었을 한국인 마을. 사내들이 마을을 가로지른 내에서 지게로 져온 무를 씻고 있다. 담뱃대를 든 노인, 물건을 이고 가는 아낙, 아이들, 강아지까지 한가한 마을의 하루를 짐작할 수 있다.

함흥 동문 밖 귀주사(歸州寺) 고려 때 창건된 귀주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글을 읽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대웅전 앞에서 일본인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함흥 남문 밖 거리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 한가운데 짐을 실은 소달구지가 서 있다. 분위기로 봐서는 장터인 듯하다. 사진 왼편 병원 간판을 내건 가게 옆으로 더벅머리 청년이 지나간다.

 

 

회령 시가지 회령은 함경북도 국경지역으로 조선 후기부터 청국과 무역을 하던 곳이다. 두만강 연안의 이 도시는 탄광 덕분에 빠르게 발전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의 회령 시가지에 소달구지들이 분주히 오간다. 오른쪽 산 중턱에 성문이 보인다. 전선줄이 하늘을 가른다.

회령 동문 안 거리 회령 동문 어귀의 풍경. 쉬고 있는 소달구지며 한가해 보이는 노인네, 성을 나서는 아낙의 모습이 마냥 평화롭다.

회령우편국 회령에 설치돼 있던 우편국 전경.

회령 현충사비(顯忠祠碑) 회령읍내의 현충사에 있는 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8명의 공적을 기려 세운 것으로, 높이 182㎝, 너비 60㎝ 크기의 현무암 석비다. 숙종 때 만들어졌다.

 

배로 두만강을 건너는 풍경 두만강을 건너면 간도(間島)다. 많은 한국인이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간도지방으로 이주했다. 두만강을 건너는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본 관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훈춘(琿春) 시가 훈춘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현의 중심지로, 간도로 이주한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다. 1920년 이른바 ‘훈춘 사건’이 일어나 많은 한국인이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한 가슴 시린 고장이다.

옌지(延吉) 국자가(局子街) 중국 지린성의 옌지에도 한국인이 많이 살았다. 지금은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가 되었다. 국자가는 옌지의 중심지인데, 사진은 청나라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담았다.

안둥현(安東縣) 부두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의 도시로 지금의 단둥(丹東). 평안북도 신의주와는 철교로 연결돼 있다. 한국인들이 만주나 중국으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관문이었다. 사진은 안둥 부두에 정박한 한국 사람들의 목선이다.

 

수원 화홍문(華虹門) 수원 화성의 북쪽 수문으로 북수문(北水門)이라고도 불렀다. 7개의 석조 무지개로 수문을 만들고 수문 돌다리 위에 다시 처마 곡선이 유연한 문을 만들었다. 왼편 뒤쪽으로 장안문이 보인다. 주변의 자연풍광이 아름답다.

수원 전경 멀리 화성이 보이는 수원의 모습. 동생을 업은 아이 앞으로 물이 마른 내와 다리가 보인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뒤섞여 있다.

수원 화홍문과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왼쪽이 화홍문이고 오른쪽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가 방화수류정이다. 이 정자에 오르면 주변을 두루 살피고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소를 매어두고 한가롭게 쉬는 농부와 주변 경관이 썩 잘 어울린다.

 

건릉(健陵) 경기도 화성군 안녕리에 있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의 합장릉. 홍살문 뒤에 제례를 치르는 정자각(丁字閣)이 있다. 정조가 승하한 직후에는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묘인 현륭원(顯隆園 ; 현재의 융릉) 동쪽에 능을 만들었지만 훗날 왕후와 합장하며 서쪽으로 옮겨 건릉이 되었다.

화성장대(華城將臺) 성벽 정상에 있어 안팎을 두루 살피며 군사를 지휘하던 2층 문루다. 정조가 쓴 ‘화성장대’ 현판이 걸려 있었다. 화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서장대(西將臺)라고도 불렀다.

화녕전(華寧殿) 정조의 어진(御眞)을 보관하는 전각. 부왕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를 지극한 효성으로 받든 것을 본받고 기리기 위해 순조가 세웠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 옆에 있는 돈대(墩臺)다. 공심돈이란 속이 빈 돈대라는 뜻. 내부는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둥근 벽을 따라 계단이 놓여 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화성에는 모두 세 곳에 공심돈이 설치되어 있었다.

 

수원의 서호(西湖) 화성의 서쪽에는 농업용 관개시설로 만든 인공호수 축만제(祝萬堤)가 있다. 서호라고도 하며 정조 때 축조됐다. 항미정(杭尾亭)이라는 정자가 이곳의 경관과 풍치를 돋보이게 했는데, 사진은 항미정에서 바라본 서호 풍경이다.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 1906년 일제 통감부가 일본 농법의 한국 이식을 목적으로 수원에 세운 기관이 권업모범장이다. 한국 농업의 시험·조사보다는 일본 농법의 지도·권장에 치중했다.

방화수류정과 용연(龍淵) 방화수류정은 용두암(龍頭岩) 위에 세워졌으며 아래에 있는 연못은 용연이라 불렀다. 용연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수원 성곽 주변에서 가장 경관이 좋았다. 못가에는 돌로 만든 용두가 자리잡고 있었다.

용주사(龍珠寺)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에 있는 절.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능사(陵寺)다. 정조가 김홍도(金弘道)에게 그리게 해 목판으로 만든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이 보관되어 있다.

 

수원 남제(南堤)의 버드나무길 남제는 수원 남쪽에 있는 저수지로 순조대에 축조되었다. 이 곳의 긴 버드나무길은 남제장류(南堤長柳)라 하여 수원8경 가운데 하나였다. 소에 물건을 싣고 지나던 장정이 사진에 담겼다. 우산을 든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천항과 시가 인천은 1883년 1월 개항했다. 서울의 관문인 만큼 일찍부터 도시가 발전하여 시가를 형성했다. 사진은 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 내려다본 인천항.

인천 일본인 거리 인천의 중심가. 일본식 4층 건물이 들어서 있고 오른쪽에는 서양식 3층 건물도 보인다. 한복을 입은 한국인이 일본인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인천의 일본인 거주지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는 일본인이 모여 사는 조계(租界)가 만들어졌다. 지금의 자유공원 남쪽이다. 사진은 일본인 거류자가 급증하면서 형성된 주택가. 곳곳에 전신주가 서있다.

 

인천 부두 배에 실을 물건과 부린 물건이 즐비하게 쌓여있다.

인천 일본영사관 인천이 개항되자마자 일본은 서양식 2층 목조건물의 영사관을 준공했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영사관을 이사청으로 개편해 청사로 사용했다. 1910년 이후에는 인천부 청사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인천 중구청 자리이다.

북한산 중흥사(重興寺) 대웅전 중흥사는 숙종대에 북한산성이 축성된 뒤 산성을 지키는 승군(僧軍)을 관장하며 큰 사찰이 되었으나, 1915년 홍수로 무너진 뒤 중건되지 못했다. 지금은 주춧돌과 축대만이 남아 있다.

파주 용미리 쌍미륵 경기도 파주 광탄면 용미리 용암사에 있는 마애입상. 보물 제93호. 고려 초기 석불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 들어 조선 세조 11년(1465)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모습을 미륵불로 조각한 것이다.

 

개성 관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은 조선시대에 개성부가 되어 유수(留守)가 파견되었다. 1906년 개성군으로 격하되었다가 1930년 다시 개성부로 환원되었다. 문루는 이층으로 위층엔 마루를, 아래층엔 4각으로 다듬은 돌기둥을 놓았다.

개성 서대문 원 사진첩에는 이 사진에 ‘개성 서대문’이라는 간단한 설명만이 붙어 있다. 오른쪽 큰 나무 아래 있는 정자는 길 가던 이들이 잠시 쉬어가는 자리였을 것이다.

개성 인삼밭 개성은 인삼재배의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산삼이 수요에 비해 크게 모자라자 인삼재배가 시작됐는데, 조선 후기부터 개성이 대표적인 재배지로 떠올랐다. 이 때문에 개성상인은 인삼교역으로 유명했다.

개성 관음사 대웅전 개성 천마산 기슭에 있는 관음사의 대웅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관음사는 주변 경치가 빼어나 ‘개성금강’이라고도 불렸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고, 앞에 높이 4.5m의 7층석탑이 있다.

 

개성 선죽교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된 곳으로 알려진 개성의 돌다리. 앞에 보이는 비각에는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이 있다.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고 전해지는 다리 옆 시내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은진미륵(恩津彌勒) 논산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고려 초기의 미륵보살상. 보물 제218호. 머리 부분이 커서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다. 높이가 18.2m나 되는 고려시대 최대의 석불입상으로,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비교하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석불 앞에 보물 제232호인 석등이 보인다.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공주 공산성(公山城) 쌍수정(雙樹亭)에서 금강을 내려다본 풍경. 인조는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이곳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쌍수정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조대에 세워졌다는 정자다.

공주 진남루(鎭南樓) 공산성의 남문. 높은 석축기단을 좌우 대칭형태로 조성한 후, 두 석축기단에 걸쳐 누각을 세워 2층과 같은 효과를 냈다.

충주 충렬사(忠烈祠) 임경업어제비(林慶業御製碑) 충주 충렬사에 배향된 충민공(忠愍公)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정조의 어제비. 임경업은 조선 인조 때의 무장으로 친명반청(親明反淸) 활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억울하게 죽었다고 하여 고려 무신 최영(崔瑩)과 함께 무속신앙에서 가장 존숭받고 있다.

충주 약사(藥寺)의 약사전과 삼층석탑 약사는 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단호사(丹湖寺)의 옛 이름.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선 숙종 때 중건되었다. 약사전 내에는 고려시대 철불좌상(보물 제512호)이 봉안되어 있다. 앞뜰의 3층석탑과 깊게 휜 소나무가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신동아 2005년 1월호

shindonga.donga.com/3/all/13/104111/1

'사랑방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6·25전쟁, 함께 만든 평화  (0) 2020.07.20
금태칠장(金胎漆匠) 김정중(金丁中)  (0) 2020.07.07
kbs 대기획 23.5  (0) 2020.04.07
민족종교 3인  (0) 2020.02.03
안기생(安期生)   (0) 2019.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