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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창간특집> 사라진 황금의 땅 '신라'… 1000년 도시의 힘 '경주'

 지난 4월 4일 "건설경제"의 창간특집으로 보도한 사라진 황금의 땅 '신라'에 관한 3편의 기사를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
<strong></strong><strong><span style="font-size: 14pt;"><창간특집> 사라진 황금의 땅 '신라'… 1000년 도시의 힘 '경주'</span></strong>
기사입력 2017-04-04 08:08:26. 폰트 폰트확대폰트축소 
8세기 세계 4대 도시’로 주목 받은 전략도시 서라벌… 그 속엔 통일과 미래를 향한 '불멸의 꿈’이 담겨 있었다



“동쪽 대양의 끝에는 ‘신라’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서쪽 끝에 있는 ‘이상향(Khalidat)’에 대비될 정도다. 서쪽의 이상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라는 비옥하고 쾌적한 기후를 가진 실제로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유토피아다.”

- 1108∼1111년경 작성된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 중 일부

중세 아랍인들에게는 두 개의 이상향이 있었다. 하나는 서방 신비의 섬 아틀란티스이고, 다른 하나는 동방의 신라였다. 9∼5세기 아랍권 지리서 20여권에는‘중국 동쪽에 위치한 황금의 나라’라는 기술이 꽤 많이 등장한다.

열사의 땅에 사는 이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황금이 지천에 깔려 있어, 가옥은 금으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고, 금제 식기를 쓰며 심지어 개의 사슬도 금으로 만드는 나라였다.

846년에 편찬된, 아랍인의 신라 진출을 입증하는 최초 기록인 이븐 쿠르다드비의 <왕국과 도로총람>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중국의 동쪽 칸수의 맞은편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다. 산이 많고 왕이 많은 나라이다. 그곳에는 금이 많다. 신라로 진출한 무슬림들은 자연환경의 쾌적함 때문에 영구정착하여 떠날 줄을 모른다.”

신라의 중심 서라벌(왕경)은 한반도의 중심이었으며 세계의 주목을 받는 도시였다. 삼국 통일 이후 동아시아 및 멀리 서역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국제도시로 성장했고, 특히 8세기에는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중국의 장안,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바그다드와 더불어 세계 4대 도시 중 하나로 꼽혔을 정도다.

1000년 왕도였던 신라 서라벌은, 다시 1000년이 지나 드디어 원래 모습을 일부나마 되찾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경주시는 문화재청과 함께 2014년부터‘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추진단’을 만들어 2025년 완료를 목표로 총사업비 945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복원 대상 사업은 월성과 황룡사, 동궁과 월지, 월정교, 대릉원일원(쪽샘 등), 대형고분, 신라왕경 중심구역 방, 첨성대 등이다.

사라진 도시에 담긴 우리 선조의 도시계획에 대한 지혜와 긴 안목은 2017년 우리에게 다시금 도시의 의미를 되묻는다. 도시란 무엇인가. 한발 더 나아가, 국가의 수도란 무엇일까. 

 

 

  
고고학계 고증을 통해 완성한 8세기경 전성기의 신라 왕경의 이미지 

 

사라진 도시가 있다. 기원전 57년 도읍지로 선정된 이후 935년 왕조가 패망할 때까지 무려 992년 동안 한 국가의 수도 역할을 했다. 그곳이 바로 서라벌, 신라 왕경이다. 국가의 성립부터 패망까지 도읍지 이전 없이 1000년이나 버틴 국가는 신라가 유일하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도시를 만드는 첫 단계부터 한반도의 중심, 통일 국가의 비전을 담고 구획 및 계획에 치밀함을 기했기 때문이다. 21세기 현재 우리의 도시계획은 1000년 국가의 비전을 담은 신라의 것보다 낫다고 자부할 수있을까. 세종시만 봐도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한양보다 컸던 신라 왕경의 규모

당시 신라 왕경 서라벌의 인구와 크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서라벌 인구 수를 두고 학계는 크게 90만명 설과 18만명 설로 나뉜다. 이유는 <삼국유사>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신라 전성기 시절, 경중(수도의 안쪽)에 17만8935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부유층의 대저택)이 있다고 기술했다.

한편 일부 역사학자는 일연이 17만8936구(口)를 호(戶)로 잘못 기입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왕경의 남북 길이는 3075보(步)로 약 5.4㎞에 동서 길이는 3018보, 약 5.3㎞였는데 그렇게 좁은 공간에 17만호가 주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과연 불가능했을까. 당시 신라는 통일 이후 갑자기 인구가 유입되며 도시가 확대되자 정방형으로 도시의 구획 정리를 시도했다. 큰 짜임새는 1920년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파리 도시계획안과 비슷하다.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안 핵심 중 하나는 주거 밀도를 높이는 것이다.

신라 역시 인구 집중으로 택지난이 심해지자 신분별로 주택 면적을 제한했다. 진골은 24척(약 52㎡), 6두품은 21척, 5두품은 18척 등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이같이 좁은 면적의 집에 살면서도 거주지가 끊임없이 확장돼 왕경에서 동남쪽으로 21㎞가 떨어진 도시 외곽 관문성 인근에서는 숯을 굽던 가마터가 20기나 발견됐다. 인구 집중의 규모를 어림짐작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삼국유사>가 기록한 인구 17만8936호(인구 90만명)는 충분히 수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일본 고고학계는 삼국 통일 이후 신라 왕경의 인구가 250만명을 넘어섰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어느 쪽을 지지한다 해도 신라 왕경의 규모는 역대급이었다. 조선시대 한양의 인구와 비교해보면 신라 왕경의 규모를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1600년 전후로 한양의 인구는 10만명을 겨우 유지하다 조선시대 말에 이르러 20만명을 간신히 넘어섰다. 현재 시를 크게 확대한 경주시 인구가 대략 26만명, 경주군을 포함하기 이전인 1990년 경주시 전체 인구가 18만명에 지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신라 왕경이 당시 세계 4대 도시에 꼽혔던 이유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유네스코는 지난 2000년 왕궁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신라 월성을 비롯해 대릉원과 황룡사, 그리고 명활산성 등 경주역사유적지구 5곳을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사라진 도시를 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인데 그만큼 신라 왕경이 세계 도시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8~9세기 신라가 지금의 팽창 일대에 닦은 신도시와 모량리 유적지 모습. 신라의 \'이방제\'를 잘 보여주는 정방형 구획정리가 돋보인다

◆ 1000년 왕도를 만든 치밀한 도시계획

신라 중대의 왕경은 당나라 장안성과 마찬가지로 동서남북 도로로 구획된, 마치 바둑판처럼 잘 계획된 질서정연한 도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왕경은 이방제(里坊制)에 의해 구성됐는데 이방제란 동서~남북으로 거주공간이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한 격자 형태로 구획되는 제도를 뜻힌다. 이 같은 이방제를 도입할 때는 왕경의 중심축 선이 있어야 한다. 중심축에 맞춰 왕이 거주하는 중심 도로와 직급별로 왕경의 주거지가 할당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황룡사의 입지가 다시 주목받는다. 황룡사는 553년 건설을 시작한 신라 왕조의 신궁(新宮)이었다. 문제는 황룡사지 입지가 늪지대였다는 점인데, 늪지대를 메우고 그곳에 신궁을 지으려 했다면 이는 상당히 계획적인 조치에 따라 그곳에 황룡사를 반드시 지어야만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황룡사지 입지는 경주의 동쪽 명활산, 서쪽 선도산, 남쪽 남산, 북쪽 소금강산의 정상을 동서와 남북으로 연결해 교차하는 지역에 위치한다. 이는 신궁의 위치를 정하기에 앞서 이미 왕경을 관통하는 중심축 선이 국가 차원에서 설정되어 있었다는 증거다.

특히 흥륜사가 왕경의 동서 중심축 선상에 위치했다는 점은 적어도 흥륜사 건립이 시작될 무렵(527년)에는 왕경의 동서 중심축 선이 정해져 있었고 여기에 맞춰 왕궁과 도로, 사찰, 고분, 주거지가 계획적으로 들어섰기에 8세기 통일신라 이후 도시로 인구가 집중될 때도 큰 무리없이 확장을 거듭하며 왕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송민구 성균관대 교수의 첨성대 동지일출선상 유적지 배치도

 

여기서 흥미로운 이론이 건축학계를 중심으로 제기된다. 바로 첨성대의 동지일출선 상에 신라의 유적지 대부분이 건설됐다는 점이다. 건축학자 송민구 성균관대 교수는“첨성대를 비롯해 신라 조영물의 상당수가 동남동 30도 각도인 동지일출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주장을 1980년 처음 제기했다.

첨성대의 회전 곡면을 이루는 첨성대의 곡선은 태양이 원을 그리며 도는 궤도에서 따온 것인데, 첨성대 꼭대기 정자석(井字石)과 바닥의 초석 및 지대석의 두 모서리가 동남동 30도에 가까운 동지일출선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송민구 교수는“그 선상에 김유신묘, 선덕여왕릉과 불국사 석굴암, 문무왕릉이 위치하는 웅장한 장사(葬事) 구도가 드러난다”며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를 정기호 성균관대 조경학과 교수가 뒷받침하며 현재 문화재청 및 역사학계와 함께 신라 왕경 도시계획의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 중이다.

정기호 교수는“옥녀봉을 시작으로 일출방향에 김유신묘와 첨성대, 선덕여왕릉, 문무대왕릉이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다른 유적지도 같은 각도 상에 건설됐다”며“주어진 자연현상의 한 특징을 포착해 그 위에 석굴암 등 조형물을 극히 계획적으로 앉혀 놓았던 점에 미루어 첨성대는 국가체제 수립 과정에서 왕도 건설의 의도적인 축 설정과 관계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도시계획 전체에 신라의 생활상, 믿음이 반영된 덕분이다. 신라 왕경은 도시를 둘러싼 산을 통해 신이 내려오고, 고분을 통해 다시 승천한다는 의식 아래 도시 구획을 정비해 나갔다. 옥녀봉을 통해 내려온 신과 바다에 잠든 문무왕릉이 일직선상에 위치하며 태양을 숭배하는 문화(예로 석굴암)를 융성시켰던 신라인들은 삶과 죽음을 도시 안에 품으며 ‘신이 선택한 도시’를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시켜 나간 셈이다. 당연히 도성 천도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영원히 거주할 도시이다 보니, 계획부터 건축물 건설까지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 분명하다.

최양식 경주시장은 “1979년 유네스코가 세계 10대 유적 도시로 지정한 경주가 사실상 유일하게 방치된 채 우리 국민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신라 왕경 복원사업은 한때 세계 4대 도시로 꼽혔던 서라벌을 통해 21세기 한반도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역사적인 프로젝트인 만큼 경주의 사업이 아닌, 국가 사업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지희기자 jh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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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family: Gulim,굴림,AppleGothic,sans-serif; font-size: 12pt;"><strong><span style="font-size: 18pt;"><창간특집> 사라진 황금의 땅 '신라' - 잠자던 1000년 왕궁의 비밀과 복원</span></strong></span>


기사입력 2017-04-04 08:08:35. 폰트 폰트확대폰트축소


<span style="font-family: Gulim,굴림,AppleGothic,sans-serif; font-size: 12pt;">사라진 궁궐 ‘월성’… 보물상자 열린다</span>
  
발굴작업이 진행 중인 월성일대 항공사진. 초승달 모양을 닮은 부지에 세워져 '월성'이란 이름이 붙었다

 

세계적인 문화유적 도시를 가면 어디에나 궁궐이 있다. 중국 베이징에 자금성이 있고, 프랑스 파리에는 베르사유궁, 그리고 서울에는 경복궁을 비롯해 5개 궁궐이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왜 1000년 고도 경주에는 왕궁과 왕성이 없는 걸까.

신라 왕경에도 당연히 왕궁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초승달을 닮아 이름 붙여진 월성이다. 월성의 총 부지 면적은 19만3800㎡, 성 내부 면적은 11만2500㎡에 달하는 비교적 큰 규모로 여기에 동궁 면적(1만5658㎡)까지 합치면 월성은 약 21만㎡에 달하는 규모로 확대된다. 경복궁의 부지 면적이 34만3800㎡인 점을 보면 1000년 전에 지은 월성의 크기가 절대 작지 않은 규모임을 알 수 있다. 초승달을 닮은 부지에 왕궁을 건설해 나라의 기운이 보름달처럼 차오르기를 바랐던 것이다.

월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약간 있긴 하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파사왕 22년(101년)에 토성을 쌓아 신라가 망할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했다. 무려 834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되며 56대에 걸친 신라 왕 가운데 대부분이라 할 수 있는 50명의 왕이 가족과 함께 생활했던, 한국 고대사적으로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곳인 셈이다.

월성의 최고 전성기인 679년에는 월성 동쪽에 큰 연못을 가진 동궁을 짓고 연못을 월지(月池)라고 불렀다. 월지는 이후 조선시대에 기러기와 오리가 많이 논다고 해 이름이 안압지(雁鴨池)로 바뀌었다. 동서남북 길이가 약 190m인 정방형이고 면적은 1만5658㎡에 달한다. 석축 동쪽과 북쪽에 절묘한 굴곡을 만들어 어느 곳에서 연못을 보더라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연못이 한없이 길게 이어진 것처럼 보이도록 설계한 점이 특징이다.

경주시는 동궁과 월지 복원ㆍ정비사업을 8대 과제 중 하나로 선정하고 사업비 630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기본설계까지 끝난 단계로 문화재청 승인이 나면 바로 실시설계 작업에 착수할 예정이다.

 남쪽으로는 황룡사와 연결되며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월성은 어떻게 사라진 걸까.

고고학계는 고려시대에 이어진 자연 풍화 외에 몽골이 침입해 황룡사를 불태우며 인접한 왕궁과 왕성이 모두 불타 소실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만약 화재에 의해 일시에 사라진 것이라면 현재까지 땅속에 상당한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2000년대 들어 왕궁 복원의 필요성을 느낀 경주시가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통해 최신 탐사기기인 비파괴 지하 레이더를 이용해 월성 안 유구의 잔존 여부를 확인한 결과 놀랍게도 상당한 유구가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탐사 결과 월성에는 14개 구역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크고 작은 건물군이 있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매장물이 땅속에 그대로 있었다. 건축물 초석도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월성 지하탐사 조사를 통해 보물지도가 완성된 셈이다.

일단 경주시는 사업비 2700억원을 투입해 월성 발굴 및 문루와 해자 등 일부 유적 복원을 진행할 계획이다.

  
현재 문루공사가 진행 중인 월정교 복원현장 

◆ 잠자는 1000년 왕궁을 깨우는 ‘월정교 복원사업’

1000년 이상 잠들어 있던 황금 도시의 왕궁 월성은 이제야 깨어나는 모습이다. 경주시는 2015년 월성 발굴조사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발굴 작업에 착수했다. 월성 중심지역 및 문루와 성벽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며 올해는 해자 복원 사업이 시작된다.

이 중 가장 실질적인 성과물로 드러난 것은 월정교 복원사업이다.

신라의 궁성이었던 반월성 남쪽을 끼고 도는 남천에는 규모가 큰 2개 다리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월정교와 일정교다.

발굴 결과 월정교는 길이 60.57m, 조사 당시 다리기둥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 조각과 기와 조각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다리기둥의 치마널이 누각(문과 벽이 없는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과 지붕으로 연결된 누교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월정교 복원 완료 조감도

남아 있는 다리기둥 기초석의 크기는 길이 13m, 폭 2.8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요즘의 4차선 도로 크기에 비견할 만큼 규모가 큰 교량이었던 셈이다.

복원 예산만 235억원을 투입해 논란 속에 2008년 시작된 월정교 복원 사업은 10년이 지난 2017년에서야 거의 공사가 끝난 상태다. 진행 과정에서 사업비는 510억원으로 늘어났다.

신라왕경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추진단 관계자는 “월정교는 고대 신라인의 뛰어난 교량 건축술을 보여주는 중요한 궁성 교량으로 신라 왕경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며 “대규모 교량사업을 진행할 정도로 신라 사회가 성숙했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월성교 유적지 조사 결과 신라인들은 교각을 만들 때 터파기를 하고 그 안에 잡석을 채워 다진 후 다시 그 위에 정방형의 교각 기초석을 놓아 기초공사를 하는 과정을 밟은 것으로 확인됐다. 교각석은 전면을 다듬어 매우 세련된 모양새인데 월성으로 통하는 궁성 교량이었기 때문에 치장이 특히 신경을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월정교는 66.15m 길이의 교량이 복원된 상태이고, 진행 중인 문루 복원 공사는 올해 안에 끝난다.

최인석 경주시 신라왕경1팀장은 “복원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수차례 고증을 거치는 과정에서 사업 기간이 크게 늘어났다”며 “신라 왕경 복원사업 중 현재 유일하게 가시적인 성과물을 낸 곳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최지희기자 jh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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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rgb(0, 0, 0); font-family: Gulim,굴림,AppleGothic,sans-serif; font-size: 12pt;"><strong><span style="font-size: 18pt;"><창간특집> 사라진 황금의 땅 '신라' - 최인석 경주시 신라왕경1팀장</span></strong><span style="font-size: 18pt;"> </span></span>

기사입력 2017-04-04 08:08:42. 폰트 폰트확대폰트축소

<span style="color: rgb(0, 0, 0); font-family: Gulim,굴림,AppleGothic,sans-serif; font-size: 12pt;">"세계적 명소로 재탄생할 역사적 사업...특별법 제정해 사업 지속성 확보해야" </span>

신라 왕경 복원사업은 비운의 사업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무너지는 석탑과 호박 덩굴에 뒤덮인 고분을 복원하고자 1971년 세계은행으로부터 차관받은 2300만달러 중 31%에 달하는 사업비 288억원을 투입해 10개년 계획의 경주관광종합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추진된 1973년 고분 발굴에서 천마총과 금관 등 값진 유물이 쏟아져 나오며 사업에 탄력이 붙었지만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며 사업은 그대로 중단됐다.

이후 경주가 다시 주목받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8대 대통령 선거 때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은 지방 공약사업으로 ‘신라왕궁 및 황룡사 복원사업’을 채택했다. 이후 2014년부터 2025년까지 1조원을 투입한다는 사업계획안이 나왔고, 대통령 지시사항으로 사업 추진과정이 주기별로 청와대에 보고됐다. 하지만 다시 대통령 파면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터지며 사업은 최근 위축된 모양새다. 이 때문인지 사업을 총괄하는 경주시 주무부서의 최인석 신라왕경1팀장은 인터뷰 내내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1조원대의 사업비를 투입해 신라 왕경을 복원하려는 이유는.

단순히 경주시 관광사업 차원으로 추진하는 사업이 아니다. 이 사업은 국가적인 사업이다. 세계적으로 고대 유적지는 국가사업으로 복원이 추진됐다. 중국 서안의 대명궁과 일본 평성궁(헤이죠쿠), 로마와 아테네 등이 대표적인 예다. 우리 경주는 불국사와 석굴암, 첨성대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국보급 문화유산을 다수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천년왕도에 걸맞은 왕경 모습을 제대로  구현조차 하지 못해 나날이 퇴색되는 형국이다. 경주는 과거뿐 아니라 동시대에도 매우 상징성이 큰 도시다. 신라 왕경 복원사업을 통해 삼국을 통일한 신라문화를 조명함으로써 국민 통합과 통일 시대의 기반을 구축하는 기틀을 다질 수 있다. 현재 우리 시대에 정신적 구심점을 만들어줄 만한 역사적인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복원사업 추진 과정에서 가장 큰 애로사항이 있다면.

복원의 정밀성을 높이는 거다. 문화재위원들의 면밀한 검토 아래 추진하고 있지만, 100% 완벽한 고증이란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적정한 복원 수준을 설정하고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다른 지역의 문화재 사업은 단순 ‘재현’이지만, 신라 왕경 사업은 ‘복원’이기 때문에 사업의 난이도가 완전히 다르다. 월정교만 해도 기존의 다리 기둥을 바탕으로 상부를 복원해내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청와대 중심으로 움직였던 사업인데 최근 힘을 좀 잃었을까 걱정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부적으로 걱정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 왕경 복원사업은 정권에 영향을 받지 않는 국가 차원의 사업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업과 재원 확보의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신라왕경 복원ㆍ정비 특별법’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 복원ㆍ정비사업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려면 연구지원 재단도 설립해야 하고, 재원 확보 방안으로 기금 조성, 특별회계에 대한 규정도 마련해야 한다. 현재 지역구 의원인 김석기 자유한국당 의원이 20대 국회 1호 발의 법안으로 준비 중이다. 경주시 및 신평 경북대 교수와 법안 협의 작업을 완료한 상태다. 4월3일 기준으로 국회 공동발의 의원 서명도 183명까지 받아놓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올해 신라 왕경 복원사업 최대 과제는 무엇인가.

월성의 해자 복원사업이다. 일단 6월 말까지 발굴이 완료될 예정이어서 연내 복원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당연히 문화재청 승인이 우선이다.

최지희기자 jh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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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건설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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