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사상9인의사연구제단 추모제
-400년 맥을이어오는 전통의연구계(戀舊契)
지난 5월20일 오전 11시경에 사상출신으로 임란에 참전하여 생환해 온 아홉분에 대한 추모제를 사상9인의사연구제단보존회 주관으로 주민 6십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상9인의사연구제단에서 봉행되었다.
우리 고장에서 400여년간 맥을이어오고 사상9인의사연구제단(沙上九人義士戀舊祭壇)의 내력에 대하여 알아본다.
추모제의 순서
제단에 처려진 재물과 술잔
아홉분을 모심므로 9개의 술잔이 놓이는 것이 특징이다.
제단앞에 차려진 제물2
제단앞에 집례를 보좌하한는 제관인 찬자와 술잔을 받들어 올리는 제관인 봉작역활을 하는 사람이 보인다.
초헌관이 잔을 올리고 있는 모습-올해의 초헌관은 최동환 부구청장이 맡았다.
사상9인의사연구제단의 추모제 지내는 모습을 조순란 회원이 찍은 사진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 4월 13일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1진 18,700명이 700척의 함선으로 부산포에 상륙 하여 성중으로 글을 보내어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하니 부산 진첨사 정발은 이를 거절 하고 군민을 이끌고 성을 지켰다. 다음날 4월14일 먼동이 틀 무렵 왜군은 부산진성을 공격하여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첨사 정발장군은 나는 죽어서 이 성의 귀신이 되겠노라고 외치면서 용전분투하였으나 왜군의 조총에 장렬히 전사하니 성은 함락되고 성중은 피아간의 시체로 시산시해를 이루 었다.
이날로 다대포진도 함락되어 참사 윤흥신도 전사하였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동래성을 에워싸고 싸우려 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길을 빌려달라는 글을 목판에 서서 세웠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목판에다 죽음은 쉽거니와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글을 써서 왜군에게 보이고 군민을 독려하여 성을 수성하였다.
4월 15일 왜군은 수비가 약한 동래성의 북문을 공격하여 성내로 진입하니 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 으로 변하고 남문루에서 분전하던 부사 송상현은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북향배재하고 의로운 성이 적에 에워 쌓였으나 다른진들이 본체 아니하는도다. 군신의 의는 무겁고 부자의 은은 가볍 도다. 라는 결별사를 써 어버이에 남기고 왜군의 칼을 받아 순절하니 동래성도 함락되었다. 17일에는 기장 양산이 함락되고 18일에는 외군 2진 3진이 상륙하여 19일에는 김해 언양이 함락되니 이후 부산지방의 산천은 왜구의 산야로 변하였다.
다대진을 함락한 왜군은 구덕령을 넘어 사상을 지나 구포, 양산 밀양등지로 올라가고 부산진을 함락한 일부 왜군들은 옛 동평현을 점령하고 사상방면을 지나 양산 밀양으로 나아가니 이곳 사상지방의 주민들은 졸지에 당한 왜란을 피해 마을뒷산 깊은 골짜기에 피신하였다. 주례주민들은 마을 뒤 안창골에 피난하고 감동 괘내 덕포주민들은 덕계천 괘내천, 수용목 골짜기에 피신하여 산속에 움막을 짓고 석벽을 쌓아 생활하였는데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옷가지와 식량들을 챙겨 올라가기도 하여 날이 밝기전에 산으로 올라 갔다고 한다. 어떤 날은 밝은 줄도 모르고 재첩을 채집하다 그만 날이 밝아 하루 종일 물속 갈대밭에서 숨어 있다가 밤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였다.
전쟁이 길어지자 주민들은 산지를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어 몇 품의 식량을 얻고 봄이면 산나물 쑥등을 캐어 쑥떡 개떡을 해 먹으며 힘센 장정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마을로 내려가 왜병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때로는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동래성과 부산의 삼진이 함락되니 부산지방은 왜구의 병참기지가 되어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왜군 병선이 수시로 내왕하고 인근 구포왜성이 축조되어 왜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또한 남해로 진출하려던 왜군 수군이 이순신장군의 우리 수군함대에 쫓겨 낙동강하구로 도망 오면서 이곳 감동포(사상구감전동)에 상륙하여 마구 분탕질을 감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마을 장정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니 이때 이곳 감동포를 임진포라 불렀다고 한다.
임진 정유 양란의 7년 전쟁은 1598년 선조 31년 11월에 왜군들의 철수가 시작되어 그해 12월에 부산을 떠나가니 이 전쟁은 인명뿐만 아니라 전 국토가 황폐할 정도가 되었다. 더욱이 동래부는 왜적의 상륙지점으로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하여 부(府)를 현(縣)으로 강등시켰고 현령이 임명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반년이 지나도 이곳 사상지방의 주민 절반 이상은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고 곳곳에서 전쟁의 상흔이 남이 있었다. 날이 밝으면 자식을 기다리고 아비를 기다리고 남편을 기다리는 주민들이 처참하게 울부짖었고 때마침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9명의 마을 출신 장정들이(모라, 주례, 덕포, 괘내, 감동출신의 9명) 힘을 합쳐 산에서 나무를 베고 강가의 갈대를 채집하여 불탄집을 새로이 짓고 식량을 구해 나누면서 마을 공동으로 농사를 경작케하여 마을 재건에 최선을 다하니 전란의 폐허로 허덕이던 이곳 사상마을도 점차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9분은 9인계를 만들고 당시 유행하던 향약을 제정하여 향약의 우두머리인 도양정과 부약정,직월포도반장 각마을 리정을 선출하여 동래부에 상신하고 마을의 딱한 사정과 진정을 호소하며 동래부의 지령을 받게 되어 이때부터 행정의 질서가 차츰 잡히어 갔다.
신축년(1601년)봄에 마을전체회의를 팔경대에서 개최하여 임진,정유재란에 전사하신 마을 영령들을 위해 단을 세우고 위령제를 올리니 통곡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고 이날의제사를 시작으로 매년 음력4월14일 면민의 이름으로 제를 올리니 지금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400여년간 이어져 내려오고있다. 이후 구인계는 조선시대 지방 마을마다 만들어졌던 동계로 전환되어 구동계 신동계,연구계로 이름이 바뀌면서 마을 공동체로서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신상필벌과 농자금을 대여해 주는 마을 금고로서의 역할까지도 수행하였다.
9분이 돌아가시고 난 뒤 연구계는 마을을 위해 훌륭한 업적을 남겼던 아홉분의 공덕을 기리고자 구인의 제사와 병행하여 제를 올리게 되었고 약 100년전부터는 9인의 제사만 모시고 있다. 9인계는 그 후 9인의사연구제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당시 마을운영에 관한 기록들을 남겨 당시의 생활상을 고증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나 이후 문서들이 여름철 홍수로 유실되는 바람에 이 아홉분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사상9인의사연구제단은 1974년 회산이 깎여 없어지면서 사상역 뒷산으로 괘법동 당산이 있던 곳의 왼쪽편으로 옮겨졌다.연구제단건립추진위원회에서 1988년 제단의 비석을 새로 세우고 해마다 동래성이 함락되었던 음력 4월 14일이 되면 사상9인의사연구제단보존회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이 모여 나라를 지키다 숨지신 선조들의 얼을 기리고 있다.
현재 사상구인의사연구제단보존회(회장: 배봉석 81, 총무: 강점수 62))는 15명의 이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회장을 맡고있는 배봉석씨의 말에 의거하면 9인의사 중 6인의 實名이 기록되어 있다고한다.다만 계를조직한 9인의 전체가 아닌데다 실명으로 기록된 사람에 대하여 처음 9인계를 조직한 사람인지? 대한 고증이 없는 것이 큰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하드라도 이름없는 지방의 촌락에서 향약을 제정하여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마을 운영의 중심이 된점이나 계(契)를 400년간이나 지켜 온 것은 크나 큰 이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동래부사천면 고문서 책자
그동안 연구계를 이어 내려오면서 연구계에 대한 기록 장부와 사상 향약 등 문서 20여종이 사상구청에 이관하였고 일부는 자체적으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이들 문서중 일부는 1999년12월에 '조선시대 동래부사천면 고문서'라는 제목으로 낙동문화원(백이성 원장)중심으로 번역발행되어 제 15회 전국향토문화연구논문공모 史料부문 최우수상을 수상(2000.2)하기도 하였다. 이는 고문서로서 조선중기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크다란 가치를 인증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올해는 그늘용 차양막을 쳐서 그늘아래에서 시원하게 추모제를 지낼 수 있었으며 추모제 후 '대제 제관의 명칭과 책무'에 프린트물을 배포하여 긍정적인 변화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답습해 온 제물의 운반과 진행의 미숙함은 풀어야 할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옛날에는 9인의사에 대한 제사를 올릴 때 면민들이 참석하는
행사에서 지금은 일부 사람들만 참석하는 행사로 바뀌고 있다. 그나마 참석한 사람
들은 나이 든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400여년간 이어져오고 있는 연구계의 고유 정
신을 살리면서 사상구민들이 직간접적으로 행사를 이해하고 참석하여 활성화를 시
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있다.
'사상9인의사연구제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상9인의사연구제단 추모제 (0) | 2025.05.06 |
---|---|
사상9인의사 추모제 (0) | 2021.07.09 |
자갈치 아지매 프로에 사상9인의사연구제단 소개 (0) | 2021.05.28 |
평민들이 만든 임진왜란 유적, 보기 드물다 (0) | 2019.01.03 |
사상9인의사연구제단비 (0) | 2014.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