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사상국민학교에서 미군퇴거 기록
사상국민학교는 미군에서 본관은 퇴거토록 하겠다한다.(제89회)
- 문서유형 : 국가기록물
- 발행정보 : 국가기록원 19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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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국무회의록(제54회-113회) 사상국민학교는 미군에서 본관은 퇴거토록 하겠다한다.(제89회)
자료 유형 : 일반기록물
관리 번호 : BA0085167
생산기관명 : 총무처
소장기관 : 대전국가기록정보센터
페이지 수 : 10
사상국민학교에서 미군퇴거에 관한 국무회의록
1952년 10월24일 부산에서 열린 국무회의에는 대통령을 비롯 16명이 참석하였으며 이날 기록된 외무부에서 보고된 사상국민학교에 진주 중인 미군퇴거에 관한 상기와 같은 기록이 있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덧붙힌 대통령의 지시사항으로는
"右에 關하여 大統領께서 慶南知事에 下命, 卽時 修理에 着手하도록 諭示가 게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1951년 2월5일(설 전날) 미군의 실화로 불타버린 학교 건물에 대하여 복구공사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1953년 10월에 완공됨에 따라 천막수업과 야외수업 중이던 교사와 학생들은 새로 지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기록이 나오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북한 인민군은 6월 25일 새벽 휴전선 전 지역과 동해안 11개소에서 일제히 포문을 열고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 인민군이 남침을 감행한 지 불과 사흘만인 28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함락됐다. 한강 방위선마저 무너지고 한국 정부는 수원을 거쳐 대전으로 쫓겨났다. 북한 인민군이 전황을 시종 압도하면서 국군은 끊임없이 뒤로 밀리고만 있었다. 끝내 정부기구가 부산으로 이전을 완료하면서 부산은 임시수도로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도시가 되었다
유엔은 유엔군의 한국파병을 결의했다. 16개국의 유엔 회원국이 한국 파병을 자청했다.
7월 7일, 유엔은 유엔군 사령부의 지휘권을 미국 사령관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의 뒤를 이어 16개국의 참전국 부대도 유엔군 자격으로 부산항을 통해 한국에 상륙했고 막대한 보급물자들이 부산항에 속속 도착했다.
전쟁으로 부산지역 각 학교 교사는 군용으로 징발되었다. 유엔군 참전으로 7월 20일, 부산수산대에 제103 미군 야전병원에 학교 교사를 비워주어야만 했다. 이처럼 당시 사상국민학교도 1950년 10월 초 미 육군 통신대가 진주하게 된 것이다. 학교 건물을 4개월째 사용하고 있던 미군의 실화로 화재가 발생하게 된다.
전시라 불평을 못한채 학교에서 물러난 교사와 학생들은 천막교실과 야외수업을 해야만 했다. 이 무렵 부산 임시수도에 머물 던 이승만 대통령이 진해로 이동할 때도로를 건너던 사상국민학생 1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대통령의 지시로 문교부 조사단이 학교를 방문, 상태를 점검하게된다. 학교 건물의 복구는 미군의 본관건물 철수 이후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1953년 10월초에 완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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