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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기사 모음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기사 모음

 

국제신문에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를 소개한다.

기사의 제목처럼 부산에 살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부산의 생활사를 이해하는데 도움되는 유익한 기사로 해당 제목을 클릭하면 기사 전문을 볼 수 있다.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20> 부산의 억척 여성, 자갈치 아지매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20> 부산의 억척 여성, 자갈치 아지매
- 1930년부터 시장 일대 매축- 건어물 상가~남부민 방파제- 거대한 매립지 만들어지며- 생선 장사 아지매들 몰려와- 한국전에 난전들 늘어나자- 생존위해 더 억척스러워져- 행정기관 노점 철거 ...    [2014-05-28 오후 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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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1> 1731년 박문수는 왜 명지동에 왔을까?-부산의 염전과 소금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1>

1731년 박문수는 왜 명지동에 왔을까?

-부산의 염전과 소금

명지의 소금, 기근에 신음하던 조선을 구하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4-01-01 19:21:04
  • / 본지 24면
   
1940년대 명지에서 바닷물을 가열해 소금 결정체를 만들어내던 모습. 강서문화원 제공

 

국제신문은 새해부터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를 연재한다. 부산에 살고 있어도 정작 부산의 역사와 생활상, 풍속 등에 관해 모르는 이야기가 많다. 부산의 참모습을 보여주고자 이 시리즈를 마련한다. 글을 쓰는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민속학 박사로 그동안 6권의 책을 집필한 필력을 자랑한다. 지난해에는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이야기를 담은 '부산은 넓다'를 써 큰 호응을 얻었다.



- 1731년 여름 끝없는 가뭄
- 백성은 나무껍질로 연명
- 참담한 영조, 박문수 불러 명지에 공염장 설치 명령

- 낙동강 뱃길의 유통망에 염전 전환가능 모래사장
- 삶 유지에 필수적인 소금, 최적의 생산 조건 갖춰

- 굶주린 백성 구제는 물론 국가 재정에도 큰 공헌
- 이후 관리들이 사익 추구, 폐단 나타나 1819년 폐쇄

- 민간에 의한 제염업 계속, 지명 곳곳에 흔적 남아
- 태풍 '사라'에 파괴되고 간척사업에 역사 속으로

■영남 제일의 염전, 명지동

부산 강서구 명지동에 가보면 역사는 신기루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우리나라 소금과 염전의 역사를 새로 써 내려갔던 곳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짠 내가 가득 밀려오던 소금밭이 명지동 곳곳에 있었다. 영남의 백성은 모두 명지동에서 생산한 소금을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영남 제일의 염전이었던 명지동 소금밭은 모두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염전이 없어진 땅 위에는 파밭이 들어섰으며, 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세워졌다. 그나마 파밭에 깔린 백모래와 강변에서 자라나는 갈대 군락이 염전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영조의 특명을 받은 박문수

   
염전이 있었던 명지 일대의 2000년대 변화된 모습. 강서문화원 제공
1731년 7월 조선의 여름은 뜨거웠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마솥더위가 계속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리 흉년까지 들어 백성은 소나무껍질로 연명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삼남의 백성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하늘에 지내는 기우제도 통하지 않자 영조의 심정은 참담했다. 영조는 뼈아픈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울음이 터지고 기가 막힌다. 잠자리에 들어도 잠이 오지 않고 음식을 대해도 그 맛을 모르겠다."

지독한 가뭄을 하늘이 왕에게 내리는 벌로 여겼던 영조에게 송진명은 현실적 대안을 내놓았다. 천재지변은 이미 일어난 일이니 백성을 구할 소금을 확보하자는 안이었다. 가뭄이 일어나면 구황식품으로 꼭 필요한 것이 소금이었다. 소금은 사람이 일정량을 먹어야 하는 식품이며, 산과 들에서 채취한 나물을 절여 먹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다.

송진명의 제안을 두고 고민하던 영조는 급히 박문수를 입궐시켰다. 그가 이번 가뭄을 구제할 수 있는 충직한 신하라 생각했다. 박문수는 설화에서 암행어사로 잘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국가 재정과 국방 분야의 전문가였다. 재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급히 국가 재정을 확보해야 했다. 조선시대 소금은 쌀과 무명에 버금가는 국가 재원이었다. 박문수는 스스로 소금을 구워 나라를 구하겠다고 영조에게 아뢰었다. 영조의 명을 받은 박문수는 특명사신으로 명지동에 파견되었다. 조선이 운영하는 대규모 공염장이 박문수에 의하여 설치되는 순간이었다.

■천혜의 조건을 가진 낙동강 하구

   
박문수가 영조의 특명을 받기 이전에도 명지동에 염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지동은 원래 낙동강 하중도로서 '명지도(鳴旨島)' 혹은 '명호도(鳴湖島)'라고 불렸다. 명지도 염전의 역사는 고대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낙동강 하구에 자리 잡은 명지도는 오랫동안 김해 땅이었다. '삼국유사'에서는 992년 금주(金州) 경계에 사는 주민이 소금 네 석을 싣고 와서 경주 대성사에 시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금주는 지금의 김해다. 당시 금주에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있었다면 지리적 조건상 명지도로 점칠 수 있다.

명지도에서 소금을 구웠던 배경에는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있다. 교통이 불편했던 전근대 시기에 소금은 생산하는 것만큼 유통하는 일이 중요했다.

낙동강은 영남의 젖줄이자 최대의 교통로였다. 낙동강은 영남을 관통할 뿐 아니라 다른 하천과 연계되었다. 낙동강의 교통수단으로는 단연 소금배를 꼽을 수 있다. 사람의 등짐에 비한다면 100배 이상의 물량을 운반할 수 있었다. 하단에서 출발한 소금배는 여러 편을 거쳐 안동까지 도착하였다고 한다. 소금배를 타고 다녔던 명지동의 김소만 옹은 낙동강 소금배 장사를 '배 장사'라고 했다. 이윤이 배가 남는 장사라는 뜻이다. 하구에서 소금을 싣고 출발한 소금배는 상류 지역까지 올라가 판다. 소금이 부족한 지역이니 당연히 가격이 비싸다. 소금배는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곳의 곡식을 싣고 되돌아와서 하류 지역에서 장사한다. 이렇게 낙동강 소금배를 통해 곡물과 소금이 교역되는 시스템은 1950년대까지 볼 수 있었다.

낙동강 하구에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이 더 있다. 염전을 조성할 수 있는 모래사장이 곳곳에 널려 있다.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지동 알씨름도 이 모래땅에서 발전하였다. 한편 소금을 굽기 위해서는 땔감이 필요했다. 조선시대 소금은 햇볕과 바람의 에너지로 만드는 천일염이 아니다. 짠물을 끓여서 생산하는 자염(煮鹽)이었다. 끓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땔감이 소요되었다. 낙동강 하구에서 쑥쑥 자라는 갈대는 명지동 염전을 활활 일으키는 땔감이었다.

■소금 이득이 나라 안에서 제일

 

특명사신 박문수는 천혜의 조건을 가진 명지도 염전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6개월 만에 얻은 소금이 무려 1만8000석이었다. 이 소금은 헐벗고 굶주린 백성 구제에 사용되었다. 박문수는 1733년까지 명지도 염전을 총괄적으로 운영하는 일을 했다. 박문수가 복귀한 뒤에도 조선 정부는 명지도 염전에서 결정시킨 소금의 추억을 잊지 못했다. 1744년 조선 정부는 낙동강 하구에 산산창(蒜山倉)을 설치한다. 산산창은 소금을 생산하는 염민에게 쌀 1석을 대여해주고 나중에 소금 2석을 받는 기관이다. 그런데 관청에서 이 소금을 가지고 낙동강으로 운반하여 장사했다. 배가 넘는 장사임은 물론이었다. 이렇게 얻은 짭짤한 수익은 백성의 구제와 상관없는 일로 쓰였다. 오로지 관청의 경비나 관리들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한 재원으로 변질했다.

다산 정약용은 명지도에서 일 년에 구워내는 소금이 수천만 석이며, 소금 이득이 나라 안에서 제일이라고 하였다. 낙동강 연안의 고을이 대부분 명지도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을 먹기 때문이다. 다산은 명지도에서 자행되는 폐단도 지적하였다. 경상감사가 명지도 염전에서 소금을 구워 낙동강 유역에 팔아 백성의 이익을 독점하고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명지도를 다녀간 암행어사들도 다산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정조가 파견한 이시수, 정대용 암행어사는 모두 관청에서 명지도 소금으로 장사하는 폐단이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점이 쌓여 1819년에 명지도의 공염장은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웃가마와 아랫가마, 염전의 흔적

명지도 공염장이 혁파되었다고 해서 소금 생산이 중단된 것은 아니다. 명지동뿐만 아니라 신호동, 녹산동 등지 염전에서 소금이 계속 생산되었다. '명지녹산 염전'이라는 말도 이렇게 생겨났다. 호황을 누렸던 제염업의 흔적은 지명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명지동에서는 유달리 가매(가마)라는 지명이 많다. 웃가매, 아랫가매, 땅가매, 건너가매, 동쪽가매, 서쪽가매 등이다. 소금을 굽던 가마가 있던 곳이다. 가마는 조선시대 짠물을 끓여서 소금을 결정시키는 중요한 시설이었다. 신호동에는 홍처사 염전, 박진사 염전 등과 같은 지명도 전해 내려온다. 모두 명지도와 그 일대에 가득 찼던 염전으로 인해 생긴 증거들이다.

일제 강점기가 되자 명지도의 염전은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일본 제염업의 영향을 받아 명지도 염전의 생산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염전 바닥에는 대나무로 수관을 깔았고, 짠물을 걸러내는 필터 시설도 예전에 비하여 작아졌다. 1930년대 접어들어 명지도 염전은 철퇴를 맞았다. 일제는 1933년부터 낙동강 제방공사를 벌였다. 김해의 농토를 확장해 농산물을 반출하려는 의도였다. 명지도의 서남쪽에서 제방공사가 시행되다 보니 이곳에 있던 염전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염부의 기억

   
신호동은 명지동의 인근에 있다. 이곳 역시 '신호도'라는 섬이었는데 매립공사로 육지로 변한 곳이다. 명지동의 명지제염소와 신호동의 신호제염소는 1950년대 말까지 소금을 생산했던 염전이다.

신호동에는 마지막 염부였던 김소종 씨가 살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염부로 일을 했다. 하지만 1959년 부산을 강타한 사라 태풍이 명지녹산 염전을 싹 쓸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는 천일염이 과잉 생산되어 염전을 없애던 판이었다. 대규모 간척사업까지 벌어져 명지녹산 염전들은 경작지로 변했다. 염전이 사라지자 그는 파밭에서 농사를 짓거나 정치망 어업을 하며 생업을 꾸려나갔다.

공단과 주택가로 변해버린 염전은 이제 그의 기억 속에만 아련히 남아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강서구의 역사는 염전과 소금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 염부의 기억에 남은 이 역사를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될 터이다. 소금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하여 서해안 일대에 건립된 소금 전시관들을 한 번쯤 상기해봤으면 한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