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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토박이

허증수 선생

 

 

 

허증수(許增秀)선생


허증수 선생(5대 문교부 차관 역임) 

사상교회 초대 교인 박도애 집사의 장남 허증수(1911년생)는 겨우 사상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업을 지속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으나 당시 사상 교회를 돌보았던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등과정인 마산 호신 학교와 평양 숭실 전문학교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 대학을 졸업했다.

해방후 미 군정청 근무했으며 국비 유학생으로 호주 멜브론 대학에 공부하고 동아대 교수, 부산 대학 교수로도 근무했으며 전쟁 중인 1952년 11월14일 정식으로 발령받아 제1공화국의 5대 문교부 차관(1952년 11월 14일 ~ 1955년 3월 9일)으로 봉직했다. 문교부 차관 재임 시 화재로 소실된 사상초등학교를 재건하는데 큰 힘이되었다. 그 후 경희대학교 교수와 초급대학 총장을 지냈다.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본적)

- 서울특별시 中區 獎忠洞 1가 31-1

- 호주 멜버른大學 수료

- 東亞大學 교수 및 釜山大學校 교수 역임
- 1952년 11월 14일 - 1955년 3월 9일 문교부 차관
- 慶熙大學 敎授
- 慶熙大學校 初級大學 學長(1967년 현재)


문교부차관임명의건(허증수) :1952년2월1일

http://www.pa.go.kr/online_contents/appoint/1323823_6847.html

 


허증수에 관한 기록 1

이사회의 동문 중 이제는 고인이 된 허증수 군이 있었는데 당시 문교부 차관으로 모교재건에 많은 힘을 쓴 바 있었던 그는 배 목사와 김 장로가 서로 이사장 자리를 사양하자, “현재 전국적으로 사학들중에 이사들의 자리다툼으로 분규중에 있는 곳이 상당수에 달하는데 여기는 서로 자리를 양보하고 있으니 이것이 숭실의 정신이고 나아가서는 기독교 정신이 아니겠습니까?”하던 것이 지금도 눈앞에 떠오릅니다. (숭전22호, 강신명)

 


허증수에 관한 기록 2

http://blog.naver.com/sohnks?Redirect=Log&logNo=30119657873


 뒷 줄 좌로부터-김장권 영수, 박도애 집사,정찬모 영수,정해동 집사(목사),이승원 조사(목사)

앞 줄 좌로부터-김금연 집사(김용수 님), 황호연(부인),장연식 장로,박자연 집사,강상은 목사

 

지금 우리 교회가 자리 잡은 터가 사상면이 부산시로 편입 되기 전까지 동래군 사상면 사무소의 뒷산이며 박도애 집사의 친정인 허씨 문중의 산소가 있는 선산이었는데 1972년 시장통 교회(건평 45평)가 협소해서 교회 이전 건축하는 부지를 물색하던 중 그때 이미 노령이신 박도애 집사를 찾아가서 교회 사정을 말하자 장남인 허증수 님과 상의 하여 흔쾌히 선산을 교회에 기증하였다.
박도애 집사는 시집온지 얼마 되지 않아 일찍 부군을 여의고 연연생으로 태어난 세 아이를 믿음 안에서 잘 양육했다. 아들인 허증수 님은 해방 후 미 군정청에 근무하면서 본래 적산이었던 시장통 교회 부지를 교회 앞으로 이전하는데 졀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한국 전쟁 중에는 문교부 차관으로 화재에 소실된 사상 국민 학교를 건축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평생을 경희 대학교 교수로 봉직했다.


허증수에 관한 기록3

(화재로 학교 전소)195125일 주둔한 미군의 난로 부주의로 사상초등학교 건물이 전소되었다. 이후 미군은 화재가 난 학교의 터를 정비하고 콘세트로 임시 막사를 지어 1953년까지 주둔했다.

(허증수 차관-모교의 재건에 기여)1954년에 사상초등학교에 부임하여 교장 사택에 거주하면서 1957년까지 사상교회에 출석했던 김형기 집사(소정교회 장로)의 회고록 내가 걸어온 신앙생활이라는 소책자에 실린 글을 인용한다.

내가 19544월에 사상학교에 부임하였다. 이 학교는 6.25 사변 때 교사를 불태워 버리고(학교에 주둔하던 미군의 실화) 학생들이 야외에서 수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학생 중에 한 아이가 길에서 대통령 차에 부상을 당했다. 대통령이 사유를 물으니 교실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을 말하였더니 대통령이 듣고 속히 교사를 건축하라고 하셨다. 이것을 대통령 특령 이라고 해서 그때 문교부 차관은 사상교가 모교가 되는 허증수 씨고 문교부 장관은 동래군 출신인 김법린 씨였다. 이 사람들이 서둘러서 2층 벽돌 교사를 아름답게 건축하여 준공을 마친 직후에 내가 교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부임 인사차 도에 갔더니 ***학무 과장이 나를 보고 대통령께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교라고 말하였고 장학 계장이 인사 서류를 들고 문교부에 갔을 때 허 증수 씨가 사상학교의 교장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 이상 허증수에 관한 기록 1~3은 사상교회 100년사에서 발췌한 내용임



허증수에 관한 기록4

1954년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후 재정적인 지원을 비롯하여 특히 운크라(UNKRA, 유엔한국부흥위원단)와도 알선해 타이프라이터 40대, 녹음기, 반향기, 축음기, 라디오 등 최신식 기자재를 도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유로 처음엔 문교부 장관 대리인 허증수 문교부 차관을 이사로 임명했다.

13

http://hufsjournal.com/?p=896



허증수에 관한 기록5

-국무회의 기록물에 의하면 전문교부차관 허증수씨에게 기념품을 진정키로 의결(제14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