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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이야기

바로 알아야 할 지명/소요리

바로 알아야 할 지명/소요리



물길 갈라지는 요지에 있던 섬마을

낙동강 제방 쌓으면서 둔치지역으로 바뀌어


소요리(所要里)라는 마을이름은 소요저도(所要渚島)에서 비롯되었다. 소요저도는 조선시대 낙동강 삼차수(三叉水)의 한 줄기인 유두강이 구포 쪽에서 소요저도의 동쪽, 즉 사상 쪽으로 흘렀다는 기록에서 물길이 갈라지는[] 중요한 요지라는 의미로 쓰인 지명으로 보고 있다.

소요리는 하중도(河中島)인 소요저도에 있던 섬마을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산군편에 “소요저도는 대저도(大渚島)의 동쪽에 있으며, 밭 수백여 두락이 있는데 땅이 몹시 기름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조선 전기부터 형성된 마을로 보인다.


소요리는 조선시대 구포권에 소속되었는데 <양산군읍지(梁山郡邑誌>(1786)에는 양산군 좌이면 소요리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1832)에는 좌이전방(左耳田坊) 소요리로 나타난다. 그리고 1869년 동래부 구포면 소요리가 되었다가 1875년 양산쪽으로 되돌아 온 역사를 안고 있다. 옛 동래 지역의 고지도에도 유포리와 함께 소요리가 나타난다.

1910년 양산군 좌이면에서 부산부로 편입되며 소요리를 삼락리로 개칭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 사상면 삼락동이 되었다. 1930년대 낙동강 제방을 쌓으면서 소요리 마을이 속한 섬의 3/4 이상이 강 쪽으로 유입되어 둔치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소요리 마을이 있던 소요저도는 소요도, 솔섬, 소래섬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소요저도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삼차수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사상의 덕포리 주민들이 배를 타고 건너 와 농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910년경 일제가 조사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소요리에 있던 옛 지명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곳에 있던 나루터는 소요진(所要津), 강변에 주민들이 쌓았던 제방은 소요제(所要提), 제일 큰 들판은 대평(大坪), 작은 들판은 소평(小坪), 절골 운수천 쪽과 마주 보는 곳은 사곡평(寺谷坪), 모라리에 있던 사천원(沙川院), 역원의 둔전답은 사천평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이성 / 낙동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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