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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문화유적

감전동노거수

감전동노거수

 

 

잎이 무성한 보훈회관 팽나무

 

겨울철 보훈회관 팽나무

 

사상의 신발산업의 역사

 

신라고무와 박필희 사장

 

사상지역의 최초의 대규모 공장이 바로 당시 서괘에 있엇던 신라고무공업사(사장 박필희)였다. 해방 후 1948년 부산에는 하루 3만 켤레 이상을 생산하는  태화, 삼화, 국제, 동양, 보생 등 14개사나 되었으며  무려 71개의 신발공장이 있었다. 또한 1949년에는 [흥아타이어]공장의 본격생산 등이 가세하면서 부산의 고무공업이 한국공업의 중심산업으로 대폭 확대되었다

 

사상면 괘법리에 신라고무가 설립하게 된 것은 박필희 사장이 사상면 모라 출생(사상공립보통학교을 졸업후 1922년 동래고보 졸업)이었으며 1937년에 元山에서 天光고무를 운영하였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 와 1947년 신라고무공업사를 창립하게 된다.

 

신라고무공업사의 신발

 

브랜드를 "王" 표 고무신, 운동화 등 생산으로 일자리를 창출하여 지역 경제에 큰 역활을 하였다. 하지만 가정사로 인해 1967년에 20년간 운영해 온 회사 문을 닿게된다. 6만9천여평의 공장을 국제 양정모 사장에게 매각하여 그나마 신발공장의 명맥은 이어지는 셈이다.

 

사족으로 훗날 두산그룹 창업주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필희 사장으로부터 6.25때 피난 내려 온 두산그룹 창업주(朴斗秉)는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민간기업인 동양맥주 이사진에 참여하게 됨을 기록하고 있다.

 

 

 

 

국제화학

 1965년 매출액기준 18위, 1975년 39위, 1985년 23위를 기록했으나 1995년 사라짐. 1949년 12월 21일 양정모씨가 부산 사상공장에서 신발류 제조업을 목적으로 창업, 훗날 국제그룹의 모태가 되었으며 1972년 수출비중 90%, 국내시장 점유율 40%. 1975년에 국제상사로 사명변경. 전두환정권하에서 기업해체의 불운을 겪음.


1968년 3월 양사 재산분할 중역회의를 통해 고정자산은 현존대로 분할하고 운전자본은 통틀어 반분키로 했다. 그 당시 고정자산은 진양화학이 10억원 정도였고 국제화학은 3억원 정도였다고 한다.

국제와 진양이 분리된 직후 아버지 양태진은 회장으로 승격되면서 진양화학 경영에 전념하고 국제화학은 그때부터 양정모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그가 사장에 취임하자 두 갈래 항로를 두고 고심했다. 하나는 범일동에 있던 국제화학의 낙후된 시설을 교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활을 걸고 진양을 능가하는 새로운 공장을 짓는 것이었다. 양정모는 결연히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사상공단에 있는 신라고무공업사의 부지 6만9천평을 매입,대규모 공장건설에 착수하는 한편 일본에서 최신 기계를 도입했다. 자금은 심지어 사채까지 끌어다 사용했다.

드디어 1969년 봄 사상공장의 거함이 출항하는 진수식을 가졌는데 그해의 수출 실적은 전년도의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시중에서는 국제화학에 대한 온갖 악의적 루머가 나돌았다. '양정모가 진양화학을 내놓게 되자 오기로 이성을 잃은 것 같다' '국제화학이 경영부실에 빠져 기능공들이 동요하고 특약점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신발업계는 물론 금융계와 사채시장에까지 위기설이 퍼지자 일부 사채업자들은 상환기간이 남았는데도 원금이나마 받아내겠다며 몰려들었다. 기업인에게 제일 무서운 게 채귀(債鬼)라더니 그때 국제화학이 마치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