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구의 효자비
효자구주성지려 정면
효자구주성지려 비음
효자구주성지려(孝子具周星之閭)
ㆍ소재지 : 부산시 사상구 덕포동 417-15
ㆍ유적현황 : 덕포동 상강선대 입구에서 우측으로 난 소로 끝에 도로와 인접하여 모셔져 있는 4기의 비석군 중 하나이다. 이 비석은 조선시대 이 지역 출신의 구주성의 효성을 기리는 효자비이다. 『동래부지』 효자 효녀조에 의하면 구주성은 아버지가 장질부사에 생명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아버지의 목숨을 살렸다.
具周星 父染病氣絶 斷指得蘇 康熙庚戌事 聞施閭
경술년 광해군 2년(1610)에 이 사실이 관에 알려져 그에게 정려가 내려졌다고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숙종 41년(1715)에 효자비를 세웠다.
그리고 현재의 비석은 비음에 기록되어있는 '崇禎紀元後 4壬寅 2月'은 조선(朝鮮) 헌종(憲宗) 8년인 1842년 2월에 다시 세웠음이 나타내고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78cm, 폭 29cm, 두께 9cm이며 전면의 비문은 음각하여 안에 붉은 칠이 되어 있다. 구주성효자비는 최초 경부선 철로변 논가에 있었는데 덕포 주민들이 훼손을 염려하여 강선대 경내로 옮겼다.
ㆍ참고문헌 : 부산광역시· 경성대학교 부설 한국학연구소, 2002 『釜山金石文』
부산광역시 사상구, 2005, 『沙上區誌』
부산광역시· 부산대학교, 2006, 『문화유적분포지도 』
효자황택룡지려(孝子黃澤龍之閭)
시멘트 담장안의 효자황택용지려
ㆍ소재지 : 부산시 사상구 괘법동 산 28-6
효자황택용지려 정면
ㆍ유적현황 : 괘법동 소재의 능인사에서 우측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길의 오른쪽에 위치한다. 이 비석은 조선시대 이 지역 출신의 황택룡의 효성을 기리는 효자비이다. 『동래부지』효자 효녀조에 의하면 황택룡은 어머니가 병이 들어 기절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함으로써 어머니의 목숨을 살렸다.(母染病氣絶 斷指得O). 경술년 광해군 2년(1610) 에 이 사실이 관에 알려져 그에게 정려가 내려졌다고 전해진다. 이에 마을사람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현종(顯宗) 10년(1669년 12월)에 효자비를 세웠다.
비석의 크기 : 높이 94cm, 폭 40cm, 두께 14cm이며 전면의 비문은 음각하여 안에 흰색 칠이 되어 있다. 비석 주위로 약 1m 높이의 시멘트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비신의 상면에 깨진 흔적이 있다. 황택용효자비는 최초 사상역앞 괘내마을 회산 자락에 있었으나 사상공단 조성으로 인해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효자황택용지려 비음
효자의 뒷면에 康熙 8年 己酉十二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효자비의 설립 시기가 조선 현종 10년인 을유년(1669년) 12월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사상지역 최초로 숙종 41년(1715)에 세운 구주성 효자비보다 먼저임을 알 수 있다. 나머지 글짜는 무지의 탓인지 읽을 수가 없어 유감스럽다.
이밖에도 감동리 조경기, 서전리 황씨부인, 학장동 황씨부인, 감동리 최씨부인 등 효자와 열녀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있으나 안타깝게도 비석은 남아있지않고 있다.
ㆍ참고문헌 : 부산광역시 사상구, 2005, 『沙上區誌』
부산광역시· 부산대학교, 2006, 『문화유적분포지도 』
'사상의 문화유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론에서 보도한 환생 티베트 스님 신라대 입학 (0) | 2013.12.18 |
---|---|
사상지역의 역사 (0) | 2013.11.27 |
냉점샘과 이중환의 택리지 (0) | 2013.10.24 |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9호 부산영산재 (0) | 2013.09.23 |
모라동 관음사 (0) | 2013.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