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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최고급 답례품 ‘호피’

(28) 최고급 답례품 ‘호피’
[이용득의 관문백물]

기사입력 2013-06-16 17:42기사수정 2013-06-16 17:42

 

이빨은 장신구·뼈는 강장제로 인기
외국 사신들에 인삼과 함께 선물도

 

 

▲조선조까지 호랑이 가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의 수출 상품으로 인기를 누렸다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호랑이와 표범이 많이 살게 된 이유는 국토의 70%가 산지로 산림이 많고 노루와 멧돼지, 사슴 등과 같은 짐승이 풍부해 먹이사슬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 탓에 나라에서는 호랑이 퇴치를 위한 사냥을 장려할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오는 백성에게는 상을 주고 가죽은 진상됐다. 심지어 세종 때인 1421년에는 중앙에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호랑이를 잡는 특별부대를 두기도 했다. 지방에는 군현에 착호인, 면단위에는 착호장이라는 사냥전문가를 두어 호랑이 소탕을 펼쳤다.

조선왕조실록 가운데서도 호랑이에 대한 기록이 자그마치 700여건에 달하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조선시대 백성들이 얼마나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과 피해가 컸던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영조 8년 5월에 전라도 남원부의 백성 우창(禹昌)이 호랑이에 물렸는데 그의 아들이 호랑이의 눈을 찔러 죽여 아버지가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그 효를 가상히 여겨 포상을 내렸다고 하니 이처럼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착호군과 같은 용맹스러운 사람이 당시로서는 하나의 우상이 됐던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어렵사리 진상된 호피나 표피는 어디에 썼을까. L H 언더우드 부인은 그의 자서전 '상투의 나라'에서 '조선의 귀족들은 호랑이와 표범 가죽을 가마에 깔며 이빨과 발톱은 장신구로 사용한다. 뼈는 갈아서 가루로 만들었을 때 최고의 강장제로 여긴다'며 이국인의 눈으로 본 호랑이에 대한 효용가치를 전해주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호피는 고조선부터 고려시대, 조선을 이어오면서 때로는 수출품으로 또는 조공과 사행예물로 인기가 있었다.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는 증여예물로 호피와 표피를 주었는데 정.부사급(正副使級)에 한해서만 지급됐다. 대일통신사가 나갈 때나 또는 일본에서 온 답례예물로 호피와 표피는 항상 인삼과 함께 최고상품으로 취급될 정도였다. 일본에서는 호랑이와 표범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호피는 아주 귀한 물품이었다.

우리나라에는 호랑이가 사라진 지 오래됐다.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중국 선양에서 발생한 우역(牛疫)과 기근으로 호랑이가 급격히 줄었고 일제강점기에 무분별한 포획정책에 의해 씨가 말랐다.

부산세관박물관장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

출처: 파이낸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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