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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일본과 청나라로 향한 조선

일본과 청나라로 향한 조선

   가 볼 곳 : 조선의 시장, 에도

  • 만날 사람 : 홍타이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 주요 사건 :  병자호란, 연행사와 통신사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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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와 일본

    17세기 이후 200여 년간 동아시아 삼국은 각기 내부 체제를 공고히 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도 평화 분위기를 유지하였다. 비록 청나라와 에도 막부 사이에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없었지만, 조선이 연행사와 통신사를 통해 문화·경제적으로 그들 사이를 연결하기도 하였다.

     

    ■ 명과 청 사이에 선 조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도움을 받은 명나라와 새로 일어난 만주족의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홍역을 치렀다. 임진왜란의 상처를 아직 치유하지 못한 터라 더욱 어려웠다. 그러던 1623년, 양측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던 광해군이 밀려나고, 명나라에 입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다(인조반정).

    명나라와 본격적인 대결을 앞두고 있던 후금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을 먼저 침략하자는 주장이 높아진 것이다. 1627년에 후금은 실제로 조선을 침략해 왔고, 1636년에도 명나라 공격 이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고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챙기기 위해 다시 조선 땅을 밟았다. 조선은 두 차례의 전쟁에서 모두 패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신하의 나라로서 청나라를 섬겨야 하였다. 그간 명나라에 하던 모든 사대의 예를 이제는 청나라에게 해야 하였다. 이 때 두 왕자와 관리를 비롯해 수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쓰라림을 맛보았다. 전쟁이 끝난 뒤 몸값을 바치고 풀려난 사람만도 무려 63만 명에 달하였다. 더욱이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여자들(환향녀)은 절개를 잃었다는 누명을 쓰고 죽어 갔다.

     

    수공업의 발달 17세기 중반 조선의 수공업 장인들은 관의 지배에서 벗어나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생산하는 데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자, 농민들 중에도 수공업으로 옮아가는 사람이 많아졌고, 전문 수공업자 마을까지 생겼다. 그림은 18세기 화가 김홍도의 〈대장간〉으로, 갓 달군 쇠를 모루 위에 대고 쇠망치로 내려치는 사람들이 보인다. 일에 전념하는 이들의 땀방울에서 당시의 활기 찬 생활상을 느낄 수 있다.

     

     

    ■ 북벌이냐, 북학이냐

    두 차례나 청나라에 패한 후에도, 조선의 집권 세력은 청나라와 대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명나라의 은혜와 만주족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도 강조하였다. 이 같은 주장은 급기야 전쟁을 준비하자는 북벌 정책으로 나타났다.

    북벌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명나라를 위해 복수하자는 주장에 모두가 동의한 것이 아니었고, 전쟁을 준비할 만큼 국력이 살아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나라는 날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북벌론은 곧 잦아들었고,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도 머지않아 안정되었다. 조선은 명나라를 대하듯 청나라를 대하였고, 연행사라 부르는 조선의 사절단이 수시로 청나라를 왕래하였다. 양국 간에 무역이 확대되고, 경제·문화 교류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조선도 빠르게 변화하였다. 농업 생산력이 높아지고 수공업이나 광업 생산도 늘었다. 다양한 상인이 활동하면서 한양의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도시가 생겼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청을 오랑캐의 나라로 깔보지 말고, 그들의 발전상을 제대로 보고 유익한 것을 배우자."는 북학론이 점차 북벌론을 대신하게 되었다.

    시끌벅적, 시장 풍경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하여 전국적으로 시장이 크게 번성하였다. 농민들은 집에서 재배한 곡식과 아낙네들이 밤잠을 못 자고 짠 베를 들고 시장에 나왔다. 물건을 지고 이 장 저 장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도 있고, 아예 점포를 연 상인도 있었다. 상인들은 이곳 저곳에서 가져온 갖가지 물품을 쌓아 두고 사람들을 끌었다. 시장이 이렇게 북적대면서 거지 떼가 각설이 타령을 부르며 한바탕 흥을 돋우고, 사당패도 놀이마당을 벌였다. 시장은 상거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농민의 사교 장소이자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였다.

    일본과 청나라로 향한 조선 본문 이미지 1

    ⊙ 조선의 대외 교류

    조선은 왜란과 호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하고 대외 교류를 계속하였다. 비록 백성들의 해외 진출은 억제하였으나,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와 잘 지내자는 사대교린 정책에 따라 중국에는 연행사, 일본에는 통신사를 파견하여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데 힘썼다. 17세기 이후 청나라와는 조공과 국경 지대에서 열리는 시장을 통해 비단, 약재, 문방구 등을 들여왔고, 인삼, 면포, 은, 종이 등을 수출하였다. 일본과는 왜관을 통해 무역하면서 인삼, 쌀, 면포 등을 팔고, 은, 구리, 후추 등을 수입하였다.

    · 청나라로 떠난 사람들, 연행사
    연행사란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에 파견되는 조선의 사신이다. 조선은 청나라에 사대의 예를 갖추는 대신 정치적 안정을 보장받고 경제·문화적 실리를 얻기 위해 이들을 파견하였다. 한편, 파견 관리들과 이 행차에 끼어든 상인들이 사적으로 하던 무역이 점차 활발해져, 의주, 평양, 개성, 한양의 상인들은 거대 상인 집단으로 자라기도 하였다. 사신 행차길에 따라나선 사람들 중에는 베이징에서 중국 학자와 문화 교류에 힘쓰고 학문 자료를 도입하는 이들도 많았다. 중국에 들어온 서양 문물도 이런 활동을 통해 조선 사회로 전해졌다.

    · 일본으로 떠난 사람들, 통신사
    통신사는 조선 국왕이 일본의 쇼군에게 국서를 보내기 위해 파견한 사절이다. 14세기에 일본이 명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조선과도 국서를 교환하면서 시작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다. 왜란 후에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쇼군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조선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통신사 파견을 희망하였다. 조선의 입장에서도 일본의 군사 동태를 살필 수 있는 기회였기에 통신사 왕래가 재개되었다.

     

    일본과 청나라로 향한 조선 본문 이미지 2
    일본과 청나라로 향한 조선 본문 이미지 3

    ① 연행사 행렬 - 연행사 일행은 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린 뒤,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주로 책문, 랴오양, 산해관 등 지정된 조공로를 따라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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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영가대 - 창덕궁 인정전에서 임명식을 한 후, 부산 동래부에 도착하여 영가대에서 바다신에게 무사를 빌고 일본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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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가미노세키 - 쓰시마 도주의 안내를 받아 쓰시마 섬과 시모노세키, 가미노세키, 효고를 거쳐 오사카에 도착.

    일본과 청나라로 향한 조선 본문 이미지 6

    ④ 에도 시내 - 오사카에서 육로로 교토를 거쳐 에도에 도착. 그림은 통신사 행렬이 에도 시가지를 행진하는 광경.

    ■ 일본에 간 조선 통신사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임진년에 일어난 전쟁으로 외교 관계가 끊겼다. 그러나 막부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를 바라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여진족의 성장으로 북쪽 국경이 불안한 상황에서 일본과의 평화를 바라던 조선의 의도가 맞아떨어졌다. 두 나라는 1609년에 국교를 다시 열게 되었고, 양국 관계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이후 양국은 부산 초량의 왜관을 통해 직접 교역하였다. 이 외에도 조선은 일본 막부의 요청에 따라 통신사라는 이름의 외교 사절을 일본으로 보냈다. 통신사는 막부의 통치자인 쇼군이 바뀔 때마다 파견하였는데, 이를 통해 양국은 약 250년 동안 평화 관계를 지속하였다. 특히 일본의 에도 막부와 명나라 사이에 직접적인 교역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어서, 조선은 왜관을 통해 양국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전개하여 많은 이익을 남겼다.

    통신사는 에도는 물론, 다녀가는 길섶마다 일본인들의 정중한 환영을 받았다. 숙소에 모여든 일본의 문인들과 토론하고 시 한 수씩 주고받으며 문화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 통신사가 다녀갈 때마다 조선 열기가 들끓고 유행이 바뀔 정도였다.

    에도 성

    에도 성 쇼군에게 국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임무 완성.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에야스는 영주들의 세력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그에 따라 특정 영주들의 세력 확장을 철저히 통제하였고, 각 지방 영주들에게 성과 부속 건물을 지어 바쳐야 한다는 법을 포고하였다. 영주들은 쇼군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건축에 참여하였다. 덕분에 외딴 어촌에 불과하던 에도는 얼마 안 가 웅장한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 에도 막부는 조선과는 통신사를 통해, 중국 상인들과는 나가사키를 통해 문물을 교류하였다. 유럽 국가 중에는 오로지 네덜란드와 교류하였는데, 그림은 17세기 중엽 네덜란드와의 무역 활동을 위해 나가사키에 조성한 인공섬 데지마(出島)의 모습이다.

    ■ 에도 막부의 번영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를 세운 뒤, 일본은 오랫동안 평화를 누렸다. 막부는 도쿠가와 집안에 대한 충성도를 기준으로 전국의 영주들을 새로 배치하고, 영주들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내란의 가능성을 막았다. 또 지방 영주들의 사적인 무역 활동을 막고 국제 무역을 독점함으로써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17세기와 18세기에 농업과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일본 사회는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외딴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에도는 인구 100만을 육박하는 대도시가 되었으며, 전국의 주요 산물이 모이는 오사카도 '천하의 부엌'이라 부를 정도로 발전하였다.

    도시를 중심으로 상인이나 수공업자 계층이 성장하면서, 농민 문화나 무사 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가 발전하였다. 서민적인 연극인 가부키가 대규모 극장에서 공연되고, 나무판에 새긴 그림을 채색하여 찍어 내는 목판화로 유명한 미술 양식, 우키요에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러한 서민 문화는 네덜란드 인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화와 함께 무사 사회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꽃피는 에도 문화, 우키요에와 가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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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 시대에는 서민층의 경제력이 향상되면서 서민의 풍속 및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 낸 우키요에라는 미술 양식이 등장하였다.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색상, 자유로운 발상으로 19세기 유럽에 '자포니즘(일본 양식)'을 성행시켰다.

    왼쪽은 기타가와 우타마로의 <게이샤(기생)>. 한편 가부키는 노래와 춤과 연기가 어우러진 연극으로, 극장의 무대가 돌기도 하고 하나미치(꽃길)라 부르는 통로를 통해 배우들이 객석 사이를 오갈 수 있어 무대와 객석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느낌이 든다. 이야말로 가부키가 지닌 서민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는 에도 시대 말기의 가부키 극장, 오른쪽은 현대의 가부키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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