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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스토리텔링 광맥을 캔다 <2> 잠자는 원석들

 

스토리텔링 광맥을 캔다 <2> 잠자는 원석들

일회성 공연 동래성 전투 뮤지컬, 지속 가능 콘텐츠화 아쉬움

  • 국제신문
  • 박창희 기자 chpark@kookje.co.kr
  • 2011-12-19 19:40:57
  • / 본지 16면

 

지난 10월 제17회 동래읍성역사축제 때 공연된 창작 뮤지컬 '외로운 성'. 임진왜란 때의 동래성 전투를 재현한 이벤트였으나, 일회성 행사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동래구 제공
- 각종 스토리텔링 공모, 입상 작품 대부분은 평면적으로 쉽게 접근…신변잡기 이야기 그쳐
- 부산은 가야시대부터 6·25 피난·부마항쟁 등 고대~근·현대사 현장, 각종 스토리 곳곳 간직
- 인터넷 등 이용해 '이야기 은행' 구축…만화 영화 등으로 활용, 지속 가능케 만들어야
- 역사적 장소와 인물, 사건 재조명과 함께 지역 역사원천 사료…번역·편찬 작업도 시급

■동래성 전투 재현

때는 조선조 1591년 4월, 장소는 동래읍성(부산 동래구).

왜군1: 어리석은 조선군들 같으니라고! 수적으로 열세인데 왜 포기하지 않고 설쳐대는 건지.

히라요시: 시끄럽다!! 이곳이 동래성이라는 곳인가? 여기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알아봐라.

왜군1: 넵!!(퇴장)

히라요시: 2만 대군에게 대항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겠다니…. 대단한 용기군. 부럽군. 누군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진정한 수장이요.

왜군1: 송상현 부사라 합니다.

히라요시: 송상현이라…. 명령한다. 내가 그를 만나기 전에는 누구도 송상현 부사를 죽이지 마라!

왜군들: 예!!

히라요시: 공격!!

왜군1: 벌레 한 마리까지 모조리 잡아죽여라!!

■외로운 성

작가 서진 씨가 주도하고 있는 '한페이지 단편소설'의 성과물들.
지난 10월 8~9일 열린 제17회 동래읍성역사축제 때 공연된 창작 뮤지컬 '외로운 성'(연출 변진호, 제작 음악극교육연구소 끼리프로젝트)의 시나리오 일부다. 모두 10장으로 구성된 '외로운 성'은 90여 명의 연기자가 출연해 당시 민·관이 일치단결해 벌인 결사항전 과정을 재현했다.

동래구 측은 "시나리오를 시민 공모로 선정했고, 제작비는 약 4700만 원이 소요됐으며, 이틀 간 4회 공연에 연인원 4만여 명이 관람한 것으로 추산한다"면서 "공연 후 배우들과의 사진촬영, 병영 무기 및 복식 체험도 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전보다 진일보한 이벤트였으나, 일회성 행사에 그치고 만 것은 큰 아쉬움이다. 보관용 비디오 촬영을 해 두었다지만, 연극,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상품 개발 따위의 다양한 '멀티 유스'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부산문화재단 차재근 문화진흥실장은 "동래성 전투는 훌륭한 스토리텔링 자원이다. '동래부순절도' 하나만 하더라도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면서 "이를 문화 관광 콘텐츠로 승화시키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시나리오부터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동아대 정봉석(문예창작과) 교수는 "아무리 좋은 소재라도 시나리오가 탄탄하지 않으면 평면적인 작품이 되고 만다"면서 "기획, 시나리오 구성 단계에서부터 전문가들이 나서야 지속가능한 레퍼토리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모전의 허와 실

스토리텔링 바람이 불면서 전국 각 지자체들은 경쟁적으로 시민 공모전을 벌여 '스토리'를 발굴, 소개하고 있다.부산시는 지난 6월 '쿨부산 스토리텔링 공모전'을 벌인 데 이어, 지난달 '제1회 산복도로 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열었다. 그러나 각종 공모전의 수상작들이 '빛'을 보는 경우는 별로 없다. 후속 연결 작업이 없다 보니 "공모전을 하고 나면 수상작들이 서랍 속으로 들어가 잠 잔다"는 얘기도 파다하다.

공모전 입상작들의 수준도 비교적 낮다. 숨은 '스토리 원석'을 찾아내 감동적 작품을 빚어내야 하는데, 평면적으로 쉽게 접근하거나 신변잡기 류의 이야기를 만드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정봉석 교수는 "공모전의 경우 기본 콘셉트를 잡고 활용 토대를 마련한 다음에 해야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인터넷을 활용한 스토리텔링의 집적화도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서진(36) 작가는 "스토리텔링 활성화를 위해선 A4용지 한 장 분량의 한 페이지 단편소설을 주목해보자"고 말했다. 그는 2003년부터 대안출판 프로젝트인 '한 페이지 단편소설(1pagestory.com)' 운영 중이다. 회원이 약 8100명이며 1만여 편이 갈무리돼 있다. 서 작가는 "그동안 책은 물론 단편 만화나 영화, 에니메이션, 뮤직 비디오 등 다양한 형태로 활용돼 왔다"면서 "원저작자의 허락만 받으면 누구나 이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스토리 뱅크 만들 때

부산은 스토리의 보고다. 가야·신라를 거쳐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왜관, 조선통신사, 일제 전관거류지, 개항, 일제강점, 6·25전쟁과 피란사, 산업화와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의 영고성쇠, 간난신고가 모두 이야깃거리다. 자연환경도 좋다. 그럼에도, 도시 브랜드는 약하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은 "근·현대사의 중심에는 늘 부산이 있었다"면서 "굵직굵직한 스토리텔링 원석(재료)만 꼽아도 100가지는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제시한 중요한 원석은 ▷영도 동삼동 패총의 조개가면 ▷정과정 이야기 ▷영도 절영마 ▷왜관 스토리(교간과 잠상, 용두산 호랑이 포획사건, 부산요 일본 도공 자살사건 등) ▷임진왜란 때의 동래성, 부산진성, 다대성 전투 ▷영선고개 이야기 ▷안용복의 독도 개척 ▷용두산 신사 ▷동래온천 스토리 ▷6·25 피란민 ▷위트컴 장군 이야기 ▷동동 구리모와 약장수 ▷부마항쟁 등이다.

김 소장은 "스토리텔링의 광맥을 캐려면 역사적 장소와 인물, 사건의 재조명과 함께 중요 건축물의 모형 복원이 필요하고, 지역사 원천 사료의 번역 및 편찬 작업도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 스토리텔링 이래야 성공

- 주변에 널린 역사·문화자원 활용…누구나 공감, 감동을 만들어내야

안동시 등이 제작한 뮤지컬 '왕의 나라' 이미지.
전남 나주시에 완사천(浣紗泉)이란 샘이 있다. 고려 왕건이 나주에서 활동할 때 이곳에서 오씨처녀를 만나 사랑을 나눈 전설이 깃든 자리다. 이곳 안내판의 글이 흥미롭다.

'왜, 이 샘물을 마시면 당신이 이루고 싶은 모든 꿈이 이루어질까요? 또 아름다운 사랑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까요? 예, 맞습니다. 바로 이 샘물은 힘차고 기백이 넘치는 멋진 남자 왕건과 어여쁘고 지혜로운 여자 오씨가 만나 사랑과 꿈을 이룬 곳입니다…. 이 신비의 샘물을 마시면, 당신의 사랑과 꿈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2년 전 안내판이 붙은 후 완사천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났다. 특히 젊은 남녀들은 샘물 한 바가지를 마시고 떠나는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나주 목사내아(牧師內衙) 숙박 체험은 스토리텔링 마케팅의 성공 사례다. 내아는 조선시대 관리가 기거하던 살림집. 나주는 전남을 호령하던 목사가 350명이나 거쳐간 고장으로 내아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나주시는 내아를 개방해 숙박을 허용했다. 스토리텔링의 요점은 '이곳에서 자고 가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는 것.

서서히 성과가 나타났다. 나주시 김종순(50) 문화재계장은 "목사 내아에는 잠만 자는 방 3개가 있는데 주말이면 늘 만원이다. 캐슬린 스티븐슨 전 주한 미대사와 유인촌 전 문화부장관이 자고 가는 등 작년에만 약 3000명이 체험을 했다"고 전했다.

목사내아 금학헌 앞의 '벼락맞은 팽나무 이야기'도 묘한 여운을 안긴다. '…오백년 세월동안 묵묵히 이곳을 지켜주는 벼락맞은 팽나무는 뿌리깊은 나무의 생명력으로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쉿! 당신에게만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출세하고 싶은데 세상이 당신을 몰라줄 때, 금학헌 팽나무에게 마음껏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으십시오. 오백년 동안 말없이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어주었던 생명력 강한 팽나무는 반드시 당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가슴 깊이 경청해 줄 것입니다…'

완사천과 목사내아의 스토리텔링을 기획, 집필한 김미경 박사는 "역사 문화자원을 활용하되 지금 여기 서 있는 방문자가 공감하고 감동을 얻게끔 하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행운은 그것을 진실로 믿는 자에게 찾아간다는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을 적용했다"면서 "부산의 좋은 소재들에도 감동의 옷을 입혀보라"고 조언했다. 김 박사는 2009년 전후 나주시 역사문화 큐레이터 겸 스토리텔링 작가로 약 1년 간 활동했으며, 지금은 대학 강의와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경북 안동시의 산수실경(山水實景) 뮤지컬 '왕의 나라'는 지역문화 콘텐츠 산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상북도와 안동시가 공동 제작한 '왕의 나라'는 1362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한 공민왕의 피란길 러브스토리를 담아냈다. 영남일보가 기획·제작에 관여했으며, 지난 8월 닷새 동안의 공연에서 4만8000여 명을 끌어모았다. 게다가 뮤지컬에 출연한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지역 출신으로, 문화적 일자리 300여 개를 창출했고, 캐릭터 상품 및 전통체험 여행을 비롯 안동민속촌 재생 프로젝트가 추진되는 효과를 낳았다.

부산 동래구의 동래성 전투 재현극이 일회성에 그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부산관광컨벤션뷰로·국제신문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