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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이야기

수로왕릉 '雙魚文의 비밀'

 

수로왕릉 '雙魚文의 비밀'을 캐라

 

 


    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위치한 수로왕릉(首露王陵)에 가 보면 두 마리 물고기가 그려진 정문 현판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끈다. 과연 이 쌍어문(雙魚文)은 무엇을 의미할까.

    지난 1977년 아동문학가 이종기(李鍾琦)씨가 “김해 수로왕릉 정문에 인도 아요디아국 전승의 신어(神魚)가 그려져 있다”는 주장을 편 이래 매스컴과 일반의 관심은 쌍어문이 수로왕과 허왕후(許王后)의 신비한 결혼 설화를 입증하는 유물이란 데에 집중돼 왔다. 87년에는 고고학자인 김병모(金秉模)전한양대교수(한국전통문화학교 교장)가 이씨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허왕후릉비에 나오는 ‘보주태후(普州太后)’라는 문구에 주목해 “허왕후 일행이 쌍어문을 국가의 문장으로 삼았던 인도의 아요디아국에서 난을 피해 중국의 옛 보주(普州),즉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일대에 머무르다가 김해의 가락국으로 이주해 왔다”라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이들은 쌍어문이 허왕후가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라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조(駕洛國記條)’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입증하는 증거란 입장이다.

    가야사 전공자인 김태식(金泰植)홍익대 교수가 최근 출간된 ‘한국사론’ 41,42 합집에 실은 논문 ‘김해 수로왕릉과 허왕후릉의 보수과정 검토’에서 이같은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김교수는 무엇보다 “수로왕릉 정문의 쌍어문 그림이 허왕후의 출신국인 아요디아국의 문장(文章)이고 서기 1세기의 허왕후 때부터 전승된 것이라면 현재 그림이 있는 건물인 납릉(納陵·조선 중종 때부터 수로왕릉을 부른 이름)정문이 지속적으로 보수되면서 이어진 것이 확인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왕후가 중국 쓰촨성 출신이라고 말하는 근거가 된 허왕후릉비도 이 비석이 언제 어떤 경위로 세워졌는지가 우선 규명돼야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음은 말할나위도 없다.

    이에 따라 ‘삼국유사’와 ‘조선왕조실록’,조선후기 수로왕릉과 허왕후릉 관리자들의 기록인 ‘숭선전지(崇善殿誌)’등 각종 기록자료들을 동원해 양릉(兩陵) 및 그 주위의 비석,사당,담,문 등의 건립과 보수과정을 살펴본 김교수는 “납릉 정문에 그려진 쌍어문이 대대로 그와 비슷한 어떤 건물의 문양으로 가야시대부터 계속 전승돼 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결론내렸다. 수로왕릉 주변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초기까지 수백년간 아무런 건물도 없이 황폐화돼 있었고 현재 쌍어문이 남아 있는 납릉 정문과 조선후기 역대 왕들이 내린 향축(香祝)을 보관하는 안향각(安香閣)등의 건물도 정조 16년(1792) 이후에야 세워졌다는 것이다.

    ‘숭선전지’등 각종 기록에 따르면 안향각은 순조 24년(1824)에 신축된 것이고,납릉 정문은 정조 17년(1793)에 외삼문(外三文)으로 설치됐다가 헌종 8년(184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만큼 쌍어문도 이때 그려 넣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또 이라크의 메소포타미아 우르크 Ⅳ기 문화에서 기원한 쌍어문이 세계 각지로 전파돼 중국과 만주,우리나라에서 길상(吉祥)을 상징하는 도안으로 널리 쓰인만큼 납릉 정문의 쌍어문도 조선 후기 미술사와 불교 건축사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와 함께 김교수는 예종 원년(1469)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서 허왕후릉의 존재와 그의 시호인 ‘보주태후’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는 사실도 밝혔다. ‘보주’라는 명칭도 특별히 중국의 쓰촨성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조선 전기 김해지역에 거주하던 지방사족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예우하기 위해 붙인 미칭(美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최영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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