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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이야기

수로왕릉

 

수로왕릉 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으로서 가락국(서기 42년) 시조대왕의 수로왕릉을 찾아볼 수 있는데

 

 

 

 

 

 

수로왕릉

 

 

 

 

 

 

 

 

 

 

 

 

 

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으로서 가락국(AD 42~532년) 시조대왕의 수로왕릉(首露王陵)을 찾아볼 수 있는데 김해 김씨, 허씨, 인천 이씨의 시조이며 가락국을 창건한 수로왕을 모신 능침이다. 수로왕은 알 중에서 맨 처음 나왔다 하여 "수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2천여 년 전 김해는 고구려, 신라, 백제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금관가야가 찬란한 역사를 꽃피웠던 곳이다. 금관가야(AD 42~532년) 시조대왕의 수로왕릉(首露王陵)은 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으로서 신화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깃들여있는 공간이다.


 

숭화문(崇化門)이라고 쓰인 수로왕릉의 정문.

 

경남 김해시 서상동 312에 있는 사적 제73호 수로왕릉(首露王陵)은 그 앞에 하마비가 세워져있다. 옛부터 이 자리였을까??

 

 

홍전문(紅箭門)

 

수로왕릉 입구를 들어서자 신성한 지역을 나타내는 홍살문이 정면에 우뚝 솟아 있다. 능(陵)·원(園)·묘(廟)·궁전(宮殿) 또는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 앞에 세우던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 문. 홍살문(紅-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경의를 표하라는 신성구역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수로왕릉을 찾는 방문자는 이곳에 경의를 표하라는 뜻일 것이다.

 

 

홍전문(紅箭門) 좌,우측의 잔디밭

 

가락루(駕洛樓)

 

입구에서 왕릉에 이르는 길인‘신도’를 따라 가자 2층 구조의 가락루(駕洛樓)가 있다. 2층 누각인 가락루는 김수로를 유일 건국왕으로 받든다는 영혼숭배 사상이 담겨 있다


 

 

수로왕릉 입구의 납릉정문(納陵正門)

예전에는 납릉정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 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출입을 못하도록 잠겨져 있다.

 

납릉정문(納陵正門)에 새겨진 쌍어문

왕릉 앞의 납릉정문(納陵正門)위에는 신어상(神漁像)이라 불리는 석탑을 가운데 두고 두마리의 물고기가 마주보는 문양이 새겨져 있고, 왕릉을 보고 왼쪽에 잇는 비석의 이수에는 태양문(太陽紋)이 새겨져 있다. 쌍어문(雙魚文)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문양이 인도의 야요디야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 닮아 있어,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인도 아유타국의 허왕후가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하는 것과 연결시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고대의 낭만적 상상력을 부채질하는 좋은 자료이다.

 

수로왕릉1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199년에 158세로 수로왕이 붕어하자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 일장(一丈)의 빈궁(賓宮)을 짓고, 장사를 지낸 후 주위 300보를 수로왕묘(首露王廟)라 하였다고 전한다. 1963년 사적 73호로 지정되었고, 1964년부터 1994년까지 계속적으로 보수공사가 실시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정화되었다. 이 왕릉의 내부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수로왕릉2

 

봉분의 규모는 직경 22m~21m, 높이 5m정도이고, 봉분 앞에 는 능비(陵碑)·상석(床石)·장명등(長明燈)·망주(望柱)가 있으며, 무덤 양쪽으로는 문무인석과 말과 양, 호랑이 석상이 무덤을 지키고, 무덤 앞의 커다란 비석에는 ‘가락국수로왕릉(駕洛國首露王陵)’이란 글귀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수로왕릉은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을 모신 무덤이다. 수로왕의 탄생과 치적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해지고 있다. 나라가 없던 때,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42년 3월, 하늘의 명을 받아 가락국의 9간(干) 이하 수백 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 둥근 황금색의 알이 6개 있었다.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한 것이 수로였다. 주민들은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는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했다. 
 

 

 

 수로왕릉3- 왕릉앞을 지키는 말, 양, 호랑이석상

 

김수로왕이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무덤으로 땅을 파자 물이 솟아오르자 '신보'라는 신하의 무척산 정상에 연못을 파면 물길이 끊어질 것이라는 말에 무척산 정상에 연못을 파자 물길이 끊어져 수로왕의 능을 이곳에 만들수 있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지금도 무척산 정상에 천지가 있다. 

 

왕릉은 고려 문종 때에 부분적으로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 다시 퇴락해져서『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세종 28년(1446)에 다시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수로왕과 허태후의 영정을 모신 숭정각

 

김수로왕 영정

 

 

김수로왕신도비

오른쪽이 1927년 참봉 김성한이 자비로 세웠다는 가락국시조왕릉중건기적비 

 

신도비의 이수부분에  뚜렷하게 새겨진 태양문양

납릉정문의 문설주에 있는 쌍어문, 파사석탑, 코끼리 문양은 1792년에 만들어졌으며 신도비의 태양문은 1927년에 만들어졌다. 이로인해 인도 아요디야 지역과과연결하여 허왕후가 인도에서 왔음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둘다 가야의 신화를 알고있었던 화공과 석공의 상상력에 의한 표시로 보여진다. 

 

가락국 시조 대왕, 시조 왕후 허씨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화를 받드는 전각인 숭선전(좌)과 향과 축을 봉인하는 안향각(우)

 

역대 금관가야의 왕들의 위패를 모시고있는 숭안전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580년(선조 13)에 당시 영남관찰사이며 수로왕의 후손인 김허수가 수로왕비릉(허왕후묘)와 더불어 대대적으로 개축한 뒤였다. 수로왕비릉 역시 높이 5m정도의 원형봉토분으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내부의 구조는 움무덤(土壙墓)또는 돌덧널무덤(石槨墓)일 가능성이 높다. 『지봉유설』에서는 임진왜란 때 수로왕릉이 도굴당했음을 밝히고 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릉경내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을 비롯하여 안향각(安香閣)·곡사전(曲祀典)·제기고(祭器庫)·납릉정문(納陵正門)·숭제(崇祭)·동제(東祭)·서제(西祭)·신도비각(神道碑閣)·문무인석(文武人石)·마양호석(馬羊虎石)·가락루(駕洛樓)·홍살문·공적비·숭화문 등의 부속건물 및 석조물들이 배치되어 잇다. 숭신각(신도비각)은 가락국 역사와 숭선전사가 기록되어 있다.

신어문양의 납릉정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 외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숙이게 하는 위엄을 느끼게 한다. 봉분의 규모는 직경 22m~21m, 높이 5m정도이고, 봉분 앞에는 능비(陵碑)·상석(床石)·장명등(長明燈)·망주(望柱)가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199년에 158세로 수로왕이 붕어하자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 일장(一丈)의 빈궁(賓宮)을 짓고, 장사를 지낸 후 주위 300보를 수로왕묘(首露王廟)라 하였다고 전한다. 1963년 사적 73호로 지정되었고, 1964년부터 1994년까지 계속적으로 보수공사가 실시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정화되었다. 이 왕릉의 내부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지봉유설<芝峰類設>》권19 능묘조에 의하면, 이 능은 임진왜란 때 왜적들에 의해 도굴을 당하였는데, 순장<殉葬>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인조 25년(1647년)에 능비<陵碑>를 세우고 고종 2년(1884년)에는 숭선전<崇善殿>이란 당호<堂號>를 내려 침묘<寢廟>를 개축하였고, 이때 안향각<安香閣>과 신도비각<神道碑閣>, 석수<石獸>도 설치되었다. 이후 1964년부터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보수공사를 실시 정화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 이 왕릉의 내부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항공촬영한 김수로왕릉일대

 

 

김수로왕릉 정문인 숭화문과 하마비

 

홍전문(紅箭門)

능(陵)·원(園)·묘(廟)·궁전(宮殿) 또는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 앞에 세우던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 문. 홍살문(紅-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경의를 표하라는 신성구역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수로왕릉을 찾는 방문자는 이곳에 경의를 표하라는 뜻일 것이다

 

김수로왕릉 내부

 

 

숭선전과 안향각

가락국 시조대왕, 시조 왕후 허씨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화를 받드는 전각인 숭선전(좌)과 춘추대제전에 예조에서 보내온 향과 축을 봉안하는 안향각(우).

 

 

 

납릉정문은 세 칸 맞배지붕으로 처마 밑 나무판에 특별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신어상 또는 쌍어문이라고 부른다. 

 

 

 

납릉정문의 신어

바다를 상징하는 푸른 바탕에 파사석탑과 유사한 흰 석탑 사이에 두 마리의 물고기가 마주보고 있다. 좌우 위쪽에는 코끼리의 문양도 새겨져 있어, 파사석탑과 쌍어문 등을 볼 때, 수로왕비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중인도 북쪽에 있던 고대국가)에서 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김수로왕릉

 

"수로왕릉은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을 모신 무덤이다. 수로왕의 탄생과 치적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해지고 있다. 나라가 없던 때,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42년 3월, 하늘의 명을 받아 가락국의 9간(干) 이하 수백 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 둥근 황금색의 알이 6개 있었다.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한 것이 수로였다. 주민들은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는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했다.

 

 

수로왕과 허태후의 영정을 모신 숭정각

 

김수로왕 영정

 

 

 

 

 

 

왕릉은 고려 문종 때에 부분적으로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 다시 퇴락해져서『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세종 28년(1446)에 다시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가락국 시조 대왕, 시조 왕후 허씨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화를 받드는 전각인 숭선전(좌)과 향과 축을 봉인하는 안향각(우)

 

역대 금관가야의 왕들의 위패를 모시고있는 숭안전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580년(선조 13)에 당시 영남관찰사이며 수로왕의 후손인 김허수가 수로왕비릉(허왕후묘)와 더불어 대대적으로 개축한 뒤였다. 수로왕비릉 역시 높이 5m정도의 원형봉토분으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내부의 구조는 움무덤(土壙墓)또는 돌덧널무덤(石槨墓)일 가능성이 높다. 『지봉유설』에서는 임진왜란 때 수로왕릉이 도굴당했음을 밝히고 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수로왕릉 전경

 

 

수로왕릉 안내도

 

입장료 : 무료

 

주차정보 : 주차장 - 38면, 주차요금 - 유료(시간당 천원)

 

안내문의 : ☎055)332-1094

 

주소 :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93번길 26(김해시 서상동 312번지)

 

찾아오는 길

시내버스를 이용할 경우에는 부산-김해 간을 운행하는 123, 130, 309번과 김해 시내버스 1, 2, 7번을 이용할 수 있다.

부산 ~ 김해경전철 수로왕릉역에서 하차 후 시내 방면으로 500m(도보 1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