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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이야기

외동성산패총(外洞城山貝塚)

 

외동성산패총(外洞城山貝塚)

 

원공단 중심부에 위치한 조개무지 외동성산패총(外洞城山貝塚)은 공단부지조성이 한창이던 1974년 긴급발굴 조사되어 초기철기 시대의 대규모 패총과 삼국시대의 성곽이 확인되었으며, 막대한 양의 각종 토기류,골각기류,철기류,석기류 등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오수전은 시작 연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기원 전후 시기부터 유적이 형성된 것을 알수 있고, 신라토기의 형식을 보면 유적은 서기 4세기 무렵까지 이어지며, 성벽에서 나온 중국 당나라 화폐인 개원통보(開元通寶)의 연대를 통해 서기 5세기 무렵까지도 계속 이어지는 유적임을 알 수 있다. 오수전 주화와 야철지의 발견은 국내최대의 기계공업지가 창원에 들어선 우연을 기분좋게 연결시킨다.


야철지와 패각층 및 성곽 등의 잘 보존되어 기념물들은 학생들의 중요한 학습장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잔디와 울창한 대나무 숲, 구름과 구릉 등의 수려한 풍광은 계절을 확연하게 느끼게 해주며, 학생들과 일반인의 소풍장소와 휴식장소로 환영받고 있다.특히나 여름의 성산패총은 배롱나무 꽃천지로 한 여름의 더위를 가시게 한다.

 

 

성산패총은
설립연도 및 규모 : 기원전후부터 형성된 유적을 1974년 성산 주변 문화제 발굴조사실시 시 사적제240호로 지정, 해발49m(4천500여평)
소재지 : 경남 창원시 외동 853-7번지
전화 : 성산패총관리사무소(055)282-7270, 창원시 공보담당관실 관광진흥담당 (055)280-2043)


구성 : A지구, B지구, C지구의 야철지와 패각층 및 성곽(일부는 창원공업단지에 별도 보호구역에 잔존),
유물전시관(출토된 중요유물 876점)

A지구 - 유적의 층위관계는 표토층表土層(위로부터 10~30cm 두께의 겉흙층), 패각층貝殼層(그 아래로 2~3m의 조가비층), 부식토층(바닥)으로 나뉘어 있는데, 자세한 사항은 아래를 참조 바란다.
표토층 : 신라토기와 근대 도자기 조각 출품
패각층(위의 흑갈색 찰흙층) : 중국 한(漢)나라 때 만든 오수전 「五銖錢: 오수(五銖)의 두 글자가 표시된 중국의 옛 돈」과 김해식 토기 출품
(아래의 황갈색 찰흙층) : 무문토기(無文土器: 청동기시대의 무늬 없는 토기. 민무늬토기)와 간돌검「마제석검(磨製石劍: 청동기시대 갈아서 만든 돌칼. 간돌검, 간돌칼)」출품, 석기와 뼈·뿔 연모, 청동 팔찌 출품
부식토층 : 쇠부리터「야철지(冶鐵址: 쇠를 다루던 작업장이 있었던 유적. 야철터)」로 볼 수 있는 구조물 출품
B지구 - 적갈색 연질토기, 회청색 경질토기 등 김해식 토기와 철기 출품
C지구 - 무문토기, 반달돌칼「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돌도끼「석부(石斧: 나무를 찍거나 패는데 사용하는 돌로 된 도끼. 날이 자루와 같은 방향으로 선 것. 돌도끼)」, 붉은간토기「홍도(紅陶)」, 김해식 토기 등 출품
정상부의 성곽 - 신라토기 출품, 조개더미의 일부가 신라때 까지 쌓인 것으로 봄,'성산'이란 이름의 유래를 밝혀주는 곳으로 성산 패총 입구에 위치.
야철지 - 조감도를 지난 나즈막한 집안에 복원되어 있다.
석조여래좌상龍華殿石造如來坐像 - 일명 「절골」로 창원시 소답동 용화전(龍華殿: 미륵보살을 안치한 불전·미륵전)에 있던 것을 택지 개발로 인해 옮겨왔다. 신(佛身)·광배(光背:불상 등의 배면에 광명을 표현한 것)·대좌(臺座: 불상을 안치하는 대臺)를 모두 갖춘 이 불상은 통일신라의 불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신라말·고려초의 불상이다.

 

 

 

1.토 기(土器)

60만년전 구석기시대에 인간이 불을 다루기 시작하게 되면서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흙이 가열에 의하여 굳어지는 것을 알게되고 이윽고 인간이 제조한 최초의 도구로서 토기가 생긴 것이다. 이들은 사용용도에 따라 식량을 저장하고 운반하는 일상용 토기와 원시신앙에 따른 의식용토기로 구분되어지고 있다.
학술적으로 토기는 도자기중 사기(沙器)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분류가 되며 토기(粗土企)토기(精土器)로 구분 되어진다.즉 조토기(natural earthenware)는 정제되지 않은 점토로 만들진 것을 말하며, 정토기( fine earthenware)는 정선된 점토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조토기는 흡수율이 15%이상이고.정토기는 흡수율이 10~15%정도이며 각기 철분이 3%이상 함유되어 있다.

빗살무늬토기
(櫛文土器)

신석기시대의 토기로서 노천에서 약 600~700°C로 구워져 만들어 졌으며 표면에 빗과 같은 도구로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겨 넣었고 바닥이 둥글거나 뾰족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어렵,수렵인의 토기였으므로 강기슭이나 해변에 유적이 밀집되어 있다.(BC 4,000~BC 1,000)

민무늬토기
(無文土器)

청동기시대의 토기로서 유문토기에 반대되는 무문토기라고 하는데 기원전 1,000년경 예백민족이 거주하던 요녕(遼寧)지방의 독특한 청동기를 사용하는 농경민이 한반도로 이주해와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들의 출현으로 빗살무늬토기는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형태의 민무늬토기가 등장하게 되며 초기 철기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어 진다.이들은 수혈가마(竪穴窯)에서 700~800°C로 구워 만들어졌으며 기형(器形)은 목달린형,반원형,우각형(牛角形),손잡이형 등 다양하고 표면에 채색을한 단도마연(丹塗磨硏)토기와 흑도(黑陶)가 유행하였다.(BC1,000)

김해식토기

선사시대 민무늬토기와 신라토기의 과도기에 해당되는 토기를 말하며 기면에 돗자리무늬,창살무늬같은 인문(印文)이 새겨져있다. (BC 1세기~ AD 3세기) 김해읍 회현리 조개무지(貝塚)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에 김해식토기란 명칭이 씌여지고 있고 원삼국토기라고도 불리워 진다. 단가마의 일종인 승염요(昇焰窯)에서 800~1000°C로 구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가야토기

신라 영내에서 만들어진 회색경질토기(灰色硬質土器)를 말하며 고신라토기는 경상도지방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낙동강 중심으로 동안(東岸)지방의 토기를 신라토기, 서안(西岸)지방의 토기를 가야토기라고 불리워지면서 서로 다른 지역군을 형성하고 있다.(AD 1~6세기)
낙동강 하류에는 사철(沙鐵)이 많이 산출되어 AD1세기부터 철기를 만들게 되어 이지역에서 철기문화를 이룩하였으므로 1세기부터를 초기철기시대라고 보고 있으며(金廷鶴,한국의 미),이는 철을 녹일 수 있는 고온을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었기에 금속성에 가까운 경도를 가진 단단한 도질토기(陶質土器)를 만들 수가 있게 되었고, 이즈음 돌림판이나 물레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전형적인 신라토기는 3세기의 초기단계를 거쳐 4세기 중엽에 이르러 본격적인 신라토기시기로 보고 있으며 기형은 민무늬회도(灰陶)와 굽다리접시(高杯)등이 있다.

백제토기

백제의 토기는 신라토기가 경질(硬質)인데 비해 연질(軟質),와질(瓦質)계의 토기가 주류인 점이 특징이며, 위치하던 수도지역과 기간에 의해 한성시대(서울,371~475),웅진시대(공주,475~538),사비시대(부여,538-660)로 구분하고 있다.
한성시대의 토기는 이지역 일대에서 출토된 회색토기 및 고구려식 손잡이가 달린 갈색토기,돗자리무늬토기등이 특징이고 이들은 점차 백제 특유의 평저기(平底器),세발토기(三足土器),그릇받침(器台),원추형굽항아리로 발전되며 6세기 웅진시대에 이르러 보다 더 발전되어 회청색경질토기가 늘어나고 여러기술을 갖춘 완전한 백제토기로 정립한다.
한때 중국 화남지방의 자극을 받어 화려한 표면장식기법이 등장하며 귀족생활의 일면과 불교의 성행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토기들이 있다.

고구려토기

고구려토기는 흑색연질토기와 흑색경질토기가 있으며 중국의 영향을 받은 납유약이 시유된 황갈유(黃褐釉)토기가 있다.
대부분 부장용품이며 항아리종류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데 기형은 아가리가 넓고 밖으로 벌어지며 밑은 편평하고 어깨에는 네 개의 귀가 달린 것이 주류이다.
무늬는 어깨부분에 간단한 물결무늬,톱니무늬,노끈무늬를 음각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주로 고구려건국과 관계가 깊은 압록강 유역(전기)과 평양근교(후기)에서 출토되고 있으며.고구려 후기 출토품인 평양근교 토기들은 고구려 특색을 지닌 것들로서 대접,항아리,사발,대야,병,골호,벼루등 생활용품들이 다양하다.

통일신라토기

횡혈식(橫穴式) 석실고분 축조기에서 신라말까지 사용한 토기를 말한다.(7세기초~10세기전반)
석실고분에서 출토된 굽다리접시는 다리에 굵은 돌기선이 있고 사각형이나 둥근 구멍이 두 개 혹은 네 개가 대칭으로 뚫려진 것들이 있다.그리고 뚜껑이 있는 합(有蓋盒)이 다량 출토되는데 뚜껑에는 보주형(寶珠形) 또는 둥근 꼭지가 있으며 기면의 무늬는 음각을 하거나 압인(壓印)한 고리점무늬(圈點文)와 반고리점무늬를 볼 수 있다.
출토품중 화장골호(火葬骨壺) 불교식으로 화장한 다음 그 재를 담는 용기인데 대부분 굽이 낮고 보주형과 배형(杯形)의 꼭지가 달린 반구형의 뚜껑으로 덮혀있고 무늬는 타압(打押),압날(押捺)한 인화문(印化文)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생활용기로서는 안압지출토품을 들 수 있는데 대부분 정선된 흙을 사용하였으며 소성온도가 높은 흑회색의 석기질을 이루고 있고 무늬는 음각문,인화문,민무늬등 이며 기형은 굽다리접시,항아리,병,등잔,벼루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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