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rank Sinatra ... !
"프랭크 시나트라 (Frank Sinatra)" 는 미국의 대중가수, 작곡가겸 영화배우이다. 그의 본명은 프란시스 알버트 시나트라 (Francis Albert Sinatra)" 인데 그는 1915년 12월 12일 미국 뉴저지 주 호포큰에서 태어났다.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미국내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명실상부한 미국의 대표적인 가수로 다른 많은 가수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부문에도 활동을 하였는데 성격배우로써 영화에 데뷔한 뒤 배우와 가수로 활약을 했었고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 로 아카데미상 조연상을 받았다. 그의 데뷔는 1941년 영화 "라스베가스 나이트 (Las Vegas Nights)" 였다. 그렇게 미국내 연예계에 한 획을 그은 뒤 1998년 5월 14일 (향년 82세) 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뉴저지 지방 신문의 스포츠 기자로 일하다가 30넌대 후반 해리 제임스 밴드와 계약을 맺고 "토미 도시 오케스트라" 의 전속 가수를 거쳐 1943년에 "All Or Nothing At All" 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기 시작한 뒤 1953년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 에서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을 받았으며 그 후 그가 죽을때까지 약 50여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한 관록이 있다.
또한 그는 가수와 배우 뿐만 아니라 레코드사 사장·제작자·영화 감독·쇼 비지네스맨 등 다양한 직업을 동시에 겸비하여 44년간 연예계를 위해 활동했으며 브라질의 리오 데자네이로에서 가진 공연은 175,000명이라는 세계 최대의 관중을 모아 기네스 북에 오르기도 했는데 1984년에는 박애주의를 위한 자선 콘서트를 거행했었는가 하면 CBS-TV에서 스페셜 프로그램을 방영해 얻은 이익을 기부해 시애틀 아동 정형외과 병원 찬사를 받기도 했다.
"프랭크 시나트라 (Frank Sinatra)" 는 라이브 가수이자 음반 아티스트로서 라디오와 영화와 텔레비전 모두에서 사실상 20세기의 모든 연예 매체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뉴저지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936년경 가수활동을 시작했으며 1937년 그와 그의 그룹 "호보켄 포(Hobocken Four)" 가 아마추어 탤런트 콘테스트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그 후 해리 제임스 밴드에 가담했었고 1939년 7월 제임스 밴드의 반주로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From the Bottom of My Heart)" 를 부른 것이 그의 음반 데뷔였다. 그 후 1940~42년 토미 도르시 오케스트라에서 노래를 했었고 1942년 12월 31일에는 뉴욕 시에서 솔로로 데뷔했다. 그리고 1943~45년 라디오 프로그램 "여러분의 히트 퍼레이드" 에서의 솔로 연주를 통해 미국 전역을 휩쓰는 인기를 끌기도 했다.
"프랭크 시나트라 (Frank Sinatra)" 가 대중적인 발라드 가수로서 뛰어난 것은 그의 독특한 프레이징, 휴지, 미묘한 감성적 배음이 섞인 목소리에 기인한 것이다. 후에 토미 도시 오케스트라로 옮기기도 했지만 나이트클럽과 라디오에서 수 많은 공연을 하며 보낸 덕으로 1942년 즈음에 그의 입지는 미국인의 우상으로 그리고 존경받는 솔로 아티스트로서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가수로서 누린 명성은 그가 쉽게 연기에 뛰어들 수 있게 해주었는데 처음에는 "닻을 올리고 (1945)" 같은 뮤지컬 영화로 자연스럽게 시작했지만 "지상에서 영원으로 (1953)" 에서 희생되는 안젤로 마지오 사병 역할을 따내기 위해 열심히 로비를 하였고 결국 그 역할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중요한 성격 배우로 떠올랐다.
본능적인 감각을 지닌 연기자인 그는 영화 연기에 대한 접근 방식 때문에 "원 테이크 찰리" 라는 별명으로 곧잘 불렸는데 "아가씨와 건달들 (1955)", "상류사회 (1956)" 같은 유명한 뮤지컬뿐 아니라 암살자로 등장한 "서든리 (1954)" 와 "만추리안 캔디데이트 (1962)" 등 극적으로 훨씬 소화하기 힘든 역할에도 도전하기도 했다.
시나트라는 "오션스 일레븐 (1960)" 으로 '랫 팩' 친구들인 "딘 마틴" 과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피터 로포드", "조이 비숍" 과 함께 신나게 만들어 댄 일련의 영화의 포문을 열었다. 처음에 '랫 팩'을 창단했던 험프리 보가트는 시나트라에게 "위원장" 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고 이 배우들 패거리가 스크린 밖에서 벌인 기행은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연예계 뉴스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의 개인사는 혜성 같은 연예계 경력만큼 흥미롭고 그의 노래들만큼 복잡했다. 그는 네 번 결혼했고 그중 두 번은 애바 가드너와 미아 패로라는 전설적인 여배우와 했다. 그리고 1970년에 아카데미는 그에게 "진 허숄트 박애상" 을 수여했다.
1985년 1월 20일 밤은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취임 전야제가 열렸었는데 미국의 각계 각층에 있는 저명 인사가 참석한 이 행사를 주관하고 감독한 사람은 다름 아닌 노배우이자 가수인 "프랭크 시나트라 (Frank Sinatra)" 였다. 이 실황을 TV로 보고 한결같이 느낀 점은 노익장의 정력이었다. 그가 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기념하여 낸 "L.A. Is My Lady" 앨범에서 시나트라는 흑인이나 컨트리 가수들을 업신여기던 통례를 깨뜨리고 흑인 거물 프로튜서를 기용해서 레코드를 낼만큼 그의 활동은 언제나 왕성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프랭크 시나트라 (Frank Sinatra)" 는 레코드회사 사장을 비롯해 기타 기업가로서도 대성공을 한 예능계의 거물인데 초기에 해리 제임스, 토미드시 악단의 가수를 거쳐 1942년 경에 독립을 했을 때는 틴에이저의 선풍적인 갈채를 받으며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그 후, 1944년 경에는 한때 슬럼프에 빠졌으나 다시 재기하여 1953년에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 로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을 받았으며 영화에는 "황금의 팔", "캉캉", "페페", "상류사회" 등 50여편에 출연하는 한편, 가수로도 활약ㅇ을 했었는데 레코드 회사도 컬럼비아, 캐피탈을 거쳐 1960년에는 리프리즈 회사를 설립하고 많은 히트 앨범을 발표하였다. 그 앨범들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역사", "골든 스테이지" 등이 있다. 그는 1961년 리플리스레코드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971년에 은퇴하였다.
"프랭크 시나트라 (Frank Sinatra)" 는 1983년 미국 케네디센터 주관 공연예술 평생공로상을(Kennedy Center honoree), 1994년에 그래미 레전드상(Grammy Legend Award) 을 받았다. 그가 가수로 활동하였을 때 부른 가장 유명한 곡이 바로 "나의 길 (My Way)" 이다. 이 곡은 그가 걸은 인생에서 후회하는 부분이 담겨 있기도 하다.
■ 곡명 : My Way (Frank Sinatr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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