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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마지막 동래 기생, 손님들 1시간 놀아도 100시간…

 

마지막 동래 기생, 손님들 1시간 놀아도 100시간…

[중앙일보] 입력 2011.12.14 00:24 / 수정 2011.12.14 09:54

나는 마지막 동래 기생 … 팔십 평생 목 쉬어 본 적 없었데이
동래학춤 구음 보유자 유금선씨
17일 서울 한국문화의집서 공연

“장구고 뭐고 나는 선생에게 악기를 배워본 역사가 없다.”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 동래학춤 구음 예능보유자 유금선 할머니는 타고난 예인이다. 연습 도중 가요 반주 나올 타이밍이 되자 피리를 불거나 기타를 연주하는 시늉까지 냈다. 장구만 칠 줄 아는 구닥다리 할머니가 아니란다. 드럼·기타 솜씨도 수준급인 만능 엔터테이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우리 전통음악에 구음(口音)이란 분야가 있다. 입소리로 악기를 흉내 내던 것이 그 자체로 춤판의 반주음악이 된 것이다. 재즈로 치면 스캣이요, 힙합으로 치면 ‘북치기 박치기’, 보통 사람들 노래판에선 ‘쿵짜작 쿵짝’이랄까. 구음의 최고봉이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 동래학춤의 구음 보유자인 유금선(80)씨다.


 

“60년 만에 보는구나. 반갑데이.” ‘유금선’ 이름 석자가 적힌 동래 권번 시절 이름표를 들고 있다.
그는 장구 하나 들고 앉아 목소리 하나로 아쟁·대금 가릴 것 없이 전통악기란 악기 소리를 죄다 불러낸다. 악보는 없다. 춤에 맞추어, 분위기에 맞추어 그때그때 다른 소리를 낸다. 춤이 소리를 부르기도 하지만, 소리가 춤을 부르기도 한다. ‘되놈 송장도 일어나게 한다’는 소리다. 구음은 즉흥이다. 정해진 MR(반주음악)에 맞추어 노래하는 요즘 가수들이 닿을 턱이 없는 경지다.

 허나, 구음의 달인 역시 그저 동래학춤의 반주 할머니 정도로 숨어 있었다. 그가 여든 평생 처음 ‘유금선’ 이름 석 자를 앞세워 서울 무대에 선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사장 이세섭)이 서울 삼성동 한국문화의집(KOUS·02-3011-1720)에서 17일 오후 4시 올리는 ‘무형문화재 스토리텔링전’의 제 1회 공연의 주인공이 바로 마지막 동래 기생 유금선과 그의 후배들이다. 지정 종목만으로 알려진 장인들의 숨겨진 재능을 보여주고, 전통 공연판 입담의 최고봉 진옥섭 감독이 예인의 인생까지 들려주는 전석 1만 원 ‘만원의 행복’ 공연이다.

 유씨는 ‘구음’으로 재주를 인정받았지만, 그 하나로 그의 삶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동래는 예부터 뛰어난 기생을 배출했다. 사신을 접대하는 외교적 목적의 관기를 내었으니 교방(敎坊) 교율은 엄격했다. 교방은 관기 제도가 철폐된 1910년 ‘동래기생조합’, 1920년 일본식 ‘권번(券番)’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 시절 유금선의 집은 동래 권번에 이웃해 있었다.

 “가시나라꼬 소학교도 댕기다 치웠지. 담장 너머로 권번 여자들이 예쁜 옷 입고 인력거 딱 타고 가는 거 보이 그래 좋고 부러운 기라.”

 

젊은 시절의 유금선.
 그는 열다섯에 권번에 입소해 소리를 배워 3년 만에 졸업장을 받고, 화초머리(기생의 성인식)를 얹었다. 유씨는 김강남월·원옥화·김계월과 함께 날리는 4인방이었다. 인기가 좋아 1시간을 놀아도 손님들은 100시간, 200시간 놀았다고 전표를 끊어줬다.

 하지만 스물둘에 난 전쟁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전쟁통에 피난민이 몰려든 부산으로 각지 예기들도 몰려들었다. 동래 권번은 ‘국악원’이란 점잖은 이름으로 바뀌었다. 온천장의 풍류는 소리가 아니라 가요판으로 변했다. 소리를 한다고 누구나 가요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전천후였다.

 “딱 한 번 들으면 입력이 되는 기라. 한 번 듣고 곡 외우고, 두 번 듣고 가사를 외웠데이. 인제 대가리 돌만 들었는가, 뇌가 죽어삤는 갑다.”

 17일 무대에는 김명초(66)·서화자(63) 등 60년대에 날리던 동래 국악원 후배들도 함께 선다. 그들 역시 소리, 민요, 가요까지 커버해 온 집안식구를 먹여 살렸던 만능 예능인이다. 60년대 동래 예인들에게도 ‘건전 민요’가 있었으니, 바로 ‘재건가’다. 민요조지만 ‘살기 좋은 동래 온천(…)이 사업을 받들어서 제일 관광 이룩하여 천수만대 보존하세~’란 가사는 건전가요 뺨친다. ‘재건가’를 기억하는 이는 진짜 동래 기생이지만, 모르면 가짜배기란다. 진짜배기들이 함께 외출(야외놀이)이라도 나가면 돈을 갈퀴로 쓸어 담았다.

 “팁이 말도 몬 해요. 나중엔 돈이 얼마나 꼽히는지 돼지 입이 째질라 캐. 그때가 재미있었지.”

 그렇게 긁어 모은 돈은 다 날리고 없다. 빚만 남기고 젊은 나이에 죽은 서방님 때문에 한번 망했고, 다시 뛰어 모은 돈으로 장안 최고의 요릿집을 차렸다가 복어 독에 손님이 죽는 사고로 또 한 번 망했다. 남자 속에서 살았지만 50년간 독수공방 신세다. 지금이야 예능인이 각광받는 시대라지만, 그 시절엔 기생이란 이름 말고는 여인이 재능을 펼칠 길이 없었다. 몇몇 후배는 이름을 감추고 가정을 꾸렸다.

 

공연 연습을 하기 위해 동래국악진흥협회 사무실에 모인 유금선(가운데)과 후배 예인들.
 8일 동래국악진흥협회에 모인 왕년의 멤버들은 ‘정선 아리랑’부터 ‘재건가’ ‘여자의 일생’ 등의 유행가까지 부르며 호흡을 맞췄다. 40여 년 만에 다시 뭉친 이들의 흥은 쿠바의 노익장 밴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부럽지 않았다. 무얼 잘못 먹어 지난 밤 토사곽란으로 잠을 설쳤다는 주인공은 연습 초반엔 굳은 표정이더니 나중엔 다리로 기타 치는 흉내까지 내며 놀았다.

 “바다에 뛰어 내릴라꼬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재미있게 살기는 살았지. 내 청춘하고 모든 것이 구음에서 다 흘러 나오는 거라. 경상도는 억양 땜에 소리꾼이 안 나와요. 그래도 내 억양은 그런대로 들어줄 만하다 카네. 목이 쉬어본 적이 없으이 그건 좀 타고났는가배. 다시 태어나면 내 대명창이 한번 되고 싶다꼬.”
 
부산=이경희 기자

 

 

 

마지막 ‘동래기생’, 구음(口音) 명인 유금선
“봄날에 사랑은 가고 늙은 소리만 남았소”
 

‘채 맞은 생짜’란 말이 있다. 제대로 수업받고 공식경로를 밟아 명부에 오른 기생들 사이에서 통하는 말이다. 그들이 공유하는 기생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에는 용모와 기예보다 회초리로 맞으며 엄하게 배운 권번시절의 추억이 더 큰 자리를 잡고 있게 마련이다. 행수기생(行首妓生)이 내리던 매질에 붉게 물들던 어린 종아리들을 어찌 잊을 텐가. 그래서 한다하는 기생들은 너나없이 출신과 선생을 따졌다.

유금선도 ‘채 맞은 생짜’다. 한데 우등만 하던 그는 맞은 적이 없었다. 졸업시험 성적도 일등급이었다. 그동안 배운 소리와 악기, 교양을 다 시험을 쳤는데 악기는 기본으로 장구, 꽹가리는 할 줄 알아야 했다. 사실 그의 소리는 진즉에 동래 인근에 소문이 나 졸업도 하기 전 땋은 머리 늘인 채로 주연(酒宴)에 나간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채 맞고’ 졸업한 동기들은 화초머리를 얹어야 권번에 나서게 된다. 그도 권번에 자신의 명패를 거는 날이 왔다. 그의 이름은 명패 앞줄에 걸려 있다.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柳·錦·仙. ‘봄날 버드나무 아래 신선들이 노닐 여열(餘熱)한 비단치마’, 그게 아니라면 ‘봄날 버드나무 아래 비단 베고 누우니 신선이 부럽지 않더라’일까. 어린 그를 홀로 두고 먼 길 떠난 부모가 이런 운명으로 살라고 알고 지어준 이름이던가. 누가 화초머리를 얹어주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물어보지도 않았다. 열일곱 살이었다.

“동래기생 치마폭엔 묻히고 만다”

권번은 본디 우리말이 아니다. 1910년,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관기(官妓)제도가 철폐되자 매인 데가 사라진 동래기생들이 생존을 위해 ‘동래기생조합’을 만들었고 이태 후 ‘동래예기조합’으로 명칭만 바꾸었다가 1920년에 다시 ‘동래권번(券番)’으로 이름을 고치게 됐다. 그 배경에는 일본이 있다. 전국에 산재했던 기생이나 창기조합의 명칭을 모두 일본식으로 강제로 바꾸게 해 10년 새 세 번이나 개명한 것이다. ‘권번’이란 교방(敎坊, 조선시대 관청에 딸려 있던 기생양성소)의 일본식 발음이다.

잘 알다시피 동래는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아 1960~70년대에 웨딩마치를 울린 대다수 부부들의 추억이 잠긴 곳. 거슬러 일제 강점기에는 유독 온천을 좋아하는 일인들에 의해 개발돼 함경도의 백천온천, 황해도의 신천온천과 더불어 3대 온천장으로 꼽히던 땅이었다. 이북에 있는 두 지역은 모습이 어찌 변했는지 알 수 없으나 동래는 어귀만 들어서도 모든 간판이 자신이 곧 ‘온천’임을 몸으로 알려준다. 골목골목마다 ‘온천’이란 글자를 상호에 얹은 간판이 즐비한 것이다.

복천동 ‘새미’들이 그러하듯 동래의 역사로 흘러온 온천천이 수영강으로 모여들고 수영강은 다시 바다로 이어진다. 물 인심 후한 지역은 사람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일본과 가깝다는 지리적 여건도 그렇지만 일인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침탈을 노골화하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유곽을 세운 곳이 부산이요 온천장이었던 것도 그런 방증이다.

일본인들이 동래에 세운 것은 ‘오키야권번(置屋券番)’이었다. 게이샤들을 공동으로 관리하며 번창하는 온천장 손님들을 끌어모으고 조직적으로 성매매까지 하며 동래기생의 생업을 넘보았다. 일본인들이 벌인 공창(公娼)제도는 묵과할 일이 아니었다. 동래권번은 더욱 철저히 가무음곡(歌舞音曲)의 기예만 보여주었다. 예기로서의 품위와 긍지를 잃지 않음으로써 일제에 대항한 것이다. 동래기생의 그런 기질은 다 그 뜨거운 물과 땅에서 오지 않았을까. 일제 강점기 조상님 호적을 남에게 내어주느니 싸그리 불질렀던 영모단이나 동래장터 만세운동, 동래고보 동맹휴학이 그랬듯 동래는 굽히기를 거부하는 부산 기질의 본산이다.

“평양기생 치마폭은 벗어나도 동래기생 치마폭에는 묻히고 만다”는 옛 말마따나 전국 한량들이 알아주던 동래기생들도 시대의 변화는 묻을 수 없었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김동년(金東年) 박난전(朴蘭田) 변비봉(邊飛峰) 같은 동래기생의 우두머리들이 주축이 돼 출범한 동래기생조합(東萊妓生組合, 이후 권번)은 광복 때까지 줄기차게 강요된 왜색 아래서도 우리 전통 가무와 음률의 맥을 보듬고 지켜냈다.

원옥화, 김강남월, 안향년, 유금선

권번에서 요정으로, 요정에서 나루토(鳴戶旅館)나 아라이(荒井旅館)로 중심점이 기울던 시대의 행간에 유금선이 있었다. 권번 앞줄에 언제나 붙어 있던 명패는 그의 인기를 말해주었다. 그 시절 영업부장들은 회사보다 권번에 출근하는 날이 더 많았다. 앞줄에 붙은 명패의 주인들을 먼저 모셔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부르는 자리가 많은 기생일수록 몸값도 비쌌다.

동래라는 지명이 생긴 이래 이때만큼 호황이었던 적은 없었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여관이요, 요정이었다. 게이샤보다는 예기(藝技)의 수준이 장인을 능가하는 동래기생을 찾는 일인들도 많았다. “왜놈 순사 앞에서는 서 있어도 동래기생 앞에서는 무릎 꿇고 만다”고도 했다. 수요보다 공급이 모자랐다.

당시 온천장을 주름잡던 4인방이 있었다. 동무로 서로 아끼던 원옥화, 김강남월, 안향년 그리고 유금선이다. 4명이 조를 짜서 움직이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을 지경으로 찾는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함께 앉았다가 틈을 봐 한 명이 옆 요정으로 가면 잠시 후 또 한 명이 다른 여관으로 갔다 돌아오는, 하룻밤 2~3번의 술청은 그들을 금방 부자로 만들었다. 봄이면 ‘불상추놀이(남자들의 야외 계모임)’, 가을이면 ‘단풍놀이’로 낮을 보내고 밤이면 요정을 뛰는 ‘주연(酒宴) 속 청춘’들이었다.

기생 한 명이 받는 행하(行下)는 한 시간에 1원50전이지만 이들을 부르기 위해 한다하는 한량들은 물 쓰듯 돈을 썼다. 선(先) 화대로 최하 100시간에서 300시간을 불러야 4인방을 부를 수 있었다. 요릿집에서 받는 큰상 값이 5원에서 10원 안짝이었다. ‘방귀깨나 뀌는’ 한량이 아니고는 용색조차 구경하기 어려운, 잘나가는 4인방이었던 것. 한산모시 숙고사 항라… 옷장을 열면, 같은 옷 두 번 입고 나설 수 없어 한 철에 갈아입을 한복이 열댓 벌 준비돼 있던 화려한 시절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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