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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루부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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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The Mona Lisa)]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53*77cm

1503-06년. 목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mona lisa)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가 그린 그림(유화)으로, 크기는 53×77cm. 제작연도는
1503∼1506년으로 추정된다. 16세기중반의 건축가이자 작가인 조르즈 바사리의 인용에 의하면 모나리자는 피렌체의 은행가 프란체스코 디 바르톨로메오디 자노비 델 지오콘도의 아내를 그린 초상화이다. 그래서 모나리자를 '라 지오콘도(la gioconda)'라고도 한다. 조 콘다부인은 G.포지의 조사에서 피렌체의 안토니오 마리아 디 놀드 게라르디니의 딸임이 판명되었다. 이 작품은 부인의 나이 24∼27세 때의 초상이며,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았을 때 이 미완성의 초상화를 가지고 갔었는데, 왕에게 4,000에큐에 팔려 퐁텐블로성에 수장되었었다. 모나리자(mona lisa)에서 '모나(mona)'는 이탈리아어로 부인에 대한 경칭이며, '리자(lisa)'는 지오콘도의 아내 이름인 엘리자베타(elisabetta)의 약칭이다. 1911년에는 모나리자가 대낮에 루브르박물관에서 도난 당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도 있었다. 이탈리아의 예술의 금자탑이 프랑스에 있는 것에 분개한 한 이탈 리아 노동자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 그림을 훔쳐 고국 땅으로 가져간 것이었다. 2년 후 범인이 피렌체의 미술상 A.골리에게 팔러 나갔을 때, 골리의 기지로 회수 되어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스푸마토 기법이란 대상과 대상 사이를 구분 짓는 윤곽선을 흐리게 만들어 대상들이 서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모나리자는 아쉽게도 때때로 세정도 하고, 광택용 니스를 바르기도 한 관계로 전체에 균열이 생겨 제작 당시의 시원스럽고 여유 있는 필치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작품은 다빈치의 대표작으로서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양식의 한 정점을 이룰 뿐 아니라 서양 고전회화의 상징으로도 간주된다. 화면 전경(前景)에는 흉벽(胸壁) 앞에 검은 옷과 베일을 걸친 반신의 젊은 여인이 약간 비스듬히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고, 중성적인 표정에는 다의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띠고 있다. 배경으로는 무한한 깊이를 느끼게 하는 상상적인 산악풍경이 레오나르도 특유의 미묘한 바림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모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있지만 이 신비적인 여인의 이미지가 단순한 초상이 아님은 분명하다. 즉 여기에서는 개별적 특성은 끝없이 사상(捨象), 초월되고 또는 복합화, 중층화(重層化)되어, 새로운 생명적 우상이라고도 할 보편적 여성상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연이은 십자군 전쟁으로 사람들이 물질과 현실에 대한 애착이 커지면서 정신 중심적 이고 내세 중심적이던 중세의 구도가 무너졌다. 그래서 십자군 말기인 13세기부터 이미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세계에 대한 관심이 커짐과 동시에 현실에서의 삶은 내세에 천당가는 것만큼 중요해졌다. 자연히 인간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중세의 미술이 의도적으로 사람을 사람답지 않게 그리려 했던 것과는 반대로 사람을 현실의 사람과 같이 그리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그 노력은 2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사람의 뼈대를 갖추고 나중에는 정말 인간과 똑같은 대지를 밟고 서있는 현실 같은 인간을 그리기 위해 원근법이 고안되었다. 그래서 모든 화가들은 정말 손에 잡힐 듯한 인간을 그리기 위해 외곽선을 분명히 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1503년 이 그림은 스프마토법 이라는 외곽선 흐리기 기법을 사용하여 입이나 눈의 윤곽이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화가들이 분명한 그림을 그리려고 발버둥칠 때 그는 반대로 뿌연 그림을 그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다빈치는 다름 아닌 인간의 정신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다빈치를 기점으로 미술은 인간의 외면에서 내면의 세계로 방향을 옮겼던 것이다. 어쩌면 또 다시 중세로 돌아가려는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르네상스 당시의 유럽은 경제적으로 호황기였다. 특히 피렌체는 모든 도시중에서도 최고의 부자 도시였고, 절대군주와 같은 권력을 휘둘렀던 '메디치'가문은 피렌체의 '은행가'였다. 사람들은 사치와 쾌락에 물들어 갔으며 물질만능주의 적인 정신이 팽배해 있었다. 의식있는 사람들은 물질만능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정신의 대표작이 바로 모나리자이었다. 다빈치는 인간과 자연과 그 모든 것 속에서 외양에 나타난 것보다 엄청난 그 무엇이 존재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인간의 내면 속에서 신의 모습을 보았으며, 자연과 인간이 서로 다르지 않고, 자연 속에서도 신성을 보았던 것이다. 이 초상화는 당시의 모든 초상화가 사람의 옆얼굴을 그리고 있는데 반하여, 정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정면을 그린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기에 당시의 모든 화가들은 회피하고 있었다. 다빈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흥미가 없었다. 오히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속눈썹과 눈썹이 없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애매하고 묘한 웃음은 레오나르도가 일부러 손가락으로 문질러서 윤곽을 지워낸 결과임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볼 때 마다 달라진다는 이 미소는 500년 동안이나 풀리지 않는 비밀이다 <모나리자의 미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표적 그림 중 모나리자는 마지막 그가 숨질 때까지 각별히 아꼈다고 한다.이 그림 에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녀의 웃음을 띤 묘한 얼굴 은 지금도 세계인의 시선을 멈추게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웃음은 안타깝게도 모나리자가 자식을 잃고 슬픔에 젖어 있을 때여서 다빈치가 악공과 광대를 불러 그 녀를 웃기려 애를 썼는 데 그 때 억지로 웃은 웃음이 바로 세계인의 시선을 멈추게 한 모나리자의 웃음이 된 것이다.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은 4년이 걸리고도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고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숙기인 제2피렌체시대에 해당하는 1503∼06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적 관심거리이다. 요컨대 이 그림은 레오다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 인 것이다. 이 그림의 역사적 경로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아 모나리자에 대한 신비성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 모나리자의 눈썹 > -모나리자의 눈썹에 대한 첫번째 설 이 초상에는 처음부터 눈썹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그 것은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의 눈썹에 대한 두번째 설 다빈치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초상화를 그리기 위함이었는데
다빈치는 그동안 없던 기법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매우 정교한 작업이었고, 기간도 오래 걸렸다. 그러던 중 그림의 모델인 여인이 남편을 따라 외국에 나가게 되어 잠시 미루기로 하였는데... 여인이 그만 외국에 나가 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여인의 눈썹을 그리지 못해서 결국 작품은 미완성 작으로 남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Mona Lisa Smile - VA (2003)
01. Mona Lisa performed by Seal - 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