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3월 창립 70주년을 맞은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이 책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회보인 『역사의 窓』에 실렸던 글들을 묶은 것으로, 그간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사하고 수집한 사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종가 고택의 서랍장에 모셔두었던 고문 서부터 이국땅의 문서보관소에서 잠자고 있던 문서들까지, 국사 편찬위원회가 찾아낸 사료들에는 하나 같이 흥미진진한 이야기 들이 깃들어 있다. 전문 학자가 아니면 사료 원문에 접근하는 것이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사료들이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열람이 가능하므로 사료란 무엇이고 그것이 연구에 어떻게 활용되는지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넓히는 데 이 책이 작은 실마리가 되리라 기대된다.
당시에 발간한 내용 중 조선후기 무관 노상추(盧尙樞, 1746~1829)가 쓴 일기가 67년간 52책을 남겼는데 진솔한 가족이야기가 담겼다고 한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요약해 놓은 내용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소개코자한다.
조선후기 무관이 남긴 67년의 일상, 『노상추일기』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역사의 현미경, 일기와 지역사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창립 70년 역사를 보는 창, 사료
18세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 ^ ^ ^
----18세기 후반 경상도 선산에 노상추(盧尙樞, 1746~1829)라 는 사람이 있었다. 노상추는 십팔 세부터 여든넷의 나이로 죽기 며칠 전까지 일기를 썼다. 67년의 세월동안 자그마치 52책을 남겼으니 기록 의 달인이라 할 만하다.
노상추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계기는 다름 아닌 아버지의 명이었다. 아버지 노철은 열아홉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마흔일곱까지 썼다. 그는 큰아들이 죽자 세상일에 흥미를 잃고 의욕도 잃었다. 그래서 29년 간 써온 일기마저 노상추에게 넘겨준 후 멈추고 말았다. 마치 시어머니 가 며느리에게 곳간 열쇠를 전수하듯이 아들에게 일기를 넘겨주었다. 노상추는 한 집안의 대들보로서 대소사를 챙기면서 집안의 역사를 기 록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노상추가 일기 쓰기에 보여준 열정은 남달랐다. 거의 하루도 거르 지 않고 일과나 사건사고를 기록하였다. 일이 없을 때에는 날짜와 날씨 만이라도 기록하였다. 매일 일기를 썼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며칠 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여러 날들의 일기를 한꺼번에 정리하곤 하 였다.
노상추는 임종이 임박했을 때에도 일기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제 밤부터 병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어 병수발을 드는 아들과 조카가 전 해주는 말만 듣고 기록한다.”(1829.9.6.)면서 정신이 혼미하고 몸조차 가눌수
없는 상황에서도 병문안 온 사람들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심사가 너무 괴로울 때면 일기 쓰기가 고단한 일과이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1)의 일기는 여느 해와 달리 일기가 아니라 한 달에 한 번꼴 로 적어놓은 월기(月記)로 되어있다. 이에 대해 노상추는 “내가 여러 해 동안 일기를 썼으나 작년 겨울부터 다른 일로 피곤해 날마다 기록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여기(오늘 날짜) 위쪽으로는 그저 대략만 적었 다.”(1777.11.16)고 털어놓았다.
붓을 꺾고 무과로 나가다
----노상추가 “붓을 꺾고” 무과에 뜻을 품은 나이가 스물셋이며 그 꿈을 이룬 해가 서른다섯이었다. 무려 12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 사이 노상추의 재정 상황은 나빠질 대로 나빠졌다. 과거에 합격한 해인 1780년(정조 4)에 과거시험의 노잣돈을 마련하기 위해 목화밭을 팔면서 “비참한 회포를 차마 다 말로 못하겠다."(1780.
1.17)고 토로했듯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강 노씨에 속한 노상추의 집안은 17세기만 하더라도 영남 남인 (南人)의 가풍을 지닌 사족 집안이었다. 그러나 노상추의 6대조인 노 경필 이후로 눈에 띌만한 벼슬을 하거나 생원진사시나 문과에서 합격 자가 나오지 못했다. 점차 집안이 기울자 조부 노계정은 글공부를 하 다가 무과로 전향해 병마절도사까지 올랐다. 하지만 아버지 대에서 벼 슬이 또 끊기고 형들마저 요절하면서 입신양명의 과업은 노상추의 몫 이 되었다.
노상추가 무과에 급제해 금의환향하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 적이었다. 노상추는 악공(樂工)을 동원해 축하 잔치를 벌였는데 당시 몰려든 인원만 “거의 5~6천명이나 되었다”(1780.4.1)고 한다. 노상추 는 무려 2개월 동안이나 친지들을 방문했는데 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잔치가 열렸고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춤까지 추었다.
노상추가 무과에 합격하기까지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격려가 컸다. 이미 선산에서 무신 집안으로 자리 잡은 해주 정씨 일가는 노상추의 진 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 해주 정씨와 사돈을 맺은 경상도 단 성의 무관 권필칭도 노상추에게 역할 모델(role model)이 되었다. 권필 칭은 단성의 명문가 안동 권씨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해 보기 드물게 유 장(儒將)으로 명성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노상추에게 문무(文武) 를 병행하는 이상적인 무신의 길을 보여주었다.
노상추 일기
진솔한 가족 이야기
-----『노상추일기』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진솔한 가족이야기 에 있다. 1774년(영조 50) 12월 25일 인생의 세 번째 혼례를 신부 집에서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스물아홉의 노상추는 마음이 착잡했다. 그 무렵 에는 신부가 혼례 후 바로 시가로 들어오지 않고 일정 기간을 친정집에 머무르는 것이 상례였기에 노상추는 혼자 집으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노상추의 첫째 부인 월성 손씨는 아들을 낳은 지 한 달 만에 사망하 였다. 손씨는 대장부 같은 풍채에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두 번째 부인 풍산 류씨는 세 번째 아이를 낳은 지 7일 만에 사망했다. 류씨는 천성과 몸가짐이 참한 데다 첫 부인의 기제사도 정성껏 챙겨준 고마운 부인이었다. 그런 그가 둘째부인이 죽은 지 4개월도 안되어 혼인을 했 으니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노상추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노상추에게는 요절한 형이 두 명 있었는데 맏형은 혼인한 상태였다. 큰형이 죽자 스물일곱의 형수는 시가에서 지냈으나 맏며느리의 역할을 잘 하지 않았다. 형수는 하루거리인 기동(耆洞)에 있는 친정을 왕래하 면서 본인의 처지를 달래곤 하였다. 심지어 형수는 노상추의 첫째 부인 이 아파서 생사를 넘나들자 초상을 피하기 위해 시아버지에게 친정집 에 가겠다고 요청했고, “형수가 친정에 다녀오겠다고 청하는데 아버지 가 막을 수 없었다.”(1764.11.26)고 한다.
노상추의 아버지 역시 세 번이나 혼인했으나 세 번째 부인마저 2년 만에 사별하였다. 그 때 노상추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노상추 집안에서 안살림을 주관할 사람은 오롯이 노상추의 부인 밖에 없었다. 노상추가 “아내를 잃은 후 파산하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 은 다시 장가들 계획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1774.12.29)면서 혼사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던 것도 현실적으로 안살림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집의 가장이자 안강 노씨의 구성원인 노상추는 일기에 본 인의 가족 이야기를 남겨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집안의 대소사를 비 롯해 주변인들의 혼인과 재혼, 출산, 가족 및 문중·이웃·친구 사이의 친교와 갈등·타협, 가계 경영, 가족과 이웃의 죽음과 장례, 제사, 사회 적으로 물의를 빚은 각종 사건들을 빽빽하게 기록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1802년(순조 2) 경상도 안동에서 고을 수령 을 지낸 사람의 며느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안동으로 시집온 이 여성은 일찍 청상과부가 되어 자녀가 없는 상태였다. 당시 지역 사회는 이 사건으로 발칵 뒤집혔고 호랑이에 물려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곧 밝혀진 사실은 “지금 전하는 말에 따르면 도망나가 간 곳이 없다고 한다.”(1802.8.11)는 내용대로 그 여성이 집을 나간 버린 것이 었다.
무신의 목소리를 듣다
-----『노상추일기』는 방대한 양에 팔색조 같은 내용을 담고 있 다. 한 집안의 소소한 일상을 담아낸 가계(家系)의 일지이면서 개인의 사생활과 무신의 관직 생활을 담아낸 기록이기도 하다. 또 앞서 소개한 대로 지역 사회의 사건사고까지 들어있어 수많은 ‘작은’ 사람들의 이 야기를 소상하게 들어볼 수 있다.
더구나 최근까지 발굴된 조선시대 양반의 일기가 대부분 문신들의 일기라는 점을 감안할 때 『노상추일기』의 사료가치는 대단히 높다. 노 상추는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지향한 조선 사회에서 ‘양반’의 아웃사 이더인 무신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자료의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사 람들이 처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고, 문치주의(文治主義) 사회에서 상대적 아웃사이더인 ‘무신’의 시각으로 조선후기 사회를 새 롭게 접근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노상추일기』의 가치는 희소성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학사(史學史) 의 시각으로 볼 때 18세기 후반은 무신에 대한 기록들이 출현하는 시기 라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병자호란의 명장이자 북벌의 상징인 임경업 의 일대기를 정리한 『임충민공실기』(1791), 최초의 무신 전기집이라 할 수 있는 『해동명장전』(1794), 충무공 이순신에 관한 기록과 자료를 망 라한 『이충무공전서』(1795)를 꼽을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노상추일기』
이와 함께 주목할 사항은 무신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힌 저술을 남겼 다는 점이다. 18세기 중후반에 활약한 무신 송규빈이 지은 국방평론집 『풍천유향(風泉遺響)』, 이정집(1741~ 1782)과 그의 아들 이적이 2대에 걸쳐 완성한 『무신수지(武臣須知)』도 무신의 의식 성장을 보여주는 저 술이다. 또 1844년(헌종 10) 서반(西班)의 인사 규정만을 다룬 『서전정 격수교연주집록(西銓政格受敎筵奏輯錄)』이 편찬된 것도 우연한 일로 보이는 않는다.
이처럼 18세기 후반 이후 무신에 대한 일대기나 저술, 법전집의 출 현은 이전 시기에는 찾아볼 수 없는 변화였다. 이 변화의 밑바탕에는 무신들이 자의식을 고양시키면서 정체성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자리하 고 있다. 그러므로 『노상추일기』도 이러한 거시적인 안목에서 접근할 때 그 가치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http://www.history.go.kr) 창립 70년 역사를 보는 창, 사료(2016.3.26 발간)
'전통문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중섭의 ‘황소’와 ‘길 떠나는 가족’의 사연 (0) | 2025.03.31 |
---|---|
광목(廣木) (0) | 2025.03.28 |
最古 한글 금속활자…600년간 묻혀있던 '세종의 꿈' 깨어났다 (0) | 2025.03.26 |
지눌, 고려 후기 불교 개혁을 이끌다 (0) | 2025.02.22 |
간경도감[刊經都監] (0) | 2025.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