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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보조국사 지눌의 禪사상

불교신문 3431호와 불교신문 3433호에 게재된 명정운스님 (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의 보조국사 지눌의 선사상에 관한 기사는 관심있는 불자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은 바 있습니다. 6여년 시간이 지난 요즘 보조국사 지눌에 관심있는 네티즌에게 이를 소개코자 아래와 같이 싣고자합니다. 

[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31> 보조국사 지눌(上)

  • 입력 2018.10.15 13:17
기자명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세 차례 깨달음…제자교육 수행법은 간화선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6근이 보고 듣고 알지만
만상에 물들지 아니하여
진성이 자재…첫 번째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영감은 
이통현의 ‘신화엄경론’ 읽고 
상무주암 ‘대혜어록’에서… 

조계총림 송광사에 소장중인 보조국사 지눌스님 진영(본지 자료사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중국이 국가적으로 혼란한 시기에서부터 사회주의 시대까지 살다간 선사가 허운(虛雲, 1840˜1959년)이다. 꺼져가는 중국의 선종과 법맥에 불씨를 지핀 선사로서 현재 본토와 대만 승려들이 대부분이 허운의 법맥이다. 중국 승려들 중에는 허운의 진영사진을 지갑에 넣어 품고 다닐 만큼 그는 중국 선종의 아버지와 같은 이미지다. 우리나라 선객들도 허운을 흠모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면 우리나라 조계종 승려들은 역대 어떤 선지식을 멘토로 할까? 

한국선을 연구하는 해외논문 주제 가운데 보조선이 간간이 거론된다. 지눌 사상을 주제로 한 박사논문이 미국에서 3편, 일본과 대만에서 각각 1편이 나왔다. 20여 년 전, 미국 하와이대학에서 지눌의 선(禪)이 출판됐다(Robert Buswell : The Korean Approach to Zen,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3). 필자가 모르지만, 이외의 논문이나 저서가 또 있을 거라고 본다.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년)은 원효에 버금가는 분이요, 한국사 이래 한국불교 선사상의 체계를 세운 선사로 평가받는다. 고익진(1934〜1988년) 교수는 지눌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지눌의 정혜결사는 애초에 선종 일각의 자각에서 일어난 운동이다. 그의 선사상은 조선조 500년을 거쳐 오늘에 이르도록 면면히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눌 이전은 중국 선의 법맥이 나말여초에 전승되며 중국선사상적인 측면이 전개되었다면, 지눌 이후로는 선사에 의한 한국불교 독자적인 선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눌의 활동 이전과 활동하는 무렵, 외세적으로는 혼란한 시기였다. 거란족은 송과 금나라의 침입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고, 송나라가 금나라에 쫓기며 계속 남하해 남송(南宋, 1127〜1279년)을 세웠다. 이 무렵, 몽골은 칭기즈칸(1162~1227)이 부족을 통합하고 나라를 건설했다. 고려는 이자겸의 난(1126년)과 묘청의 난(1135년)이 일어났다. 이어서 명종 초에 일어난 정중부, 이의방을 중심으로 무신의 난이 일어났다(1171년). 이후 무신들의 권력다툼으로 서로를 살육했고, 문신 귀족과 가까운 교종의 승려들이 무신 정권에 도전하면서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한편 무신들은 교종에 반하는 정신세력을 찾고자 했고, 명종 26년 최충헌이 무신 정권을 잡은 이래 세습 정치가 시작됐다(1196년). 

 

 ▶ 문자선과 간화선 

고려 중기에서 말기로 흘러가면서 교와 선의 분쟁이 있었다고 하지만, 선종을 드러낼만한 비전이 없는 상태였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지만, 고려시대 교종이 강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균여(923~973년)의 화엄사상과 화엄종은 고려 초기에 불교 사회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법상종의 소현(1038˜1096년)이 활동하던 당시, 중국에는 서명원측(西明圓測) 학파와 자은규기(慈恩窺基) 학파로 나누어 있었다. 대체로 고려 초까지 서명학파(신라 원측법사의 사상)의 법상종이었으나 소현이 활동하면서는 자은규기 법상종으로 변화됐다. 천태종은 대각국사 의천(1055˜1101년)의 활동이 있었는데, 의천은 선교 대립을 의식해 선교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고려 중기에 혜조국사 담진·원응국사 학일·대감국사 탄연·연담(淵湛)이 배출돼 교종에 비해 미약했으나 선은 면면히 흘렀다. 그러다 최충헌에 의해 연담 등 10여 명의 승려가 영남지역으로 유배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법맥조차 끊어질 정도로 위기에 처했다. 한편 동일한 사굴산문에서도 지눌과 혜심의 수선사는 최 씨 무신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다. 최 씨 집권 이후 선종은 크게 두각을 나타내면서 불교계를 대표했으며, 교종 승려가 국사로 추증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선종의 승려들이 왕사 국사가 됐다. 

지눌스님이 세 번째 깨달음을 이룬 지리산 상무주암. ‘상무주’ 편액은 경봉선사가 글씨이다.

 

보조국사 지눌에게 사상적인 영향을 미친 점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지눌 이전 선사상을 전개한 이들이다. 곧 탄연이 있었고, 청평거사 이자현의 능엄선이 있었으며, 정각국사 지겸(志謙, 1145˜1229년)에 의한 일원상 사상이 있었다. 지눌은 이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둘째는 규봉 종밀의 <화엄경>에 입각한 교선일치와 돈오점수 사상이다. 셋째는 송대의 문자선과 대혜종고 간화선의 영향이라고 본다. 

당대(唐代) 선문답을 기록한 것이 어록이다. 법안종의 도원(道原)이 1004년 <경덕전등록> 30권을 완성시켰다. 이후 분양 선소(分陽善昭, 947〜1024년)가 <100칙의 송고(頌古)>를 만들었고, 이어서 설두 중현(雪竇重顯, 980〜1052년)이 <100칙의 송고>를 완성시켰다. 당시 설두의 송고는 시문학적인 가치로 인정받았다. 이후 원오 극근(圓悟克勤, 1063〜1135년)은 설두의 송고 100칙에 수시(垂示), 착어(著語), 평창(講評)을 첨부해 <벽암록>을 저술했다. <벽암록>은 ‘종문(宗門)의 제일서(第一書)’라고 칭할 만큼 선종의 대의를 표명하고 있는 대표적인 공안집이다. 이러한 송고 문학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간화선이라고 볼 수 있다. 대혜는 당시 학자들이나 승려들이 문학적인 ‘송고’와 <벽암록>의 구절을 외우고 실참이 없는 것에 대해 염려한다. 게다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그릇되게 인식하고, 안일함에 안주해 있는 승려들을 비판하면서 간화선을 제창한다. 즉 간화(看話)란 조사가 보인 말씀과 행동을 깨달음의 직접적인 수단이자 과제, 다시 말해 화두로 삼고 그것을 참구하는 것이다. 이 화두의 역할은 바로 자기의 근원적인 마음을 조고(照顧)해 보는 도구이다. 즉 의심을 일으키도록 하는 강한 방편이라는 점이다. 

 

 ▶ 왜 보조지눌에 주목하나

보조국사의 휘는 지눌(知訥), 시호는 불일(佛日)이다. 지눌 스스로 ‘목우자(牧牛子)’라고 했다. 목우자는 ‘소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십우도의 네 번째 그림에 해당한다. 지눌이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찾아 길들이고자 하는 수행자로서의 진정성이 드러나 보인다. 지눌의 성은 정(鄭) 씨, 황해도 서흥 사람으로 1158년 정광우와 부인 조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국학(현 국립대학)의 학자였다. 지눌이 어려서부터 신병이 잦아 아버지가 ‘아들의 병이 나으면 출가시킬 것’을 발원할 정도였다. 

지눌은 8세 때 종휘(宗暉)에게 출가했다. 출가 후 구족계를 받고 일정한 스승 없이 도를 구했다. 25세 때인 1182년(명종 12년), 승과에 급제해 선지식을 두루 찾아다녔다. 사굴산문에 출가했지만 특정 종파에 국한하지 않았다. 곧 어느 선지식이든 법을 구하며, 경전과 논, 어록도 섭렵했다. 25세에 개경 보제사 담선법회에 참석했다가 당시 승가의 무질서함을 인식하고 도반들과 함께 정혜결사 할 것을 결의한다. 

이후 25세 창평 청원사, 28세 하가산 보문사, 41세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세 차례에 걸친 깨달음을 얻는다. 31세에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고, 1200년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가 이곳에서 11년 동안 선풍을 진작시키며 제자들을 제접했다. 52세 때 송광사에서 평소처럼 법상에 올라 설법하다가 주장자를 잡은 채 입적했다. 입적할 때에 “천 가지 만 가지가 다 이 속에 있다”는 열반게송을 남겼다. 사법 제자로는 진각 혜심이 있으며, 이 혜심은 수선사 2세가 된다. 저서로는 <수심결> <진심직설> <계초심학입문>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염불요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등이 있다.

구도 중 첫 번째 깨달음은 25세 때다. 전남 창평 청원사에서 주지를 역임하는 중에 <육조단경> ‘정혜품’을 읽다가 홀연히 깨달았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6근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알지만 만상에 물들지 아니하여 진성이 항상 자재하다.”

두 번째 깨달음은 28세 때로 예천 하가산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곧 선·교가 다르지 않음을 알았고, 원돈(圓頓)의 이치를 깨닫고 환희심을 얻었는데, 그 부분은 이러하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 ‘기이하고 기이하다. 모든 중생이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구나. 내가 마땅히 성인의 진리로서 그 허망한 생각과 집착을 여의케 하고 자기의 몸속에 있는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부처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리라’라고 한 부분에 이르러 나는 읽던 책을 머리에 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또 이통현 장자가 지은 <화엄론>의 10신(十信) 초위(初位)에 대한 해석을 열람하게 되었다.…이통현은 또 중생 스스로 범부라고 자처하고, 자신의 마음이 바로 부동지의 부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41세 때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대혜어록>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이 무렵, 지눌은 어떤 막중한 물건이 가슴에 걸리는 듯했는데, 다음 구절에 큰 깨달음 얻는다. “선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아니하다. 또한 일용응연처에도 있지 않고, 사량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아니하다. 하지만 참으로 고요한 곳이든 시끄러운 곳이든 일용응연처이든, 사량 분별하는 곳이든 그 어떤 것을 여의지 않고 참구하라. 홀연히 눈이 열리면 이 집안의 일을 알 것이다.” 

지눌은 세 번째에 이르러 견성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지눌이 세 번째 큰 깨달음이 <대혜어록>이었기 때문에 지눌 자신으로나 제자 교육에서도 수행법은 간화선이었다.

[불교신문3431호/2018년10월13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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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32> 보조국사 지눌(下)

기자명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마음이 곧 부처…‘선정과 지혜 구족’ 불교 쇄신운동

 

불교계 타락과 부패 ‘비판’ 
승려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예불 독경과 참선 노동에 
힘쓰자는 적극적인 주장

금강경 독송, 육조단경 본의
화엄론ㆍ대혜어록 날개 삼아

“깨달았다고 해도 번뇌가 
쉽게 제거되지 않기에 
정과 혜를 꾸준히 닦는 것”
‘돈오점수’ ‘선오후수’ 강조

보조국사 지눌의 사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점은 ‘정혜결사’다 선정과 지혜로 함께 닦아 본래의 ‘마음이 곧 부처’인 사실을 바르게 깨닫기 위한 결사로 불교 쇄신운동이다. 사진은 정혜결사 모습이 담긴 순천 송광사 벽화.

 

두 번째 깨달음을 얻은 뒤 31세의 지눌은 영천 은해사 거조사(居組寺)에서 몇 도반들과 정혜결사를 모의했다. 수행의 본연에 힘쓰기 위해 개경과 멀리 떨어진 곳을 택했다. 지눌의 사상 가운데 한국불교에 미친 두드러진 점은 정혜결사이다. 정혜결사란 바로 선정과 지혜로 함께 닦아 본래의 ‘마음이 곧 부처’인 사실을 바르게 깨닫기 위한 결사로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한 불교 쇄신운동이다. 불교계의 타락과 부패를 비판하면서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예불 독경과 참선 노동에 힘쓰자는 적극적인 주장이다. 부처님 열반 이래 승가가 존속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점이라고 본다. 계율과 관련해 승가를 바로잡고자 하는 선지식들이 역사 이래 배출됐기 때문이다.

시국선언문과 같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의 일부를 보자. “우리들의 일상 행위를 돌이켜 보라. 불법(佛法)을 빙자하여 ‘나다’, ‘남이다’하는 상(相)을 내고, 명예와 이익만을 좇으며, 욕망의 풍진 속에 빠져 도(道)와 덕(德)은 닦지 않고 옷과 밥만 축내고 있으니, 이런 그대들이 어찌 출가자라고 할 수 있으며, 출가의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슬프도다. 3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면서 속세를 벗어날 수행은 하지 않으니 육신은 한갓 남자 몸일 뿐, 그 뜻은 장부의 기개가 아니다. 위로는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있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중간에는 네 가지 은혜를 저버렸도다.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로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일을 탄식하고 있었다.”

지눌은 결사문을 통해 승려들이 올바르게 함께 탁마하며 수행하는 길을 지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눌이 염려했던 승가의 문제점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다. 그래도 필자는 조계종에 희망을 품는다. 열심히 살고 있는 민초 같은 승려들이 적지 않음이요, 교단은 자정(自淨)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41세 때 세 번째의 깨달음을 얻은 지눌은 1200년 43세에 순천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가 본격적으로 결사운동을 했다. 길상사를 수선사(修禪社)라 개명하고, 산 이름도 송광산에서 조계산으로 바꿨다. 결사에는 왕족,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재가신자들도 동참했다. 당시 교종 승려들이 정권 세력에 이용당하면서 승려들에 대한 비판이 있다 보니, 무신 정권은 새로운 기반의 불교가 필요했다. 이런 영향으로 정혜결사는 정치적, 경제적 원조를 받아 교세가 크게 확장됐다. 왕족이나 정권 집단과 일부러 거리를 둔 것이 아니라 왕족과 귀족들도 포함돼 있다. 곧 분별심 없이 ‘귀족이든 평민이든 평등한 입장에서 모두 함께 한다’는 결사라는 점을 높이 산다. 

정혜결사를 시작한 영천 거조암.

 

보조선의 네 가지 특징 

조계산수선사불일보조국사비(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로 보는 지눌 사상의 큰 틀은 이렇다. “사람들에게 송지(頌持)를 권함에는 <금강경>으로 하고, 입법연의(立法演義)에는 <육조단경>을 본의(本意)로 하였으며, 이통현의 <화엄론>과 <대혜어록>을 양 날개로 삼았다.”

그렇다면 지눌 사상의 특징은 어떤가. 첫째, 지눌의 선사상은 3문(三門) 체계이다. 3문은 선의 실천적 체계요, 제자를 제접하는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다.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은 점수(漸修)를 표방한 것이며,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은 돈오(頓悟)를 설명하고, 간화경절문(看話經截門)은 앞의 둘을 타개하기 위해 화두를 들어 수행해 들어가는 방법이다. 선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간화선을 받아들여 전개했다. 이 경절문은 어로, 사량분별, 의리 등을 끊고 곧바로 깨달음의 길로 드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둘째로 선교(禪敎)일치, 즉 회통사상이다. 우리나라 불교사상은 전반적으로 ‘정토+선’, ‘화엄+선’, ‘천태+선’ 등 회통사상을 근간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눌 이전 화엄종의 균여는 화엄 입장에서 선의 일치를 염두에 두었고, 의천은 천태 사상을 기반에 두고 선을 융합했다면, 지눌은 6조 혜능의 선과 대혜의 간화선을 근간으로 <화엄경>을 흡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로 돈오점수이다. <수심결>에 의거해 살펴보자. 먼저 ‘돈오’이다. “4대(지·수·화·풍)가 몸이라고 하고, 그릇된 생각(妄想)을 자기 마음이라고 하면서 제 성품이 참 법신임을 알지 못하여 밖으로 부처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선지식의 가르침으로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一念廻光) 제 본성을 보면, 번뇌 없는 청정한 성품이 본래부터 스스로 구족하고 있는 것이 제불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를 돈오라고 한다.” ‘점수’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중생일지라도 돈오는 비록 부처와 동일하지만 다생(多生)의 습기가 깊다. 곧 바람은 멈췄으나 물결은 아직 출렁이고, 이치는 나타났으나 망상이 그래도 침범하는 이치와 같다. 지혜로써 비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명을 다스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돈오는 중생의 본성, 불성이 본래 청정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 점수는 돈오를 바탕으로 점차적인 닦음을 통해 온전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깨달았다고 해도 번뇌가 쉽게 제거되지 않기 때문에 정과 혜를 꾸준히 닦는 것이다. 지눌은 ‘깨달음(悟)은 마치 햇빛과 같이 갑자기 만법이 밝아지는 것이고, 닦음(修)은 거울을 닦는 것과 같이 점차 밝아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면서, 만일 깨우치지 못하고 수행만 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선오후수(先悟後修)를 강조했다.

넷째는 정혜쌍수로서 선정과 지혜를 함께 구족해야 한다. ‘참선 수행에는 새의 양 날개처럼 선정과 지혜가 동시에 구족되어야 한다’고 했다. 지눌은 <수심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정은 본체요 지혜는 작용이니, 본체인 작용이기 때문에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고 작용인 본체이기 때문에 선정은 지혜를 떠나지 않는다. 선정이 곧 지혜이기 때문에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지혜가 곧 선정이기 때문에 알면서 항상 고요하다.”

 

자력수행 바탕 ’염불’ 수용

‘염불’, 이 단어는 말로 드러내도 마음이 행복하다. 위빠사나의 열 가지 반복적인 마음챙김(十隨念, anussati) 가운데 첫째가 불수념(佛隨念, buddhnussati)이다. 곧 부처님의 덕성을 염하면서 선정에 드는 것이다. 후대 중국 7세기 정토종에서 부처를 염하면서 소리를 내는 칭명염불로 발전됐다. 어떤 방법이든 부처 명호를 염한다는 것은 번뇌망상을 줄여 해탈열반을 향하는 지름길이라고 본다. 곧 부처를 스스로 염함으로서 닮고자 하는 것이 염불인데, 지눌은 염불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자. 
 “염불에는 대략 열 가지가 있다. 

①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염불 ②입을 잘 다스리는 염불 ③마음가짐을 올바로 하는 염불 ④움직이면서도 늘 잊지 않는 염불 ⑤조용히 앉아서 잊지 않는 염불 ⑥타인과 대화를 하면서도 잊지 염불 ⑦침묵 속에서 염하는 염불 ⑧부처님 모습을 보면서 하는 염불 ⑨무심삼매 속의 염불 ⑩진여속의 염불”이다.

①˜③은 신·구·의 3업을 청정케 하는 계율과 관련된다. 부처님께서도 라훌라에게 “너는 신구의 3업을 청정히 닦아야 한다. 몸과 입, 뜻으로 짓는 모든 행 하나하나에서 현재의 자신을 면밀히 살펴보고, 지금 현재 청정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지눌은 “정성을 다해 존경하면서 깊이 부처님을 생각하라”고 했는데, 이런 마음으로 부처를 염하면 힘든 인생에 큰 장애가 없을 거라고 본다. 

다음 ④˜⑦은 삶의 움직임 모두 어(語)·묵(默)·동(動)·정(靜) 측면에서의 염불이다. 대화를 할 때나 쉴 때, 그 어느 때든 잊지 않고 부처를 염하는 것이다. 한편 스트레스를 받거나 누군가를 미워하는 등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부처를 염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본다. 

⑧은 관상염불(觀象念佛)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부처님의 덕상을 염하는 의미지만, 처처 두두물물을 부처라고 보고 염한다면 감사하지 않을 일이 없을 것이다. ⑨는 무주심(無住心)으로 어떤 잡념도 없는 청정심, 보리심에 입각한 염불이다. ⑩은 진여염불이다. 지눌은 “염불의 마음이 이미 그 극에 달하면 끝이랄 것도 없는 끝, 마음의 가장 깊은 경지가 드러난다. 원각이요, 대지(大智)이다. 언제나 한결같고 참된 마음, 모든 것을 다 평등하게 감싸며 모든 것을 다 명백하게 비추며 아무것도 그것을 흔들지 못하는 진여(佛心)가 나타난다. 지눌이 주장한 염불 사상도 타력적인 명호를 염하는 것이 아닌 자력적인 수행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다. 

순천 조계총림 송광사에 있는 ‘불일보조국

지눌이 후대에 미친 영향

첫째, 지눌의 돈오점수 선사상은 근자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었다. 물론 20여 년 전 돈점 문제로 학계의 논쟁이 됐지만, 이 또한 지눌의 영향이다. 둘째, 승가의 법식이나 청규 등은 당시 지눌이 제정한 것으로, 현재는 많은 변화가 있지만 승가의 규율이 강화됐다는 점이다. 셋째, 지눌 이후 조선의 선사들도 선을 근간으로 교(경전)의 일치를 주장했다. 대략 <화엄경>을 최상의 경전으로 두고 <기신론> <도서> <원각경> 등 사교과와 대교과의 교과목 등이 정해지게 된 경우는 지눌의 영향이라고 본다. 넷째, <법집별행록절요과목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科目幷入私記)>, 줄여서 ‘절요’는 지눌 이후 현대까지 학인(승가대학 교재)들과 선사들의 수행 나침반이 되고 있다. 

[불교신문3433호/2018년10월20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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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철학하는 시간] <34> 보조지눌 : 다만 모른다는 것을 알라

  • 입력 2021.10.22 09:36
  • 호수 3687
기자명 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스승은 바로 ‘소치는 목동’

유마와 지눌의 병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일체가 여기에 있다’는 말을
끝으로 열반적정에 든 선사

이처럼 ‘무지’를 자각할 때
‘나’란 존재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나올 수 있어

지눌은 무지를 깨쳤기 때문에
자신과 고려불교 문제점 직시
정혜결사 운동 펼치면서 평생
‘수심인’ ‘목우자’로 존경 받아

평생을 소걸음의 실천으로 일관했던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진영.

 

➲ 호랑이 눈, 소걸음

‘호랑이 눈, 소걸음(虎視牛行)’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 1210)의 삶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호랑이는 사냥을 할 때 곁눈질을 하지 않고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소는 비록 행동은 느리지만 꾸준하고 성실하게 걸음을 옮긴다. 지눌이 호랑이처럼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소처럼 끊임없이 실천하면서 살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호랑이 눈에 비친 지눌 당시의 현실은 어떠했으며, 그가 소걸음의 실천을 중시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지눌은 황해도 서흥(瑞興) 출신으로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 오늘날로 보면 국립대학 학장을 지낸 인물이다. 지눌은 어린 시절부터 병치레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는 출가를 하면 병을 고치고 주어진 명대로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어린 지눌을 절에 맡긴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눌은 황해도에서 그 먼 강원도 강릉에 자리한 굴산사(崛山寺)로 출가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굴산사지 당간지주가 있는 곳이다. 당시 굴산사는 구산선문 가운데 사굴산문의 중심 사찰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종휘(宗暉)선사에게 출가를 하게 된다.

기록에 학무상사(學無常師), 즉 일정한 스승 없이 공부했다고 나오는 것을 보면 지눌이 굴산사에 오래 머물면서 정진한 것 같지는 않다. 지눌은 25세의 나이에 그 어렵다는 승과(僧科)에 합격하게 된다. 이는 국가에서 매우 뛰어난 엘리트 승려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승과에 합격하게 되면 큰 사찰의 주지나 중요한 자리에 임명되는 등의 특혜가 주어진다. 한마디로 승려로서 탄탄대로의 미래가 보장된 셈이다. 하지만 지눌은 출세, 명리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당시 합격자들을 위한 축하 모임이 개경 보제사(普濟寺)에서 담선법회(談禪法會) 형식으로 열리는데, 이 자리에서 지눌은 도반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이 법회가 끝나면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모임을 만듭시다.”

고려불교를 새롭게 혁신하려는 강한 의지가 담긴 사자후다. 그렇다면 지눌은 왜 출세 길을 외면하고 이런 어려운 길을 선택했을까? 당시 지눌이라는 호랑이의 눈에 비친 고려불교는 매우 심각할 정도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외적으로 승려들은 종교적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무신(武臣) 정치 세력들과 결탁하여 전투에 참여했으며, 심지어 가난한 서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할 정도였다. 불교 내적으로는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이 서로 헐뜯으면서 ‘원수’처럼 싸우고 있었다. 한마디로 지눌은 고려불교가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고 진단했던 것이다.

지눌은 먼저 고려불교가 타락한 원인을 분석하고 그 대안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가 내린 결론은 불교가 마음 닦는(修心) 일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고 정법불교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수심불교(修心佛敎)로 회복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가 담선법회에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결사를 만들자고 외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그는 뜻을 함께 하는 도반들과 남쪽으로 내려와 이를 실천에 옮긴다. 그것이 유명한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이다. 팔공산 거조암(居祖庵)이나 조계산 송광사(松廣寺) 등은 이런 숭고한 뜻이 새겨진 역사적 현장이다.

이처럼 지눌은 마음 닦는 결사를 통해 고려불교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불교 내적으로 문제가 된 선종과 교종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전통 속에 있는 선사로서 회통(會通)의 근거를 발견하기 위해 3년 간 대장경을 공부한 일은 당시로서는 파격에 가까웠다. 그는 선(禪)과 교(敎)가 둘이 아니라는 근거를 발견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가 이 문제에 얼마나 깊이 천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지금까지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禪是佛心),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敎是佛語).”

이는 단순하지만, 마음과 언어가 만나면(會) 서로 통(通)할 수 있다는 의미 있는 결론이다. 결국 마음을 밖으로 표현한 것이 말씀이기 때문에 선과 교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서로 원수처럼 싸울 이유가 사라진 셈이다.

평생 고려불교의 혁신과 선교회통을 위해 진력한 지눌은 53세라는 짧은 나이에 제자들과 법담을 나누다 입적에 든다. 그는 유마거사와 지눌의 병이 같은지 다른지 모르겠다는 제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면서 이승과의 인연을 마친다. 

“너는 같고 다른 것만을 배웠구나. 일체의 모든 것이 이 안에 있느니라(爾學同別來 千種萬船摠在這裡).”

 

 

➲ 무지를 자각할 때 나오는 것들

한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죽음은 평생 동안의 생애를 압축하는 순간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선(禪)에서는 ‘갈 때 보자’는 말을 종종 한다. 잘 간다는 것은 잘 살았다는 방증일 테니 말이다. 잘 갔다는 의미를 담은 ‘선서(善逝)’가 붓다의 명호 가운데 하나인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지눌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을까? 개인적으로 제자들과 진리에 대한 법담을 나누면서 삶을 마감하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고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지눌은 53세가 되던 1210년 어느 봄날 자신이 떠날 것을 미리 알고 목욕재계를 한 다음 제자들에게 마지막 법문을 한다. 비문에는 “이 눈은 시조(始祖)의 눈이 아니고, 이 코도 시조의 코가 아니다. 이 입은 어머니가 낳아준 입도 아니고, 이 혀도 어머니가 낳아준 혀가 아니다”라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한마디로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돌이켜보라는 뜻이다. 그리고 힘이 있는 자는 나와서 질문하라고 하자 유마와 지눌의 병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는 제자의 물음이 나온 것이다. 지눌은 들고 있던 주장자를 몇 번 내리친 다음 일체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는 말을 끝으로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

그의 마지막 말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마음으로 전한 선사들의 언어를 지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무척 힘들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만큼 해석하고 거기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축복일지 모른다. 이 때문에 눈썹이 빠진다 해도 즐겁게 받아들일 것 같다. 인류는 같은 속성을 가진 사물들을 구분하고 다른 대상과의 차이를 규명하면서 진화해왔다.

예컨대 말과 고양이는 동물이라는 공통성이 있으며, 식물과 동물은 본질이 다르다. 동양인과 서양인은 사람이라는 본질은 같지만, 외모나 사용하는 언어 등은 다르다. 고려 당시 같은 불교 내에서도 선종과 교종은 원수처럼 싸울 만큼 서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동일한 현상이라도 보수와 진보 진영의 해석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지금까지 인류는 같고 다른 것을 구분하면서 편을 만들고 나와 다른 진영은 틀렸다고 적대시하면서 살아왔다.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지른 전쟁을 생각하면 정말로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같고 다른 것을 구분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구별하고 있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돌아본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지눌은 제자에게 같은지, 다른지 모르겠다고 질문한 놈이 어떤 바탕인지 진지하게 돌이켜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성품을 보는 것(見性)은 선(禪)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고 다름을 구분하면서 살아온 업장 때문에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이때 필요한 일이 무엇일까? 지눌은 <수심결>에서 “다만 모른다는 것을 알라”고 강조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편견이나 선입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불회(但知不會)는 시비, 분별에 사로잡힌 마음을 모두 내려놓겠다는 자기 고백이다. 나 자신의 존재가 어떤 바탕인지 돌아보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순간이다.

이때 나오는 질문이 다름 아닌 ‘이 뭣고(是甚麽)?’라는 화두, 즉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러한 살아있는 질문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던 소크라테스나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라고 말했던 공자와 같은 의미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눌이 마지막으로 남긴 ‘일체의 모든 것이 이 안에 있다’고 했을 때 ‘이것’은 바로 모르겠다는 ‘그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처럼 무지(無知)를 자각할 때 나란 존재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지눌은 무지를 깨쳤기 때문에 호랑이의 눈으로 자신과 고려불교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직시하고 대안을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마음 닦는 수심불교의 확립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정혜결사 운동을 펼치면서 평생을 수심인(修心人)으로 살았다. 지눌 스스로 ‘소치는 아이(牧牛子)’라고 불렀던 이유이기도 하다.

어른이라는 허울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소치는 목동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정확히 모르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짜 뉴스나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온갖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어른과 달리 어린 아이는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 용기가 있으니까 말이다. 다만 모른다는 것을 알라는 가르침이 무겁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불교신문3687호/2021년10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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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 한국사 - 고려

지눌

고려 불교를 개혁하라

요약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한 조계종을 창시했어요. 지눌은 타락한 고려 불교를 개혁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지요.
출생-사망
1158년 ~ 1210년

1. 지눌의 키워드

시대 ▶ 1158년~1210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 불교의 사치
‘나’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 조계종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 정혜쌍수와 돈오점수
남기고 싶은 한 마디 ▶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아우르자!
역사적 중요도 ▶ ★★★★☆
시험 출제 빈도 ▶ 높음

2. 고려 불교가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고려 중기에 이르면 귀족 사회가 번성을 누렸어요. 그러자 불교계도 점점 사치를 일삼게 되었습니다. 귀족들이 불교를 후원했던 것이죠.

승려들은 수행이나 경전 공부를 뒷전으로 하고, 점차 경제 활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3. 절에서 경제 활동을 하다

고려 중기에는 넓은 토지를 소유한 절들이 많아지게 되었어요. 토지를 소유한 절에서는 백성들을 상대로 돈을 빌려 주고 비싼 이자를 받았습니다.

또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돈을 받고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해 주기도 했지요.

절에서 경제 활동이 이뤄지게 된 것이에요.

4. 지눌, 현실을 비판하며 개혁을 추진하다

승려들이 경제 활동에만 집중하자,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고 나선 승려가 있었어요. 바로 지눌이에요.

지눌은 전라도 송광사에서 ‘수선사’라는 신앙결사 운동을 일으켰어요. 수선사 운동은 ‘승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답니다.

5. 지눌, 조계종을 창시하다

지눌의 수선사 운동은 지방 승려들의 지지를 얻었어요.

그러자 지눌은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을 중심으로 경전 공부를 중요시하는 교종을 아우르는 조계종을 창시했지요.

6.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라는 수행 방법을 중시하다

정혜쌍수에서, ‘정()’은 참선을, ‘혜()’는 교리를, 쌍수()는 둘 다 닦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참선과 교리 모두 수양해야 한다는 것으로, 특히 교리 보다 참선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함을 강조했어요.

또한 지눌은 ‘돈오’와 ‘점수’를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돈오()는 ‘깨닫는다.’ 점수()는 ‘꾸준히 수행한다.’는 뜻이에요.

즉, 먼저 깨닫고 난 뒤에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7. 고종훈의 5분 강의 - 지눌

 
 
 
00:0004: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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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방송 한국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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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공처 정보

생방송 한국사 4 : 한국사 더 쉽고 재밌고 생생하게!, 고려 2017.01.20. http://tv.naver.com/owlbook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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