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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에티오피아 참전기념비

 

 

에티오피아 참전기념비

 

소개

1. 명칭 : 에티오피아 참전기념비

2. 지역 : 강원

3. 주소 : 강원도 춘천시 근화동 361-1(조각공원 내)

4. 건립일 : 1968-05-07

5. 시설종류 : 기념비, 기념식수

6. 시설물 크기 : 비 높이 15.2m, 기단 높이 1.2m

7. 특징·설명/추모내용 :
강원도 춘천시 공지천 유원지 입구에 있는 에티오피아 참전비는 유엔한국참전국협회와 춘천시가 1968년 5월에 건립했다. 깃대를 세워놓은 형상의 높이 16m인 이 탑의 중앙엔 에티오피아를 상징하는 사자상이 있다. 탑엔 ‘자유 수호를 위하여 6·25전쟁 중 이 땅에서 공헌한 영웅적인 이디오피아 제국의 용사들에게 바친다’는 비문이 적혀 있다. 제막식에는 당시 방한 중이던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도 참석했다. 75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참석해서 참전 군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나타낸 이유는 6·25전쟁에 파병된 에티오피아군이 황제 근위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과 에티오피아의 우정은 역사에 기록되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제막식 연설을 하기도 했다. 에티오피아 참전비 길 건너편엔 춘천시에서 2007년에 세운 에티오피아 참전기념관이 있다.

 

사진 

 

 

 

 

 

 

 

 


출처: UN평화기념관 방문을 환영합니다. 국내 페이지 입니다.

 

UN평화기념관 방문을 환영합니다. 국내 페이지 입니다.

 

www.unpm.or.kr

 

 

<< 관련내용1>>

 

2022년 5월의 유엔참전국 에티오피아

선정 근거 : 1951년 5월 6일 한국 도착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유엔참전국 22개국에서 195만7733명이 참전했습니다. 참전용사들의 용기와 활약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하였습니다. 유엔평화기념관은 뉴스1과 함께  2023년 정전 협정 70주년을 앞두고 ‘이달의 유엔참전국’ 연재를 통해 유엔참전국과 참전용사의 활약상을 조명하고 기억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뉴스1 기사 바로가기 클릭!

 

5월 6일은 에티오피아 군이 이역만리 먼 한반도를 향한 긴 항해 끝에 부산항에 도착한 날입니다. 에티오피아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유엔 회원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안정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온 우방국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할 무렵에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던 에티오피아 정부는 한국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유엔이 지원을 요청해 오자 “한국의 위기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유엔의 결의를 적극 지지한다.”는 요지의 공식성명 발표 후, 약 1,4000파운드의 자금을 지원하고 자국 내의 사정을 고려해 황실근위대 병력 중 자원하는 병력을 중심으로 1개 대대 병력을 파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영국군으로부터 훈련을 마치고 1951년 4월 13일 아디스아바바 궁정에서 출정식을 했고, 이 자리에서 셀라시에 황제는 “국제평화와 인류의 자유 수호를 위해 침략군을 격파하고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 때 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 까지 싸워라!(Fight until you win, or die)” 라고 격려하며 ‘격파하다’,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라는 의미로 대대의이름을 Kagnew(강뉴 또는 각뉴)로 명했습니다. 에티오피아 대대는 열차편으로 아디스아바바시를 출발하여 이역만리 먼 한반도를 향하여 수송선으로 한 달여의 긴 항해 끝에 1951년 5월 6일 부산에 상륙하였고 이후 7월 11일 가평으로 이동하여 미 제7사단에 배속된 후 중동부전선인 적근산 전투에서부터 참전하였습니다.
 
에티오피아군은 연인원 약 6천여 명이 참전하였으며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을 당하는 희생을 치렀으나 단 한명의 포로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개 포로는 부상 때문에 낙오되었다가 적에 붙들리는 경우가 많으나 에티오피아 군인들은 부상한 동료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물론 전사한 동료의 시신까지도 모두 진지로 옮겨왔고 만일 동료가 적에 붙들리는 것을 본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곧바로 뛰어가 동료를 구해냈습니다. 에티오피아 군인들에게는 “전쟁에서 전사한 영웅들의 시신은 반드시 수습한다.”라는 전통이 있었으며 강뉴부대도 그 전통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대대는 황제의 엄명에 따라 용감하게 싸웠으며, 부상자나 전사자, 실종자는 반드시 찾아내어 자대로 복귀시켜내며 화천지구 전투, 양구부근 전투, 삼각고지 부근 전투, 요크 및 엉클고지 전투 등 253차례의 전투를 수행하여 대부분 승리하는 전과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에티오피아군의 용기와 희생은 에티오피아군에게 전달된 상훈으로도 나타나는데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 2회,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 1회,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 2회를 포함한 무공훈장 58회, 미국 은성훈장 1회를 포함한 각종 훈장 20회를 수여 받았습니다.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참전국 중 아프리카 대륙에서 지상군을 파견한 유일한 국가인 에티오피아가 남긴 집단안보와 자유에 대한 신념은 지금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가치로 남아 있습니다.
 

<< 관련 내용2>>

 1951년 전쟁 발발 시 아프리카 국가가운데 유일하게 황실친위대를 중심으로 전투부대원 600명을 파송해준 나라가 바로 에티오피아다. 우리나라를 공산화로부터 구해주기위해 참전한 수많은 유엔군들이 많지만 특별히 에티오피아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 연 인원 6,037명이 5회에 걸쳐 한국전쟁에 참전했는데 강원도 춘천지역에서 남하하는 중공군과 무려 253차례나 전투를 벌려 한 번도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를 한 바 있다.

이 전투에서 123명이 전사하고 600여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단 1명의 포로도 없었다. 당시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2세 황제는 한국전에 참전하는 병사들에게 “싸워서 이기든지, 죽기까지 싸우라!”라는 단호한 명령을 하여 보냈던 것이다. 그 무더운 사막에서 낳고 자란 그들이 그렇게 춥던 겨울에 한국에 도착해 싸워야했으니 기후와 환경 또한 이기고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또 하나의 적이었던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고 저항했으나 결국 패전국이 되고 말았다. 그때 에티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제네바 국제연맹에 가서 전 세계지도자들에게 에티오피아를 도와달라고 호소를 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셀라시에 황제는 에티오피아의 젊은이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며 내일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고 드디어 1941년 이탈리아를 에티오피아 땅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엔이 설립되자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에서 “우리가 힘들 때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지만 우리는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와 같은 나라가 다시 나오지 않도록 힘을 모아 약한 나라를 도와주자!”라는 집단안보를 주장하고 나서자 유엔은 셀라시에 황제의 의견을 받아드렸다.

그 후 첫 번째로 발발한 전쟁이 공교롭게도 6.25 한국전쟁이었다. 셀라시에 황제는 “집단안보”를 주장하며 유엔에 한국을 즉각 도울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왕실 근위대였던 ‘강뉴부대’를 즉각 한국전쟁에 파병키로 했던 것이다. ‘강뉴’란 말은 에티오피아어로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한다.’라는 뜻과 ‘초전박살’이라는 뜻이다. 셀라시에 황제는 강뉴부대를 한국전에 파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에티오피아가 항상 추구해왔던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안보를 실천하기 위해 그대들은 오늘 장도에 오른 것이니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한 후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

셀라시에 황제는 안타깝게도 지난 1974년 공산주의자 맹기스투 소령의 무력 쿠데타로 살해를 당하고 그 후 16년 동안 에티오피아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하는 바람에 나라경제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권력을 쥔 맹기스투가 북한과 친해지면서 한국전쟁 참전자와 가족들, 그리고 후손들까지 적국을 위해 싸웠다는 이유로 모든 공직에서 축출시키고 재산을 몰수하며 온갖 박해를 하는 바람에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지금도 참전 생존자 200여명이 최 극빈자 생활을 하고 있으며 1950년 당시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 약 70달러일 때 에티오피아는 3.000달러나 되었지만 현재는 우리나라가 30.000달러가 되었고 에티오피아는 700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을 정도이다. 에티오피아는 1960년 로마올림픽 때 황실 친위대 소속 육상선수인 비킬라 아베베가 맨발로 마라톤에 도전 금메달을 따면서 전 세계에 감동과 함께 관심을 갖게 한 나라이기도 하다.

지난 2017년 우리나라 언론보도에 의하면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 가운데 단 3명만이 살아있으며 그 후손들 가운데 일부는 정치적 박해를 피하여 우리나라에 난민으로 정착중이라고 한다

 

출처: 6.25전쟁과 참전국 에티오피아

 

6.25전쟁과 참전국 에티오피아

호국보훈의 달 6월이 저물어간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제64회 현충일 기념식과 6.25 한국전쟁 발발 69주년을 맞게 된 금년이야말로 과거 어느 때보다 국가안보가 염려되는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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