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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다시보는 진품명품]감정위원이 선정한 최고의 명품은?

 

[다시보는 진품명품] 감정위원이 선정한 최고의 명품은? KBS 131103 방송

https://youtu.be/5OALmkUZzRY?si=lkPBl4LX9g_N_oMJ

 

2021년 10월 20 #TV쇼진품명품

그림, 글씨, 도자기, 민속품 총 망라!! TV쇼

진품명품 감정위원들이 선정한 최고의 명품은?

 

열녀서씨포죽도(烈女徐氏抱竹圖) / 화산관 이명기(華山館 李命基)

 

이 그림은 2012년 10월 진품명품 지방출장감정에서 발견되어 본 방송으로 이송 방영 되었으며 감정가가 무려 10억이나 책정되어 세간을 놀라게 하였다.

 

이 그림을 살펴보면 느티나무와 살구나무로 추정되는 정원수가 집을 에워싸고 있고집안엔 새싹이 돋아난 대나무 지팡이가 보이며, 집 뒤뜰 언덕에 오르면 대나무 숲이 있다그 숲에서 소복을 입은 여인이 대나무를 부여잡고 먼 산 밑 소나무가 있는 묘지를 바라보며 슬피 울고 있다그리고 그 여인 주변으로 흰 대나무가 환영처럼 여기저기 솟아있다.

 

이 그림이 바로 시대가 강요한 회생을 감내한 열녀서씨의 한 많은 삶이 담겨있는 그림이다.

  

<열녀서씨포죽도>가 그려진 시대적 배경 

먼저 이 그림을 감상하기에 앞서 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적 배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조선건국과 함께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자리 잡으며 모든 사회제도가 개혁되면서 적지 않은 부작용이 발생했다남녀노소와 신분에 따른 인간의 가치를 차등적용 시키면서 유교이념을 확대해석해 권위주의와 심각한 남녀차별을 조장했다.

 

정절이데올로기가 사회 깊숙이 스며들며 여성에 대한 각종 비인간적인 억압과 통제가 당연시되었다여성의 바깥출입과 활동이 규제되었고, 출가외인의 개념이 도입되었으며, 효부 열부로 살도록 강요되었다. 외나무 다리를 건느다 다른 남자의 손길만 스쳐도 죄의식을 느껴 피부가 벗겨지도록 닦아내는 시대가 되였다여성의 몸은 가문의 혈통을 잇는 수단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을 살다간 열녀서씨의 한 많은 삶이 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젠 남존여비 사상이 이 땅에서 잠들고 여성이 국가수반에 올라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정을 펼친다고 하니, 다시는 여성이 사회적 회생물이 되는 비극은 없을 것 같다.

  

<열녀서씨포죽도>의 사연과 내역 

세종대왕 때 경북 군위에 도운봉 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결혼 후 약1년 정도 지난 어느날 20대 초반의 이른 나이로 병을얻어 운명 을 달리한다그 후 정부인달성서씨가 매일 남편이 심어놓은 뒤뜰 대나무 숲에 올라 대나무를 부여잡고 남편의 무덤을 향해 애절하게 슬피울며 죽은 남편을 그리워한다.

 

그러한 일이 17년간이나 계속되던 어느 날 홀연히 대숲에서 흰 대나무가 솟아올랐다.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이를 향당에서 경상도 감사에게 알리고, 다시 경상도 감사가 세종대왕에게 장계를 올리자왕이 그 흰 대나무를 그려 올리라 명한다경상도 감사는 그 흰대나무를 그려 진상했고, 그 백죽도(白竹圖)를 본 왕이 크게 감동하여 서씨에게 열녀의 증표인 정문(旌門및 복호(復戶)를 명하고 어제시(御製詩)를 하사한다이러한 사연이 세종실록과 속삼강행실도 등에 실려 있다.

 

세종대왕이 내린 작첩이나 문서 및 사적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멸실된다이 후 도씨문중에선 선조비이신 서씨의 행적을 기려 포죽도(抱竹圖)를 제작 보관하고 있었는데그 그림이 낡아 정조19(1795)에 영천지역 찰방(현 우체국장)으로 재임하던 당대 대표적인 초상화가인 화산관 이명기(華山館 李命基)에게 부탁해 새롭게 그린 것이 <열녀서씨포죽도>.

 

 

다음은 화산관 이명기(華山館 李命基)가 열녀서씨포죽도를 중모(重摹), 즉 다시 그릴 때 포죽도 중모기(抱竹圖 重摹記)를 남겼는데 그 전문이다.

 

<포죽도 중모기(抱竹圖 重摹記)> 

영남은 본래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고장으로 일컬어져 예로부터 정승 판서 등의 이름난 높은 벼슬아치와 도학충의절효(節孝)의 선비가 전후로 계속 배출하여 빛나는 전적(典籍)과 현자가 많은 최고의 고장이 되었다.

 

나는 지난 계축년 여름에 역참을 관리할 것을 명받았지만 역의 공무가 쌓여 단 한걸음도 문밖에 나가서 아름다운 명승지를 구경할 겨를이 없었으나때때로 시골 선비들에게 새로운 것을 많이 듣게 되었는데감동할 때가 많았다.

 

이번에 석사 도필구가 두루마리 한 폭을 갖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다시 모사하는 일을 부탁하므로 삼가 받들어 펼쳐보았더니 곳 그의 선조비(先祖妣정부인 달성서씨의 <포죽도>였다.

 

장헌(세종)대왕의 시도 여기에 게재되어 있어 두 손으로 받들어 읽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기리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나라에서 절의를 장려하고 교훈과 가르침을 붙들어 심어 백세에 없어지지 않는 덕을 드리운 것을 볼 수 있으니그것이 어찌 도씨 한 집안 만의 영광이겠는가아마도 세상의 도리를 위해 다행한 일이니 아 훌륭하여라그 흰 대와 눈 속의 붕어가 정성스런 효도의 감동으로 인한 것이니이 사실이 모두 삼강행실도에 실려 있으므로 지금 감히 글을 덧붙일 수 없도다.

 

훌륭하도다도씨의 집안에는 어쩌면 그렇게 절의가 많았던가이 일에 나도 참여하는 영광을 얻은 것이니어찌 감히 거절 하겠는가즉시 일어나서 손을 씻고 삼가 모사하여 돌려주며 드디어 이를 위해 중모기를 쓴다.

 

통훈대부 행 장수도 찰방 이명기 삼가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