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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석남사승탑, 도의선사 무덤 아니다

 

석남사승탑, 도의선사 무덤 아니다

울산 울주군 가지산의 석남사승탑 건립 시기 고찰

07.02.04 17:17, 최종 업데이트 07.02.04 17:17l

신병철(shinbcl)

석남사승탑, 도의선사 무덤 아니다 울산 울주군 가지산의 석남사승탑 건립 시기 고찰 07.02.04 17:17l최종 업데이트 07.02.04 17:17l신병철(shinbcl)▲ 석남사 승탑, 직선과 곡선이 적당히 어울리고 상승감이 정겨운 우아한 승탑이다.ⓒ 신병철

부도는 부처의 무덤인 불탑, 탑파, 탑과 같은 뜻이다. 그래서 선종의 유행과 함께 제작되기 시작한 스님의 무덤을 부도라고 불러왔으나, 옳지 못한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부도라 불러왔던 스님의 무덤을 승탑(僧搭)이라 부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울산광역시 울주군 가지산 남쪽에 자리 잡은 석남사에는 아름다운 승탑이 한기 서 있다. 높이에 비해 몸체가 가늘어 날씬하고 팔각형과 원형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깔끔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통일신라시대 승탑으로 상승감이 뛰어난 멋들어진 승탑 중 하나다.

석남사 승탑이 도의선사의 무덤?

▲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 승탑, 기단은 탑 기단과 같고, 탑신은 8각원당형으로 탑과 승탑의 절충형이다.ⓒ 신병철

승탑 안내글에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선종을 전파한 '도의국사의 사리탑이라고 전한다'라고 적혀 있다.

도의는 784년에 중국 당나라에 가서 남종선을 터득하고 821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우리나라에 선종을 전파하려 하였으나, 교학(敎學)만을 숭상하고 무위법(無爲法, 즉 선종)을 믿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직 시기가 아님을 알고 설악산 진전사에 들어가 40여 년을 수도하다가 제자 염거에게 선종을 전하고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진전사에는 도의선사의 승탑으로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승탑이 있다.

도의선사로부터 남종선을 전수받은 염거는 다시 제자 체징에게 선종을 전했는데, 체징이 전라남도 장흥의 가지산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도의선사를 가지산파의 개산조로 삼고 염거화상을 제2대조로 삼고, 자신은 제3대조가 되었다.

 

그렇다면 도의국사(선사)가 울산 석남사에 왔음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석남사가 자리 잡고 있는 산이 가지산파의 가지산과 이름이 같으니 후세 사람들이 혼돈하거나 아니면 석남사가 절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장흥의 가지산과 동명임을 이용하여 도의국사를 끌어들였을 가능성이 있겠다.

석남사 승탑의 특징들

사실 여부가 문제가 될 때에 믿을만한 기록이 있으면 쉽게 해결된다. 그러나 없을 경우에는 도의국사의 승탑이라고 하는 '석남사승탑'을 살펴보아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석남사승탑의 모습으로 그 시간적 위치를 살펴보면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지 모른다.

▲ 승탑구조도, 크게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분된다.ⓒ 국보 도록

석남사승탑은 대부분의 승탑과 마찬가지로 크게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나뉜다. 기단부는 탑의 바탕이 되는 단으로 다시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석남사승탑의 하대석은 사자를 새긴 8각의 하단과 권운문을 돋을 새김한 둥근 모양의 상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 부처님을 상징한다. 구름은 하늘에 떠 있으니, 그 위에 있는 물체는 모두 하늘나라 이상 세계에 있음을 상징한다. 사자가 받드는 이상세계에 스님의 사리를 모신 셈이 되는 것이다. 팔각과 둥근 모양이 적절하여 조화롭다.

석남사승탑의 중대석은 북을 업어놓은 모양이다. 자세히 보면 팔각을 표시하는 기둥이 표시되고 그 안을 사과 모양의 안상으로 꾸몄다. 그 가운데에 4개의 잎을 가진 바람개비 모양의 꽃을 새겼고, 그것은 다시 두 개의 띠로 좌우로 연결하고 있다. 둥그스레한 팔각형 북모양이 푸근하고, 꽃이 있어 예쁘다.

▲ 석남사승탑 중대석과 상대석, 중대석이 북모양으로 둥그스레해서 우아함을 느낄 수 있다.ⓒ 신병철

상대석은 크게 위로 핀 연꽃 모양과 팔각형의 갑석모양으로 구분된다. 팔각형 모서리마다 연꽃을 크게 새겼고, 그 중간에 작은 연꽃 일부를 새겼다. 각 연꽃잎은 다시 두개로 나뉜다. 연꽃잎은 포동포동하여 육감적이기까지 하다. 그 위에 놓인 팔각형의 갑석이 탑신을 받치고 있다.

@BRI@탑신부는 탑몸과 지붕으로 나뉜다. 탑몸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겨 8면을 만들었다. 남쪽 정면에는 자물쇠가 있는 문을 새겼다. 북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남문의 좌우에는 신장이 서 있는 형상을 새겼다. 나머지 5면에는 아무것도 새기지 않았다.

지붕의 아랫면은 서까래를 표시하였고, 윗면에는 기왓골을 새겼다. 지붕 낙수면은 급하지 않고, 추녀있는 합각에는 작은 내림마루를 만들고 그 끝을 살짝 들어 올려 작은 귀꽃을 넣었다. 탑신이 조금 크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조화로운 모습이다.

탑의 꼭대기 부분이 상륜부다. 석남사승탑의 상륜부는 매우 잘 남아 있다. 아래에 위로 향하여 핀 앙화가 있고, 제법 높직한 중앙 띠를 가진 간석 위에 보개가 놓였고, 그 위에 길쭉한 보주를 놓았다. 상륜부가 완전히 남아 있는 소중한 승탑이라 하겠다.

신라말 호족 세력이 승탑을 세웠다

 

▲ 화순쌍봉사철감선사대공탑, 통일신라 승탑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멋있다. 철감선사가 저렇게 멋진 분이었을까? ⓒ 신병철

승탑은 9세기 이전에는 만들지 않았다. 통일신라는 '왕을 곧 부처'라고 절대시하면서 피지배층을 장악했다. 8세기까지는 왕과 진골세력이 지방세력을 장악하면서 그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9세기경부터 지방세력이 크게 성장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방 호족들은 왕족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하는 교종보다는 선종을 그들의 이념으로 삼았다. 선종은 누구나 불성이 있으며, 그것을 깨달으면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은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선종은 진골세력의 이념인 교종보다 더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었고, 신라해체 시기에 지방호족과 진골체제에서 이탈해 나간 6두품세력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이런 경향의 선종을 처음 중국에서 받아들인 존재가 바로 도의국사였다.

 

도의가 821년에 귀국하여 40년을 진전사에서 수도하였다 했으니 그가 입적한 때는 860년쯤 되는데, 그 시간은 믿기 어렵다. 도의의 제자 염거화상의 승탑이 844년에 만든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니, 도의선사는 적어도 그 전에 입적했을 가능성이 크다.

도의선사가 입적한 곳에 처음으로 승탑을 세웠다. 왕이 부처의 무덤인 탑으로 절대 권력을 정당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호족들은 선종의 개산조 혹은 정신적 지주가 된 고매한 선사들의 승탑을 만들어 호족의 정치세력화를 이뤄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최초의 승탑은 도의선사 승탑으로 알려진 진전사지승탑이다. 이 승탑은 4각의 2중 기단 위에 팔각의 연화괴임을 놓고 그 위에 팔각형의 탑신을 올렸으며, 그위에 옥개석을 올리고 연봉오리 모양의 상륜부를 지녔다. 기단부는 당시 유행한 2중기단의 3층석탑의 기단부와 같은 모양이다. 탑신을 올리는 괴임돌 이상은 모두 팔각이니, 당시의 탑과 이후 승탑의 절충형임을 알 수 있다.

▲ 염거화상 승탑, 우리나라 최초의 8각원당형 승탑이다. 도의선사의 제자 염거의 승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있다.ⓒ 신병철

 

현재 알려지고 있는 두 번째 승탑은 가지산파의 제2대조인 염거화상의 승탑으로 844년에 만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각의 기단이 완전히 팔각이 되고 둥근 몸체를 가졌다. 우리나라 승탑의 전형인 팔각원당형이 염거화상탑에서 완성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승탑, 앞으로 나란히!

▲ 석남사승탑과 관련된 통일신라 승탑의 비교표ⓒ 신병철

다시 한번 석남사 승탑의 특징을 찾아보자. 석남사 승탑은 하대석 아래에 사자상이 있고 권운문 상단이 있으며 중대석은 북을 엎어놓은 모양이며, 탑신 괴임돌은 사라진 대신 상대석 갑석이 있고, 탑신의 앞면에만 문모양을 새겼고, 좌우 두면에만 신장상을 새겼고, 옥개석은 기왓골은 존재하나, 작은 귀꽃이 새겨져 있다.

석남사승탑은 9세기 말에 만들었다

▲ 장흥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 염거화상의 제자로 장흥 가지산파 선문을 연 스님의 승탑이다. 석남사승탑과 가장 유사하다. ⓒ국보도록

 

실제로 석남사승탑은 장흥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과 가장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탑신에서 8면 중에서 앞면과 그 좌우면 3면에만 장식이 있는 점, 옥개석의 추녀에 귀꽃이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보림사승탑보다는 후대의 모습으로 판단된다. 반면 창원봉림사승탑보다는 장식이 많고 하대석에 옛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그것보다는 앞선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승탑 비교사진

통일신라시대 승탑 비교사진, 석남사승탑은 보림사승탑과 봉림사 승탑 사이에 있어야 할 것 같다ⓒ 신병철

 

이렇게 볼 때, 석남사 승탑이 도의국사의 승탑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도의국사(선사)가 울산 가지산에 갔을 가능성도 적고, 그 곳에서 입적했을 가능성도 없다. 양양 진전사에서 입적한 스님이 장흥 보림사라면 몰라도 울산 가지산에 모셔졌을 리도 없다. 시대도 9세기 중엽에 입적한 도의선사의 사리를 적어도 50년 뒤 연고도 별로 없는 울산 가지산 석남사에 모셨을 까닭도 없다.

▲ 석남사 입구 글씨, 가지산 석남사라고 되어 있다. 장흥의 가지산과 이름만 같다.ⓒ 신병철

 

석남사 승탑은 9세기 후반 이곳에서 활약한 어느 선사의 승탑으로 보인다. 석남사 뒷산이 석안산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가지산이라 부르면서 장흥 가지산과 혼돈되었고, 가지산파의 개산조인 보조선사의 스승인 도의선사의 승탑으로 인식시키면서 석남사의 사세를 드러내려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류라고 생각된다.

그래도 1100년 전에 만든 석남사 승탑은 예쁘고 세련되었다. 어느 스님의 승탑일까? 현재 석남사에는 여승만 계신다. 석남사승탑은 어쩌면 예쁜 비구니스님을 닮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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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90124&CMPT_CD=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