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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1907년 8월 1일 서울시가전

 1907년 8월1일 서울시가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병제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 최고 군사 기관인 원수부를 해체하고 진위대(지방군)의 병력을 크게 감축시켰는데 본래의 18개 대대에서 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황주·평양·북청의 8개 대대로 축소하였다. 편제는 과거 1개 대대가 5개 중대였던 것을 4개 중대로 개편시켰으며, 1개 중대 병력을 장교 이하 256명으로 줄여서 8개 대대를 모두 합쳐도 2,365명에 불과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 축소에 아예 정미 7조약의 비밀조치서 따라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하려고 했다. 일본 통감부는 대한제국군 시위대 병력 전부를 1907년 8월 1일자로 비무장 상태로 훈련원에 모이라고 공지했다.  참고로 통감부는 1910면 한일합방 이전에 대한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으로 초대 조선통감부 통감은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였다.

프랑스 언론 [르 프티 주르날]에 실린 남대문 전투 시가전-

 

서울 시가전은 일본의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저항하여 대한제국 군대가 반발, 교전(交戰)을 벌인 전투다.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新協約)이 체결되었을 때에 첨부되고 있던 비밀 각서에 의거해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조선군 사령관은 조선군의 화약과 탄약고를 접수하게 한 다음, 7월 31일 순종으로 하여금 군대 해산 조칙을 공표하게 하였다.

제1연대 대대장(大隊長) 박승환

1907년 8월 1일, 서울 시위대(侍衛隊)의 해산을 시작으로 각 지방의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 바로 그 날, 서울 시위대 제1연대 대대장(大隊長) 박승환이 울분을 못 이겨 권총 자살을 한다. 그는 유서에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니 만(萬)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라고 하였다. 대장이 죽자, 대한제국 시위대 사병들은 격분했고, 일본군을 습격하여 교전(交戰)을 벌인다. 일본군이 3명이 사망한 반면에, 대한제국군은 68명이 사망했다. 또한 일본군이 27명이 부상당한 것에 비해서, 대한제국군은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8 1일 전투 당시 간부로서 확인된 전사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참령             오의선 ( 2연대 1대대 중대장)

정위 권중협 (1연대 1대대 중대장), 참위 장세정, 노덕세, 이준영, 이규병, 이한승, 남상덕

특무    정교    김순석, 고희정

견습 소대장    이충순, 백보용

령관장교 1, 위관장교 7, 특무정교(원사) 2, 견습소대장 2.  12.

 

대한제국군 남대문 전투 내용 정리

  대한제국군 일본 조선주차군 13사단
교전국 시위대 1연대 1대대
시위대 2연대 1대대
 
51연대
7,9,10,12 중대
지휘관 참위 남성덕 조선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谷川好道
대위 가지와라[梶原]
병력 소총 베르단
후장식 단발 소총
탄약 소지 10 ~ 15발
소총 5연발 38식 아리사카
호치키스 기관총
피해 전사 68명(장교 13명)
부상 100 여명
포로 516명
전사 4명
부상 30 ~ 40명
총탄 - 총탄 보병 7215발, 공병 350발, 기병 및 포병 8발, 기관총탄 1138발, 황색화약 1.6kg 총탄 보병 7215발, 공병 350발, 기병 및 포병 8발, 기관총탄 1138발, 황색화약 1.6kg
노획물 - 소총 74정, 실탄 3,305발

** 상기 데이터 출처: 가야제국과 불휘 :: 남대문 전투, 대한제국 군대해산 (tistory.com)

                                                프랑스 언론 [르 프티 주르날]

대한제국군 사병을 총칼로 제압하는 일본군

 

일본군의 무력 진압에 순국한 대한제국군 사병

 

1907년 8월 1일 서울 시가전을 벌인 후 일본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한 대한제국군 시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