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사 꽃살문의 미美
한국산사 법당은 불보살을 모신 성스러운 공간이다.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말한 성스러움이 현현하는 히에로파니Hierophany의 성소다. 거룩함에 대한 정성스런 예경과 종교장엄이 뒤따른다. 공간에서 깊이와 높이, 중심성을 구현하고, 장식에 있어 특별한 건축 장치들로 위계를 드높인다. 법당 출입문 창호를 특별하게 장식한 꽃살문 장치도 그중의 하나다.
창호는 공간의 내부와 외부 경계에 위치한다. 한국 전통건축에서 창호는 한지를 발라 내부 공간의 대기 순환과 온도, 채광의 지혜로 삼아 왔다. 창호에 한지를 발라야 하는 까닭에 소나무로 만든 창호 틀 내부에 필수적으로 살대를 엮는다. 살대는 보통 수직선, 수평선, 사선이나 그 조합으로 엮는데 대단히 기하학적이며 규칙적인 규범을 가진다. 특별하게는 남장사, 쌍계사, 내소사, 신흥사, 실상사, 성혈사의 창호처럼 꽃이라든가 꽃나무로 창호의 살대를 만들기도 한다. 살대를 엮는 방식에 따라 창호의 기본 형식은 세 가지로 나타난다. 수평과 수직 살대로 정사각형 집합으로 엮은 ‘우물 정井’자 형식의 격자살문, 45°와 135°로 교차하는 빗살문, 일정한 간격의 수직 살대에 수평 살대를 상중하 세 영역에만 차등 있게 넣어 면 분할의 비례미를 추구한 띠살문 등이 그것이다. 몇몇의 특별한 건축에서는 격자살과 빗살을 조합하여 0°, 45°, 90°, 135°의 살대가 교차하는 격자빗살문도 보이는데, ‘솟을살문’으로 부른다. 한국산사의 꽃살문은 격자살문과 빗살문, 솟을살문에 꽃 조형을 더하거나 꽃잎 갖춘 꽃으로 창호의 살대를 구성한 한국문화 고유의 미의식의 산물이다.
자연의 꽃만큼 인간의 미적 감각을 일깨우는 소재도 드물다. 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으로서 사람의 미의식에 열락의 환희심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산사의 꽃살문엔 연꽃이나 모란, 국화 등이 주요한 장식 소재로 쓰인다. 한국산사 꽃살문의 꽃은 경험의 자연 질료가 지닌 감각과 감성을 초월한다. 정신 관념이 구현된 이상화의 디자인으로 정화해서 종교교의를 반영한다. 자연의 꽃이 종교예술의 장엄소재로 조영되는 순간 불교 교의체계에 동화되어 형이상形而上의 상징으로 재해석되기 때문이다. 꽃살문의 꽃은 법당에 모신 불보살에 올리는 세세생생 시들지 않는 꽃 공양의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꽃으로 장엄한 자비와 진리의 세계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영주 성혈사나 예천 용문사의 꽃살문은 특별하다. 기다란 송판에 화면을 투조기법으로 파낸 통판투조 형식의 창호다. 화면은 연꽃이 만발한 여름날의 연지蓮池를 표현하고 있다. 연꽃 사이로 물고기가 유영하고, 두루미는 먹잇감을 찾고 있고, 연잎에 앉은 동자는 연꽃 줄기를 들었다. 천진스럽고 자유로운 가운데 초월성이 깃들었다. 생명이 두루 공존하며 공생하는 연화장세계, 곧 화엄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속초 신흥사 극락보전의 꽃살문에서도 조형에 구현한 형이상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꽃과 나비, 새, 물고기, 거북이 등의 공존으로 생명의 인드라망을 이룬 화엄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 때의 꽃은 자연의 꽃이 아니라 부처의 자비와 진리의 표징으로 이해된다. 꽃으로 표현한 또 하나의 경전이다. 한국산사 꽃살문에 깃든 미의식은 한국인 고유의 자연주의에 기반한다. 꽃살문은 화려하지만 거드름이나 위압감이 보이지 않는다.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자연 속에 길러진 어진 심성과 다정함이 우러나온다. 한국산사 꽃살문 속에 한국인의 생명존중 문화와 자연에 대한 예의가 깃들어 있다. 꽃살문 속에 한국인의 어진 마음이 녹아 있다.
Text and photos by 노재학, 사진작가
출처:koreanheritage www.koreanheritage.kr/photo/view.jsp?articleNo=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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