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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박창희 대기자의 말하는 두레박 <2> 우물 인문학

박창희 대기자의 말하는 두레박 <2> 우물 인문학

인간사 고스란히 담은 이야기샘…인문학적 상상력 채운 두레박을 띄우자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5-05-05 18:47:09
  • / 본지 6면
   
그림=서상균 기자
우물을 따라 마을이 들어섰고 우물이 마르면 동네를 옮겼다 
먹을 물을 긷고 빨래를 하며 몸도 씻던 일상적인 장소이면서 
건국신화 모태이자 제의 치렀던 성스러운 의미도 담긴 공간 
다시 살아난 냉정에서 도시 공동체 회복의 희망도 엿보았다 

#냉정 재발견 

냉정(冷井)을 알고 난 후 우물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동네 우물 하나가 도시 공동체 회복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것, 인문학적 상상력이 그 생각을 깊게 만든다는 것. 꿈이라면 길몽이다. 

찬물이 나온다는 냉정은 부산 사상구 주례2동 주민센터 인근에 있다. 도시철도 2호선 3번 출구로 나가면 언덕빼기 어디선가 '찰찰~' 샘물소리가 들려온다.

비록 바로 먹지는 못하지만 도시의 지친 영혼을 씻어주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일찍이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조선 13도의 우물 중 천하일품'이라 말했거니와, 지금도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흐른다는 게 신기하다. 도시개발로 사라졌던 냉정이 지난 2000년 되살아났을 때 주민들은 '용왕님이 보살핀 덕'이라 여겼다. 냉정보존회 윤준섭(80) 회장은 "당산 소나무가 450년 됐다 하고 우물 나이는 그 곱절이라 안 카나"라며 오는 24일 밤 11시쯤 열리는 냉정의 당산·용왕제에 놀러오라고 당부한다. 

냉정은 운이 좋은 우물이다. 아무리 살리려 해도 안 되는 게 있고,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구멍과 틈새로 당대를 숭숭 빠져나가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퍼마셔왔던 이 땅의 수많은 우물들이 그렇다. 시인 송유미는 '냉정'을 다룬 스토리텔링 글에서 '오, 천년우물…. 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마음을 씻어본 적이 없는 이여,/ …흐르는 물에 차마 흘려보내지 못할/ 때 묻은 영혼이라도 씻어보자'고 쓴 적 있다. '때 묻은 영혼'이란 말이 폐부를 찌른다.


#제의의 공간 

지난 2000년 여름,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부지를 발굴하던 조사단 눈앞에 이상한 유골이 보였다. 개 고양이 소 말 사슴 멧돼지 토끼 쥐 오리 까마귀 호랑지빠귀 새매 상어 도미 농어 광어 복어 등 온갖 것들의 뼈가 나왔다. 그 옆엔 항아리 병 토기 금속그릇 나무빗 뒤꽂이 나무두레박이 뒹굴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깊이 10m가 넘는 우물 바닥에 거꾸로 쳐박힌 어린아이의 유골이었다. 조사단은 긴장했다. 어린아이가 실수로 빠져? 죽어서 폐기? 아니면 인신공양?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어느 날, 왕실 차원의 우물 제사가 벌어진다. 제관들은 토기들을 가지런히 쌓은 다음 제물로 고양이 소 말 개 등을 차례로 빠뜨렸다. 분위기가 절정에 달할 즈음 10살쯤 된 어린아이가 산채로 우물에 던져진다. 인신공양이다. 왕이 엎드려 빌었다. "역병을 물리쳐 주시고, 왕실과 백성들이 편히 살게 해 주옵소서. 부디 깨끗한 물을 내려 주시옵소서…." 기원이 간절한 만큼 지상의 생명체를 최대한 많이 넣어야 했다. 우물에 상석이 덮히고 흙이 채워졌다.

학자들은 이 우물을 제의 유적으로 보고 '우물 고고학'이란 새로운 영역을 찾아냈다. 유물 보존이 용이한 우물이 역사 창고가 될 수 있음이다. 아이를 넣었다는 대목은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아이 공양과 비슷한데, 그 진실은 우물 고고학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우물과 마을 

신라의 건국신화는 우물에서 발원한다. 시조 박혁거세는 경주의 나정(蘿井) 옆 금궤 안에서 발견됐다. 그의 부인 알영은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난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신화가 우물에서 춤을 춘다.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지을 때 식수 확보가 용이한가부터 살폈다. 마을 형성의 1차 조건이 물이었다. 마을 '동(洞)'자는 물(水)을 같이(同) 쓰는 지역공동체란 의미다. 우물이 마르면 동네를 옮겼다. 실록에 보면 1415년 조선 태종은 도성에 가뭄이 들자 도성 안 5가구마다 공동 우물 하나씩을 파도록 했고, 1421년 경상도 관찰사는 "기장현에 우물물이 없어 현청 관아를 박곡리로 옮기고자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동래읍지'는 동래읍성 안에 6개의 우물(문헌에 따라선 최대 10개)이 있었다고 전한다. 동래구 복천동(福泉洞)은 복 받은 우물이 있었다는 동네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옥미정동(玉未井洞) 대정동(大井洞) 야정동(野井洞) 등으로 불렀다. 모두 '井'자를 품었다. 큰샘, 옥샘, 골샘 등으로 이름 값하던 동래읍성의 옛 우물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있다. 역사 멸실이다.


#샘솟는 추억들 

우물 치는 날은 괜시리 마음이 들떴다. 보통 모내기가 끝날 무렵인 칠월칠석이면 우물 청소를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풍물을 치며 놀았다. 한 달에 한 두번이라도 공동우물을 이용하는 집 여자들은 모두 나와 청소를 했다.  

남정네들은 흰옷을 입고 고르박질을 했다. 고르박은 네모진 커다란 물통으로, 네 모서리에 줄을 달아 두 사람이 맞잡고 물을 퍼냈다. 물을 다 퍼내면 우물 속에 사다리를 놓고 들어가 싸리비로 이끼를 긁어내거나 잡물을 건져냈다. 어떤 동네는 부정이 타지 않게 어린아이를 먼저 들여 보내기도 했다. 우물 친 날은 동네 골목이 환했고 왠지 기분이 개운했다.

 

여름엔 우물이 천연 냉장고였다. 두레박 대신 그물자루에 수박이나 토마토, 물김치, 음료수 등을 넣어 우물 속에 담궈 두었다가 꺼내 먹었다. 우물물을 길러 찬밥 한덩어리를 넣고 풋고추·된장과 함께 먹던 점심은 얼마나 시원했던지…. 우물가에서 아버지는 등목을 했고, 어머니는 몸을 숨기며 목욕을 했다.
 

아침이면 텅빈 우물 속에 서늘한 안개가 차 올랐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두레박 줄이 바르르 떨리며 샘물이 올라왔다. 뒤란에서 장작을 패던 아버지가 땀을 훔치며 우물물 한 바가지를 들이키면, 어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상을 차렸다. 굴뚝 연기는 맑았고, 마굿간에선 소가 목을 빼고 길게 울었다. 

상수도가 놓이면서 우물가는 썰렁해졌다. 우물에 모이던 아낙네도, 떠돌던 가담항설도, 빨래터도 사라져간다. 나이든 것, 오래된 것들이 속절없이 밀려난다. 앵두나무 우물가, 바람난 동네 처녀 이쁜이와 금순이는 물동이 호미자루 다 내던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우물 두레박의 꿈 

지역방송의 '골목' 프로그램에 참여해 약 3년간 이곳 저곳 골목을 누볐던 사진가 김홍희는 동구 범일동에서 마주한 우물을 떠올리며 아직도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곳은 우물을 중심으로 'ㄷ'자 형태로 올망졸망 집들이 붙어 있었죠. 우물을 만났으니 속을 들여다보는 건 프로 진행상 당연한 일. '이런!' 어두운 우물 안이 갑자기 환해지면서 물체가 눈에 들어왔죠. 맑은 우물 속에 어른 팔뚝만 한 은빛 잉어들이 놀고 있었지 뭡니까. 생명의 환희랄까요. 한동안 감전된 듯 아무 멘트도 할 수 없었어요." 

지하수 이론에 따르면 우물이나 샘 같은 지하수는 보이지 않지만 지층의 수맥을 통해 대부분이 서로 통한다고 한다. 지하수는 땅 밑에 바로 있기도 하고 수백 미터 깊이에 있기도 하다. 거대한 지하 순환계를 생각하면 우물의 상상력은 지구적이다. 

크게 말하면 우물은 하늘과 땅, 문명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다. 식수, 탄생과 성장, 만남, 제의, 공동체, 소멸과 파괴, 재생, 꿈, 순환 등 인간사 세상사가 우물에 이야기의 빨대를 꽂고 있다. 이것을 '우물 인문학'이라 이름할 수 있다면 우물에서 건질 것이 의외로 많다.

되살아난 냉정이 도시재생의 희망으로, 고려 왕건과 장화왕후의 로맨스가 싹튼 전남 나주의 완사천(浣紗泉)이 관광상품으로 뜬 것은 우물을 콘텐츠로 여긴 결과다. '은빛 잉어가 노니는 우물'에도 이야기 두레박을 드리울 수 있을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잉어)'가 되든, '우물 밖 낚시'가 되든 상관없다. 

이제 아버지의 우물은 사라졌고 수도꼭지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우물이 사라진 자리에는 광장과 시장, 카페, SNS 같은 21세기의 공동우물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공동우물을 찾으려면 인문학적 상상력을 갖춘 두레박이 필요하다. 급고수경(汲古修綆), 옛 것을 길어 올리려면 두레박 줄부터 점검하라고 했다. 

   
우물 꿈은 흔히 길몽으로 친다. 우물을 파는 꿈은 매사가 좋은 방향으로 풀릴 조짐이요, 불어난 우물은 재물이 생길 징조라고 한다. 함께 우물의 꿈을 꾸어 보물을 건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