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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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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3> 범일동 일대 '조방 앞'

열악한 처우 반발한 여공들 노동운동 앞장… 뜨거웠던 삶의 현장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3-07-09 19:54:13
   
일제강점기 부산 동구 범일동에서 가동되던 조선방직주식회사 여공들의 작업 현장. 국제신문 DB(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제공 사진)
 
- 日 독점자본 조선방직 세워
- '매일 수십 원 받고 갖은 호강'
- 감언이설 속은 농촌 여인들
- 비싼 기숙사비, 외출 통제

- 참다못해 파업·단식투쟁
- 사측·경찰 탄압에 실패로

- 해방 후 정실인사 등에 반발
- 4개월간 쟁의 전국적 이슈
- 재개발로 공장 사라졌지만
- '조방돼지국밥' 등 상호 남아

- 부산시 특화거리 조성 계획
- 치열했던 역사성은 어디에

'조방 앞'이라는 장소는 오늘날 부산 동구 범일동 자유시장과 평화시장, 부산은행 본점 주변 예식장 거리를 가리킨다. 조방(朝紡)은 조선방직주식회사의 줄임말이다. 일제강점기 조선방직의 정문은 지금의 평화시장 공구상점 골목 입구에 있었고, 후문은 부산시민회관 쪽에 있었으므로 조방 앞은 문화병원·현대백화점 일대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후문이 있었던 부산시민회관 부근, 서쪽 자성대 앞 부산은행 본점까지를 통칭 조방 앞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오히려 '조방 터'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느 토박이에게, 일제강점기 조방 앞은 정문 양쪽 옆에 아름드리 서 있는 수양버드나무 밑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여공들이 총각들과 몰래 만나는 데이트 장소로 기억되었다. 반면 이제는 고인이 된 어느 사회주의자에게는 찐빵가게가 쭉 늘어서 있던 이곳에서 일요일이면 외출하는 여공들에게 1전짜리 빵을 사주며 의식화 교육을 했던 장소로 기억되었다.

■3·1운동 나던 해 완공된 조선방직

조방은 1917년 11월 범일동 700번지에 창립(1919년에 완공되었으나 화재로 실제 공장 가동이 이루어진 것은 1922년임)되어 1968년 청산될 때까지 약 50년 동안 존재했다. 일본 독점자본 미츠이(三井)계열의 인맥이 설립한 이 회사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면방직공장으로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공칭자본금 500만 원, 공장부지 4만 평(1968년 해체 때에는 8만 평), 건물 54동, 종업원 2000명~3200여 명에다 공장 내에는 병원과 기숙사까지 갖추고 있었다. 구내 병원이 종업원들의 간이진료소가 아니라 외부인들의 치료와 입원도 가능한 병원이었다는 점에서 조방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최초의 대규모 방직공장이 1917년 무렵 부산에 입지한 것은 세계1차대전에 따른 호황으로 일본 내 독점자본의 식민지 이전이 요구되는 경제 변화와 일제의 육지면재배사업에 의해 생산된 남부지방의 면화 공급에 기인했다. 그런데 방직공장이 범일동에 입지한 것은 도시공간의 편성과 산업공간의 배치란 맥락에 근거했다.

조방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것은 공장의 규모보다도 여공들이 전개한 치열한 노동운동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들은 항일투쟁의 하나로 노동자들을 의식화하고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 쟁의를 시도했다. 특히 노동조건이 열악하고 일제 독점자본 공장이어서 운동의 파급력이 강한 조방은 사회주의자들의 대표적인 '공작'대상이 되었다.

조선방직 여공 중에는 경상북도나 충청도의 농촌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은 출장 온 여공모집원이 '공장에 가기만 하면 매일 수십 원의 수입이 있느니 갖은 호강을 다하느니'라고 유혹하는 감언이설에 속아 입사한 이들이었다. 신입여공은 일급 최대 15, 16전을 받으며 6, 7년 후 숙련공이 되면 30~40전을 받았는데, 4원가량의 기숙사비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처음 입사하는 날부터 여비 때문에 빚을 진 여공들은 도망을 우려하여 기숙사 외출이 통제되었다. 작업용구는 회사 측에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마련해야 했는데 스패너는 거의 두 달 월급에 해당하는 9원이나 했다.

벌금제도가 있어서 기계 고장에 의해 불가피하게 제품에 흠이 나거나 혹은 12시간 2교대제의 고된 노동으로 잠깐 졸아서 실수하더라도 벌금을 물고 때로는 일본인 감독으로부터 난타당하기도 했다. 조방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연간 20만 원의 산업보조금을 받고 주주배당률도 높았지만, 직공에 대한 처우는 최악이었다.

■반발, 자각, 그리고 저항

이러한 열악한 노동조건과 작업환경에 모순을 느끼고, 1930년 1월 10일 남자 직공들의 모임인 중락회(衆樂會)가 중심이 되어 파업을 일으켰다. 그러나 파업의 실제 주역은 여공들로, 이들은 여공파업단본부를 따로 설치하고 단식투쟁을 감행하며 회사에 맞섰다. 그러나 회사와 경찰은 공장 밖으로 진출하려는 여공들에게 영하 3도의 기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세례를 퍼붓는가 하면, 파업에 적극적인 맹렬 여공들을 해고하고, 단식으로 탈진한 이들을 강제로 끌어내 기차에 태워 본적지로 돌려보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단식투쟁에 놀라 시골에서 온 부모들은 굳게 닫힌 정문에 매달려 울부짖었으나 딸을 만나지도 못했다. 임금 인상, 8시간 노동제, 작업도구 무료지급, 벌금제 폐지, 기숙사 여공 출입증 폐지 등 12개 요구조건을 내건 파업은 결국 경찰의 탄압과 파업단의 준비 부족으로 실패로 끝났다.

해방 후 조방은 적산(敵産)으로 미 군정에서 관리했는데, 1946년 1월부터 본격 조업에 들어가 비교적 양호한 가동률을 보였다. 1946년 한국에서 첫째가는 방직기업이란 의미에서 한일실업공사(韓一實業公社)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으나, 1년여 만에 원래의 이름으로 복귀했다. 전쟁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공장인 조방은 이승만의 정치자금 문제와 연계되면서 파란을 겪었다. 사장 강일매(姜一邁)의 정실인사와 부당해고, 노동조합 어용화와 분열 책동, 방만한 경영에 항의하여 조방 여공들은 1951년 12월부터 4개월간 쟁의를 전개했다. 국회의원 전진한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파업 단행을 선언하고 이에 반박하는 특별담화를 대통령 이승만이 발표할 정도로, 이 조방 쟁의는 "대한민국 수립 후 가장 치열하고 또한 가장 대규모의 쟁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 노동운동의 분수령을 이룬 사건이었다.

특혜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조방은 결국 강일매에게 불하되었으며, 1959년 10월 강일매가 사망하자 삼호방직(정재호)에 인수되었다. 그러나 정재호는 부정축재환수금 납부에 급급하느라 조방 운영을 정상화하지 못했다. 결국 1968년 부산시가 조방을 인수하여 8만 평의 부지를 불하함으로써 범일지구재개발사업이 기공되어 무허가건물과 공장이 철거되고 자유시장과 평화시장, 부산시민회관과 한양아파트 등이 들어섰다.

■명품거리? 역사성은 어디에

   
돼지국밥, 낚지볶음 등을 판매하는 동구 범일동 식당가에도 '조방'이라는 명칭이 여전히 남아있다. 김동하 기자
조방 공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조방 앞'이란 지명은 남았다. 조방은 부산의 대표적 기업이었고 따라서 한국 노동운동사의 획을 긋는 쟁의들이 이곳에서 발생함으로써, '조방 앞'은 여공들의 치열한 투쟁과 이를 저지하는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 대결하던 역사적 공간이었다.

부산의 역사로 기억되는 '조방'은 오늘날 버스정류장 이름으로 혹은 '조방돼지국밥' '조방낙지' 등의 상호로 남았다. 아마도 서민이 즐겨 찾는 돼지국밥이나 낙지볶음 등의 상호에 조방이란 명칭이 유독 많은 것은 이 일대가 1960년대까지 부산의 대표적인 공장지대여서 직공들이 즐겨 찾는 메뉴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산의 외곽이었던 조방 터는 1970년대 이후에는 경남 일대 상인들이 자유시장이나 평화시장으로 물건을 도매하기 위해 몰려들던 부도심 상업공간으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십여 개의 예식장이 몰려 있어 주말이면 교통체증을 빚는 번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전통시장이 쇠락하면서 얼마 전 부산시와 동구는 옛 조방 일대의 상권 활성화를 위해 국비와 시비 100억 원을 투입하여 2015년까지 조방거리 추억거리 문화거리 등 3개 특화거리를 조성한다고 밝혔다. 부산은행 본점부터 자성대 앞을 지나 범일교차로에 이르는 곳을 '조방거리'라고 명명하고, 전신주 지중화와 LED전광판 설치를 통해 명품거리로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여공들의 한숨과 함성이 교차했던,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조방거리와 재현되는 조방거리는 한참 비껴가는 것 같다.


# 1920~30년대 방직·고무공장 집중적으로 들어서

- 수정·좌천동 등 산업지로 조성

1884년 부산항을 방문한 영국 서기관 윌리엄 칼스(William Richard Carles)가 "이곳은 마치 조선 사람이 살지 않는 일본의 도시 같다"는 소감을 피력할 정도였다. 이는 부산이 이미 1880년대부터 오늘날의 용두산 부근에 있는 일본전관거류지가 확장하면서 급속하게 근대적 도시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도시 건설 초기에 부산의 산업공간은 식품·금속 공업지대인 부평정과 조선공업 지대인 영도(牧島)였다. 그러나 도시가 확장하면서 1913년~1918년, 1927~1932년에 걸쳐 부산진매축공사가 진행되었고, 개항 이전부터 전통적 조선인 마을이었던 수정동과 좌천동, 범일동 지역이 새로운 산업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조선방직회사 설립을 시작으로 1920년대 이후 이곳에 고무공장과 염직소, 양말공장, 방직공장 등이 들어섰다.

   
특히 일영고무(1923년), 능암고무(1926년), 환대고무(1928년), 희성고무(1929년), 대화고무·부산고무(1930년), 일성고무(1932년) 등 고무공장이 집중적으로 들어섰는데, 1930년대에 일본계 독점자본인 삼화고무가 이들 공장 중 일부를 인수 합병해서 1~5공장으로 재설립하면서 '삼화고무왕국'이 되었다. 부산에 고무공장이 많이 들어선 이유는 동남아시아로부터 원료인 생고무 수입이 쉬웠기 때문이다. 이들 방직공장이나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직공들은 수정정이나 좌천정의 산록에 주거공간을 마련하여 산동네를 형성했다.

오미일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한국근현대사 전공 성균관대 문학박사

※공동기획 :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의인문학연구단, 국제신문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