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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스크랩] 고구려 고분벽화-1

천장으로 뻗은 기둥, 마선구1호분 벽화


 

 

전호태(울산대 역사문화학과)


 

어떤 이는 기둥은 받치기 위해 세워진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기둥은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잇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건축학도는 앞의 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종교학도는 뒤의 말에 보다 관심을 나타낼 것이다. ‘기둥’이라는 부재와 개념은 건축술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고 성립하였을 것이나, 어쩌면 기둥의 출현과 동시에 그것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규정은 실재의 기능과 형태를 크게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자리잡고 있는 마선구1호분은 집안권 고구려 벽화고분 가운데에 가장 출현시기가 이른 무덤에 속한다. 좌우에 곁방이 있는 앞방과 정방형에 가까운 널방을 지닌 두방무덤으로 무덤의 방향은 북쪽으로 15° 치우친 서향이다. 앞방 오른쪽 곁방의 천장은 변형궁륭고임식, 왼쪽 곁방 천장은 삼각고임식, 널방 천장은 궁륭고임으로 각각 다르게 처리되었다. 널방 입구에 두 짝의 돌문을 달았으며, 널방 한가운데에 둥근 돌기둥을 세워 천장에 닿게 하였다.

 


                       (그림1) 마선구1호분 측면도

 

1962년 가을부터 다음 해 봄에 걸친 발굴조사 당시 널방 좌우 바닥에 쌓은 2개의 돌관대가 확인되었다. 무덤 안의 벽과 고임 뿐 아니라 기둥, 관대, 바닥에도 회를 발랐으며, 널길 및 앞방, 널방 벽과 널방 관대의 백회층 위에는 그림을 그렸다. 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널길 벽에 표현된 것은 연꽃, 구름, 마름모꼴 무늬를 적절히 배합한 장식무늬이다. 앞방의 좌우 곁방의 경우, 벽 모서리에 기둥과 두공, 도리를 그려 무덤의 내부 공간이 목조 저택의 내부처럼 느껴지도록 한 뒤, 분할된 개별 공간에 기능적 건물의 모습이나 행사장면을 묘사함으로써 무덤주인의 생전 생활이 재현되도록 하였다. 오른쪽 곁방 벽면에 배치된 사냥장면은 비록 현재는 그 일부만 모사선화로 전하지만 집안권 초기 및 중기 벽화 특유의 힘 있는 필치로 박진감 넘치게 그려졌다. 사냥도 곁에는 두 채의 기와건물이 묘사되었다. 천장고임은 연꽃무늬로 장식되었다. 왼쪽 곁방 벽면에 그려진 것은 다락창고와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들, 구름, 새 등이다. 다락창고는 고구려인이 집과 함께 그 곁에 지었다고 하는 桴京으로 지금도 집안일대에서 벽화에서와 같은 형태의 건물이 지어지고 사용된다. 다락창고 아래에 표현된 기구는 발방아의 일종, 혹은 織機의 한 종류로 추정되고 있다. 왼쪽 곁방 천장고임을 장식하고 있는 것도 오른쪽 곁방에서와 같이 연꽃무늬이다. 널방 벽면에는 시종들을 거느린 무덤주인부부, 말과 사람 모두 갑옷과 투구로 완전무장한 鐵騎 1기, 두 사람의 무용수가 춤추는 모습 등이 표현되었다. 널방 천장고임 역시 연꽃무늬로 장식되었다. 널방의 돌관대는 호랑이 가죽무늬로 장식되었다.

마선구1호분 벽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왼쪽 곁방에 표현된 기둥들이다. 다락창고를 받치고 있는 기둥들도 그러하지만 도식적이면서도 소박한 양식으로 그려진 구름과 새, 산을 나타내려는 듯한 연속 삼각형 무늬, 그 아래 2쌍의 이중 세로 선들에 의해 분할된 두 개의 공간, 비교적 넓은 위의 공간에 일정한 간격마다 세로로 굵게 그어 내려간 두 개의 선들, 상대적으로 좁은 아래 공간에 일정 간격으로 내려 그어진 굵은 선들. 두 공간의 굵은 세로 선들이 화면 구획을 위한 선들이 아니라면 조사보고자들도 언급하였듯이 이 굵은 선들은 기둥을 나타낸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림2) 마선구1호분 오른쪽 곁방 벽화: 다락창고,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들

 

 

문제는 이들 기둥의 용도와 정체이다. 회랑식 건물의 기둥들인가. 기념비적 대형건축물의 기둥들인가. 혹 기둥만으로 어떤 건축물을 나타내려고 했는가. 아니면 기둥이 표현된 뒤, 건축물의 묘사가 더 진행되지 못한 결과인가.

고대 중국에 전해지던 창조신화의 주인공 여왜는 神 공공이 하늘을 받치던 기둥을 쳐서 부러뜨리자 동해 큰 거북의 다리를 잘라 그것으로 대신 하늘을 받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고대 중국인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사는 세계를 하늘을 지붕으로, 땅을 바닥으로 삼은 거대한 건축물의 일부, 건물 안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이들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머리에 눈을 이고 있는 거대한 산들이 하늘과 땅을 나누면서 잇는 존재,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과 만물이 사는 공간을 유지시켜 주는 이른바 ‘하늘기둥’으로 해석된 연유를 알게 하는 부분이다.

마선구1호분 널방 벽화 속의 커다란 구름무늬와 작게 그려진 새들은 산을 연상케 하는 연속 삼각형 무늬 위의 공간이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공간, 곧 하늘세계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삼각형 무늬 아래의 세계는 지상공간일 것이다. 널방 한 가운데에 세워진 돌기둥이 고분이라는 우주적 규모의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실제적, 상징적 장치이듯이 화면 속의 이 수많은 기둥은 지상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수많은 건물과 그 속의 공간, 다양한 인간세계를 나타내려는 상징적이자 직접적인 표현인지도 모른다.

 

 

 

 

대가의 안채 생활, 안악3호분 벽화


전호태(울산대 역사문화학과)


안채는 바깥채에 대비되는 명칭이다. 바깥채는 흔히 사랑채로 불린 바깥주인의 주된 거처로 공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공간이고, 안채는 안주인이 관리하는 가정생활의 중심공간이다. 안채의 주인은 저택의 살림살이를 총괄하는 대내적 존재이고, 바깥 세계와의 관계를 꾸려나가는 대외적 활동은 사랑채 주인의 몫이다. 일상적인 생활공간이 구분되는 바깥주인과 안주인의 만남은 안채 깊숙이 자리 잡은 안방에서 만들어내다시피 한 ‘한가한 시간’에만 이루어진다. 사실상 한 지붕 두 가족인 셈이다.

사랑채니, 안채니 하는 용어에서 사람들은 당연한 듯이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생활정경을 떠올린다. 박물관의 사랑채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선비들의 생활용품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한 지붕, 두 가족을 주제로 한 위의 안채, 바깥채 이야기는 고구려 귀족의 저택구조와 생활방식에 관한 것이다. 안악3호분과 덕흥리벽화분에서 확인되는 귀족 저택의 공간 구조와 기능 구분에 대한 설명이다.

안악3호분은 발견 당시부터 무덤구조, 벽화, 墨書 모두 화제의 대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은 고구려 초기 생활풍속계 벽화고분이다. 앞방과 좌우곁방, 널방, 회랑이라는 비교적 복잡한 평면구조를 지닌 안악3호분에서 고구려 귀족 저택 안채의 공간구성 및 운용방식은 주로 왼쪽(동쪽) 곁방 벽화의 제재 배치를 통해 확인된다. 왼벽(동벽)의 부엌, 고깃간, 차고, 앞벽(남벽)의 외양간, 마굿간, 방앗간, 안벽(북벽)의 용드레우물. 안채를 중심으로 안뜰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배치되기 마련인 부속건물 및 시설들이다.

조리방과 상차림방으로 나뉜 부엌에서는 시녀 세 사람이 아궁이에 불을 지펴 음식을 조리하고 상차리기에 열중하고 있으며, 계단을 통해 올라가도록 만들어진 고깃간 근처에서는 두 마리의 개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림1)안악3호분 앞칸 왼쪽 곁방 벽화: 부엌

 

넓은 차고에는 둘레가 트인 주인용 차와 둘레를 가린 부인용 차가 나란히 놓였고 차를 끌어야 할 소들은 외양간에서 여물을 먹고 있다. 사냥이나 전쟁에 나갈 때에 주인을 비롯한 바깥채 사람들이 타고 나갈 말들은 마구간에 매어 있고 마구간 아래 나무방책 앞에서는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이 시동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중이다. 방앗간에서는 시녀 두 사람이 곡식 찧기에 바쁘고, 용두레우물에서는 두 시녀가 물을 길어 항아리와 구유에 담는 중이다. 넓지 않은 곁방 벽면 각 방향에 묘사된 장면들이지만 고구려 귀족 저택 안채에서 이루어지던 일상의 한 순간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온다.

안채의 주인은 오른쪽 곁방 앞벽(남벽)에 표현되었다. 장방 안 평상 위에 비스듬히 앉은 부인 좌우에는 세 사람의 시녀가 둘러 선 채 시중들고 있다. 화려한 복식과 머리를 한 부인의 얼굴에는 대가 안채 주인다운 위엄과 여유가 배어 있다. 안채 주인인 부인의 얼굴이 향한 오른벽(서벽)에는 바깥채의 주인인 남편의 정면 좌상이 자리 잡고 있다. 머리에는 冠을 쓰고 오른손에 鬼面의 麈尾를 쥔 남주인의 좌우에는 세 사람의 신하와 한 사람의 시녀가 둘러 서 주인에게 무엇인가를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 적거나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다. 笏을 쥔 신하 곁에는 門下拜, 簡을 든 신하 곁에는 省事, 붓과 문서를 든 신하 곁에는 記室이라는 墨書詺이 있다. 이들 묵서명은 신하들의 직무와 신분을 알게 할 뿐 아니라 이런 사람들을 거느리는 주인의 신분과 지위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단서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안악3호분 오른쪽 곁방 벽화는 안채 주인과 바깥채 주인의 일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하는 동시에 안주인과 바깥주인, 남편과 부인이 모처럼 함께 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남주인은 직속된 신하들의 보고를 받으며, 업무를 판단하고 지시하는 공적인 공간과 영역에서 잠시 벗어나는 순간이고, 여주인은 저택의 각종 시설, 남녀시종, 경제 전반의 관리에서 잠깐 손을 놓는 시간이다. 두 사람만의 편안하고 여유로운 때가 내세 삶의 공간 속에 재현되면서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 덕흥리벽화분 널방 벽화의 배치로 볼 때, 고구려 귀족의 안채에는 마굿간이나 외양간 외에 다락창고도 세워졌고 연못과 정원도 꾸며졌다.

 

 

(그림2)덕흥리벽화분의 벽화배치로 본 저택 구조

 

다락창고는 문헌기록에 고구려인이 집의 부속시설로 마련하였다고 전하는 桴京이다. 연못 근처에서는 七寶供養과 같은 불교적 행사도 개최되었으며, 저택의 안과 바깥으로 펼쳐진 넓은 뜰에서는 馬射戱와 같은 훈련을 겸한 놀이도 이루어졌다. 어떤 이들은 안악3호분 벽화를 보면서 고구려 귀족의 저택 안으로 들어가 1,500년 전 선조들의 바쁜 일상과 마주치는 듯이 느낄지도 모른다.

 

 

 

 

구름과 별의 어울림, 복사리벽화분 벽화


전호태(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구름이 낀 밤하늘에서 이런 저런 이름의 별자리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별이 잘 보이는 밤하늘에는 구름이 걸려 있지 않다. 별이나 구름이나 하늘을 하늘처럼 느끼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지만, 별과 구름이 함께 하늘을 하늘답게 하지는 못한다. 현실에서 별과 구름은 함께 있으면 서로에게 방해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현실이 아닌 세상의 하늘에서는 별과 구름이 어우러질 수 있을까. 서로를 방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황해도 안악에서 발견된 복사리벽화분은 널방 천장이 궁륭식으로 처리된 외방의 돌방무덤이다. 월암산 북쪽 능선 끝 구릉 위에 입구를 동쪽으로 15° 치우친 남향으로 한 채 조성된 이 고분의 벽화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발견조사 당시 회벽 위에 그려졌던 벽화의 상당 부분은 백회와 함께 떨어져 나가거나 습기의 침투를 겪으면서 지워진 상태였으나 남은 벽화를 통해 널방 안벽에는 무덤주인의 장방생활도를, 왼벽과 오른벽에는 행렬도를 배치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복사리벽화분 조사과정에서 조사자의 눈길을 모은 것은 무덤길 좌우의 벽에 달린 감, 널방 서남쪽 모서리의 장방형 제단, 널방의 궁륭식 천장 및 널방 벽과 천장고임에 남아있는 벽화였다. 널방을 장식한 벽화 가운데 특히 흥미를 자아낸 것은 층을 이루며 도리를 올린 목조건축물의 뼈대 표현 및 천장고임을 가득 채운 구름과 별자리였다.

 

      (그림1) 복사리벽화분 널방 북측 고임 벽화: 구름과 별자리

 

각각 4세기경 고구려가 이르렀던 건축술 및 천문과학 수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4세기로 편년되는 벽화고분 가운데 복사리벽화분과 같이 천장고임에 다수의 별자리가 표현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널방 입구 방향에 자리 잡은 천장고임 남측 벽화는 아래 부분이 거의 완전히 떨어져나간 상태이지만, 4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네모꼴 별자리 2개, 3개의 별, 4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또 다른 별자리들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위로 열린  逆사다리꼴 별자리의 안쪽에는 ‘南方’이라는 墨書까지 남아 있다. 천장고임의 동측 한가운데에는 해로 추정되는 커다란 검붉은 색 원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위로 각각 4개의 별들이 묵선에 의해 네모꼴로 이어진 별자리 두 개와 별자리로 추정되는 6개의 별, 1개의 별, 5개의 별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별과 별자리 사이의 공간은 고졸한 형태의 구름들로 매워졌다. 붉은 색 원의 아래 부분과 고임의 아래쪽은 벽화가 떨어져나가 어떤 별들이 더 그려졌는지는 알 수 없다.

천장고임 서측의 벽화는 중심부가 대부분 떨어져나가 구름 몇 자락과 3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 한 개와 2개, 혹은 3개의 별들이 몇 개의 무리를 이룬 모습 정도만 확인된다. 동측의 별자리 배치 상황으로 볼 때, 서측의 한가운데에도 달이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북측의 벽화는 위 부분이 상당히 잘 남아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무려 64개의 별들이 몇 개씩 무리를 이루도록 묘사되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고임의 한가운데에 北斗七星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별자리를 배치하였다는 사실이다. 국자의 그릇 부분에 6개의 별을 1변을 공유한 두 개의 네모꼴로 배치한 까닭에 모두 9개의 별들이 하나의 별자리를 이룬 듯이 보이게 만들었다. 이 별자리가 북두칠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임은 거의 확실하지만 북두칠성 근처에 2개의 별을 더 그린 것인지, 아니면 북두칠성의 계절적 위치 변화를 한 화면에 나타내기 위해 9개의 별을 표현한 것인지 가부간 판단하기 어렵다. 북두칠성과 그 외의 별과 별자리들 사이는 여러 자락의 구름으로 채워졌다. 외관상 고임 북측에서는 북두칠성과 나머지 별자리들이 구름에 의해 구분되고 있는 셈이다.

복사리벽화분의 구름은 별과 별 사이의 빈 자리를 매우는 존재이다.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별과 별 사이를 잇는 기능을 맡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별만 그려진 하늘은 하늘이기보다는 별자리 그림에 가깝지만 구름이 별과 함께 하는 공간은 무한한 창공 그 자체이다. 구름은 별이 하늘이라는 세계에 속한 존재임을 알려주는 표지이자 하늘세계의 구성원, 별의 동반자인 셈이다. 죽은 자의 내세를 위한 공간, 곧 무덤 속 하늘에서 구름은 별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복사리벽화분 벽화의 별들 사이로 구름이 흐르고, 구름 사이로 별자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이 때문인가.

 

 

 

백호가 차지한 사냥터, 수렵총 벽화


전호태(울산대 역사문화학과)


한 아이가 하늘의 정기를 받고 세상에 났다. 알에서 나왔다는 소문도 있고, 그 어머니가 빛을 쐬고 아이를 배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활을 잘 쏘아 이름보다는 명궁이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렸다. 부여말로 명궁은 주몽이다. 왕궁에서 태어났고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주몽은 서자였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서자, 인기는 있으나 별궁에서 지내는 후비의 아들. 주몽은 결국 몇몇 친구와 부여의 왕궁을 떠난다. 부여 변방의 작은 나라 한 귀퉁이에 겨우 발 뻗을 곳을 정한 동부여 망명객 무리. 졸본부여의 왕이 내준 한 뙤기의 땅에 주몽은 ‘고구려’라는 이름의 작은 깃발을 꽂았다. 150여 년 뒤, 고구려는 해동 북방의 강자가 되었다. 졸본부여는 고구려의 한 지방이 되었고, 동부여는 고구려의 위세에 눌려 지내는 변방세력으로 전락한다. 이제 고구려는 해동의 새로운 패자로 우뚝 설 것을 꿈꾼다.

생활풍속은 고분벽화의 가장 일반적인 주제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역시 초기의 주제는 예외 없이 생활풍속이었다. 무덤에 묻힌 이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 누렸던 풍요와 여유, 함께 지냈던 사람들, 사람들과 어울려 겪었던 의미 있는 사건들, 주변의 풍경들이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벽화의 개별 제재들이었다. 땅의 일들은 벽에 그려졌고, 하늘에서 보았거나 하늘에 있다고 믿었던 것들은 천장고임에 표현되었다. 해와 달, 별자리, 날개 달린 짐승이나 아름다운 새,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선들이 무덤 칸 천장고임에 묘사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언제인가부터 천장고임의 한 귀퉁이에는 청룡, 백호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림1) 무용총 널방 천장고임 벽화: 하늘세계

 

동방의 별자리들, 서방의 별자리들이 각각 머리를 이루고, 등과 허리, 다리가 되어 모습을 드러낸 결과이다. 청룡, 백호는 하늘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구성원의 하나일 뿐이었다. 주작에 이어 현무도 자연스럽게 하늘세계의 새 가족이 되었다. 생활풍속이라는 커다란 주제 안에서 고분벽화의 하늘세계는 보다 풍요로워지는 듯이 보였다.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사신은 고구려에서 가장 선호되는 고분벽화의 주제로 자리 잡는다. 생활풍속은 사신에 부속되는 제재로 흔적만 일부 남기게 되었고, 한 때 풍미했던 연꽃 중심의 장식무늬도 어느 사이엔가 무덤칸의 한 부분을 장식하는 무늬로만 여겨진다. 오래지 않아 고구려 고분벽화는 사신만으로 장식된 사신도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수렵총은 사신이 고분벽화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주는 벽화고분의 하나이다. 현 남포시 와우도구역 화도리(옛지명: 평남 용강군 대대면 매산리, 평남 온천군 화도리)에 있는 수렵총은 1913년 발견 직후에는 무덤 널방 벽에서 발견된 사신으로 말미암아 매산리사신총으로 불렸다. 북한에서는 현재 사냥무덤으로 불린다. 조사 당시 널방 천정 동남쪽은 파손되어 있었고 남벽 상부에는 도굴 구멍이 뚫려 있었다. 외방의 돌방무덤인 무덤의 널방 동벽에는 청룡과 기마인물, 해가, 서벽에는 백호와 사냥도, 달이 그려져 있었다. 널길이 동쪽으로 치우친 남벽에는 한 쌍의 주작을, 안벽인 북벽에는 쌍현무와 무덤주인부부, 말과 인물을 배치하였다. 천장고임은 구름무늬와 넝쿨무늬로 장식되었다. 이 무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사신과 생활풍속 장면의 배치 및 표현방식, 벽화구성 안에서 지니는 개별 제재의 비중이다. 널방 동벽과 서벽의 벽화에서 청룡과 백호가 지니는 제재로서의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림2) 무용총 널방 천장고임 벽화: 하늘세계

 

사실상 벽면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두 신수가 다른 제재를 위해 남긴 공간은 길게 뻗은 등 위쪽이다. 청룡, 백호가 그려진 뒤 비어 있는 공간은 그리 좁지 않지만 화면 구성상 이 부분은 부수적으로 남겨진 공간에 해당한다. 청룡, 백호가 자리한 곳의 성격을 결정짓는 해, 달이 벽 가운데 상단에 그려졌는데, 해, 달을 나타내는 원 안의 세발까마귀나 달두꺼비 모두 특정한 상징기호가 되어 공간에 붙박인 존재이다. 여전히 남겨진 화면의 한 부분에 기마인물이 그려졌고, 사냥장면이 묘사되었다. 청룡의 머리보다 조금 더 큰 기마인물상은 꼬리 근처에 표현되었고, 암수 두 마리 사슴을 뒤쫓으며 활을 겨눈 기사는 화면 한가운데 그려졌다. 하나 뿐인 기마인물은 대행렬에서 떨어져 나온 듯 외로워 보이고 기마사냥꾼과 사슴 두 마리는 대규모 사냥도에서 이 부분만 옮겨진 듯이 보인다.

남벽에는 암수주작 외에 다른 것이 그려지지 않았다. 생활풍속의 다양한 제재들, 행렬이나 씨름, 부엌이나 외양간, 수레를 둔 차고 같이 일상의 모습, 삶을 위한 시설들이 전혀 표현되지 않았다. 남방의 수호신 주작에게 저들의 자리를 잃은 것이다. 북벽에는 무덤주인과 세 사람의 부인이 화면 한가운데 그려진 장방 안에 자리 잡았고, 두 마리 현무는 부속품처럼 장방 바깥의 한편에 조그맣게 그려졌다. 북벽 화면의 주인공은 무덤주인부부이며 쌍현무는 이 네 사람의 주인공을 지키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일종의 경호원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수렵총의 널방 네 벽, 동벽과 서벽, 남벽과 북벽에서 사신이 지니는 화면상의 비중과 역할은 이처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남벽은 이미 주작의 세상이 되었지만, 동벽과 서벽은 아직 청룡과 백호만의 세상이 아니다. 북벽의 현무는 이제 겨우 무덤주인의 수호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했을 뿐이다. 5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수렵총 널방 벽화에서 앞 시기에 유행했던 생활풍속의 일반적인 제재들은 더 이상 채택되지 않는다. 생활풍속이 그려지던 자리를 사신이 차지하게 된 때문이다. 청룡, 백호가 천장고임을 떠나 벽으로 내려오면서 고취악대를 동반하던 대행렬은 위축되었고, 산야를 내달리는 짐승들을 향해 창을 던지며 화살을 겨누던 사냥꾼 무리의 수는 줄어들었다. 고취악대와 수레가 사라지고 몰이꾼과 도보창대가 물러난 자리, 철갑기병 호위대도 떠나고 산과 나무, 짐승이 없어진 텅 빈 공간 한 끝에 이제 남은 것은 뒤처진 기마인물 한 사람, 사냥의 말미를 장식하는 기마사냥꾼과 사슴 한 쌍 뿐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한 시기를 풍미했던 생활풍속의 시대가 가고 사신의 세상이 왔음을 벽화 속의 주인공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느낌이 있는 얼굴, 장천1호분 벽화의 문지기


전호태(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불교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위계적 인물표현이다. 깨달음의 크기, 존재 안에 담긴 인격의 깊이, 베풀 수 있는 자비의 넓이를 인물의 크기로 나타내는 까닭에 여래의 크기와 평범한 속인의 크기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여래, 보살, 천왕, 팔부신중, 십대제자와 아라한의 크기가 각각 다르다. 속인은 여래의 손가락 마디보다도 작게 그려진다. 불교회화의 인물상은 언 듯 보면 난장이부터 거인 종족을 차례로 배열한 듯 보이기도 한다. 대상에 대한 관념과 인식을 회화적 수단에만 의존하여 나타내려고 하다보니 회화기법 상으로는 무리를 범할 수밖에 없게 된 경우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사람의 크기를 다르게 나타낸 사례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5세기 중엽 이전에 제작된 고분벽화의 인물들은 신분과 지위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여 나타내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다. 고구려 귀족부부와 이들을 수발하는 시종들 사이에는 당연히 신분적 거리가 있다. 사회적 존경을 받던 불교승려와 귀부인 사이에도 마찬가지의 신분․지위상의 넘기 힘든 격차가 존재했다. 주인의 나들이를 준비하고, 따라 나서며 여러 가지 잔일을 도맡아 했던 귀족 집안의 시종들이 고분벽화에서는 주인의 ⅛, 혹은 그보다 두 배 더 작게 그려진다. 덕흥리벽화분에서 시종들은 주인의 머리 ½ 크기로 묘사되었고, 수산리벽화분의 시종은 주인의 ¼도 안 되는 크기로 그려지는 바람에 기형적으로 길어진 양산의 대를 힘들게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

 

(그림1)덕흥리벽화분 앞방 안벽 벽화: 무덤주인

 

불교적 제재들로 가득 찬 장천1호분에는 두 사람의 문지기가 등장한다. 두 문지기는 앞방에서 널방으로 이어지는 통로로 좌우로 나뉜 안벽 양쪽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자세로 그려졌다.

 

(그림2)장천1호분 앞방 안벽 벽화: 문지기

 

무덤칸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할 때 안벽의 오른쪽에 그려진 문지기 그림의 높이는 153㎝이고, 왼쪽에 그려진 문지기 그림의 높이는 155㎝이다. 삼국시대 전쟁에 나가기 위해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던 건장한 보통의 성인 남자의 키가 대체적으로 155㎝~160㎝정도였다는 고고학적 발굴 결과로 볼 때, 두 문지기는 실제의 인물 크기로 그려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교적 번듯하게 차려 입은 고구려 귀족 집안의 문지기들이 실물 크기로 벽화에 묘사된 것이다. 이들이 문지기임을 고려하면 앞 시기 고분벽화의 신분에 따른 인물 표현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표현방식이 아닐 수 없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물 표현방식에 더하여 눈길을 끄는 것은 두 문지기를 나타내는 구체적인 표현기교와 그 효과이다. 두 문지기는 앞 시기 고분벽화의 인물들과 달리 표정을 지니고 있다. 화가는 오른쪽 문지기를 흰 피부, 둥근 얼굴에 큰 눈, 넉넉한 표정과 마음을 지닌 존재로 그렸고, 왼쪽 문지기는 검붉은 피부, 각이 진 얼굴에 끝이 날카롭게 뻗어나간 눈, 엄한 표정과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오른쪽 문지기는 선하게 보이는 얼굴에 걸맞게 팔을 들어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쥔 약간은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지만, 왼쪽 문지기는 쏘아보는 듯한 눈초리로 앞을 보며 팔을 내려 두 손을 좌우 허리와 배 사이에 댄 버티고 선 듯한 자세로 입구를 지키고 있다. 두 사람의 표정은 살아 있고, 성격은 얼굴 표정과 서 있는 자세만으로도 뚜렷이 드러난다. 화가는 두 문지기가 어떤 사람인지, 평소에 사람들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를 말 한마디 없이 붓끝으로만 보는 이가 알게 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두 문지기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표정을 읽기는 극히 어려웠다. 화가가 인물의 표정을 통해 성격을 드러내려 노력한 흔적을 찾아내기도 그리 쉽지 않았다. 화가는 일종의 관행적 표현, 틀에 박힌 듯한 인물묘사 방식에 매어 있었다. 화가가 살고 있던 시대가, 당대의 일반적인 관념이 관행적 표현을 넘어서는 인물묘사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물의 개성을 보아도 본대로, 느껴도 느낀 대로 그려서는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과연 시대를 넘어서는 모험을 할 화가가 몇 사람이나 있었을까.

장천1호분 벽화에서는 표정을 담아 느낌을 전할 수 있는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두 문지기 정도는 아니지만 쌍영총 벽화에서도 역시 실물 크기의 표정 있는 문지기를 볼 수 있다. 5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고구려의 화가들은 화가의 붓끝을 멈칫거리게 했던 앞 시대 신분관념의 엄한 족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던 듯하다. 고분벽화 인물 표현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변화는 인간 개인의 본질적인 평등을 말하며, 이 세상에서의 개인 삶의 태도와 그로 말미암은 열매를 중요시 하는 불교가 고구려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믿어진 데에서 비롯된 것일까. 엄격한 신분적 인물 표현을 더 이상 강제할 수 없을 정도로 동방의 패자 고구려가 열린 사회를 지향하면서 나타난 현상일까. 아니면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흐름을 감지한 화가들이 시대를 앞서는 모험을 감행하면서 ‘고분벽화’에서부터 일어난 사건일까. 장천1호분 벽화 두 문지기의 얼굴과 자세에서 그것까지 읽어내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말하는 짐승들①, 안악1호분 벽화의 人面獸


전호태(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세계 곳곳의 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신들의 처음 모습은 사람이 지니지 못한 힘과 능력을 갖춘 짐승의 형상인 경우가 많다. 산신령도 본래의 모습은 호랑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의 모습은 점점 사람과 가까워진다. 이집트 신화에 많이 등장하는 머리 외에는 사람인 신들이 이런 신들이다. 따오기머리, 매의 머리, 자칼이나 하마, 풍뎅이의 머리를 지닌 사람 형상의 신들이 이집트 신화에는 수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집트 신화에서도 대신, 최고의 신은 완전한 사람의 형상을 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태양신 라나, 신중의 신 오시리스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사람이다.

중근동 및 지중해 연안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에 제 모습을 갖추는 그리이스 신화에는 대부분의 신들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오히려 사람의 모습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 않은 신은 신들 가운데 하위의 신들로 취급된다. 짐승의 모습이 남아 있는 신들의 거처는 변방의 외진 곳이거나 바다 속 외딴 섬이다.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말인 반인반마 켄타우로스 같은 존재는 대개의 경우 이성을 잃고 쉽게 자기 기분에 쏠려 난폭한 행동을 일삼는 괴물로 취급된다. 신화와 전설 속에서이지만 신들도 진화한 셈이다.

안악1호분은 벽화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는 벽화고분들 가운데 하나이다. 1949년 4월과 5월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외방무덤인 벽화고분의 널방 벽 하부의 벽화는 토사의 침식으로 백회가 떨어져 나가면서 거의 사라졌음이 확인되었다. 널방을 채우고 있던 토사는 벽 상부에 뚫린 도굴구멍으로 흘러든 것이었다. 다행히 벽 상부의 벽화는 부분적으로 남아 있었고, 천장고임의 벽화는 일부나마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였다.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널방 벽면 벽화의 제재는 행렬, 전각, 사냥, 인물 등이었다.

그런데 무덤구조나 4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이 벽화고분에서 벽면의 행렬도나 사냥도에 가려 조사자들의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났지만 오히려 주목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천장고임에 그려진 신비한 새와 짐승들이었다. 천장의 평행고임 제1층과 제2층에 방향별로 그려진 새와 짐승들 가운데 모습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은 날개 달린 물고기, 날개 달린 말, 날개 달린 기린, 한 쌍의 봉황, 사람머리의 새, 사람머리의 짐승 등이다. 전체적으로 12마리가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흔적 일부라도 남은 것은 모두 11마리이다. 새나 짐승 가운데 어느 한 마리도 눈길을 끌지 않는 것이 없지만 신들의 진화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존재는 사람머리의 짐승이다.

 

(그림1)안악1호분 널방 천장고임 벽화: 인면수

 

사람머리의 짐승은 덕흥리벽화분에도 보인다. 이 무덤의 앞방 천장고임은 하늘세계의 별자리와 선인, 옥녀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견우직녀설화의 주인공 직녀의 아래쪽에 사람머리의 짐승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이 짐승 곁에는 먹으로 ‘猩猩之像’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그림2)덕흥리벽화분 앞방 천장고임 벽화: 성성

 

성성은 『산해경』에 소개된 기이한 짐승 가운데 하나로 사람의 말을 할줄 안다. 이것을 먹으면 귀가 밝아지고 잘 달릴 수 있다고 하여 사람들이 잡으려고 덫을 놓는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이 놓는 덫이다. 성성이 잘 다니는 길목에 술동이와 국자를 놓고 그 곁에 서로 이어진 짚신을 여러 켤레 둔다는 것이다. 성성이 지나다가 이것을 보고는 덫을 놓은 사람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치며 욕을 한다고 한다. ‘아무개야, 이 나쁜 놈아. 나를 잡으려고 이런 짓을 하다니 내 절대 안 속는다. 다 안다. 다 알아 이놈아. 이 애비 아무개도 그렇고, 할아비 아무개도 그렇고 모두 다 나쁜 놈들이야. 에이 고약한 놈 같으니라고…’ 말 그대로 다 안다는 식이다. 이 성성이는 다른 친구 성성이들까지 불러 고래고래 욕을 하고는 가 버리는데, 오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되돌아와 투덜거리며 술을 맛보고 신을 신어 본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술에 취하여 서로 이어진 짚신을 신은 채 어기적거리다가 사람에게 잡히고 만다고 한다.

무덤칸 천장고임에 그려진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성성이나 안악1호분의 사람머리 짐승이나 다른 신이한 짐승들과 함께 처음에는 하늘세계에 터를 잡고 살았을 것이다. 본래의 형상은 별자리였을 가능성도 있다. 밤하늘에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며 신비한 빛을 내쏘는 별들을 보며 사람들은 특정한 짐승 모양의 신을 상상하고 숭배하며 제사를 드렸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별자리 신은 사람의 모습을 갖춘 반면, 또 다른 별자리 신은 짐승의 형상인 채로, 혹은 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의 모습을 한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사람 모습의 신은 더 널리 숭상된 반면, 짐승 형상의 신은 신앙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더 나아가 사람이 특정한 능력을 갖추기 위한 사냥 대상으로까지 전락하였을 것이다. 성성이나 안악1호분의 사람머리 짐승은 자신들이 본래는 별자리였고, 신이었으며 사람들의 소원을 귀담아 들어주던 존재였음을 알리려고 무덤칸 속 하늘세계 한 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말하는 짐승들②, 무용총 벽화의 인면조(人面鳥)


전호태(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호머의 서사시 오딧세이아에는 세이렌이라는 사람머리의 새가 등장한다. 트로이의 멸망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타카 왕 오딧세우스는 전쟁이 끝나자 귀향을 서두른다. 10년에 걸친 긴 전쟁으로 병사들의 향수는 극에 달해 있었고, 오딧세우스 역시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를 한시라도 빨리 다시 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귀국을 위한 항해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방해로 20년이나 걸리고 만다. 세이렌은 길고도 험했던 항해 길에 오딧세우스가 겪은 수많은 모험 속의 조연 가운데 하나이다.

여자머리의 새 세이렌은 거친 바닷길을 헤쳐 나가던 선원들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어 선원들이 넋을 잃게 만든다. 노래에 귀 기울이던 선원들이 제대로 노를 젓지 않는 사이에 배는 세이렌들이 사는 섬 근처의 바위에 부딪쳐 난파하고 만다는 것이다. 오딧세우스는 선원들에게는 귀마개를 한 채 노 젓게 하고, 자신은 돛대에 몸을 묶고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면서 세이렌의 섬을 지나가는 데 성공한다.

영혼의 사냥꾼 하르피이아도 불길한 이미지를 지닌 여자머리의 새이다. 그리이스 신화에서 하르피이아는 인간에 내린 신의 저주를 집행하는 집행관 역할을 담당했는데, 하르피이아들이 살던 섬에 도착한 유명한 아르고원정대는 북풍의 아들들의 도움으로 이들을 멀리 쫓아버린다. 그리이스 신화에서 사람머리의 새들은 사람들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존재였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사람머리의 새는 여럿 등장한다. 무용총 널방 천장고임에는 봉황을 연상시키는 몸에 긴 모자를 쓴 사람의 머리가 달린 새가 그려져 있다.

    (그림1)무용총 널방 천장고임 벽화: 사람머리 새

 

천장고임의 다른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런 긴 모자는 신선들이 즐겨 쓰던 것이다. 사람머리의 새는 천왕지신총 벽화에도 보인다. 널방 천장고임에 크게 그려진 사람머리 새의 얼굴 앞에는 먹으로 ‘천추(千秋)’라는 글이 써 있다. 이 새 역시 머리에는 모자를 썼다. 안악1호분 널방 천장고임에 그려진 사람머리의 새도 머리에 모자를 썼지만 곁에는 아무런 글씨도 써 있지 않다. 덕흥리벽화분에는 사람머리의 새가 두 마리 등장한다. 삼산관(三山冠) 형식의 모자를 머리에 쓴 사람머리의 새들 곁에는 각각 ‘천추지상(千秋之像)’, ‘만세지상(萬歲之像)’이라는 글이 써 있다.

  (그림2)덕흥리벽화분 앞방 천장고임 벽화: 천추

 

천년, 만년을 뜻하는 천추, 만세는 인간의 무한 장수를 기원하고 소망하는 용어이다. 사람머리의 새 천추, 만세는 무한한 수명을 꿈꾸는 인간의 바램이 형상화된 상상속의 존재인 셈이다.

고대 중국의 신화에서도 사람머리의 새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산해경』에 소개되는 사람머리의 새들 가운데에는 잡아먹으면 특별한 약효를 지닌 것도 있고, 나타나면 흉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있었다.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는 날아다니는 반모라는 새는 잡아먹으면 더위 먹은 것을 낫게 하며, 탁비의 깃털을 차고 다니면 천둥이 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주라는 새가 나타나면 그 고을에 귀양 가는 선비가 많아지며, 옹이 모습을 보이면 온 세상에 가뭄이 들고, 부혜가 나타나면 전쟁이 일어난다고 한다. 차조, 첨조가 지나가는 나라는 망했고, 청문과 황오가 모이는 나라도 멸망했다. 중국에서는 사람머리의 새에 대한 이미지가 선과 악, 길함과 흉함 사이를 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집대성된 고대 동아시아 신화에서 사람머리 새의 본래의 정체는 ‘신(神)’이었다.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우주론에서 땅을 둘러싼 네 개의 바다에는 각각 바다를 주관하는 신들이 있었는데, 동해의 신 우호, 서해의 신 엄자, 북해의 신 우강은 하나 같이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새였다. 천하의 질서를 방위별로 나누어 관리했다고 하는 오신(五神) 가운데 동방의 신 전욱은 새들의 왕이었으며 사람머리의 새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가 많았다.

그렇다면 『산해경』에 소개된 사람머리 새들을 복용함으로 말미암는 특별한 약효나, 이런 새들의 출현이 가져오는 특이한 현상들은 이런 새들이 지녔던 ‘신’으로서의 힘이나 능력이 세속적으로 해석된 결과일 수도 있다. 사람머리의 짐승들처럼 사람의 모습을 한 신이 되는 데에 실패하고 요괴나 괴물 수준으로 전락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이스 신화 속의 하르피이아나 세이렌들도 마찬가지이다.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홀리게 하는 노래를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영혼을 아무나 사냥할 수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무용총과 안악1호분의 사람머리 새들은 신선을 연상시키는 얼굴을 지녔고, 특별한 형태의 모자를 썼다. 천왕지신총의 천추나 덕흥리벽화분의 천추, 만세는 무한한 삶의 화신들이다. 신은 아니지만, 괴물이나 요괴, 약용동물도 아니다. 고대 동아시아 신화에 모습을 드러냈던 신으로서의 이미지와 능력을 아직 일부나마 간직하고 있는 존재인 셈이다. 어쩌면 고구려 고분벽화 속의 사람머리 새들은 신으로 지내던 시대를 되돌아보며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 세상의 변화, 이전과는 달라진 사람들의 눈초리를 안타까운 눈으로 마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꽃이 담고 있는 수수께끼, 미창구장군묘 벽화


전호태(울산대 역사문화학과)


환인은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이 있던 곳이다. 부여의 망명객 주몽 일행은 오랫동안 이곳 비류수 가에 터 잡아 살던 송양국의 왕에게서 나라 한 귀퉁이를 얻어 겨우 떠돌이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송양국을 아우르고 비류수 유역 뿐 아니라 압록강 중류일대의 강자로 입지를 확고히 한 뒤, 고구려는 졸본에서 국내로 서울을 옮긴다. 건국을 선언한 지 40년, 동명성왕 주몽의 뒤를 이은 유리왕 즉위 22년(기원 3년)의 일이다. 이후 졸본은 고구려왕이 시조묘에 제사할 때에 간간히 등장할 뿐 고구려 역사의 주무대로 역할이 주어지지 않게 된다. 고구려 사람들에게 졸본은 시조 주몽을 기리는 동명왕묘(東明王廟)가 있는 곳으로만 기억되게 된 것이다.

환인의 미창구장군묘(중국 요녕성 환인만족자치현 아하향 미창구촌)는 1991년 9월 발견, 조사되었다. 외형이 절두방추형인 이 흙무지돌방무덤의 흙무지 둘레는 150m에 이르며, 바닥부터의 높이는 8m 가량이다. 널길과 두 개의 퇴화형 곁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으로 잘 다듬은 장방형 석재로 널방의 벽과 천장을 쌓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널방 네 벽 위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20군데에 걸쳐 뚫려 있는 못구멍이다. 동벽의 못구멍 2개에 구리못의 일부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널방에는 만장이 걸려 있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무덤주인부부의 장례 당시 곁방과 널방 안은 장식무늬로 채워지고, 널방 네 벽은 만장으로 둘려졌으며 널방 안에는 두 기의 돌관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무덤의 규모, 무덤축조에 사용된 장대한 석재, 무덤칸 내부를 장식한 벽화의 제재와 구성방식이다.

벽화를 먼저 살펴보자. 장군묘, 미창구1호묘 등으로도 불리는 이 무덤의 내부는 연꽃문과 ‘王’자문 중심의 장식무늬로 채워졌다.

                  (그림1)미창구장군묘 내부

 

앞방의 퇴화형으로 볼 수 있는 두 곁방 안은 온통 ‘王’자문으로 장식되었고, 널방은 벽과 천장고임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측면연꽃으로 채워졌다. 4단 평행고임 밑면에는 곁방에서와 같은 ‘王’자문이 묘사되었으며, 벽과 천장고임의 경계에 가로로 길게 띠를 이루도록 그려진 자색 대 안에는 변형용문을 그려 넣었다. 비교적 넓은 천정석 밑면에는 옥벽(玉璧)처럼 바깥은 둥글고 안쪽은 네모진 무늬 9개가 열과 행을 이루며 그려졌다.

잎맥과 꽃술까지 표현되고 꽃잎 끝이 뾰족하게 처리된 측면연꽃은 5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집안지역 고분벽화의 제재로 즐겨 선택되었다. 산연화총이나 장천2호분과 같은 연꽃장식 벽화고분의 중심제재였다. ‘王’자문 역시 같은 시기 집안지역 고분벽화의 제재로 선호되었다. 산성하332호분은 널방 벽면 전체를 ‘王’자문으로 채우고, 천장고임은 연꽃으로 장식한 사례이고, 장천2호분은 장군묘처럼 두 개의 곁방은 ‘王’자문으로 장식하고 널방은 연꽃으로 채운 경우에 해당한다. 미창구장군묘는 연꽃무늬와 ‘王’자문이 유행하던 5세기 중엽 전후 집안지역 벽화고분의 일반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벽화고분인 셈이다.

장군묘는 외형도 크지만 무덤칸의 규모도 만만치 않다. 널길의 길이가 5.4m, 안쪽 너비가 1.48m이며, 왼쪽 곁방의 길이X너비X높이가 1.6mX1.17mX1.34m, 오른쪽 곁방이 1.58mX1.16mX1.34m, 널방이 3.52mX3.50mX3.5m이다. 널방 크기로 볼 때 북한에서 왕실귀족의 무덤으로 거론되는 진파리4호분이나 왕릉급 무덤으로 평가되는 호남리사신총에 비해 결코 작지 않다. 더욱이 이 무덤을 축조하는 데에 사용된 석재 가운데에는 길이가 3m, 두께가 1m에 이르거나 이보다 큰 것도 여럿 확인된다.

427년, 고구려는 또 한 번 수도를 옮긴다. 새 서울이 될 도시는 압록강 일대와는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풍토를 달리 하는 대동강 유역의 평양에 조성되었다. 장수왕 즉위 15년에 일어난 일이다. 대동강 북쪽 기슭에 조성된 왕궁과 귀족들의 저택, 불교사원들은 동아시아 4강체제의 개막을 눈앞에 둔 동방 강자 고구려의 새로운 중심이었다. 전성기 고구려 사회․문화의 내용이 준비되고 펼쳐져 나갈 진원지에 해당했다. 동방을 제패한 패권국가 고구려의 자부심은 고구려 사람들로 하여금 새 서울과 옛 수도에 대형 기념물들을 만들게 하였고, 완성된 기념물들이 왕실의 신성성과 국가 권위의 상징이 되게 하였다. 널방 전체가 연꽃으로 장식된 (전)동명왕릉, 유사한 무덤구조의 장식무늬 벽화고분인 미창구장군묘 역시 평양 천도를 계기로 고구려가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하던 왕실 신성화 작업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그림2)(전)동명왕릉 내부

 

첫 수도 졸본에 조성되어 있던 동명왕묘를 개축, 혹은 신축하면서 ‘王’자문과 연꽃무늬로 무덤칸 내부를 장식하여 새 왕의 즉위의례 장소로 삼고, 새 서울 평양에는 국가 및 왕실 차원의 정기적인 시조묘 제사를 위해 새롭게 동명왕릉을 축조하게 한 것은 아닐까. 역시 여래의 가호를 받는 왕권임을 나타내기 위해 연꽃을 벽화의 주제로 삼으면서….

 

 

 

 

놓이지 않은 평상 앞의 신발, 수렵총 벽화의 고구려 귀족부부

전호태(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임아 건너지 마오. 그예 임은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네. 이 임을 이제 어찌하리오.’

어디선가 백발이 성성한 한 늙은이가 나타나 휘적휘적 강 가운데로 걸어들어 가더니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늙은이를 뒤따라오면서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소리치던 노파도 잠시 망연자실, 물가에 서서 늙은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소리치며 울더니, 지니고 있던 악기를 꺼내 노래 한 곡을 연주하더니 역시 그 뒤를 따라 강 가운데로 걸어들어 간다. 잠깐 사이 일생을 함께 한 듯한 노인 부부가 강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지만 강물은 다시 유유히 흐를 뿐이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나루터지기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와 아내 여옥에게 낮에 겪은 일을 말하여 주었더니 아내가 백수광부의 아내가 탔던 그 악기 공후인을 연주하면서 그 노래를 다시 불렀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로 알려진 ‘공무도하가’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이다.

수렵총(옛지명: 평남 용강군 대대면 매산리, 평남 온천군 화도리, 현지명: 남포시 와우도구역 화도리) 벽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장면은 널방 안벽의 무덤주인부부그림이다.

(그림1)

 

정면을 향해 평상 위에 앉은 모습의 네 사람. 물론 한 사람은 무덤주인이고 다른 세 사람은 그의 부인들이다. 상서로운 기운이 몸 좌우로 두 줄기씩 뻗어 나오는 무덤주인의 외양은 佛像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머리의 오른쪽 위 약간 떨어진 지점에 먹으로 ‘仙寬’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일부에서는 이 묵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인물상이 그려지는 방식으로 볼 때에 무덤주인이 내세에 신선이 되어 선계에서 살기를 원했을 가능성은 그리 낮지 않다.

무덤주인의 세 부인은 그의 오른편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모두 두루마기를 걸쳤고 두 손은 소매 안에서 앞으로 모아 잡았다. 역시 이들의 몸 좌우로도 상서로운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으나 무덤주인과 달리 한 줄기씩이다. 흥미로운 것은 무덤주인이 앉은 평상과 둘째, 셋째 부인이 함께 앉은 평상 앞에는 목이 긴 가죽신 한 켤레씩 옆으로 나란히 놓였지만 첫째 부인이 홀로 앉은 평상 앞에는 아무 것도 놓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무덤 발굴 당시의 기록으로 보아 첫째 부인 앞의 빈 공간에도 가죽신이 그려졌다가 습기 등으로 말미암아 지워졌을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려지지 않았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무슨 까닭일까.

온돌방에서 지내는 우리 민족에게 실내와 실외는 뚜렷이 구분되는 생활공간이다. 방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신발을 벗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신발을 신는다. 초가집이나 기와집에 살던 시절 누군가를 찾아갔을 때 불러낼 사람이 있는지 여부를 그 집 방문 앞 섬돌 위에 신발 몇 켤레가 어떻게 놓여 있는지를 보고 판단하던 습관이 있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굳이 신발의 존재 여부를 기준으로 짚어본다면  평상 위에 사람이 그려있지만 수렵총 무덤주인의 첫째 부인은 그 곳에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수렵총 보다 50여 년 가깝게 먼저 그려진 덕흥리벽화분에는 무덤주인의 초상이 두 번 등장하는데, 수렵총 벽화와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것은 널방 안벽에 그려진 두 번째 초상이다.

(그림2)

 

안벽 가운데에 그려진 장방 안 화면 왼쪽 공간에 평상이 마련되었고 그 위에 무덤주인 鎭이 정면을 향해 앉아 있다. 장방 안 화면의 나머지 반에 해당하는 오른쪽 공간 곧 주인의 왼편은 비어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 모습도 이름도 알 수 없는 鎭의 부인이 그려졌어야 할 곳이지만 무려 1,6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이 공간은 여전히 비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방 바깥의 장면만으로 본다면 무덤주인의 부인은 이미 남편이 와 있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여행을 마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화면 오른쪽, 장방 바깥의 공간에는 부인이 탄 수레와 시녀들이 도착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부인은 차양으로 가려진 수레 안에 앉아 있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부인이 장방 안에 그려지지 않은 것은 주인 진의 장례절차가 완전히 마무리되어 무덤 문이 닫히는 시각까지 실제 부인이 이 세상을 뜨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덕흥리벽화분 널방 안벽의 무덤주인이 앉은 평상 앞에는 수렵총 벽화에서와는 달리 신발이 그려져 있지 않다. 대신 무덤주인의 부인 자리를 비워 놓음으로써 부인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나타낸 것이다.

덕흥리벽화분의 주인 진은 이 세상을 먼저 뜨면서 자신의 아내와 함께 하지 못하는 내세로의 여행을 무척 아쉬워했는지도 모른다. 이와 달리 수렵총에 묻힌 고구려귀족은 둘째, 셋째 부인과 함께 내세로 떠나면서 뒤에 남은 첫째 부인까지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듯하다. 아직 살아 있는 첫째 부인의 초상을 자신과 함께 그려 넣게 한 것이다. 아내는 여럿이었지만 첫째 부인과는 결혼과 함께 백년해로를 기약하는 수의를 같이 마련한 각별한 사이였기 때문일까. 뒤에 남은 첫째 부인도 검은머리가 파뿌리처럼 희게 될 때까지 남편과 함께 한 날들을 떠올리며 아름답고도 슬픈 옛 노래 ‘공무도하가’를 연주했던 것은 아닐까.


 

 

 

새처럼 훨훨, 또는 맹수처럼 힘차게, 고구려의 춤


전호태(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깃털 모양 금장식 절풍모를 쓰고

흰빛 무용신을 신은 채 망설이는 듯하다가

삽시에 팔을 저으며 훨훨 춤을 추니

새처럼 나래 펼치며 요동에서 날아왔구나.


당나라의 시인 이백이 당의 궁중에서 펼쳐진 고려무(高麗舞)를 보고 쓴 시 ‘고구려’의 내용이다. 시가 형용하는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고구려 사람들은 옷소매가 긴 저고리, 통이 넓은 바지나 품이 넓은 치마를 입은 무용수가 몸을 돌리거나 발을 내닫으면서 팔을 빠르게 제키거나 굽혔다 펴 풍성한 옷자락의 움직임과 나풀거리는 옷소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게 하는 춤을 즐겼다. 삽시에 팔을 저으며 훨훨 춤을 추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새가 나래를 펼치고 나는 듯이 보이게 했던 고구려 사람들의 소매 춤은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널리 알려졌던 고구려 공연예술 장르의 하나였다. 춤은 일반적으로 춤추는 사람의 수에 따라 홀로 추는 춤, 둘이 추는 춤, 여럿이 추는 춤으로 나뉘며, 춤추는 사람이 도구를 쓰는지의 여부에 의해 도구를 지닌 춤과 그렇지 않은 춤으로 다시 나뉜다. 또한 협연 형태에 따라 남녀합창에 맞추어 추는 춤, 거문고 등의 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추는 춤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이런 다양한 형식의 춤이 모두 나타난다.  

무용수와 연주자들은 흔히 얼굴에 화장을 했는데,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입술을 붉게 칠했으며 이마와 볼에는 연지와 곤지를 찍었다. 장천1호분 벽화에는 얼굴을 붉게 화장한 무용수와 오현금 반주자가 만나는 장면, 무용수가 오현금 연주에 맞추어 긴 소매를 너풀거리며 춤추는 모습이 한 화면에 그려졌다.

(그림1) 장천1호분 앞방 벽화: 독무

 

무용수가 음악에 맞추어 홀로 춤추는 모습은 안악3호분 벽화에도 보이는데, 이 경우 반주자는 무려 셋으로 나란히 줄을 이루고 앉아 각각 긴 저, 완함,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다. 다른 벽화와 달리 이 벽화에 등장하는 무용수는 코가 높게 조각된 가면을 쓴 것처럼 보이고, 춤동작 역시 빠른 몸놀림이 전제된 서역 쪽의 호선무를 연상시킨다. 당연히 옷도 이런 춤에 적합한 짧고 좁은 소매의 저고리와 통 좁은 바지 차림이다. 통구12호분 벽화에는 한 사람의 거문고 반주에 맞추어 두 사람의 무용수가 춤추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앞으로 발을 내딛거나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펼치면서 팔을 움직여 소매를 너풀거리게 하는 고구려 춤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여러 사람의 무용수가 등장하는 군무는 무용총 벽화에 잘 표현되었다.

(그림2) 무용총 널방 벽화: 군무

 

춤을 이끄는 사람과 열을 이루어 춤추는 사람까지 모두 6명의 무용수가 남아 있는 무용총의 무용장면에는 반주자가 등장하지 않는 대신 7명으로 이루어진 합창대가 등장한다. 3명, 2명으로 나뉘어 줄을 이룬 무용수들의 옷차림은 춤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색의 배열을 고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오른쪽 줄 무용수들의 저고리와 바지색이 서로 위아래가 엇갈리게 하고,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왼쪽 줄 무용수 가운데 옷차림이 같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람의 두루마기 색깔을 서로 다르게 하여 춤추는 동안 관람자들로 하여금 춤동작과 옷 색깔이 함께 변화하며 조화를 이루는 듯이 느끼게 하려 한 것이다. 이미 고구려시대에도 춤과 같은 특수한 분야는 전문적인 기획과 연출을 바탕으로 공연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도구를 쓰는 춤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안악3호분 벽화 대행렬도에 보이는 칼과 활을 손에 들고 추는 춤이다. 팔청리벽화분의 행렬도에도 칼춤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두 남자가 각각 오른 손, 혹은 왼 손에 긴 검을 하나씩 손에 쥐고 몸을 낮추기도 하고 뛰어오르기도 하면서 칼 부리는 재주를 사람들에게 선 보이고 있는데, 행군 도중, 혹은 진영 안에서 펼쳐지는 이와 같은 무기춤은 놀이와 훈련을 겸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무기류를 손에 들고 춤을 출 때에 반주에 쓰이는 북이나 소, 뿔피리 같이 울림이 크거나 높고 날카로우며 박자가 빠른 음악을 연주할 때에 쓰이는 악기들이다. 자연 춤 동작도 크고 격렬하며 무용수도 거의 예외 없이 남자이다. 안악3호분 벽화에는 작은 북을 몸에 건 채 연주하면서 춤을 추는 장면도 보이는데, 오늘날 전통공연의 한 장르로 남아 있는 북춤의 가장 오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북춤 장면은 오회분5호묘 벽화에도 보인다. 소매 춤과 달리 도구 춤의 경우, 무용수들은 격렬한 움직임에 적합한 옷차림을 하였다. 소매가 좁고 짧은 저고리와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더하여 바지 가랑이를 홀쳐 맨 옷차림새의 남자들이 무용수로 등장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출처 : 연어알
글쓴이 : 북극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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