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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이야기

가야의 흔적으 찾아서

가야의 흔적을 찾아서

 

영남매일에서 보도한 가야의 흔적을 찾는 시리즈로 모았습니다.

 

 

·[김해] (21)-왕후가 지참하신것 Ⅱ

이 기록은 허왕후를 맞은 가락국의 직제의 변혁은 비단 그 직제만이 아니라 통치구조(統治構造)에 큰 변혁이 있었고, 그 변혁은 종래보다 진보적인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개신(改新) 작업은 왕후를 시종해온 잉신 두 사람이 각각, 가

·[김해] (20)-왕후가 지참하신 것

왕후가 거처하는 궁을 "중궁(中宮)"이라고 부른것도 한반도의 역사의 기록으로는 가 처음이다. 왕후의 별칭(別稱)이 "중궁마마"였던 조선조의 관습은 멀리 그 연유가 가락국으로 소급함을 알 수 있다.왕후(王后)는 이에(愛) 중궁(中宮)에 처(處)하게 하고

·[김해] (19)-세계사로 이어지는 가락국기 Ⅱ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선사(一然禪師)의 민족애(民族愛)가 겨우 그 매몰의 압력 속에서 구출해낸 `가락국기`를 역대 한족계열(漢族系列)이거나, 그 세력에 영합해야 한 사관(史官)들이 탄괴지서(誕怪之書)라 규정하고, 정사(正史)의 근처에도 못오게 만든

·[김해] (18)-세계사로 이어지는 가락국기

세기 48년 음력 7월 28일. 가락국의 별포(別浦)를 떠난, 비단 450필(疋)은, 로마제국의 귀족들의 의상으로 배달된 동방(東方)의 실크의 반출(搬出)에 관한 유일한 증언이다.그 엄청난 교류의 길, 실크로드-무엇이 이 길고 험한 길을 이은 원동력이

·[김해] (17)-마주보는 두마리 물고기Ⅱ

`황벽`은 옛부터 황색(黃色) 물감의 원료로 쓰인 식물로, 이곳 복주에서 일어난 선종(嬋宗)을 일본국에서는 황벽종(黃璧宗)이라 부르는 사실과, 왕후의 생국(生國)을 `허황국` `황국` 그리고 그 이름인 `황옥(黃玉)` 등의 `황`자는 이 복주와 무관할

·[김해] (16)-마주보는 두마리 물고기

수로왕릉 정문에 깊이 새겨진 장식판(裝飾板) 디자인은 한국의 단청의장(丹靑意匠)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특히 가운데 흰 수투우파을 두고, 파아란 물속에 마주보는 두 마리 물고기가 인상적이다. 아유타(阿踰陀)라는 나라 이름이 전통적인 한국사에서 찾을 수

·[김해] (15)-아유타국으로 가는 길Ⅱ

가락국이 비한문화권(非漢文化圈)의 문화를 주축으로 했었고, 그 권력(특히 해운력)이 강해서 쉽게 신복(臣服)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이 기록에 따르면, 보첩에는 와 마찬가지로 `아유타국`이라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조선시대 초기에 정리된 라는

·[김해] (14)-아유타국으로 가는 길

가락국은 해상별국(海上別國)으로 그 당시 이 지역에서는 최대 최강의 해운국이었음은 분명하다.바다의 실크로오드제3의 길은 광주(廣州^廣東)에서 시작하는 해로(海路)로, 인도차이나 반도를 돌아 마래카해엽을 지나, 갠지스강의 하구(河口)에 이르는 것이었다.

·[김해] (13)-파도를 잠재운 신비의 파사석탑과 호계사!

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의 바사석탑은 옛날 차읍(此邑)이 금관국시(金官國時)에 세조수로왕지비(世祖首露王之妃).허황후명황옥(許皇后名黃玉)께서 서역(西域) 아유타국에서 소재(所載)하여 내(來)한 것이니라. 처음에 공주께서 친(二親)의 명(命)을 승(承

·[김해] (12)-가락국 수로왕과 황옥공주의 결혼식

때 : 서기 46년 음력 7월 27일 곳 : 경상남도 김해군 장유면 대청리 유궁 신랑 : 가락국 건국주 수로왕 신부 :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許黃玉) ▲ 김해시 동상동 연화사내 있는 왕궁터 표지석. 김해는 가야문화의 발상지였고 가락국 500년의 왕도였

·[김해] (11)-허왕후를 맞이하는 김수로왕

"소재(所齎>한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衣裳), 필단(疋段)과 금은주옥(金銀珠玉), 경구복완기(瓊玖服玩器)는 불가승기(不可勝記)이더라."최고급 비단 천에다 옷과 옷감, 금.은.보석, 그리고 신기한 노리개 등은 일일이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는 것

·[김해] (10)-허왕후 바다로부터 오다

"궐(闕)에 주(走)하여 이를 주(奏)하매, 상(上)께서 문(聞)하시고 흔흔(欣欣)하시더라." 궐(闕)은 궁궐이지마는, 그 궁궐에 달려와 왕에게 아륀 사람이 탈락된 문장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연하국(輦下國)인 승점(乘岾)으로 간 신귀간이 아니라,

·[김해] (8)-왕도와 나라만들기

"그달 보름(望日)에 즉위(卽位)하였느니라. 시현(始現)한 고(故)로 수로(首露)라 위하고, 국칭(國稱)하기를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 칭(稱)하였느니라" 이렇게 기록된다. 서기 42년, 음력으로 3월 15일 마침내 천강의

·[김해] (7)-대왕을 맞이하는 큰 기쁨

짙은 안개 속에 서서히 내리는 자주빛 밧줄 끝의 붉은 보자기! 그 보자기를 열어보니 금합 속에 해처럼 둥근 황금의 알 여섯개! 이것을 눈 앞에 본 무리들의 놀라움과 기쁨은 오늘 우리들의 실감일 수도 있다. `황천상제님은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이

·[김해] (6)-구지봉의 대왕맞이

공중어는 당신이 군왕이 되어 이곳에 나라를 이루고 자손을 뻗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린 몸임을 밝히고, 구간(九干)의 무리들에게 구지봉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개벽(開闢)의 후(後), 이 땅에 아직 방국(邦國)의 호(號)

·[김해] (5)-망산도(望山島)

허황옥이 가야로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된 것은 어떻게 보면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들의 만남이 운명으로 보여지는가? 삼국유사에 보면 허황옥이 망산도에 도착해 수로왕의 영접을 받고 침전에 들어 수로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

·[김해] (4)- 김해 초선대

초선대(招仙臺).김해사람은 초선대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대충 알기는 하겠지만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표시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동공단을 들어서 약 200M. 주변의 공장들과 썰렁함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제78호)로써의 위상이 말이 아니다.

·[김해] 가야의 흔적을 찾아서(3)-봉황동 유적과 전설

김해의 대표적인 봉황동 유적은 1907년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에 의해 우리나라에서는 고고학상 처음으로 발굴된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유적지인 봉황대를 합한 것으로 유적 제 2호로 지정되어 있다. 몇차례의 발굴조사를 거쳐 지금은

·[김해] 가야의 흔적을 찾아서(2)-파사석탑

구지봉에서 내려오면 허황후릉이 보이고 그 조금 아래에 파사각이 있다. 바로 파사석탑을 모신 곳이다. 파사석탑은 현재 문화재자료 제227호로 김해시 구산동 119-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파사석탑에 대한 내용은 삼국유사 제3권 탑상에 나온다. 그 내용을

·[김해] 가야의 흔적을 찾아서(1)-구지봉(龜旨峰)

1세기에 시작되어 근 500년 동안 막강한 세력을 떨치며 찬란한 문화의 고대국가를 이루었던 가야국의 시작은 구지봉과 구지가(龜旨歌)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지가의 최초 기록은 고려 문종 30년(1076년) 당시 金官(현재 김해로 추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