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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요한 아침의 나라 57분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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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orean History Channel.- 독일 신부가 영상으로 기록한 '1925년의 조선'2 

 

 

 

 

노르베르트 베버. 출생지 독일. 소속은 베네딕도 선교회.

 

 

 

 1911년 조선 제1차 방문때의 베버 신부 일행(가운데 말 탄 사람이 베버신부)

베버 신부는 정말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사랑했었나보다. 그가 남긴 글 일부를 옮겨보자.

 

 ( * kbs스페셜 홈페이지 내용 일부를 옮겼음)

" 1911년에 내가 그리도 빨리 사랑에 빠졌던 한국과 이별할 때 작별의 아픈 마음으로 대한만세를
 불렀었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넘게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한국과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함께 가져오게 되었다. "


 

 

           ▲ 1911년, 식사중인 베버신부 일행 (왼쪽 두 번째 베버신부)


베버 신부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찾은 독일의 신부였다(1911년).

 

예술가, 문화 인류학자였던 그는 당시 4개월간 한국을 여행하면서

사람들의 문화와 삶을 400페이지가 넘는 글과 사진으로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후 베버 신부는 한국을 잊지 못하고 14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아 한국 문화에 대한 방대한 영상기록을 남긴다 (1925년).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1970년대 말, 독일 남부 뮌헨 근처의 한 수도원 지하실 공사 중 필름뭉치가 발견되었다.

15,000M분량의 35mm 필름은 한국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농업,수공업, 풍습, 명절, 예식 등을 자세히 기록한 한편의 영화였다. 
 

그 영화의 제목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1920년대에 촬영 되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한 화질의 그 필름 전편이 <kbs스페셜>을 통해 2010년 2월21일 모습을 드러냈다.  

 

 

               ▲ 1911년, 장죽(담뱃대)을 피우는 베버신부 일행 (오른쪽 끝 베버신부)

 

 

2,Korean History Channel.- 독일 신부가 영상으로 기록한 '1925년의 조선'3 

 

   

 

3,Korean History Channel.- 독일 신부가 영상으로 기록한 '1925년의 조선'4

 

  

 

4,Korean History Channel.- 독일 신부가 영상으로 기록한 '1925년의 조선'5

 

  

 

5,Korean History Channel.- 독일 신부가 영상으로 기록한 '1925년의 조선'6 

 

 

 

충무로 입구(1903)
충무로 입구에서 바라본 명동성당이다.
당시 충무로는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명동성당(1905)
앞의 종탑은 명동성당이며, 우측 흰 3층건물은 샬트 수녀원이다.

 

옛 조선호텔 앞 거리(1900)
일본에 의해 황근우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을 건축하기 전의 모습이다.

 

옛 진고개 (1904)
진고개는 현재 충무로 2가의 고갯길로서 흙이 몹시 질어 진고개라는 지명이 생겼다.
명동성당과 북악산이 보인다.
1906년 8척 가량 파내어 길을 닦고 높이 5척의 방주형 수멍을 묻었다.
이것이 서울시내 수멍도랑의 시초이다.

 

광화문 전경(1907)
당시 이거리는 도성에서 제일 넓은 거리였다.
왼쪽에는 통감부 통신관리국이 있고, 오른쪽 건물엔 일본관리인과 군부대가 있었다.

 

소공동 거리(1907)
소공동 주변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약방이 많았는데 일흥노약방 뒤로 원구단 누각이 보인다.

 

소공동 중심가(1903)
당시 충무로와 소공동은 가장 번화한 거리이다.
중앙의 누각은 현 조선호텔에 남아있는 황궁우이다.

 

마포 나루터(1900)
왼쪽에 밤섬이 보이고, 이곳 마포 나루터는 화물 선착장으로 유명했다.

 

용산 나루터(1904)
이곳은 나룻배를 건조하던 장소로 유명하다.
줄무늬 상의를 입은 소년과 목판에 엿을 담은 어린 엿장수가 엿을 팔고 있다.
소년의 옷차림이 당시 유행에 민감했음을 보여준다

 

중학천(1907)
뒤의 누각은 경복궁 동십자각이며 백악산과 경복궁을 거쳐 청계천과 합류하였다.
하천 주변에 주민들은 이곳을 빨래터나 목욕터로 이용하였다.

 

청계천(1904)
청계천은 서울 중심을 흐르는 하천.

말그대로 물이 맑아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이용되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사진이다.

 

 

서대문밖 곡물창고
당시 이곳에는 곡물창고가 있었고 왼편의 건물은 전차 수리소이다.
멀리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독립문 앞 전경(1931)
 각종 채소들이 집산되어 시내로 유입된다.
 이곳은 일본인들이 의주통이라 불렀다.

 

서부역 부근(1907)
이곳은 저지대라 비가오면 진흙땅이 된다.
멀리 보이는 건물은 약현성당이다.

출처 : 눈&귀
글쓴이 : 실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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