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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스크랩] 詩 : 파도 / 유치환

 
 


Raul Di Blasio / Oto AI (파도소리)
 
파도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파도 ( 에 얽힌 비하인드스토리 )
청마 유치환과  시조 시인 이호우의 동생이자 시조 시인 이영도는 
서로 사랑을 했더래요..아마도 플라토닉 사랑?
당시 청마도 기혼자였고, 이영도 역시 기혼자였데요..
같이 문단 생활을 하다보니..접할 기회도 많았을 뿐더러..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영도 여사는 아주 다소곳한 현모양처의 기질을 갖추고 있었다네요..
어느 날 청마는  플라토닉 사랑의 가슴 벅찬 번뇌를 이기지 못하고 
이영도 여사의 집에 찾아갔지요..
독백처럼 되뇌었겠죠..'나 플라토닉 사랑 이제 안할래..
완성된 사랑이 뭐야?..플라토닉 사랑 + 육체 인거야..'(영화 박하사탕 버젼이었을까??)
미친 듯 대문을 두드리며..
"제발..영도씨(영도야, 영도 여사님??) 문 좀 열어주이소.."
이영도 여사는 괴로운 듯..두 손엔 십자가를 들고 귀를 막으며,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며..견딜 수 없는 목소리로
"청마 선생님..제발..이러시면 아니되와요..제발 돌아가 주세요...흑흑"
그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몸부림으로 <파도>는 태어났답니다

* 내 멋에 산다. -청마 유치환 일대기 *
 靑馬(청마) 柳致環(유치환·1908∼67)은 깃발의 시인이다. 
남성적 준열한 삶의 의지를 실어 나르는 한문투성이의 그의 시들은 한과 애상,
그리고 여성적 비극의 정조로 물들여 있는 한국 현대시의 맥락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그의 목소리는 높고 준열하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저 푸른 海原(해원)을 향하야 흔드는 /永遠(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純情(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오로지 맑고 곧은 
理念(이념)의 標(표)ㅅ대 끝에/哀愁( 애수)는 白鷺(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국정교과서에 실림으로써 유명해진 「깃발」이다. 그 「깃발」은 무엇일까? 
그가 지향했던 「정신적 높이」와 상응하는 위치에서 펄럭이는 그것은 
「아직 변질하지 않는 생명의 原型(원형)」이었을까?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문단적 교류가 전무한 채 변방에서 외롭게 혼자 시를 써가던 청마는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불멸의 
에피그램(경구)을 남겼다. 
유치환은 1908년 경남 통영의 태평동에서 韓醫(한의)였던 柳焌秀(유준수)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장남은 극작가인 유치진이다. 
그의 부친은 본래 거제군에서 살았으나 결혼한 뒤에 처가가 있던 
통영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는 외가에서 태어나 11세 때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의 그는 말이 통 없는 소년이었다.학교 종이 울리더라도 뛰어가는 법이 없이 
조용히 걸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갔다. 그가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2년이다. 그의 형 유치진은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의 내성적 성격은 중학 시절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는 
대신에 그는 혼자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일에 열중했다. 
도일한 이듬해 관동대지진을 맞이 했고,그때 일인들에 의해 무고한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신문을 보냈다. 그 소녀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權在順(권재순)이다. 
도요야마중학 4학년 때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그는 귀국하여 東萊高普(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1928년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진명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권재순과 결혼한다. 
그 당시로는 드문 신식 결혼식이었다. 
이 결혼식 때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던 어린아이 중의 하나가 훗날 
시인이 된 김춘수이다. 그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는 1931년 「문예월간」에 「靜寂(정적)」이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온다. 이때 청마는 비슷한 또래의 통영 문학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곤 했다. 그의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던 아내는 시아버지와 
청마를 설득하여 거처를 평양으로 옮긴다. 
청마는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내 걷어치우고 시작에만 전념한다. 
그의 아내는 청마에게 평양의 신학교 진학을 권유했으나 그는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다시 거처를 부산으로 옮긴 것은 1934년이고,부산화신연쇄점에 근무한다.
그는 「 청마시초」라는 시집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사실 나는 광복 이전에는 문단적 교유나 교섭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한때 米鹽(미염)으로 벌이하던 和信(화신) 관계로 부산에서 趙碧岩(조벽암)
과 접촉하던 외에는 간간이 서울 가면 주배를 나눈 이로서 素雲(소운),芝溶(지용),
李箱(이상) 제씨가 기억에 남아 있을 뿐. 따라서 현재 내가 가진 문단의 선배,
동배의 교분은 거개가 광복 후에 비로소 맺어진 것이다』 
어느날 김소운은 충청도 서천에 계시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화신에 근무하던 청마를 불러내었다. 다방에서 청마와 마주앉은 소운은 
청마 앞에 전보를 내밀었다. 청마는 전보를 읽고는 얼마면 되느냐고 물었다. 
소운은 수중에 돈이 있긴 있느냐고 물었다. 청마는 자신에겐 가진 것이 없고 
아내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권재순의 유치원 보모 월급이 40원이던 시절이다. 
청마는 20원을 구해 소운의 손에 쥐어주었다.청마의 첫 시집 
「靑馬詩抄(청마시초)」가 나온 것은 1939년이다. 
이 시집은 김소운의 주선으로 화가 具本雄(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출판사 靑色紙社(청색지사)에서 나왔다. 시집의 본문 용지는 파지를 이용한 것이었다. 
1940년 봄,가족들을 이끌고 만주 煙首縣(연수현)에서 정착하여 
농장 관리인으로 일하던 그는 광복 직전인 1945년 6월 돌연 귀국한다. 
청마가 북만주 언 땅에 외아들을 묻고 고향 통영으로 귀환한 것은 아내 권재순의 
강권 때문이었다. 아내는 꿈마다 할아버지 가 나타나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손짓을 
한다고 남편을 채근했다. 그들이 귀국하고 두달 뒤에 광복이 되었다. 
당시 문학청년이었던 김춘수는 친구와 함께 고향의 대시인을 방문했다. 
점심 무렵이었는데,청마는 「柳(유)약국집」 마루에 혼자 앉아 파쌈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켜고는 파쌈을 
고추장에 찍어 입에 연신 집어 넣고 있었다. 결벽증이 있던 문학청년의 눈에 
청마의 모습은 너무나 「세속적」으로 비쳐 실망감이 컸다. 김춘수는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김춘수가 청마를 방문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9월15일 「통영문화협회」가 결성되었다. 청마가 대표가 되고 윤이상,전혁림,
김춘수 등이 간사를 맡았다. 문맹자를 위한 한글강습,시민상식 강좌,
농촌계몽 연극 공연 등을 하는 계몽적인 예술운동단체였다. 
이윤수 시인 등과 함께 「竹筍(죽순)」 동인을 한 것은 1946 년이다. 
대구 서문로에서 名金堂(명금당)이라는 시계점을 내고 있던 이윤수는 
1946년 5월1일자로 광복 이후 최초의 시동인지인 「 죽순」 창간호가 
나오자 점포 앞에 「죽순시인구락부」라는 간판을 내 걸었다. 
그해 11월이 다 저물 무렵 대구 명금당에 나타난 청마는 동인들과 
사나흘 같이 지내다 집으로 돌아갔다. 청마가 여류 시조 시인 이영도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죽순」 동인을 통해서이다. 
당시 통영여중 교사로 있던 이영도는 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혼자였다 . 
그 뒤 청마는 경북대학교 문리대에 자리를 얻어 시론을 강의했다. 
청마는 향촌동에 있던 백구세탁소 2층에 세들어 살았다. 
추운 겨울이면 방안에 있던 잉크병이 얼기도 했다. 
이때 경북대 의대를 나온 문학청년 許萬夏(허만하)는 혼자 청마를 흠모하며 
시를 쓰고 있 었다. 
청마는 이영도를 향해 숱한 편지를 보내고 또 숱한 연모의 시를 썼다. 
그 사랑은 매우 고통스러운 사랑이다. 
「쉬이 잊으리라/그러나 쉬이 잊히지 않으리라.」 
그들은 같이 있을 수 없었다.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연정의 조각」은 
「가슴을 저미는 쓰라림」으로 그를 찔렀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어룽」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명편의 시를 낳기도 했다. 
「 오늘도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우체국 창문 앞 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길을 향한 문으로 숫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 봇지를 받고/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슬프고 즐겁고 다정 한 사연들을 보내나니.//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 한 연분도 /한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비귀꽃인지도 모른다.//­
사랑 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느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1960년 이른 봄 허만하는 대구 경북여고 부근 육군 관사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청마의 집을 방문했다. 청마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실직 
상태였고,한쪽 다리는 신경통으로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이다. 
햇볕이 따뜻한 마루 끝에 걸터앉은 허만하는 얘기 끝에 청마에게 물었다. 
『선생님,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셨겠습니까?』 
청마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아마 천문학자가 되었을끼라』 
청마가 세상을 뜬 것은 1967년 2월13일이었다. 
그날은 고교 후기 입싯날이었다.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있던 청마는 
학교일을 마치고 예총 일로 몇몇 문인을 만났다. 그들과 어울려 몇군데 술집을 들렀다. 
청마는 고혈압 때문에 술 대신 사이다를 마셨다. 술값을 치르고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청마는 좌천동 앞길에서 한 시내버스에 치여 부산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절명했다.- 옮겨온 글 -
					
출처 : 영혼 속에 젖어드는 그대
글쓴이 : 一墨 金錫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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