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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스크랩]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과 고향

 
   

  아이들 마음속에 별이 되어…

  아~ 童心의 고향


  ‘청년이 되고 또 오래되어 노년이 되더라도 나의 혼의 한 가닥은 오래오래 어린이 나라에 깃들어 있을 터입니다.’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이 15세때인 1926년 방정환 선생에게 보낸 편지이다.(사진:마산 산호공원에 있는 '고향의 봄'노래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롭던 소년 이원수에게 잡지 ‘어린이’와 방정환은 큰 위안을 주었고. 문학을 해야겠다는 생각. 삶의 태도를 배워나갔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아동문학을 하면서 이 약속을 지켰다.

  마산 산호동 곳곳 선생의 흔적들

  세 들어 살던 집… '겨울나무' 무대 팽나무… 산호공원엔 고향의 봄 노래비

  창원 이원수문학관엔 친필원고·유품·작품집 등

  평생 동심 위해 살다간 뜨거운 불꽃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 산호공원의 겨울나무
  “우리나라 아동문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이원수(1911~1981)선생은 양산 출생이지만.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창원(1912)과 김해(1921)를 거쳐 마산(1922)에 와서야 비로소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흔적 찾기에 동행을 한 아동문학가 임신행씨는 “그는 마산에서 보통학교와 상업학교를 다녔으므로. 이 때의 체험이 그의 문학에 끼친 영향을 소홀히 할 수 없다”면서 마산시립도서관(산호공원)밑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원수 선생이 같은 아동문학가인 최순애 여사와 결혼을 하고 살던(1936~1939년) 집이다. 디귿자로 생긴 이 집 아래채에 세를 들어 살면서 시내 건재상에 일을 나가셨다고 한다. 아직도 그 당시 사용했던 우물이 남아 있지만 덩그러니 놓인 두레박이 세월의 덧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예전에는 집 뒤로 오솔길이 있어 용마산을 오르내렸다고 하지만 지금은 엄두를 못낼 정도로 경사가 급해져버렸다.

  “저기 보이는 오래된 팽나무가 선생의 동요 ‘겨울나무’의 무대가 되었죠.”(왼쪽사진)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평생을 살아 봐도 늘 한자리/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께 듣고/꽃 피던 봄 여름 생각하면서/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이원수 작사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를 붙들고 위태롭게 서 있는 이 팽나무는 세찬 바람따라 여전히 휘파람을 불고 있다.
  선생은 ‘겨울나무’를 유난히 좋아했다고 한다. 한번씩 마산에 내려와 술자리를 할 때 이 동요를 제일 먼저 부르면서 회상에 잠기곤 했다는 것.
  임신행 선생은 “이런 의미가 담긴 곳에 표지석이라도 하나 해놨으면….” 하면서 아쉬움을 내비쳤다.

  ★고향의 봄
  산호공원에 있는 고향의 봄 노래비로 향했다.
  선생이 다녔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마산 성호초등)가 어렴풋하고 마산상업학교(현 용마고)가 손앞에 잡힌다.

  그의 문학의 뿌리가 되었던 곳으로 ‘고향의 봄’이 태어났다.

  ‘나의 살던 고향은/꽃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아기 진달래/울긋불긋 꽃대궐/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그립습니다.’

(사진:오른쪽 이원수 선생이 살던 마산 산호동의 집앞에서 아동문학가 임신행씨가 설명하고 있는 모습(위), 이원수 문학관을 찾은 부모와 아이들이 이원수 선생의 유품을 살펴보고 있다.)

  이 노랫말은 이원수 선생이 15세가 되던 1926년에 발표한 시이다. 그 당시 유명한 아동잡지인 ‘어린이’ 4월호에 실렸다. 선생이 활동하던 ‘소년회’단체가 해산되면서 외로움을 겪다 마침 학교(현 성호초등학교) 뒤편 복숭아꽃을 보고 어린 시절 천주산 아래 고향에서 뛰어놀던 일들이 가슴 아리도록 그리워져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일래 선생이 작곡한 곡이 불리기 시작하다가 이후 홍난파 선생이 작곡한 곡 ‘고향의 봄’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1968년 9월 28일 학생과 시민들이 정성을 모아 산호공원에 노래비를 건립했다.

  그러나 40년 세월동안 노래비의 동판이 분실되기도 하면서 수모를 겪었다. 노래를 적은 앞면의 동판은 고물상에서 찾아 원상복구했지만 결국 뒤편에 붙어있던 동판은 찾지못해 대리석으로 교체했다고 한다. 게다가 공사중 푯말과 간이급수시설. 또 다른 비(碑)에 둘러싸여 노래비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다.

  임신행 선생은 “이원수 선생이 마산에 오시면 이 노래비 옆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천주산 쪽 고향을 보면서 회상에 잠기기도 했다”면서 선생의 남다른 고향사랑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창동 주변 옛 마산교도소 자리를 가리키면서 함안 독서회 사건으로 감옥살이(1935년)를 할 때 창살 밖으로 들리는 두부장수의 종소리를 듣고 쓴 동시 ‘두부장수’ 이야기도 하곤 했다.

  ★이원수 문학관
  김일태 시인과 함께 들른 이원수문학관은 창원시 서상동 고향의 봄 도서관 내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약 55평 규모의 전시실과 로비공간에는 유족들과 후배 문인들로부터 기증받은 친필원고와 필기구. 주요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친필 시화액자. 생활용품 등 이원수 선생의 유품 40여점과 ‘오빠생각’으로 알려져 있는 최순애 여사의 유품 3점. 호적부와 주요 저서들. 선생의 작품이 실려 있는 당시의 잡지들이 전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원수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1950~1970년대에 발간된 다양한 도서자료들이 확보돼. 한국 아동문학의 연구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김 시인은 “지난해 윤이상 선생 행사와 관련하여 북한에 갔을때 그 곳에서 발간한 음악잡지에 ‘고향의 봄’ 악보가 실려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면서 “그만큼 우리 민족이 가장 널리 부르는 노래임을 한번 더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 이 곳을 방문한 유족들은 고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문학관을 둘러보고 벅찬 감격과 함께 창원시민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원수의 삶과 문학세계
  이원수 선생은 1911년 11월 17일(음) 양산에서 태어나 돌이 되기 전에 창원 소답으로 이사를 와서 11살까지 살았다. 그리고 마산과 함안에서 해방될 때까지 생의 절반을 살다가 해방후부터 돌아가시는 날까지 서울에서 생활했다.

(사진:위에서부터 아동잡지 '어린이'에 실린 이원수 선생의 동요 고향의 봄, 천추산아래 고향의 봄 노래의 배경이 된 마을 앞에선 이원수 선생, 1968년 건립된 고향의 봄 노래비 제막식 사진)

  여러갈래의 어린이문학을 두루 거치며 민족의 현실을 시의 소재로 삼았고. 우리민족이 겪어왔던 아픔과 슬픔. 안타까움과 그리움 같은 민족정서를 풀어 아이들이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동요와 동시를 썼다.

  해방 후에는 주로 통일과 민주주의. 생명존중과 더불어 사는 삶. 정의와 같은. 사람이 겪는 모든 문제를 풀어 소년소설과 동화 속에 담았다.

  또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어린이문학의 기초이론을 만들어서 어린이 문학이 바른길을 걷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처럼 선생은 어린이를 위한 글쓰기에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언제나 평화롭고 행복한 어린이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다.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눈에 띄지도 않는 일이고 또 문단에서도 따돌림을 받는 아동 문학을 하면서 한평생을 살아 온 것에 때때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마음속에 내 생각이 스며드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순수한 어린 마음을 길이 살려서. 착한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이 밝고 깨끗한 곳이 되게 하는 데에 조그만 힘이라도 되려고 하는 나의 소망 때문이다.”

  칠십 평생을 오로지 동심 속에. 동심을 위해 살다 간 이원수 선생의 말이다. 이종훈기자 leejh@knnews.co.kr

출처 : 아름다운 세상으로
글쓴이 : 죠나단 리빙스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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