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모양토기
높이(왼쪽 38㎝∙가운데 18.5㎝∙오른쪽 44㎝), 호림박물관
東明王신화에서 朱蒙은 呪言으로 沸流國의 왕도에 7 일간 홍수를 내려 송양을 굴복시킨다. 이때 주몽은 오리 말(鴨馬)을 타고 갈대줄로 강을 가로질러 백성이 그 줄 을 붙들어 살게 한다. 여기서 오리말은 오리처럼 생긴 말이란 의미일 수도 있고, 신령한 능력자인 주몽이 오리 를 말처럼 이용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오리는 재앙으 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神的존재로 신성시되었 다. 샤머니즘의 우주창조신화에 의하면 태초에 세계는 온통 물바다였는데, 이때 오리가 수중 밑바닥까지 잠수 해 흙을 퍼다가 물 위에 계속 쏟아부었고, 그 흙이 쌓여 오늘날의 땅이 되었다 한다.
이집트에서 오리는 태양을 낳은 존재로 여신 이시스와 결부되고, 유대교에서는 不 死를 상징하며, 켈트문명의 문헌에서도 오리가 백조와 유사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다고 했다. 북쪽에서 와서 다시 돌아가는 철새인 오리 는, 구원의 과정을 거쳐 至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고귀 한 존재나 천사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오리는 하늘과 물의 관계를 맺어 주는 중개자이고, 무사태평을 상징하기도 하며 한가로 이 물 위를 떠다니며 몸치장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나쁜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물 위에 떠서 머리를 물 속에 불쑥 처박으며 흡사 깊은 지혜를 구하는 듯한 오리 는 심오한 신비를 탐구하는 기쁨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늘을 날고 땅을 걸으며 물을 가른다 하여 天地水 三界를 내왕하는 靈物로 우러름을 받아왔다. 이는 水界나 地下 界와 관련 있는 중요한 종교적 의미가 있다. 천상의 신 명과 통신하는 솟대 위에 얹는 새가 오리인 것도 이 때 문이다.
기러기 등 철새는 한 계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옛날 사람들은 天界 혹은 神仙界로 가는 것으로 인식) 다시 나타나는데, 이러한 능력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再 生神意의 전달자 또는 중개자로 보다 높은 神靈의 상징 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물고기를 물고 있는 오리의 모습 은 그 자체가 풍요로움을 상징하기도 했다.
가을에 북녘에서 번식하여 우리나라로 이동해 오는 겨 울철새는 대개 낙동강 하구를 중심으로 모이는데, 이곳 은 한반도 최대의 철새도래지이며 벼농사의 중심지이 다. 이곳에서 출토된 오리모양토기는 祭禮用品으로 제 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철새인 오리가 주기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동성 때문에 이승에서의 소멸과 저승에서의 재생을 바라는 당시 사람들의 靈魂觀과 합 치되는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암 시하며 초자연적인 세계로의 여행을 의미하여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넘나드는 영혼의 순환적 여행을 뜻하 기도 한다.
천둥새로서의 오리는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농경마을 에 비를 가져다 주어 풍요를 이루게 하는 동물로 신앙시 되었다. 이는 철새가 갖는 주기성이 농경에 필요한 비를 가져다 주는 계절풍과 관련이 있고, 실제로 일부 마을에 서는 솟대 위에 오리를 정남향으로 놓아 우순풍조를 기 원했다. 오리가 북녘에서 날아오지만 남쪽에서 비를 몰 고 온다는 믿음이 있어 물을 확보하기 위해 종교적인 기 원이 생겼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祈雨祭이다. 그러나 기우제는 비정기적인 祭儀인데 비하여 솟대의 오리는 상시적인 神竿物로 물의 확보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또한 오리는 전형적인 물새로 잠수하기 때문에 홍수에 도 살아남을 수 있는 不死의 새로도 생각했다. 風水에서 말하는 行舟形 지세는 바다에 떠 있는 불안정한 배의 형 태이므로, 이를 안정시키고자 배의 돛대의 역할로 솟대 를 세우고 그 위에 대부분 오리를 얹었다. 오리는 마을 을 인도하며 평안하게 하는 역할도 하지만 홍수나 재해 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의 새로 생각했다.
우리의 전통혼례에서 혼인날 신랑이 나무로 만든 기러 기나 새를 신부집으로 갖고 가는 풍습은 암수의 애정이 깊은 새이기 때문에 변치않고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뜻 이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鴛鴦은 단 하나의 짝에만 애 정을 바치며 살다 헤어지면 그리워하다가 말라죽는다고 하여 배우자의 정조를 상징하고, 오리는 금실좋은 배우 자 또는 정절을 상징한다.
오리는 과거급제를 나타내기도 한다. 鴨을 破字하면 甲(갑옷갑) 字가 나오므로 오리가 두 마리 있으면‘二甲’ 즉 鄕試와 殿試 두 가지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함을 의 미한다. 또한 오리는 다산성이라는 특징이 있고, 닭보다 크고 무거운 알을 낳는다. 그래서 서유럽∙中近東 지 방∙중국 등지에서는 고대부터 오리알을 식용으로 즐겼 다고 한다.
이렇게 인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오리는 3세기 경에 이르러 洛東江 東岸지역을 중심으로 토기의 형태로 나 타나기 시작했다. 이들 오리모양토기는 주로 오리나 기 러기와 같은 사실적인 새의 형상으로 제작되었고, 대부분이 硬質土器로 완성되었다.
鳥形은 일반적으로 오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반 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3세기 경 胴體가 새의 형태를 취하지만 정수리 부분의 큰 깃이나 양쪽으로 튀어나온 귀 등의 조형성은 말과 새의 특징을 복합한 神獸처럼 느 껴져, 실존하는 새의 일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葬送時 의 의례용으로 고안한 儀器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초기의 오리모양토기는 頭部에 큰 깃과 귀가 빠짐없이 나타나고, 顔面部에 코와 입은 있지만 눈의 표현은 드문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후반에는 깃과 귀는 소략화되거나 없어지지만 눈은 반드시 표현 된다. 그리고 처음에는 낙동강 동안지역을 중심으로 사 용되기 시작하다가 硬質化되면서 西岸지역으로 확장된 다. 이는 오리모양토기를 사용한 집단이 정치적인 영역 의 확장이나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는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략 5세기 초를 전후하여 頭部가 馬形인 오리 모양토기의 등장이 주목되는데, 말과 새모양의 결합은 갑작스런 출현이 아니라 어떤 배경이 있다고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馬形이나 龜形과 같은 동물형토기도 함께 나타나는 것은 동안지역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는 새로운 세력의 출현에 따른 토착세력의 이동으로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원삼국시대 후반부터 만들기 시작한 오리모양토기는 주로 신라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達城∙安東∙昌寧 등 낙동강 동안지역에서 발달했고,
원삼국시대의 토기에 비해 작아지지만 날갯깃을 그리거나 귀걸이모양의 날개 가 붙는 등 장식이 강해진다. 기본적인 형태는 굽다리 위에 오리를 올려 놓은 모습으로, 몸통 속이 비어 있고 등 위에는 잔의 구연부를 붙이거나 꼬리에 구멍을 내어 용기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오리모양토기는 일상용기라기보다는 오리형태의 제작 에 목적이 있는 것으로, 물과 관계 있는 儀式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三國志』魏書 東夷傳에 의하면 낙동강 지방에서는 영혼이 승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안내자 의 구실로 새뼈나 새깃을 무덤 안에 넣었다 한다. 이는 고대사회의 새에 대한 신앙을 말해준다. 한편 토기나 � 屬製의 그릇뚜껑의 손잡이에 새를 표현한 것과 무령왕 릉의 頭枕에 봉황의 머리를 조각하여 붙인 것도 비슷한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박물관사람들_5 삼국시대, 경북 금릉 삼성동, 높이(오른쪽 14.5㎝), 대구박물관(경주 2785) 5세기, 높이 6.5㎝, 경주박물관(이양선 기증유물) 경
부부애의 상징, 원앙새와 기러기 특집│오리모양토기
김민기│ 화가
원삼국시대의 오리모양토기로는 숫원앙의 관모양 깃털을 연상시키는 祭器가 많이 출토되었다. 닭벼슬 같은 것이 달려 있는 가야의 오리토기도 있는데 미국 골돈 하트 수집품(Goldon Hart Collection, B.C 200�A.D 400년)으로 북미 인디언도 비슷한 것이 있다. 기러기는 암수가 한 번 짝지으면 배필을 다시 구하지 않기 때문에 전통혼례에서 사랑의 서약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한 쌍을 전해준다. 그래서 亡配의 슬픔을‘짝잃은 기러기’라 한다. 원앙새는 배필새(匹鳥)라 부르는데 수컷을 鴛, 암컷을 鴦이라 한다. ‘백제대향로’의 뚜껑 중앙에는 원앙새와 악기를 연주하는 신선이 조각되어 있는데, 원앙새가 天帝의 왕궁 속 정원 연못에서 노니는 음양화합의 사랑새임을 잘 드러 내는 사례라 하겠다.
‘韓憑 搜神記’에는 원앙의 슬픈 전설이 있다. 대부벼슬을 지내는 한빙의 아내는 절세가인이었는 데, 임금이 한 번 보고 혹하여 한빙에게 죄를 씌워 죽게 하고 아내를 빼앗았다. 아내는 왕궁 누각 에 갇혀 잠자리에 불려가게 되자 유서를 써놓고 투신하여 남편을 뒤따랐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부부를 합장했는데, 왕이 이를 알고 대노하여 옆에 따로 무덤을 만들게 했다. 얼마 후 두 무덤에 서 자란 가래나무의 뿌리가 서로 엉켜 하나의 큰 나무가 되었는데 어디선가 원앙새가 날아와 슬피 울자, 이를 본 사람들이 부부의 精魄이 원앙새가 되었다고 했다. 원앙의 암컷은 촌부의 모습으로, 수컷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한다. 우리 민속에서는 부부의 사이가 나빠져 공방 귀가 들면 먹으로 원앙새를 그려 출입문에 붙였는데, 이것을‘부부화합부’라 한다.
한민족의 성산인 백두산 영봉에는 하늘의 연못인 천지가 있고, 여기서 흘러내린 크고 긴 푸르른 강을 오리가 내려온다 하여 한자로 鴨綠江이라 적는다. 왜 이 하늘의 강(天河)을‘오리의 푸른강’ 이라 했을까? 여기에는 단군조선의 문화적 상징성이 함축되어 있고, 天符經을 읽는 열쇠를 오리 에게서 얻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단군신화에도 새가 등장한다. ‘환웅이 天符印과 風伯∙雲師∙雨師∙雷公과 삼 천의 인재들을 느리고 신단수로 내려와 神市(天府)를 여는데, 天宮은 건축가 제비가 짓고 세발까마귀(三足烏 : 해)와 두꺼비(蝦 : 달)는 밤낮으로 開天宮을 밝혀 홍익인간의 道가 온 세상에 퍼지도록 힘썼다’고 한다. 위에서 풍백은 바람의 신 오리神將이고, 운사는 구름의 신 鶴官(관리의 우두머리)이며, 우사는 비의 신 龍官(치산치수담당 사공격)이고, 뇌공은 천둥번개의 신 박쥐로 白 馬都元帥이며 隻邪進福의 수호신이다.
가뭄이 극심해 대지가 타들어 가면 바람의 신 오리가 바람을 일으켜 구름을 모으며 비를 만들고, 홍수가 나면 바람으로 구름을 쫓으며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이 오리신장 풍백의 역할이다. 멕시 코 인류학박물관에 있는 바람의 신‘에에카톨(A.D 10세기)’은 부리가 강조된 오리머리사람(鴨頭 神像)으로 고아시아 문명이 북미를 거쳐 남하한 것으로 보이며, 공통적인 神鳥신앙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인디언 유물에서는 지금은 사라져 없고 기록에만 남아 있는 우리의 옛모습을 볼 수 있다.
‘단군천부경’에서 오리는 북두성의 사신이고, 24계 중 낮이 짧고 밤이 길어서 가장 견디기 힘든 혹한(동지∙소한∙대한)을 살피는 使者이다. 일 년을 평생에 비유하면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때다. 벗어나려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 힘들어지기 때문에 엄동을 지내듯 쉬며 기다리라는 뜻으로 9궁(洛書에 나오는 9방위를 일컬음: 中央∙乾∙坎∙艮∙震∙巽∙離∙坤∙兌)의 첫 자리 감궁을 ‘휴문’이라 한다(坎天逢休門一宮). 참고 기다릴 때 안에서 생기가 陽生冬至한다는 것이다. 뒷날 엄 동의 시기가 인생의 큰 교훈이 되며 어려울 때를 대비하는 지혜를 준다는 것이다. 오리는 이를 무언으로 일깨우며 현명하게 대처하는 덕행자를 찾아 하늘에 알리는 天福使者이자 풍백이다. 이것 이 우리 솟대 위의 오리이자‘가을에 다시 오리(再來)’이고, 순환의 깨우침을 주는 스승이자 대자 연의 사신인 것이다.
鴨形土器 雜想
굴아화촌(掘阿火村)의 아래뜰(下垈) 전투에서 죽은‘큰 손’대장의 영혼을 저승으로 잘 안내해 가라고 빌면서 오 리토기 몇 개를 무덤에 딸려 보냈다. 몇 해 전 그 무덤에 있던 오리 한 마리가 뒤뚱뒤뚱 걸어 나왔다. 천 수 백년 이 걸린 모양이다. 함안이나 현풍, 창녕에서 나온 오리와 함께 이제 제법 식구들이 늘어났다. 울산 중산리, 김해 대성동, 부산 복천동, 경산 임당, 포항 옥성리 합천 옥 전, 사천 늑도에서 오리가족들이 출토된 것도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그들의 고향은 모두 낙동강 어디쯤이다.
오리모양토기들은 모두 부리와 눈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몸통은 간략하게 만들었지만 오리의 모습을 충 실히 따르고 있다. 등에는 원통 모양의 注入口가 있고, 꼬리 쪽은 뚫려 있어 액체를 담아 따를 수 있는 容器의 기능도 지닌다.
瓦質이 주를 이루는 三韓의 오리모양토기는 하대, 중산 리, 임당, 옥성리, 복천동38호의 예가 대표적이다. 하대 압수품과 중산리, 임당, 복천동38호 등의 예에서 보듯이 부리는 길고 뭉툭하여 밉살스러운데 지금도 꽥꽥거리는 듯하다. 대롱으로 점 두 개를 쿡 찔러 코를 뚫었다. 작은 대가리 좌우에는 진흙 고리 두 개를 안경처럼 달아 튀어 나오지도 않은 눈을 끔벅끔벅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정수 리에서 목덜미까지에는 높고 긴 볏을 세워 위엄스럽게 하 였다. 하대32호 단지의 뚜껑에는 암수 두 쌍이 등을 지 고 사뿐히 올라앉아 꼭지가 되었다. 사라리55호의 것은 종종걸음으로 어미를 따르고 있는 모양인데, 모아진 두 발의 물갈퀴가 앙증맞지만 두 마리 모두 목이 없어 슬프 다. 유독 임당 오리만은 길다란 부리 사이가 갈라져 약간 위로 올라가 있어 살짝 웃고 있다. 죽음을 기쁨으로 승화 시킨 미소이리라. 며칠 전 대곡댐 발굴현장에서 만난 오 리는 고개를 왼쪽으로 약간 틀고 있어 완벽한 조형미까지 를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가 되면 오리모양토기도 대부분 陶質로 만들어 진다. 형태상의 변화도 일어나지만 오리의 원래 품새는 유지된다. 통통한 몸체의 현풍 출토품은 등에 솟은 구멍 과 부리를 톱날처럼 마무리하였다. 머리를 약간 숙인 채 한 쌍이 밀어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김천 삼성동 출토 한 쌍은 목과 신체 곳곳에 달개 장식을 달고 서로 뽐내고 있기도 하다. 이 시기의 오리모양토기들의 가슴팍에는 대 부분 일렁이는 물살이 표현되어 있다. 물 위를 떠다니는 모습을 나타낸 성싶다. 금방이라도 놀라서 그 짧은 날갯 짓으로 파닥이며 물을 퉁길 듯하다.
오리는 기원전 3,000년 경 이집트에서 처음 가축화되 었다고 한다. 그들의 상형문자에 보이는 오리는 알파벳의 첫 글자‘a’로 읽히며, 그 오리 뒤에 태양의 모양이 추가 되면‘파라오의 아들’이라는 어마어마한 뜻이 된다고 한 다. 깃털의 모습까지 정확하게 묘사된 메둠의 벽화와 투 탕카멘의 stool에 조각된 오리머리, 망사로 된 옷을 입고 오빠를 유혹하는‘사랑의 노래’에 나오는 누이는 아마 오 리와 물장구치고 있었지? 오리가 고대 이집트인들과 얼 마나 친숙하고 그들의 문화와 밀접하였나를 짐작하고도 남겠다. 석양을 등진 오리의 신비함이 보일 듯하다.
동양에서는 오리가 하늘을 날고 땅을 걸으며 물을 가른 다 하여 삼계를 내왕하는 영물로 취급된다. 솟대에 오리 가 올라앉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리는 평생 한 마리와 짝을 짓는다고 한다. 한 가정을 이루는 출발점에 선 부부 의 혼례식에 오리를 앞세우는 연유를 알겠다. 물새이면서 도 철새라는 점에서도 상징성을 갖는다. 일정한 계절을 주기로 나타났다 다시 사라지는 철새를 이승과 저승,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넘나드는 神鳥로 보았음직하다.
오리를 죽은 자에게 처음으로 딸려 보낸 우리 조상은 3 세기 중반의 변∙진한인들이다. 일찍이『三國志』魏書 東 夷傳 弁辰條에‘큰 새의 깃털로 죽은 이를 보내니 죽은 이의 넋이 하늘을 날도록 하려는 뜻(以大鳥 羽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이라고 기록하여 두 었다. 神鳥로서의 장엄하고 위엄스러움, 목이 잘리 고도 어미를 따르는 처연함, 죽음마저 초탈한 야 릇한 미소, 장식으로 뽐내고 밀어를 속삭이는 여유 로움까지, 이제서야 낙동강 어디쯤 사람들의 오리에 배어 있는 염원을 조금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비는 계속 내렸다.
봄비치고는
처연하다고 할 정도로
빗방울이 굵었다.’
오리를 찾아 나선
주남저수지에도 雲門寺 鵲鴨殿에도
오리는 없었다.
그냥 비만 내리고 있었다.
지난 주말 저녁 月池를 찾았다. 신라가 백제를 멸하고 최고의 국운을 뽐낼 때였지 아마. 망망대해를 앞뜰에 옮 기고 三神山의 믿음을 그대로 펼쳐 놓은 이 조그마한 연 못. 경순왕이 왕건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던 그 자리. 천 년의 사직을 넘겨주며 悔恨하던 곳이다. 월지의 영화가 가고 기러기와 오리만 찾는 황폐한 연못을 아쉬워하던 조 선의 선비들은 그래서 雁鴨池라 불렀겠지. 원형을 찾았다 고 하지만 거기에는 이제 기러기도 날아들지 않고 오리도 뒤뚱거리지 않았다. 파아란 오월의 상현달만이 서라벌의 향수를 어루만지며 일렁거렸다. 월지에는 달이 잠겼는데, 안압지에는 오리가 헤엄치지 않았다. 우리가 한 짓이다. 오리모양토기를 생각하면서 煩說하였다. 2003. 5. 13, 雲門
가사 출처: 상기 기사는 사단법인 한국박물관회에서 발행하는 <박물관 사람들 2003년 여름호>에 특집으로 소개한 오리모양토기임을 밝혀드립니다. 비록 21년전의 기사이지만 오리모양 토기 이해에 유익한 내용으로 네티즌과 공유하기 위해 소개코자 합니다
蔚山 下垈에서 출토한 한 쌍이다. 압수품이어서 정확한 출토양상은 알 수 없지만 臺附壺, 兩耳附壺와 함께 출토되었다고 하므로, 3세기 말~4세기 초에 성행한 후기 와질토기의 여러 器種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부리는 장방형으로 짧고 직선형이며, 깃은 머리에 비해 매우 높게 강조한 편이 다. 먹이를 구하거나 끼리끼리 遊戱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고개를 들어 근엄하게 멀리 응시하는 생김새에서 死者의 영혼을 인도하는 엄숙함이 보인다. 容器이지만 어떤 날짐승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의례적인 관념을 부가하여 형상화한 것이 분명하며, 원초적인 모델은 오리인 것 같다. 鴨形土器가 장식이 강하고 제작이 까다로워 다소 희귀성을 갖고 있으나, 이 희귀성이 우월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오리를 수장의 심벌로 채택한 것이라기보다는 내세관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높이(아래) 29.5㎝, 국립김해박물관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