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 대흥사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 대흥사

 

사찰소개

                                                                                       대흥사 전경

    •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 전라남도 해남군에 위치한 두륜산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이다.
      두륜산(頭崙山)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대둔사와 대흥사라는 사찰명 중 몇 번의 개칭이 오고가다 2003년에 대흥사로 명칭을 다시 바꾸었다. 절이 들어앉은 두륜산의 옛이름이 한듬이었으므로 절도 오랫동안 한듬절로 불렸다. 옛말에서 ‘한’이란 ‘크다’라는 뜻이고 ‘듬’이나 ‘둠’ 등은 ‘둥글다’라거나 ‘덩어리’라는 뜻을 가진다. 세월이 지나면서 한듬은 한자와 섞여 대듬이 되었다가 다시 대둔(大芚)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절도 대듬절, 대둔사로 바뀌어 불렸다. 한편, 대둔산은 중국 곤륜산(崑崙山) 줄기가 한반도로 흘러 백두산을 이루고 계속 뻗어내려와 마지막으로 맺은 산이라 하여 다시 백두의 두(頭), 곤륜의 륜(崙)을 따서 두륜산(頭崙山)이 되었다.
  •  
                                                                                        대흥사 천불전
                                                                         대흥사 북미륵암 마여여래좌상
                                                                                    대흥사 승탑군
    • 일찍이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흐트러지지 않을 땅[萬年不毁之基]”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토록 하였다. 이후 대흥사는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호국도량으로 변모하였고, 13분의 대종사(大宗師)와 13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흥사는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도 간직하고 있다. 현재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祠)는 서산대사의 구국정신을 기려 국가에서 건립한 호국도량의 한 표상이다. 그리고 13분의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草衣禪師)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대흥사 북원 전경

두륜산의 자연환경

  • 두륜산은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에 위치하며, 해발 703m인 가련봉(迦蓮峰)을 주봉으로 두륜봉(頭輪峰)·고계봉(高髻峰)·노승봉(능허대)·도솔봉(兜率峰)·혈망봉(穴望峰)·향로봉(香爐峰)·연화봉(蓮花峰) 등 8개의 높고 낮은 능선이 연봉으로 이루어져 남해를 굽어보며 우뚝 솟아 있다. 산세는 대흥사 해탈문에서 바라보았을 때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세(臥佛像)를 하고 있는데, 특히 고계봉과 가련봉의 형상이 비로자나불의 대표적인 수인인 지권인(智拳印)을 닮아 있다. 또한 대흥사는 멀리 북쪽의 월출산, 남쪽의 달마산, 동쪽의 천관산, 서쪽의 선은산이 사방을 호위하여 풍수적으로 완벽하기 때문에 별도의 사천왕상이 없다고 전해진다.
  •  
                                                                    해탈문에서 본 와불 형상의 두륜산
  • 두륜산의 자연환경은 난대성 상록활엽수와 온대성 낙엽활엽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중 온대 지역에서 확인되는 소사나무 군락과 온대남부극상식물인 개서어나무 군락이 자생하는 등 생태적 가치가 높은 곳으로 1979년 12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질은 백악기 말에 관입한 화강암이 주요 암봉을 이루고 있어 자연이 빚어낸 독특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두륜봉에서 발원한 계곡은 대흥사를 남원과 북원으로 나누고 장춘길을 따라 흘러, “아홉 굽이 굽이지는 숲길”이라 불리는 구림구곡(九林九曲)을 따라, 울창한 편백숲길을 이루는 등 뛰어난 경관으로 명승으로 지정 되어있다.
  •                                                              구림구곡을 따라 형성된 편백숲길
  •                                                                        반야교와 대흥사계곡
  • 주요수목에는 대흥사 느티나무, 만일암지의 느티나무, 진불암의 붉가시나무 등이 확인된다. 대흥사 삼진교 근처에 있는 연리근(連理根) 느티나무는 특이하게 자라는 수형을 사랑하는 사이에 비유하거나, 길조(吉兆)로 보고 소원이 성취된다고 알려져있다, 수령은 약 500년이고 보호수로 지정되어있다. 만일암터(挽日庵址)에 있는 천년수(千年樹) 느티나무는 북미륵암과 남미륵암을 조성할 때 해를 매달아 두었던 나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실제로는 나이가 더 많은 1,2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그밖에도 진불암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붉가시나무로 추정되는 나무도 있다.
    •                                                               대흥사 연리근 느티나무(보호수)
    •                                                                       진불암 붉가시나무 노거수
    •                                                           왕벚나무 자생지(천연기념물 제173호)
  • 한편, 대흥사 뒤편에는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오래된 2그루의 왕벚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일대는 제주도를 제외한 육지에서는 유일한 왕벚나무 자생지로서 천연기념물 제173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왕벚나무는 우리나라가 원산지로서 자생목은 그 수가 매우 적은 희귀종이므로 생물학적 가치 그대로 식물지리학적 연구가치도 크다. 한때 일본의 나라꽃이라 하여 베어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에는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발견되지 않아, 우리나라의 왕벚나무가 도입되어 자라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흥사의 역사

    • 대흥사의 창건연기를 담고 있는 자료로는 『죽미기(竹迷記)』ㆍ『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ㆍ『북암기(北菴記)』 등이 있다. 창건연대로는 『만일암고기』의 기록을 따른 426년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 창건설, 『죽미기』의 기록을 따른 514년 아도화상(阿道和尙) 창건설, 875년 도선국사(道詵國師) 창건설이 있다.

      그러나 1823년(순조 23)에 간행된 『대둔사지(大芚寺志)』에서는 이들 자료의 수집을 맡은 혜장(慧藏)이 아도화상이 활약한 시기, 도선국사의 탄생연대 등을 근거로 대조했을 때 이들 자료에 제시된 창건설이 근거 없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대흥사의 현재로서는 대흥사의 정확한 창건시점을 알기 어려운 상태이다. 그러나 사찰에 전하는 여러 유물과 역사적 정황으로 보아 그 대략적인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  
    •  
                                                                        대흥사 일제강점기 때 전경
    •                                                                               대흥사 삼층석탑
    • 먼저 응진당 앞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 320호)의 제작연대가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되고 있으며, 1481년(성종 12)에 지어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절의 앞마당에 신암(信菴)ㆍ총은(怱隱)ㆍ성유(性柔) 등 세 분 고승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들 고승의 구체적인 행장은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승려인 점은 밝혀진 바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대흥사는 늦어도 고려 이전인 통일신라 말경에는 창건된 고찰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대흥사는 관련된 자료가 매우 부족한 것을 보았을 때, 대흥사의 위상이 크게 부각된 시점은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이곳에 전해지고 조정과 불교계에서 모두 대흥사를 주목하기 시작했던 조선중기 이후부터이다. 임진왜란 때 승군(僧軍)을 조직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는, 대흥사를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이며 만년동안 파괴됨이 없는 곳[三災不入之處萬年不毁之基]으로서 종통을 귀의케 할 곳[宗統所歸之處]”이라 하여 자신의 의발을 이곳에 전하도록 당부하였다. 이에 1604년(선조 37)에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지게 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대흥사는 조선시대 불교 억압 속에서도 13 대종사와 13 대강사를 중심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으며, 조선 후기 계속되는 불사가 이어졌다
연표

        연대                                         내  용

통일신라 말경 창건
고려시대 북미륵암의 마애여래좌상과 삼층석탑을 조성함
신암, 사은, 성유 등 세 분 고승의 부도를 세움
1604년 서산대사의 의발을 모셔옴
1630년 극현(克玄), 덕호(德浩) 등이 진불암 중건
1647년 서산대사의 비와 부도를 건립함
1665년 심수(心粹)가 대웅보전을 중창함
1675년 융신(融信)이 만일암을 중건함
1683년 진불암을 중건함
1740년 위일(位一)이 고진불암을 중건함
1743년 두원(斗元)이 향적전을 중건함
1761년 청운당을 중건함
1780년 청담(靑潭)이 은선암을 중건함
1788년 계홍(戒洪)ㆍ천묵(天黙) 등이 서산대사를 기리기 위한 사당 건립과 편액을 내려달라는 내용을 조정에 올림
1789년 조정의 명으로 사당을 건립하고 정조가 친필편액 ‘表忠’을 내림
1791년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를 건립함
정능(定能)이 고진불암을 중건함
1797년 전훤(典烜)이 남암을 중건함
1809년 자암(慈菴), 은봉(隱峰) 등이 만일암을 중건함
1811년 천불전 등의 당우가 화재로 소실됨
1812년 용화당을 중건함
1813년 완호(玩虎) 등이 천불전을 중건함
1841년 초의선사가 대광명전(비로전)을 중건함
1899년 서상실(西上室)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북원(北院) 일곽의 건물이 모두 불에 탐
1900년 육봉(六峰)이 대웅전 일대를 중건함
1912년 30본말사법에 의해 인근 44개 사암을 관장하는 본사로 지정됨
1978년 서산대사유물관을 건립함
1993년 사찰명을 대흥사(大興寺)에서 대둔사(大芚寺)로 개명함
2003년 사찰명을 대둔사(大芚寺)에서 대흥사(大興寺)로 다시 개명함
 

 

대흥사의 가람배치

 
* 주요전각 클릭 시 관련설명이 나옵니다.

넓은 산간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표충사,대광명전,박물관)의 3구역으로 나뉘어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남원 뒤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사명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대웅보전

대흥사의 주불전으로 대흥사 가람 북원에 자리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다포양식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공포는 외2출목ㆍ내3출목이며, 포의 형상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외부로 뻗은 쇠서 위에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내부는 모양을 판형으로 만들어 운봉형(雲峰形)으로 단장하였다.

어칸 상부에 자리한 2행 종서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로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이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상부에 이단층의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그 내부에 반자와 운궁형 닫집을 형성한 화려한 불전으로, 대들보 사이에 용두와 칠보문양을 단장하고 있다. 후불벽 앞에는 불단을 두어 목조삼세불(석가-약사-아미타)과 삼불회도를 봉안하였다.

현재의 대웅전은 침계루에 걸린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梁文)」과 「대웅전중건기(大雄殿重建記)」를 통해 1667년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나, 화려한 치장과 치목수법, 조각기법 등으로 보아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 이후 육봉선사의 발원으로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대흥사의 국가유산

 현재 대흥사는 사적 제508호로 지정되어있으며, 두륜산 대흥사 일원 또한 명승 제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정문화재로는 국보 1건, 보물 8건, 시도유형문화재 5건, 문화재자료 3건 등이 있다.

  연번       종목                                                                             명칭                                                               시대

1 국보 제308호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고려시대
2 보물 제301호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 고려시대
3 보물 제320호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
4 보물 제1347호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탑 조선시대 (1647년)
5 보물 제1357호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유물 조선시대
6 보물 제1547호 해남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 조선시대
7 보물  제1552호 해남대흥사영산회괘불탱 조선시대
8 보물 제1807호 해남 대흥사 천불전 조선시대(1813년)
9 보물 제1863호 해남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 조선시대(1612년)
10 사적 제508호 해남 대흥사 -
11 명승 제66호 두륜산 대흥사 일원 -
12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52호 대흥사천불상 조선시대
13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93호 대흥사용화당 조선시대
14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94호 대흥사대광명전 조선시대(1841년)
15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66호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의발 등 유물 일괄 조선시대
16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96호 대흥사관음보살도 조선시대
17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5호 해남대흥사북미륵암동삼층석탑 고려시대
18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6호 해남대흥사만일암지오층석탑 고려시대
19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96호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조선시대
                                                                                                                                                             *2015년 6월 기준
 

 

대흥사의 인물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 1520~1604년)
    •                                                                              서산대사 진영
    • 조선시대 승려이자 승군을 이끌던 대표적인 승군장이다. 법명은 휴정이고, 호가 청허(淸虛)이다. 오랫동안 묘향산(妙香山)에 살았으므로 묘향산의 다른 이름인 서산을 따서 서산대사라고 불렀다.
      평안도 안주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의 도움으로 한양으로 옮겨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5살 때 진사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여행길에 올랐는데 지리산에서 숭인장로(崇仁長老)를 만나 출가하였다. 1540년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을 모시고 계(戒)를 받았다.

      이후 1549년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그러나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두류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두루 다니며 수행하였고, 후학을 만나면 친절히 지도하였다.
  •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결백이 밝혀져 선조의 어명으로 석방되었다. 3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패퇴하고 임금마저 의주로 피난하였는데, 73세의 휴정은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전국의 모든 승려들이 총궐기하여 싸움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서산대사의 문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000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의승군은 휴정의 지휘로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환도한 후에 사명대사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惟政)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서산대사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호를 내렸다.
  • 그 후 1604년(선조 37) 서산대사는 세속 나이 85세, 법랍 67세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였다. 입적한 뒤 21일 동안 방 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웠고, 유훈에 따라 금란가사와 발우 등은 부도와 함께 대흥사에 봉안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대흥사에는 서산대사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인 표충사(表忠祠)가 있으며, 매년 봄 서산대사를 기리기 위한 서산대제를 이어나가고 있다.
초의선사 의순(草衣禪師 意恂, 1786~1866년)
  •                                                                                      초의선사 의순
  • 조선 후기 승려로 법명은 의순이며, 초의는 호이다.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서 오랫동안 머물렀기 때문에 당호는 일지암이다. 대흥사의 13대 종사의 한 사람인 대선사(大禪師)로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 불린다.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일이 인연이 되어 6세 때 나주 운흥사(雲興寺)에서 출가했다. 그 후 각지로 다니며 수행을 하다가 대흥사 10대 강사인 완호윤우(琓虎 尹佑)의 법을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얻었다.

    초의선사는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을 섭렵하며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다. 특히 김정희와는 매우 가깝게 지내 귀양살이하는 김정희를 만나러 제주도를 다녀오기도 했을 정도였다.

    초의선사는 현실의 일상생활과 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상을 펼쳤는데, 특히 그는 차(茶)와 선(禪)을 하나로 보아 자신이 지은 책 『동다송(東茶頌)』에서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표현을 하였다.

    초의선사는 중년 이후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여년을 은거하며 차와 더불어 수행에 전념하다가 속세나이 81세로 입적했다. 현재 입적일인 음력 8월 2일에 맞춰 매년 초의선사의 다도정신을 기리는 ‘초의문화제’를 시행하고 있다.
※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대흥사 홈페이지
 
 

대흥사의 설화 

대흥사 미륵불 조성설화
    •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                                                          해를 매달아 놓았다는 만일암지 천년수
    • 북미륵암과 남미륵암에는 미륵불의 조성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구전에 따르면 옛날에 하늘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천동과 천녀가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다시 속죄를 하고 하늘에 올라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바위에다 하루 만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하루에 불상을 조각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해가 지지 못하도록 천년수 나무에다 해를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천동은 남쪽 바위에서 불상을 조각하고, 천녀는 북쪽 바위에서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천녀는 앉은 모습의 좌상미륵불을 바위에 조각했기 때문에 서 있는 모습을 조각하는 천동에 비해 먼저 불상 조각을 마칠 수 있었다. 조각을 완성하자 천녀는 먼저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생겨, 해를 매달아 놓은 끈을 가위로 잘라버렸다. 끈이 잘린 해가 서산 너머로 떨어지자 천동은 더 이상 불상을 조각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하늘에도 다시 올라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따라서 현재 북미륵암의 미륵불은 완성된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음각으로 희미하게 남아 있는 남미륵암 터는 빈 전각만 남아 있다.
대흥사 천불전 천불조성설화
  • 완호(玩虎)는 초의선사의 스승이었는데, 1813년(순조13)에 천불전을 중건한 뒤 경주의 옥석(玉石)으로 천불을 조각하게 했다. 열 명의 조각사가 6년에 걸쳐 천불을 완성하자, 모두 3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울산과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흥사를 향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 장기현(長岐縣)까지 밀려가게 되었다.

    바닷가에서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그 속에서 300여 개의 옥불(玉佛)을 발견하고, 서둘러 이를 봉안할 절을 짓기로 의논하였다. 그러나 어느날 밤 이 불상들이 그들의 꿈에 나타나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현몽하자, 하는 수 없이 해남으로 돌려 보내면서 불상 밑바닥에 모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한다.

    천불전에 봉안된 옥불상은 근래에도 그 영험함을 보인 바 있다.
  •                                                                               천불전 내부전경
  • 인근지역 신도들이 꿈속에 불상들이 나타나 “가사를 입혀 달라”는 현몽을 여럿이서 꾸게 되었는데, 그 뒤부터 4년마다 한번씩 가사를 갈아입히고 있다. 따라서 이때 갈아입은 헌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는 속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

대흥사 안내

  • 주소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 연락처061-534-5502
  • 홈페이지http://www.daeheungsa.co.kr
오시는길

 

  • 경부고속도로 이용광주 비아톨게이트 → 좌측 나주.목포방면 → 나주 → 해남.영암.완도 방면 → 영산포 → 나주-영암도로 → 해남방면 → 해남
  • 서해안 고속도로 이용목포IC → 2번 국도 → 13번 국도(해남 방향) → 806번 지방도로(대흥사 방향)
  • 대중교통 이용해남터미널 → 대흥사, 절 입구 매표소 종점까지 운행
  • 입장료
    개인단체
    어른 3,000 2,500
    청소년, 군인 1,500 1,200
    어린이 1,000 800
  • 주차료1일 1대 소형, 중형:2000원, 대형 : 3000원

출처: http://www.koreansansa.net/ktp/sansa/sansa_020201.do

 

대흥사 ㅣ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ㅣ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ㅣ 세계유산등재 추진위원

 

www.koreansans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