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子曰、學而時[1]習之[2]、不亦[3]說[4]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人不知而不慍[5]、不亦君子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선생께서 말하시기를, 배우고 때에 맞춰 실천하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부터 오고 있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6]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쌓아두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논어 학이(學而)편 1장
2. 논어의 여러 버전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당연히 논어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논어의 원본이 뭔지는 알기가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분서갱유의 진짜 모습을 고려하면 그 때문에 원본을 알 수 없다는 말은 근거가 희박하다.[8] 어찌되었든 전한대에 이르러 논어 같은 고전이 말하고자 하는 원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연구하는 학풍이 훈고학이란 형태로 나타났다.
이미 한나라 대에 논어의 세 가지 판본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분서갱유 설은 설득력이 적다. 먼저 공자가 일생의 시작과 끝을 보낸 고국 노나라 옛 땅에 전해지던 텍스트(노논어)와 제나라 땅에서 별도로 전해지던 텍스트(제논어), 그리고 한경제 때 곡부의 공자 생가를 허물다 벽에서 나온 텍스트(고논어)이다. 현재 전해져 우리가 보는 논어는 전한의 장우(張禹)가 노논어를 중심으로 하여 장구(章句)를 나누고, 제논어의 내용을 첨가한 통합본이다.[9]
하안은 "제논어는 문왕(問王), 지도(知道)편이 있으니 노논어보다 2편이 많다."라고 했는데 2010년대에 해혼후묘에서 지도(知道)편으로 추정되는 죽간이 발견되었다. # '논어'라는 명칭이 붙은 때는 한나라 경제, 무제 연간이고,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듯한데, 3-4세기 한성백제시대 목간에 5편인 공야장(公冶長) 편의 주요 내용이 있다.
논어에 주석을 다는 작업도 이때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져 공안국, 마융, 정현 등이 주석을 달았으나 지금 전해지지는 않고 위나라(魏)의 하안이 이를 바탕으로 《논어집해》(論語集解)를 펴냈다. 이 《논어집해》를 저본으로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황간이 《논어의소》(論語義疏)를, 송나라 때에는 형병이 《논어정의》(論語正義)를 저술하였는데 모두 《논어집해》의 재해석이다.
형병의 《논어정의》는 북송대에 《논어집해》와 함께 십삼경주소에 포함되었다.[10] 성리학이 집대성되기 전까지 가장 많이 읽혔던 것이 바로 이 《논어주소》(論語注疏)이다. 《논어의소》는 현학적 경향이 있음이 특이하다.[11] 형병이 단 주석은 훈고를 중심으로 하는 주석학의 경향에서 의리를 밝히려는 경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향이 있다. 여기까지를 일반적으로 고주(古註)라고 한다.[12] 이후 남송의 주자가 그동안 축적된 연구성과를 집약해 《논어집주》(論語集註)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을 신주(新註)라고 한다. 여기에는 《논어주소》의 설은 물론, 정호(程顥), 정이(程頤), 사량좌(謝良佐), 장식(張栻), 범조우(范祖禹) 등 송대 유학자의 설이 다양하게 망라된 데다가 원대 이후 성리학이 관학의 지위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논어집주》는 가장 보편적으로 읽히는 논어 주석서로 자리매김하였다.[13]
이후 청대에는 고증학이 발달하였고, 이러한 고증학적 성과들이 경전 독해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유보남의 《논어정의》(論語正義)가 그러한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주석이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정수덕의 《논어집석》(論語集釋), 양수달의 《논어소증》(論語疏證), 양백준의 《논어역주》(論語譯注) 역시 중요한 주석으로 꼽힌다.
한국의 경우 정약용이 일본 에도 막부의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같은 인물까지 참고하여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14]를 썼다. 다만 조선시대 인물들의 사고를 추적하는 경우에는 주희의 《논어집주》(論語集註)를 주로 읽는다. 조선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주희의 성리학에 입각해 사고했기 때문이다. [15]
이상의 인물 및 저작들은 서로 살았던 시기가 심하면 1500년은 훌쩍 차이나며 학문관도 그만큼 상이하므로, 같은 논어임에도 결코 비슷한 종류의 저작이라고 할 수 없다.
3. 내용과 특징
예를 들어 공자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16]라고 한마디 했는데,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 말을 했는지는 없고 그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는 한 마디만 남아있다. 말 그대로 상황은 하나도 없고 말씀만 남아 있으니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 물론 이 경우는 이미 널리 알려진 말이지만, 역시 정확한 맥락이 어땠는지는 영영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인, 예, 충 등의 의미가 후대 유교에서 변화, 각색된 경우가 있다. 공자가 말하는 인, 예, 충 등의 의미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인, 예, 충의 의미가 상충되기도 하므로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명확하게 와닿지를 않는다. 하기사 2천 년도 더 전의 책을 글자만 보고 바로 이해가 간다면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아무 것도 없다는 소리니 말이 될 리가 없다. 더구나 한문 특유의 중의적인 의미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예를 들어 학이편에 나오는 증자의 말 중 '전불습호(傳不習乎)'라는 문장은 크게 아래와 같은 4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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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받은 것을 익히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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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전하고도 스스로 익히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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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傳)을 익히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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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익히지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고 있는가?
또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 중 '색난(色難)'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대로 해석하면 '안색이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해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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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늘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부모를 섬기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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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부모의 얼굴빛을 살피고 그에 맞게 대처하기 어렵다.
저 긴 문장을 두 글자로 확 줄여버리니 해석하기 어려울 수밖에. 다만 조선시대로 한정하면 사실상 주자의 주석이 절대기준이었기 때문에 주자의 주석을 보면서 공부한다면 크게 혼란스러운 점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중의성은 고전 한문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과 함께 글의 해석하기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에는 책을 만들기가 지극히 어려웠다. 간독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책을 만드는 일은 굉장히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때문에 길이를 줄여, '꼭 필요한 공자 어록'만 요점 노트 비슷하게 만들고 이를 모조리 암송한 후, 구체적인 맥락과 해석은 스승에게 구두로 전수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자는 남아도 말은 흩어져 사람마다 경전의 풀이가 달라졌다. 후대에 주석으로 남은 부분을 제외하면 해석 부분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해석을 구전의 영역에 둔 것이 정확성을 훼손하는 것만은 아니다. 일정한 체계와 연속성이 있다면 오히려 문자 기록만 남아있을 때보다 구전이 더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그 유명한 사해문서이다. 사해문서는 구전으로 이어져온 경전이 오류투성이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천여 년이 지나도록 거의 비슷하게 보존한 사례이다.
각설하고, 그 외에도 《논어》는 여러 단문의 모음집이라 앞 내용과 뒷내용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의 몇몇 구절은, 배경지식이 없을 시 곡해하거나 아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비슷한 예로 《맹자》 양혜왕 편을 들 수 있다."'처음으로 나무 인형을 만들어 순장에 사용한 사람은 틀림없이 자손이 끊어져 후대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신 적이 있으니"[17]라는 문구는 순장에 대한 공자의 적개심을 알지 못한다면 이해가 힘든 부분이다.
그런 만큼, 하나의 일관된 사상하에 전개된 노자나 장자, 중용, 맹자보다 훨씬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들은 원전 하나만 파도 이해가 되지만, 《논어》는 획일화된 사상이 직접 드러나지 않는 명언 모음집을 읽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문 해석 면에서는 일부 난해한 비유들을 제외하면 맹자가 더 쉽고 주제의식도 명확하다. 논어는 책 전체를 꿰뚫는 주제의식을 찾기가 대단히 어려운 경전이다.
이것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논어를 읽으면 "그냥 착하게 살라는 말 아니야?"로 오해하기가 매우 쉽다. 사실 이건 유교에 대한 흔한 오해이기도 하다. 물론 논어는 책 전체를 꿰뚫는 일정한 사상하에 쓰여진 책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완독 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게 된다.
4. 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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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론(上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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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學而) - 논어의 첫 편. 내용이 배우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근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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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爲政) - 주로 올바르게 정치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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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일(八佾) - 편의 제목인 '팔일'은 주나라 천자가 제사를 지낼 적에 한 줄에 8명씩 8줄, 총 64명이 서서 추는 춤이다. 이 춤을 노나라의 일개 대부[19]인 계손씨가 자기 집안 제사에서 추게 하는 것을 보고 공자가 예절이 무너지고 법도가 무너지는 춘추시대 말기의 사회상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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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里仁) - 선비가 살아가면서 처신해야 할 몸가짐을 설명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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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야장(公冶長) - 공야장은 공자의 제자이자 사위가 되는 인물이다. 옛날과 당시의 유명 인사들에 대한 평가가 주로 실렸다. 주자는 이 편을 자공의 제자들이 지었으리라 추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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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야(雍也) - 전반부는 공야장편과 비슷하게 인물평가. 후반부에는 주로 올바로 아는 것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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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述而) - 공자가 남을 가르치는 내용과 평소 행실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편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구절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은 이후 동양 역사학에서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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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泰伯) - 공자가 구상한 이상적인 정치상을 설명하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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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子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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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당(鄕黨) - 공자의 공사생활에서 드러난 행동거지에 대하여 기록한 편. 공자의 말보다는 공자의 평소 행실을 더 많이 설명한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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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여담
한국어 번역은 워낙 다종다양하며 동양철학 전공자들은 '괜찮은 논어 번역본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난감해한다. 번역본 종류가 워낙 많거니와 동양철학 전공자 수준이라면 번역본이 아닌 원문으로 논어를 읽기 때문. 따라서 동양철학 전공자에게 추천을 부탁해 봤자 '서점에서 죽 훑어 봐서 자신에게 적당하다고 느껴지는 것을 고르라.' 하는 판에 박힌 답변만 듣게 될 것이다.
한문 초심자들이 논어로 공부를 시작하기도 한다. 논어와 맹자 어느 쪽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은지는 일단 맹자가 문장이 매끄럽다는 이유로 선호도가 조금 높기는 하지만 개인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어차피 초심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고 그러면 단문 위주로 구성되고 중의적 해석이 많아 한문 읽는 맛이 있는 논어를 먼저 읽어도 된다는 쪽도 있다. 이이의 《격몽요결》은 맹자보다 논어를 먼저 읽는 쪽을 추천했다.
또한 내용을 보면 딱딱한 유교 경전의 이미지에 비해 생각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제법 있다. 공자가 제자들을 평가하면서 솔직하게 심정을 나타내는 모습이나, 제자들이 공자에게 이러저러하게 질문하고 따지자 공자도 이러저러하게 반박하고 설명하는 모습 등, 공자와 그 제자들 역시 평범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자로에 대한 애정 어린 갈굼(...)은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공자가 혹독하게 평가하는 제자 중에서도 유독 비난당하는 제자가 있다. 그는 바로 재여(宰予). 3년상을 하지 않아도 제 맘은 편안한뎁쇼? 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책 안 보고 자다가 욕을 먹기도 하고(...)[22] 자로의 경우처럼 부족한 제자라도 나름의 장점을 인정하고 꾸짖으면서 이끌어주려는 공자가 유독 독한(...) 모습을 보이는 제자. 자로 문서에서도 확인 가능하지만, 자로를 꾸짖는 건 어디까지나 교육이 목적이다. 그런데 재여는 인(仁)하지 않다거나, 조각도 못 하는 썩은 나무토막이라며 화를 낸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재여가 사상적으로 공자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것이 아닌가라는 말도 있고, 훗날 재여가 제나라에서 반역 사건에 참가했다가 삼족이 몰살당한 뒤, 공문십철이라고까지 불린 그와의 연관성을 최대한 부정하고자 유가 계열에서 재여를 깎아내리는 말을 많이 퍼뜨렸다는 말도 있다. 이래저래 흥미로운 인물.
공자가 사람을 구타한 기록도 있다. 《예기》〈단궁 하〉를 보면, 공자의 어린 시절 같은 마을 사람인 원양(原壤)은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슬퍼하지 않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등[23] 얽매이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기에 도교 사상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으나 공자의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논어》〈헌문〉에 이르기를, 어느 날 원양이 공자를 찾아갔을 때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거만하게 굴자 공자가 "어려서는 공손하지 않았고, 나이들어서는 일컬을 바도 없으면서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네놈이 바로 도적놈이다!" 라면서 원양의 정강이를 지팡이로 때렸다는 기록이 있다.
공자가 대노했다는 해석도 있으나 실제로 대노했다는 기록은 없이 위의 언행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때문에 김용옥은 이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여, 사실 이것은 공자의 소탈한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들 중 하나로, 못난 친구를 농담조로 힐난하며 투닥대는 흐뭇한 모습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기사가 고전 한문으로 기록되고, 공자가 이제껏 기계적인 성인으로만 해석되어서 다만 준엄한 꾸짖음으로 여겨져 왔지만, 실제로는 "짜식, 왜 사냐?"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 사실 원양은 단순한 공자의 동향인이 아니라 정말로 공자의 죽마고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노래를 불렀다는 기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면 이렇다: 원양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공자가 그 겉 널 짜는 일을 도왔다. 헌데 원양이 목재위로 올라가 말하기를 "내 어머니의 상을 당한지도 오래되었고, 감정을 음률에 맡기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다" 하며 노래하기를 "너구리 머리 털 반드러움이여, 여인 손 잡은 듯 보드랍네!(나뭇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하였다. 공자가 그냥 못 들은 체 하였는데, 제자들이 "선생님께서는 저 사람과 사귀기를 그만두지 않으시려는지요?" 하였다. 이에 공자가 답하기를 " 구(丘: 공자의 이름)는 들었노라, 친우(親友), 그 친(親)을 잃지 말 것이며, 고우(故友), 그 고(故)를 잃지 말 것이라!" 하였다. 이 기사를 감안할 때 김용옥의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논어를 공자의 저작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공자 본인은 단 한 권의 저술도 쓴 적이 없다. 잘 알려진 춘추나 시경 등도 술이부작(述而不作), '그대로 서술하되 창작하지는 않는다' 의 원칙하에 편집하기만 했을 뿐이다. 혹자는 공자가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편집, 즉 술이는 술이인데 완전히 부작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공자 본인의 편집 철학은 술이부작이라고 한다.[24][25]
성균관대학교의 졸업 필수 과목이다.
역대 중국, 한국의 왕조들과 일본의 천황가, 쇼군가, 다이묘들도 배우는 학문 중 하나였다. 근대 일본의 기업가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논어와 논어의 가르침을 살면서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5. 관련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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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리사의(見利思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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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유불급(過猶不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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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력난신(怪力亂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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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언영색(巧言令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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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복례(克己復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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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사표음(簞食瓢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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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道聽塗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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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지십(聞一知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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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신언(敏事愼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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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분망식(發憤忘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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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하문(不恥下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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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신성인(殺身成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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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송백(歲寒松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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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부작(述而不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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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추원(愼終追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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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지신(溫故知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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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산요수(樂山樂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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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속부달(欲速不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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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지학(爲己之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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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보원(以直報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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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중도원(任重道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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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계우도(割鷄牛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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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생가외(後生可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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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연이 공자에게 인을 물었다 :세 원숭이의 모티브도 여기서 나왔다.
6. 외부 링크
7. 관련 문서


子曰、學而時[1]習之[2]、不亦[3]說[4]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人不知而不慍[5]、不亦君子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선생께서 말하시기를, 배우고 때에 맞춰 실천하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부터 오고 있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6]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쌓아두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논어 학이(學而)편 1장
2. 논어의 여러 버전[편집]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당연히 논어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논어의 원본이 뭔지는 알기가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분서갱유의 진짜 모습을 고려하면 그 때문에 원본을 알 수 없다는 말은 근거가 희박하다.[8] 어찌되었든 전한대에 이르러 논어 같은 고전이 말하고자 하는 원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연구하는 학풍이 훈고학이란 형태로 나타났다.
이미 한나라 대에 논어의 세 가지 판본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분서갱유 설은 설득력이 적다. 먼저 공자가 일생의 시작과 끝을 보낸 고국 노나라 옛 땅에 전해지던 텍스트(노논어)와 제나라 땅에서 별도로 전해지던 텍스트(제논어), 그리고 한경제 때 곡부의 공자 생가를 허물다 벽에서 나온 텍스트(고논어)이다. 현재 전해져 우리가 보는 논어는 전한의 장우(張禹)가 노논어를 중심으로 하여 장구(章句)를 나누고, 제논어의 내용을 첨가한 통합본이다.[9]
하안은 "제논어는 문왕(問王), 지도(知道)편이 있으니 노논어보다 2편이 많다."라고 했는데 2010년대에 해혼후묘에서 지도(知道)편으로 추정되는 죽간이 발견되었다. # '논어'라는 명칭이 붙은 때는 한나라 경제, 무제 연간이고,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듯한데, 3-4세기 한성백제시대 목간에 5편인 공야장(公冶長) 편의 주요 내용이 있다.
논어에 주석을 다는 작업도 이때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져 공안국, 마융, 정현 등이 주석을 달았으나 지금 전해지지는 않고 위나라(魏)의 하안이 이를 바탕으로 《논어집해》(論語集解)를 펴냈다. 이 《논어집해》를 저본으로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황간이 《논어의소》(論語義疏)를, 송나라 때에는 형병이 《논어정의》(論語正義)를 저술하였는데 모두 《논어집해》의 재해석이다.
형병의 《논어정의》는 북송대에 《논어집해》와 함께 십삼경주소에 포함되었다.[10] 성리학이 집대성되기 전까지 가장 많이 읽혔던 것이 바로 이 《논어주소》(論語注疏)이다. 《논어의소》는 현학적 경향이 있음이 특이하다.[11] 형병이 단 주석은 훈고를 중심으로 하는 주석학의 경향에서 의리를 밝히려는 경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향이 있다. 여기까지를 일반적으로 고주(古註)라고 한다.[12] 이후 남송의 주자가 그동안 축적된 연구성과를 집약해 《논어집주》(論語集註)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을 신주(新註)라고 한다. 여기에는 《논어주소》의 설은 물론, 정호(程顥), 정이(程頤), 사량좌(謝良佐), 장식(張栻), 범조우(范祖禹) 등 송대 유학자의 설이 다양하게 망라된 데다가 원대 이후 성리학이 관학의 지위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논어집주》는 가장 보편적으로 읽히는 논어 주석서로 자리매김하였다.[13]
이후 청대에는 고증학이 발달하였고, 이러한 고증학적 성과들이 경전 독해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유보남의 《논어정의》(論語正義)가 그러한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주석이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정수덕의 《논어집석》(論語集釋), 양수달의 《논어소증》(論語疏證), 양백준의 《논어역주》(論語譯注) 역시 중요한 주석으로 꼽힌다.
한국의 경우 정약용이 일본 에도 막부의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같은 인물까지 참고하여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14]를 썼다. 다만 조선시대 인물들의 사고를 추적하는 경우에는 주희의 《논어집주》(論語集註)를 주로 읽는다. 조선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주희의 성리학에 입각해 사고했기 때문이다. [15]
이상의 인물 및 저작들은 서로 살았던 시기가 심하면 1500년은 훌쩍 차이나며 학문관도 그만큼 상이하므로, 같은 논어임에도 결코 비슷한 종류의 저작이라고 할 수 없다.
3. 내용과 특징[편집]
예를 들어 공자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16]라고 한마디 했는데,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 말을 했는지는 없고 그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는 한 마디만 남아있다. 말 그대로 상황은 하나도 없고 말씀만 남아 있으니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 물론 이 경우는 이미 널리 알려진 말이지만, 역시 정확한 맥락이 어땠는지는 영영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인, 예, 충 등의 의미가 후대 유교에서 변화, 각색된 경우가 있다. 공자가 말하는 인, 예, 충 등의 의미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인, 예, 충의 의미가 상충되기도 하므로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명확하게 와닿지를 않는다. 하기사 2천 년도 더 전의 책을 글자만 보고 바로 이해가 간다면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아무 것도 없다는 소리니 말이 될 리가 없다. 더구나 한문 특유의 중의적인 의미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예를 들어 학이편에 나오는 증자의 말 중 '전불습호(傳不習乎)'라는 문장은 크게 아래와 같은 4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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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받은 것을 익히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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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전하고도 스스로 익히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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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傳)을 익히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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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익히지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고 있는가?
또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 중 '색난(色難)'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대로 해석하면 '안색이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해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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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늘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부모를 섬기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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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부모의 얼굴빛을 살피고 그에 맞게 대처하기 어렵다.
저 긴 문장을 두 글자로 확 줄여버리니 해석하기 어려울 수밖에. 다만 조선시대로 한정하면 사실상 주자의 주석이 절대기준이었기 때문에 주자의 주석을 보면서 공부한다면 크게 혼란스러운 점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중의성은 고전 한문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과 함께 글의 해석하기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에는 책을 만들기가 지극히 어려웠다. 간독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책을 만드는 일은 굉장히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때문에 길이를 줄여, '꼭 필요한 공자 어록'만 요점 노트 비슷하게 만들고 이를 모조리 암송한 후, 구체적인 맥락과 해석은 스승에게 구두로 전수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자는 남아도 말은 흩어져 사람마다 경전의 풀이가 달라졌다. 후대에 주석으로 남은 부분을 제외하면 해석 부분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해석을 구전의 영역에 둔 것이 정확성을 훼손하는 것만은 아니다. 일정한 체계와 연속성이 있다면 오히려 문자 기록만 남아있을 때보다 구전이 더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그 유명한 사해문서이다. 사해문서는 구전으로 이어져온 경전이 오류투성이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천여 년이 지나도록 거의 비슷하게 보존한 사례이다.
각설하고, 그 외에도 《논어》는 여러 단문의 모음집이라 앞 내용과 뒷내용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의 몇몇 구절은, 배경지식이 없을 시 곡해하거나 아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비슷한 예로 《맹자》 양혜왕 편을 들 수 있다."'처음으로 나무 인형을 만들어 순장에 사용한 사람은 틀림없이 자손이 끊어져 후대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신 적이 있으니"[17]라는 문구는 순장에 대한 공자의 적개심을 알지 못한다면 이해가 힘든 부분이다.
그런 만큼, 하나의 일관된 사상하에 전개된 노자나 장자, 중용, 맹자보다 훨씬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들은 원전 하나만 파도 이해가 되지만, 《논어》는 획일화된 사상이 직접 드러나지 않는 명언 모음집을 읽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문 해석 면에서는 일부 난해한 비유들을 제외하면 맹자가 더 쉽고 주제의식도 명확하다. 논어는 책 전체를 꿰뚫는 주제의식을 찾기가 대단히 어려운 경전이다.
이것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논어를 읽으면 "그냥 착하게 살라는 말 아니야?"로 오해하기가 매우 쉽다. 사실 이건 유교에 대한 흔한 오해이기도 하다. 물론 논어는 책 전체를 꿰뚫는 일정한 사상하에 쓰여진 책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완독 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게 된다.
4. 편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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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론(上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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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學而) - 논어의 첫 편. 내용이 배우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근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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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爲政) - 주로 올바르게 정치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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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일(八佾) - 편의 제목인 '팔일'은 주나라 천자가 제사를 지낼 적에 한 줄에 8명씩 8줄, 총 64명이 서서 추는 춤이다. 이 춤을 노나라의 일개 대부[19]인 계손씨가 자기 집안 제사에서 추게 하는 것을 보고 공자가 예절이 무너지고 법도가 무너지는 춘추시대 말기의 사회상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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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里仁) - 선비가 살아가면서 처신해야 할 몸가짐을 설명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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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야장(公冶長) - 공야장은 공자의 제자이자 사위가 되는 인물이다. 옛날과 당시의 유명 인사들에 대한 평가가 주로 실렸다. 주자는 이 편을 자공의 제자들이 지었으리라 추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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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야(雍也) - 전반부는 공야장편과 비슷하게 인물평가. 후반부에는 주로 올바로 아는 것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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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述而) - 공자가 남을 가르치는 내용과 평소 행실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편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구절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은 이후 동양 역사학에서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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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泰伯) - 공자가 구상한 이상적인 정치상을 설명하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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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子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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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당(鄕黨) - 공자의 공사생활에서 드러난 행동거지에 대하여 기록한 편. 공자의 말보다는 공자의 평소 행실을 더 많이 설명한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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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여담[편집]
한국어 번역은 워낙 다종다양하며 동양철학 전공자들은 '괜찮은 논어 번역본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난감해한다. 번역본 종류가 워낙 많거니와 동양철학 전공자 수준이라면 번역본이 아닌 원문으로 논어를 읽기 때문. 따라서 동양철학 전공자에게 추천을 부탁해 봤자 '서점에서 죽 훑어 봐서 자신에게 적당하다고 느껴지는 것을 고르라.' 하는 판에 박힌 답변만 듣게 될 것이다.
한문 초심자들이 논어로 공부를 시작하기도 한다. 논어와 맹자 어느 쪽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은지는 일단 맹자가 문장이 매끄럽다는 이유로 선호도가 조금 높기는 하지만 개인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어차피 초심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고 그러면 단문 위주로 구성되고 중의적 해석이 많아 한문 읽는 맛이 있는 논어를 먼저 읽어도 된다는 쪽도 있다. 이이의 《격몽요결》은 맹자보다 논어를 먼저 읽는 쪽을 추천했다.
또한 내용을 보면 딱딱한 유교 경전의 이미지에 비해 생각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제법 있다. 공자가 제자들을 평가하면서 솔직하게 심정을 나타내는 모습이나, 제자들이 공자에게 이러저러하게 질문하고 따지자 공자도 이러저러하게 반박하고 설명하는 모습 등, 공자와 그 제자들 역시 평범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자로에 대한 애정 어린 갈굼(...)은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공자가 혹독하게 평가하는 제자 중에서도 유독 비난당하는 제자가 있다. 그는 바로 재여(宰予). 3년상을 하지 않아도 제 맘은 편안한뎁쇼? 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책 안 보고 자다가 욕을 먹기도 하고(...)[22] 자로의 경우처럼 부족한 제자라도 나름의 장점을 인정하고 꾸짖으면서 이끌어주려는 공자가 유독 독한(...) 모습을 보이는 제자. 자로 문서에서도 확인 가능하지만, 자로를 꾸짖는 건 어디까지나 교육이 목적이다. 그런데 재여는 인(仁)하지 않다거나, 조각도 못 하는 썩은 나무토막이라며 화를 낸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재여가 사상적으로 공자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것이 아닌가라는 말도 있고, 훗날 재여가 제나라에서 반역 사건에 참가했다가 삼족이 몰살당한 뒤, 공문십철이라고까지 불린 그와의 연관성을 최대한 부정하고자 유가 계열에서 재여를 깎아내리는 말을 많이 퍼뜨렸다는 말도 있다. 이래저래 흥미로운 인물.
공자가 사람을 구타한 기록도 있다. 《예기》〈단궁 하〉를 보면, 공자의 어린 시절 같은 마을 사람인 원양(原壤)은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슬퍼하지 않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등[23] 얽매이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기에 도교 사상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으나 공자의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논어》〈헌문〉에 이르기를, 어느 날 원양이 공자를 찾아갔을 때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거만하게 굴자 공자가 "어려서는 공손하지 않았고, 나이들어서는 일컬을 바도 없으면서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네놈이 바로 도적놈이다!" 라면서 원양의 정강이를 지팡이로 때렸다는 기록이 있다
공자가 대노했다는 해석도 있으나 실제로 대노했다는 기록은 없이 위의 언행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때문에 김용옥은 이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여, 사실 이것은 공자의 소탈한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들 중 하나로, 못난 친구를 농담조로 힐난하며 투닥대는 흐뭇한 모습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기사가 고전 한문으로 기록되고, 공자가 이제껏 기계적인 성인으로만 해석되어서 다만 준엄한 꾸짖음으로 여겨져 왔지만, 실제로는 "짜식, 왜 사냐?"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 사실 원양은 단순한 공자의 동향인이 아니라 정말로 공자의 죽마고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노래를 불렀다는 기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면 이렇다: 원양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공자가 그 겉 널 짜는 일을 도왔다. 헌데 원양이 목재위로 올라가 말하기를 "내 어머니의 상을 당한지도 오래되었고, 감정을 음률에 맡기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다" 하며 노래하기를 "너구리 머리 털 반드러움이여, 여인 손 잡은 듯 보드랍네!(나뭇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하였다. 공자가 그냥 못 들은 체 하였는데, 제자들이 "선생님께서는 저 사람과 사귀기를 그만두지 않으시려는지요?" 하였다. 이에 공자가 답하기를 " 구(丘: 공자의 이름)는 들었노라, 친우(親友), 그 친(親)을 잃지 말 것이며, 고우(故友), 그 고(故)를 잃지 말 것이라!" 하였다. 이 기사를 감안할 때 김용옥의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논어를 공자의 저작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공자 본인은 단 한 권의 저술도 쓴 적이 없다. 잘 알려진 춘추나 시경 등도 술이부작(述而不作), '그대로 서술하되 창작하지는 않는다' 의 원칙하에 편집하기만 했을 뿐이다. 혹자는 공자가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편집, 즉 술이는 술이인데 완전히 부작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공자 본인의 편집 철학은 술이부작이라고 한다.[24][25]
성균관대학교의 졸업 필수 과목이다.
역대 중국, 한국의 왕조들과 일본의 천황가, 쇼군가, 다이묘들도 배우는 학문 중 하나였다. 근대 일본의 기업가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논어와 논어의 가르침을 살면서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5. 관련 고사성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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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리사의(見利思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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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유불급(過猶不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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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력난신(怪力亂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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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언영색(巧言令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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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복례(克己復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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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사표음(簞食瓢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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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道聽塗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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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지십(聞一知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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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신언(敏事愼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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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분망식(發憤忘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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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하문(不恥下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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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신성인(殺身成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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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송백(歲寒松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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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부작(述而不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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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추원(愼終追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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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지신(溫故知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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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산요수(樂山樂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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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속부달(欲速不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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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지학(爲己之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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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보원(以直報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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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중도원(任重道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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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계우도(割鷄牛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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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생가외(後生可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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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연이 공자에게 인을 물었다:세 원숭이의 모티브도 여기서 나왔다.
6. 외부 링크[편집]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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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子曰、學而時[1]習之[2]、不亦[3]說[4]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人不知而不慍[5]、不亦君子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선생께서 말하시기를, 배우고 때에 맞춰 실천하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부터 오고 있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6]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쌓아두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논어 학이(學而)편 1장
2. 논어의 여러 버전[편집]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당연히 논어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논어의 원본이 뭔지는 알기가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분서갱유의 진짜 모습을 고려하면 그 때문에 원본을 알 수 없다는 말은 근거가 희박하다.[8] 어찌되었든 전한대에 이르러 논어 같은 고전이 말하고자 하는 원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연구하는 학풍이 훈고학이란 형태로 나타났다.
이미 한나라 대에 논어의 세 가지 판본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분서갱유 설은 설득력이 적다. 먼저 공자가 일생의 시작과 끝을 보낸 고국 노나라 옛 땅에 전해지던 텍스트(노논어)와 제나라 땅에서 별도로 전해지던 텍스트(제논어), 그리고 한경제 때 곡부의 공자 생가를 허물다 벽에서 나온 텍스트(고논어)이다. 현재 전해져 우리가 보는 논어는 전한의 장우(張禹)가 노논어를 중심으로 하여 장구(章句)를 나누고, 제논어의 내용을 첨가한 통합본이다.[9]
하안은 "제논어는 문왕(問王), 지도(知道)편이 있으니 노논어보다 2편이 많다."라고 했는데 2010년대에 해혼후묘에서 지도(知道)편으로 추정되는 죽간이 발견되었다. # '논어'라는 명칭이 붙은 때는 한나라 경제, 무제 연간이고,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듯한데, 3-4세기 한성백제시대 목간에 5편인 공야장(公冶長) 편의 주요 내용이 있다.
논어에 주석을 다는 작업도 이때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져 공안국, 마융, 정현 등이 주석을 달았으나 지금 전해지지는 않고 위나라(魏)의 하안이 이를 바탕으로 《논어집해》(論語集解)를 펴냈다. 이 《논어집해》를 저본으로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황간이 《논어의소》(論語義疏)를, 송나라 때에는 형병이 《논어정의》(論語正義)를 저술하였는데 모두 《논어집해》의 재해석이다.
형병의 《논어정의》는 북송대에 《논어집해》와 함께 십삼경주소에 포함되었다.[10] 성리학이 집대성되기 전까지 가장 많이 읽혔던 것이 바로 이 《논어주소》(論語注疏)이다. 《논어의소》는 현학적 경향이 있음이 특이하다.[11] 형병이 단 주석은 훈고를 중심으로 하는 주석학의 경향에서 의리를 밝히려는 경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향이 있다. 여기까지를 일반적으로 고주(古註)라고 한다.[12] 이후 남송의 주자가 그동안 축적된 연구성과를 집약해 《논어집주》(論語集註)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을 신주(新註)라고 한다. 여기에는 《논어주소》의 설은 물론, 정호(程顥), 정이(程頤), 사량좌(謝良佐), 장식(張栻), 범조우(范祖禹) 등 송대 유학자의 설이 다양하게 망라된 데다가 원대 이후 성리학이 관학의 지위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논어집주》는 가장 보편적으로 읽히는 논어 주석서로 자리매김하였다.[13]
이후 청대에는 고증학이 발달하였고, 이러한 고증학적 성과들이 경전 독해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유보남의 《논어정의》(論語正義)가 그러한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주석이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정수덕의 《논어집석》(論語集釋), 양수달의 《논어소증》(論語疏證), 양백준의 《논어역주》(論語譯注) 역시 중요한 주석으로 꼽힌다.
한국의 경우 정약용이 일본 에도 막부의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같은 인물까지 참고하여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14]를 썼다. 다만 조선시대 인물들의 사고를 추적하는 경우에는 주희의 《논어집주》(論語集註)를 주로 읽는다. 조선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주희의 성리학에 입각해 사고했기 때문이다. [15]
이상의 인물 및 저작들은 서로 살았던 시기가 심하면 1500년은 훌쩍 차이나며 학문관도 그만큼 상이하므로, 같은 논어임에도 결코 비슷한 종류의 저작이라고 할 수 없다.
3. 내용과 특징[편집]
예를 들어 공자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16]라고 한마디 했는데,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 말을 했는지는 없고 그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는 한 마디만 남아있다. 말 그대로 상황은 하나도 없고 말씀만 남아 있으니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 물론 이 경우는 이미 널리 알려진 말이지만, 역시 정확한 맥락이 어땠는지는 영영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인, 예, 충 등의 의미가 후대 유교에서 변화, 각색된 경우가 있다. 공자가 말하는 인, 예, 충 등의 의미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인, 예, 충의 의미가 상충되기도 하므로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명확하게 와닿지를 않는다. 하기사 2천 년도 더 전의 책을 글자만 보고 바로 이해가 간다면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아무 것도 없다는 소리니 말이 될 리가 없다. 더구나 한문 특유의 중의적인 의미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예를 들어 학이편에 나오는 증자의 말 중 '전불습호(傳不習乎)'라는 문장은 크게 아래와 같은 4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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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받은 것을 익히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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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전하고도 스스로 익히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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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傳)을 익히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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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익히지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고 있는가?
또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 중 '색난(色難)'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대로 해석하면 '안색이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해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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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늘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부모를 섬기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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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부모의 얼굴빛을 살피고 그에 맞게 대처하기 어렵다.
저 긴 문장을 두 글자로 확 줄여버리니 해석하기 어려울 수밖에. 다만 조선시대로 한정하면 사실상 주자의 주석이 절대기준이었기 때문에 주자의 주석을 보면서 공부한다면 크게 혼란스러운 점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중의성은 고전 한문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과 함께 글의 해석하기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에는 책을 만들기가 지극히 어려웠다. 간독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책을 만드는 일은 굉장히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때문에 길이를 줄여, '꼭 필요한 공자 어록'만 요점 노트 비슷하게 만들고 이를 모조리 암송한 후, 구체적인 맥락과 해석은 스승에게 구두로 전수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자는 남아도 말은 흩어져 사람마다 경전의 풀이가 달라졌다. 후대에 주석으로 남은 부분을 제외하면 해석 부분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해석을 구전의 영역에 둔 것이 정확성을 훼손하는 것만은 아니다. 일정한 체계와 연속성이 있다면 오히려 문자 기록만 남아있을 때보다 구전이 더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그 유명한 사해문서이다. 사해문서는 구전으로 이어져온 경전이 오류투성이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천여 년이 지나도록 거의 비슷하게 보존한 사례이다.
각설하고, 그 외에도 《논어》는 여러 단문의 모음집이라 앞 내용과 뒷내용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의 몇몇 구절은, 배경지식이 없을 시 곡해하거나 아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비슷한 예로 《맹자》 양혜왕 편을 들 수 있다."'처음으로 나무 인형을 만들어 순장에 사용한 사람은 틀림없이 자손이 끊어져 후대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신 적이 있으니"[17]라는 문구는 순장에 대한 공자의 적개심을 알지 못한다면 이해가 힘든 부분이다.
그런 만큼, 하나의 일관된 사상하에 전개된 노자나 장자, 중용, 맹자보다 훨씬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들은 원전 하나만 파도 이해가 되지만, 《논어》는 획일화된 사상이 직접 드러나지 않는 명언 모음집을 읽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문 해석 면에서는 일부 난해한 비유들을 제외하면 맹자가 더 쉽고 주제의식도 명확하다. 논어는 책 전체를 꿰뚫는 주제의식을 찾기가 대단히 어려운 경전이다.
이것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논어를 읽으면 "그냥 착하게 살라는 말 아니야?"로 오해하기가 매우 쉽다. 사실 이건 유교에 대한 흔한 오해이기도 하다. 물론 논어는 책 전체를 꿰뚫는 일정한 사상하에 쓰여진 책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완독 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게 된다.
4. 편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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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론(上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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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學而) - 논어의 첫 편. 내용이 배우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근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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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爲政) - 주로 올바르게 정치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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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일(八佾) - 편의 제목인 '팔일'은 주나라 천자가 제사를 지낼 적에 한 줄에 8명씩 8줄, 총 64명이 서서 추는 춤이다. 이 춤을 노나라의 일개 대부[19]인 계손씨가 자기 집안 제사에서 추게 하는 것을 보고 공자가 예절이 무너지고 법도가 무너지는 춘추시대 말기의 사회상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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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里仁) - 선비가 살아가면서 처신해야 할 몸가짐을 설명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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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야장(公冶長) - 공야장은 공자의 제자이자 사위가 되는 인물이다. 옛날과 당시의 유명 인사들에 대한 평가가 주로 실렸다. 주자는 이 편을 자공의 제자들이 지었으리라 추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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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야(雍也) - 전반부는 공야장편과 비슷하게 인물평가. 후반부에는 주로 올바로 아는 것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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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述而) - 공자가 남을 가르치는 내용과 평소 행실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편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구절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은 이후 동양 역사학에서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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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泰伯) - 공자가 구상한 이상적인 정치상을 설명하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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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子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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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당(鄕黨) - 공자의 공사생활에서 드러난 행동거지에 대하여 기록한 편. 공자의 말보다는 공자의 평소 행실을 더 많이 설명한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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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여담[편집]
한국어 번역은 워낙 다종다양하며 동양철학 전공자들은 '괜찮은 논어 번역본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난감해한다. 번역본 종류가 워낙 많거니와 동양철학 전공자 수준이라면 번역본이 아닌 원문으로 논어를 읽기 때문. 따라서 동양철학 전공자에게 추천을 부탁해 봤자 '서점에서 죽 훑어 봐서 자신에게 적당하다고 느껴지는 것을 고르라.' 하는 판에 박힌 답변만 듣게 될 것이다.
한문 초심자들이 논어로 공부를 시작하기도 한다. 논어와 맹자 어느 쪽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은지는 일단 맹자가 문장이 매끄럽다는 이유로 선호도가 조금 높기는 하지만 개인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어차피 초심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고 그러면 단문 위주로 구성되고 중의적 해석이 많아 한문 읽는 맛이 있는 논어를 먼저 읽어도 된다는 쪽도 있다. 이이의 《격몽요결》은 맹자보다 논어를 먼저 읽는 쪽을 추천했다.
또한 내용을 보면 딱딱한 유교 경전의 이미지에 비해 생각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제법 있다. 공자가 제자들을 평가하면서 솔직하게 심정을 나타내는 모습이나, 제자들이 공자에게 이러저러하게 질문하고 따지자 공자도 이러저러하게 반박하고 설명하는 모습 등, 공자와 그 제자들 역시 평범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자로에 대한 애정 어린 갈굼(...)은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공자가 혹독하게 평가하는 제자 중에서도 유독 비난당하는 제자가 있다. 그는 바로 재여(宰予). 3년상을 하지 않아도 제 맘은 편안한뎁쇼? 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책 안 보고 자다가 욕을 먹기도 하고(...)[22] 자로의 경우처럼 부족한 제자라도 나름의 장점을 인정하고 꾸짖으면서 이끌어주려는 공자가 유독 독한(...) 모습을 보이는 제자. 자로 문서에서도 확인 가능하지만, 자로를 꾸짖는 건 어디까지나 교육이 목적이다. 그런데 재여는 인(仁)하지 않다거나, 조각도 못 하는 썩은 나무토막이라며 화를 낸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재여가 사상적으로 공자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것이 아닌가라는 말도 있고, 훗날 재여가 제나라에서 반역 사건에 참가했다가 삼족이 몰살당한 뒤, 공문십철이라고까지 불린 그와의 연관성을 최대한 부정하고자 유가 계열에서 재여를 깎아내리는 말을 많이 퍼뜨렸다는 말도 있다. 이래저래 흥미로운 인물.
공자가 사람을 구타한 기록도 있다. 《예기》〈단궁 하〉를 보면, 공자의 어린 시절 같은 마을 사람인 원양(原壤)은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슬퍼하지 않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등[23] 얽매이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기에 도교 사상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으나 공자의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논어》〈헌문〉에 이르기를, 어느 날 원양이 공자를 찾아갔을 때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거만하게 굴자 공자가 "어려서는 공손하지 않았고, 나이들어서는 일컬을 바도 없으면서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네놈이 바로 도적놈이다!" 라면서 원양의 정강이를 지팡이로 때렸다는 기록이 있다
공자가 대노했다는 해석도 있으나 실제로 대노했다는 기록은 없이 위의 언행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때문에 김용옥은 이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여, 사실 이것은 공자의 소탈한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들 중 하나로, 못난 친구를 농담조로 힐난하며 투닥대는 흐뭇한 모습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기사가 고전 한문으로 기록되고, 공자가 이제껏 기계적인 성인으로만 해석되어서 다만 준엄한 꾸짖음으로 여겨져 왔지만, 실제로는 "짜식, 왜 사냐?"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 사실 원양은 단순한 공자의 동향인이 아니라 정말로 공자의 죽마고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노래를 불렀다는 기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면 이렇다: 원양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공자가 그 겉 널 짜는 일을 도왔다. 헌데 원양이 목재위로 올라가 말하기를 "내 어머니의 상을 당한지도 오래되었고, 감정을 음률에 맡기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다" 하며 노래하기를 "너구리 머리 털 반드러움이여, 여인 손 잡은 듯 보드랍네!(나뭇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하였다. 공자가 그냥 못 들은 체 하였는데, 제자들이 "선생님께서는 저 사람과 사귀기를 그만두지 않으시려는지요?" 하였다. 이에 공자가 답하기를 " 구(丘: 공자의 이름)는 들었노라, 친우(親友), 그 친(親)을 잃지 말 것이며, 고우(故友), 그 고(故)를 잃지 말 것이라!" 하였다. 이 기사를 감안할 때 김용옥의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논어를 공자의 저작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공자 본인은 단 한 권의 저술도 쓴 적이 없다. 잘 알려진 춘추나 시경 등도 술이부작(述而不作), '그대로 서술하되 창작하지는 않는다' 의 원칙하에 편집하기만 했을 뿐이다. 혹자는 공자가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편집, 즉 술이는 술이인데 완전히 부작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공자 본인의 편집 철학은 술이부작이라고 한다.[24][25]
성균관대학교의 졸업 필수 과목이다.
역대 중국, 한국의 왕조들과 일본의 천황가, 쇼군가, 다이묘들도 배우는 학문 중 하나였다. 근대 일본의 기업가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논어와 논어의 가르침을 살면서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5. 관련 고사성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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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리사의(見利思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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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유불급(過猶不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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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력난신(怪力亂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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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언영색(巧言令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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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복례(克己復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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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사표음(簞食瓢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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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道聽塗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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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지십(聞一知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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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신언(敏事愼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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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분망식(發憤忘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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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하문(不恥下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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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신성인(殺身成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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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송백(歲寒松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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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부작(述而不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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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추원(愼終追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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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지신(溫故知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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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산요수(樂山樂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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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속부달(欲速不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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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지학(爲己之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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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보원(以直報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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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중도원(任重道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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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계우도(割鷄牛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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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생가외(後生可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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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연이 공자에게 인을 물었다:세 원숭이의 모티브도 여기서 나왔다.
6. 외부 링크[편집]
7. 관련 문서[편집]
논어
子曰、學而時 여기서 時를 '때때로'가 아니라 '때에 맞추어 적절하게'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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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子曰、學而時 여기서 時를 '때때로'가 아니라 '때에 맞추어 적절하게'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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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가자
통가자 ( 通 假 字 )는 한자 의 사용법의 한 가지로, 특정 뜻을 나타내는 한자가 이미 있음에도 글을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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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가자
통가자 ( 通 假 字 )는 한자 의 사용법의 한 가지로, 특정 뜻을 나타내는 한자가 이미 있음에도 글을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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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가자 ( 通 假 字 )는 한자 의 사용법의 한 가지로, 특정 뜻을 나타내는 한자가 이미 있음에도 글을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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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고사성어( 故 事 成 語 )는 고사 에서 유래된 한자어 관용어 를 말한다. '고사'란 유래가 있는 옛날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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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고사성어( 故 事 成 語 )는 고사 에서 유래된 한자어 관용어 를 말한다. '고사'란 유래가 있는 옛날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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