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모 성균관유도회 부산광역시본부 회장의 유교신문에 발표한 ‘바위에 새겨진 각자(刻字)에서 역사를 배운다’라는 특별기고를 연재하여 네티즌들로 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송진모 성균관유도회 부산광역시본부 회장은 유교신문 부산광역시본부 주재기자와,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금정구 남산동에서 태어나 향토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동래 범어사를 가끔 찾으면서 범어사 옛길 가에 있는 각자에 흥미를 느껴 연구를 하다가 차츰 관심이 깊어져 전국을 대상으로 각자를 조사하였다고 한다. 송진모 성균관유도회 부산광역시본부 회장의 소중한 옥고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목적으로 아래와 같이 기사를 소개코자 한다.
특별기고 - 바위에 새겨진 각자(刻字)에서 역사를 배운다
④근현대 최대 각자 인명사전, 양산 통도사 청류동천(靑流洞天) 계곡을 찾아서
송진모 / 부산시 주재기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양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자장 율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로 해인사,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대 사찰로 불리고 있으며, 낙동강과 동해를 끼고 있는 영축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영축산은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하던 인도의 영축산과 산세가 비슷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자장 율사는 당나라 구법(求法) 중에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 사리와 가사 및 경책을 금강계단에 쌓은 뒤 봉안하고 사명을 통도사라 했다. 통도사는 이처럼 부처님의 진신 사리와 가사를 금강계단에 봉안했기 때문에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있지 않다.
통도사의 이름은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금강계단을 통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모든 진리를 회통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 통도사 입구에서 일주문까지는 오래되고 울창한 노송림들이 찾아온 이들을 여유롭게 반기고 있으며 해탈문으로 들어서면 보이고 만져지는 대부분의 것들이 국보나 문화재들이라 불자이든 아니든 들어선 모든 이들에게 경이로움과 따뜻함을 안겨 준다.
통도사 청류동천 각자 바위
청류동천(靑流洞天) 각자 바위 주변에는 많은 바위들이 있고, 이들 바위에는 또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바위 면마다 틈이 없을 정도다. 이름을 남겼으나 알 수 있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목은 이색,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은 후손이 새겨 놓았고, 1723년(경종 3)부터 1900년대 초까지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은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며 바위에 이름을 새기고 후세에 남겼다.
조선시대의 각명자(刻銘者)는 가진 자의 호사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親日)의 상징과도 같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시대를 상징하는 풍속도이기도 하다. 양반, 관료, 거부, 친일매국노, 일본인, 스님, 기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남겨놓은 영욕(榮辱)의 방명록이자 가히 조선 최대 각자 인명사전이라 할만하고 근현대의 수많은 인물이 각자되어 있어 한국사의 흐름을 알 수 있는 현장이라 할 수가 있다. 청류동천의 풍광과 풍류, 불보 종찰 통도사를 찾기 위해 조선의 유명한 사람들이 앞 다투어 통도사와 청류동천을 찾게 된 자가 현재 파악된 각명자(刻銘者) 수가 무려 1,800여 명이나 된다.
통도사 청류동 각자 바위
청류동(靑流洞) 각자 바위에 앞면 31명, 옆면 3명, 뒷면 28명, 그리고 바닥 20명 등 모두 8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중 앞면 중앙 위쪽에 작은 크기로 청류동(靑流洞)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자를 처음으로 새긴 사람은 암행어사 유수(柳綏)로 그가 이 바위에 계묘유월어사래(癸卯六月御史來,1723년 6월)로 각자(刻字)함으로써 기록에 남아 있는 청류동천의 효시가 되는 것이다.
박내정(朴乃貞) 동래부사가 이름을 새긴 것은 숭정재계묘동(崇禎再癸卯冬)으로 1723년 겨울인데 비해 유수(柳綏)가 이름을 새긴 것은 계묘유월(癸卯六月)로 같은 해이지만 반년이나 빠른 여름이다.
그 옆에는 조선시대 유명한 화가였던 우리가 잘 아는 인물들의 이름도 보인다. 1789년 정조의 명을 받아 일본지도를 그릴 임무를 띠고 김응환과 같이 온 김홍도가 있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와 그의 스승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의 이름이 선바위에 나란히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최고 화가 가운데 하나인 김홍도가 이곳 통도사를 찾아 어떤 영감을 얻었을지 궁금하지만 현재 성보박물관에는 김홍도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는 ‘통도사전도’가 남아 있다.
그 옆에는 전라도 관찰사 때 동학군 김개남을 체포하는 데 공을 세운 이도재(암행어사)도 있고, 다소 누운 바위에는 갑오년 동학 농민군을 토벌한 공로로 동래부사가 된 후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이 있다. 지석영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추도사를 읽었지만, 경술국치가 되자 일제가 불법으로 조선을 병탄했고 자신이 일제를 위한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인식한 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여러 차례 총독부로부터 수많은 공직을 권유받아도 단 한 번도 수락하지 않았다.
박영효, 김홍조 각자 바위
또 청류동 각자 바위 옆에는 박영효, 김홍조, 김정훈 바위도 있다. 박영효(1861~1939)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지만 일본 귀족으로 친일의 길을 죽을 때까지 걸었다. 그의 의형제인 김홍조(1863~1922)는 반상의 차별 철폐, 종의 폐지와 해방, 적자와 서자의 차별철폐, 의복개량과 색옷 장려, 자작농 육성, 교육권장을 한 울산의 선각자이다. 박상진의 대한광복단 비밀요원으로 군자금을 지원하였고,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이었고, 지방신문의 효시인 경남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사장과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철저한 불교 신자였던 그는 통도사 자장암 마애불 조성에 시주하기도 하였다. 또 작천정과 학성공원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밖에도 많은 역사적 인물이 이곳 이름바위에는 있다. 이름바위들은 여름이면 이끼가 껴 잘 보이지 않는다. 부끄러운 혹은 자랑스러운 이름이지만 감추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인가 보다.
청류교를 지나면 영축총림 바위가 보인다. 말 탄 자 내리라는 하마비 뒤의 큰 너럭바위가 부채형상을 한 선자바위이다. 숲 속의 선자바위에는 을사오적 이근택, 울산 장대벌에서 천주교인을 참수한 윤선응도 있다.
하지만 도로 쪽 바위에 더 많은 역사적 인물이 많다. 1910년 양산 내원사에서 49일 기도를 한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는 내원사와 같이 통도사에도 포덕 51년 1월에 그와 수행인 이름을 새겨놓았다. 그 옆에는 백산 안희제와 같이 활동한 전석준이 있다. 한국 근대사의 역사적 인물들이 이 주변 바위에 많이 발견된다. 이름이 빛나기도 하지만 오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부산과 관련 있는 인물을 시작으로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박내정 동래백, 서당보·조규년·홍종용·윤노동·송정화·정현덕·신동신·홍희조·유석환·강시영·남종순·박제관·김학진 동래부사, 김종윤·이종직·박병익·조종서 동래부윤, 정인표·원유상 동래군수, 장우석 구명학교 설립자, 박기종 부산 개성학교창설·부하철도회사 창설, 손영희 기장군수, 이정필 절영도 첨사, 이규직 구포은행장·경남은행장, 김교헌 동래부사 겸 동래감리·대종교2대 교주, 기장철마 오덕근 통정 비서승, 오태환(덕근의 자) 구산학원 설립자, 오봉근 덕근의 제, 김희권 구포의 재력가(구포동화재의연기념비), 기장 이하영 미국공사·외부대신·법부대신, 부산 송정 노영경 경주부윤, 유직 부산첨사·함안군수, 조병택 한일은행장·동래지점 개설, 이만직 경상도 암행어사(선동 비석有), 동래기생 신유, 황기수 조선일보 조선지국장·신간회 동래지부 조직 선전부 간사, 후쿠다소베(福田增兵衛) 부산의 3대 부자, 후쿠다쇼베의 부인 방자(房子), 해사 김성근 탁지부대신·범어사 일주문 현판글씨·작천정 현판 글씨, 아이다 아끼라(飯田章) 부산경찰서 경시, 이기방 기장군수, 최재학·유방주 금정별장, 이남집·이창한 부산첨사, 이원희·이교헌 다대포 첨사, 최유봉 부산 실업가·사립초량학교 설립자, 이상만 동래부 참서관, 임백은 청백리 기장현감, 조병진 기장현감, 유봉석 부산항 총순, 안동준 부산왜학 훈도이다. 이헌영 부산항감리·경상도관찰사, 권순도(부산 해관장 사택서생)
이어 부산 관련 이외의 각자에 대해 소개한다.
하서면 난국계(蘭菊契,93명), 광무 6년 임인계추(壬寅契秋,27명), 산수계(山水契,29명), 병인갑계원방함(丙寅甲契員芳啣,14명), 조병호·이근필 경상도 관찰사, 윤풍정 울산감목관, 윤영한 울산군수, 이만헌 언양헌감, 이기혁 경상좌병사, 현승운 경주영장, 정긍조(鄭肯朝) 헌산시사(巘山詩社,1896) 결성, 최설송당 영친왕보모상궁·김천중고교 설립, 류석 경상좌도 암행어사(1886), 이규설 언양현감, 남정철 성균관 대사성(1885)·내부대신, 정환직 삼남의병부대장(1907), 이호신 경상감영 중군(1871), 현학표 창원부윤·창원감리(1904), 조만식 양산군수(1880), 최시명 언양군수, 민종묵 양산군수·공조판서·외부대신·탁지부대신, 윤치오 학부 학무국장, 조석영 울산군수,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채경묵 양산군수, 현왕운 조선전보총국 감동사용(監董司勇,정9품), 엄형섭 양산군수, 창원기생 김점순, 원용준 경상좌병영 우후, 대구기생 선희, 이기혁 경상좌병사를 따라온 관기 밀양기생 초월과 월선, 김인호 경상좌수사, 울산기생 강선·산홍, 박효관 가곡원류(가곡원류는 고시조의 최종보고서라 할 수 있으며, 김천택의 청구영언, 김수장의 해동가요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조집), 정병하 밀양부사·농상공부대신, 정숙조 김해부사, 서상화 대구의 교육자, 이계홍 경상좌병사, 손병규 중추원의관, 오횡묵 함안군수(叢鎖錄·與載撮要 저자), 이보상 남해군수(1925년 오세창 최남선 등과 산벽시사 참여), 임한수 경주부윤, 김해기생 채선, 창원기생 채선, 평양기생 금홍, 순천기생 앵혜, 회산기생 계선, 진남기생 춘흥, 경주기생 봉란·향란, 경주기생 백안동, 금릉기생 벽도·정국향, 엄주익(엄비의 조카) 법무대신 서리, 내시 강석호 홍릉상선·경효전상선·시종원상선(이 당시 환관은 국가의 좀벌레), 내시 오긍엽, 내시 한유현, 이근영 언양군수·한성부 관찰사, 이범선 양산군수, 최정헌 양산찰방, 이지영 경주영장, 광뢰장강 양산수리수합장(1922), 장직상 신령군수, 김관수 현풍현감, 조운한 영산현감, 조희식 창녕현감, 송상래 안동부사는 아전들의 이름을 같이 새긴 최초의 사람이다. 이우 경상좌병사, 조창호 웅천현감, 권상문 경주군수, 이범석 영천군수,박정양·강문형·엄세영·심상학·이헌영 신사유람단, 밀양부사 조장호, 현영운 박문국 주사,배정자 현영운의 처(악독한 친일), 김기수 최초의 수신사(1876), 김유일 작천정 중수기 현판, 이만도 의병대장·양산군수 등이다.
청도 금천면 임당리 김씨고택
청도 임당리 고택의 주인 김병익(金秉翼)도 자(子) 일준(馹俊)· 학준(學俊), 손(孫) 문선(文善)· 문극(文極)· 문석(文錫)과 같이 이름을 새겼다. 경북 청도군(淸道郡) 금천면(錦川面) 임당리(林塘里)에 있는 임당리김씨고택(林塘里金氏古宅)의 주인들로서 17대를 이어온 내시집안이다. 별채에서 내시부통정일준가세계(內侍府通政金馹俊家世系)라는 이른바 내시 족보를 발견한 것이다. 고택의 주인이 다름 아닌 내시들이었고, 궁궐에서는 내시로 살고, 청도 집에서는 왕실의 농토를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출처; 유교신문
특별기고 - 바위에 새겨진 각자(刻字)에서 역사를 배운다④근현대 최대 각자 인명사전, 양산 통도사 청류동천(靑流洞天) 계곡을 찾아서 (cf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