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와 쑹메이링
1950년 7월 29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Bataan) 호가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북한군의 공격을 뚫 고 수원비행장에 착륙했다. 한강 남쪽 최전선을 시찰했다. 맥아더는 바로 도쿄로 돌아왔다. 그의 머릿속에는 작전 구상이 이미 끝나 있었다. 이튿날 맥아더 장군의 바탄호가 다시 이륙했다. 기수는 대만 을 향했다. 맥아더를 만난 장제스는 3만3000명을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렇듯 한국전쟁은 시작부터 대만과 한 쌍을 이루고 있었다.
공산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자 맥아더 장군 일행은 대만을 방문, 장제스 정부 군수뇌부를 만나 대책 회의를 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 중앙에 맥아더 사령관 그의 왼쪽편에 장제스 총통 그리고 맥아더 오른편에 장 총통 부인 쑹메이링여사 앉아있다. (1950년 7월 31일)
한 컷에 담은 쑹메이링 여사와 맥아더 사령관(1950년 7월 31일)/이상 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홈페이지
쑹메이링(宋美齡, 병음: Sòng Měilíng, 한자음: 송미령 1897년 3월 5일 ~ 2003년 10월 23일) 여사는 전부 근대
중국의 출현 동안 눈에 띈 세 명의 쑹 자매(쑹아이링, 쑹칭링, 쑹메이링) 중에 막내로 중화민국 총통인 장제스의 부인이다. 상하이 출신으로 중국의 부유한 감리교도인 쑹 자매의 부친 찰스 존스 쑹은 미국에서 수학하였고, 쑹메이링을 조바어 웨슬리언 대학교로 유학을 보내어 그녀는 1917년 졸업하였다. 장제스는 1927년 그녀에게 청혼하며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자신의 첫 부인과 이혼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활동적으로 중국의 정치에 참여하게 되어 신생활 운동을 일으키고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화민국 입법원의 회원과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항공 정세 위원회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자신의 남편이 대원수와 국민당의 당수에 오르면서 쑹 여사는 그의 영어 통역, 비서와 조언자로서 활동하였다.
미국에서 그녀의 경험들은 그녀를 유능한 대변인으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동안 그녀는 넓게 여행을 다녀 중국의 곤경을 알리고 일본군에 대항하는 성원을 유도하였다. 1943년 그녀는 미국의회에서 연설하는 데 첫 중국 국적이자 두번째 여성이었다. 1948년 쑹 여사는 국민당의 성원을 위하여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호소하러 미국에 갔다. 1949년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의 설립 후, 그녀는 장제스 총통의 부인으로서 중화민국의 정치에서 현저한 역할을 하였다. 25년 가까이 그녀는 미국의 10명의 가장 존경받는 여성들의 명단에 포함되었고, 2번이나 타임 잡지의 표지에 나왔으며 한번은 남편과 함께, 한번은 "용의 여성" 타이틀 아래 혼자였다. 1975년 장제스의 사망 후 그녀는 106세의 나이에 자신의 사망까지 미국에 거주하였다.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화민국에 의존할 때 도운 공로로 196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1등)을 수여 받았다.(출처: 위키백과)
당시 장제스를 방문한 멕아더와 그의 참모들과 대화에 쑹메이링 여사의 통역으로 단단히 한몫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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