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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불화, 마이크로 세계 ]기사 모음

[고려불화, 마이크로 세계 ]기사 모음

 현대불교신문에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는 중앙승가대 강소연교수의 [고려불화, 마이크로 세계] 기사 모음집을 소개합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자랑스러운 고려 불화의 우수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려불화, 마이크로 세계] 14. 아미타삼존내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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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강소연/ 중앙승가대 교수 
  • 입력 2021.07.19 10:12

투명 광배, ‘반야의 빛’ 표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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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호도지 소장된 삼존내영도
내영도 중 3대 수작으로 꼽혀
불보살 투명 광배 표현 ‘눈길’
고려 불화 특유 ‘금선묘’ 확인 

고려불화에 등장하는 부처님과 보살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투명한 광배다. 물론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가늘고 가는 금선묘의 문양. 그것이 고려불화 특징 중 최고 압권이지만, 이와 동시에 또 하나의 손꼽을 만한 특징은 투명한 요소의 표현이다.

화려한 보관의 두 협시보살과 금빛 보상화문 넘실대는 가사를 입은 부처님.(그림1) 아미타 삼존의 장엄한 공덕을 완성시키는 화룡정점은 투명한 금테의 광배이다.(그림2) 마치 커다란 보름달 3개가 순차적으로 뜬 것처럼 교교(皎皎)하고 영롱하다. 일본 호도지(法道寺) 소장 고려불화 〈아미타삼존내영도〉(그림1)는, 삼존 형식의 내영도 중에 일본 MOA미술관과 한국 호암미술관 소장품과 더불어 3대 수작으로 손꼽힌다. 

 

‘금선묘 디테일’ 재확인
삼존 가운데의 아미타불 광배 역시 투명했을 것인데, 일본에 유출되어 약 8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의 어느 시점에 하얀 불투명한 색이 살짝 입혀져 버렸다. 지난 연재 일본 쇼호지(正法寺) 소장 〈아미타독존내영도〉의 아미타불 광배를 참고하면, 본래 어떤 모습의 광배였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현존하는 고려불화 약 160여 점에 등장하는 모든 부처 및 보살의 광배는 일관적으로 투명하다. 고려불화에 투명하지 않은 광배는 없다고 보면 된다. 반면, 조선시대, 특히 조선후기 불화의 불보살 광배는 녹색인 경우가 많다. 도상학적으로 본다면, 고려불화의 광배 표현이 보다 여법(如法, 법의 이치에 합당)하다고 하겠다. ‘신묘(神妙)의 경지’라 칭송받는 고려불화 ‘금선묘 디테일’의 품격을 한 번 더 그 정점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 바로 투명한 요소의 표현이다. 

광배 이외에도 투명한 염주, 투명한 정병, 투명한 사라, 투명한 영락 등 고려불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투명한 도상들이 많이 있다. 그 치밀하고 정밀한 화려함에 투명함이라는 고도의 기술을 더해 종교화로서의 완성도를 극치로 끌어올렸다. 

고려불화는 ‘투명함’이라는 깨달음의 요소를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고려불화를 그린 화승(畵僧)들은 깨달음의 풍경과 깨달음의 요소를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온 힘과 정열을 기울여 투명함을 표현하는 데 용맹 정진했고 그것을 기필코 구현해 냈다. 주지하듯이, 〈수월관음도〉에 표현된 투명한 사라의 표현은 고려불화의 세계적인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수행을 하다보면, 무수한 투명한 요소들과 만나게 되고 그것과 합일하게 된다. 뿌옇던 하얀 빛은 점점 밝아지더니 급기야 투명해진다. 무엇을 관찰하던 결국에는 모두 투명해져 버린다. 그러다가 공空의 자리가 드러난다. 세상의 풍경 역시 투명하고 영롱하게 반짝인다. 마치 양파 껍질이 벗겨진 듯, 탁한 필터가 제거된 듯 갑자기 맑게 게인 듯 보인다. 사마타 수행 끝에 만나는 여의주 역시 투명하다. 무량한 빛이라는 강력한 빛 역시 발광하는 빛줄기가, 지상의 빛처럼 반사되거나 퍼져나가지 않고, 희안하게 투명하다. 

생전 처음 보는, 뭐라 설명 불가한 빛의 모습이다. 빛은 빛인데 발광(發光)하지 않는다. 바탕 공간에 편재하는 각성(覺性)의 마음은 투명하다. 대승경전에서 자주 만나는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는 용어에서 보듯, ‘투명하다’를 ‘청정하다’라고 표현한다. 깨달음과 합일한 부처 보살의 몸체에서는 ‘깨달음의 빛’, 즉 청정한 ‘반야지혜의 빛’이 퍼져 나온다. 이것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 바로 고려불화의 광배이다.  

“광명 만나면 진정한 휴식 얻으리”
〈무량수경〉에 언급된 이 밝은 빛 또는 광명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자. 

“아미타불의 밝은 광명은 가장 높고 뛰어나서, 달리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부른다. 만약 중생이 아미타불의 광명을 만나게 되면, 탐욕과 성냄, 어리석은 마음이 저절로 스러지고, 몸과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상냥해지면, 기쁨이 가슴 가득 넘치고, 진리를 구하려는 마음이 용솟음친다. 지옥과 아귀, 축생의 삼악도에서도 이 광명을 만나게 되면, 평안한 휴식을 얻어 다시는 괴로움을 겪지 않고, 목숨이 다한 뒤, 해탈을 얻는다.” 

이 빛을 만나면 치성했던 탐진치(貪瞋痴)가 그대로 녹는다고 한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빛을 만나기 전에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니요, 휴식도 휴식이 아닌 것이다.

“세상을 비추는 이 밝은 지혜는 생사의 먹구름을 거두나니”라고 하여, 생사윤회의 검은 에너지를 타파해 버린다. 이 빛으로 자아의 바탕인 탐·진·치의 마음이 녹아버려야, 자아가 없어져야 만이 세세생생 윤회하던 기나긴 고단함이 드디어 쉴 수 있다. 

 

눈 먼 사람이 어찌 길 안내를 
아미타삼부경은 극락세계를 제시하고 또 이러한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삼부경 중, 특히 무량수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내용이 참으로 깊고 심오하다. 간절히 원한다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심신으로 행동해야 된다. 진정 사랑한다면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극락에 태어나는 ‘원인이 되는 공덕’을 설한 부분인 ‘극락왕생의 인행(因行)’을 보면, 중생뿐만 아니라 보살에게도, 그러니까 중생과 보살 모두에게 극락왕생의 인행을 간곡히 설법하는 내용을 만날 수 있다. 

중생에게는 상중하(上中下)의 근기(根機, 본인이 쌓은 수행 가능한 능력의 정도)에 따라 어떻게 왕생하게 되는지 설명하였고, 보살에게는 게송으로 당부하고 있다. 보살들의 소원, 극락정토를 이룩하려면 “법의 성품이 공하고, 무아임을 깨닫고, 보살도를 닦아 공덕을 갖추라”라고 하시고, 중생구제의 다짐을 받는 내용이 나온다. 

“지극한 서원 세워 자신이 사는 땅, 극락으로 만드려면 모든 중생 제도할 것을 다짐하라! 교만하고 삿되고 게으른 사람은 이 법문 만나기 심히 어렵다.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길 안내를 하려 함과 같다. 온 세계 불길 가득하여도 반드시 뚫고 나가 불법을 깨닫고 부처되어, 생사 헤매는 중생을 구하라!” 

‘내가 공함을 깨닫고 남을 이끌라’라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길만이 보살의 유일한 길이자, 이곳을 극락으로 만들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 이룩되어 있는 극락정토는 법장 비구(아미타불의 전신)가 5겁의 오랜 세월을 두고 깊은 선정에 들어 이룬 불국토”라고 한다.  

이렇게 공들여 만들어진 “극락세계에는 모두 몸에서 빛이 나는 보살들이 있는데, 그 보살들 중에 가장 존귀한 두 보살이 있다”고 한다. “한 분은 관세음보살이고, 또 한 분은 대세지보살이다.” 

이 두 보살 역시 속세에서 세세생생 보살행을 닦을 결과로 극락에 태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극락이든 지옥이든, 중생이든 성자이든, 어디에든 인과법(因果法)은 적용된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는 불이법(不二法)이 납득이 가게 된다. 

불교의 특징, ‘自力’의 제시
경전에는 “거지는 왜 거지이고, 임금은 왜 임금인가?”라는 질문에 “전생에 지은 복덕의 과보”라는 답과 함께 아무리 속세에서 임금이 되어도 “보살에는 비교할 수 없다”라고 한다. 그러니 보살이 되고자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아미타신앙이라고 하면 타력(他力)신앙이라고 흔히 규정한다. 타력 신앙이란 아미타불의 위신력에 전적으로 의탁하여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것이다. 중생의 마음은 나약하기에 거의 모든 종교는 타력신앙을 제시한다. 특정 신(神)을 믿고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 안에서 타력신앙이라고 불리는 아미타신앙의 핵심을 들여다보면, 타력과 함께 자력(自力)을 제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수행의 결과로 스스로 부처가 되라는 것이다. 

 “참으로 극락에 가는 길은 쉽건만, 가는 사람이 없구나!” 이렇게 극락세계의 존재와 극락왕생의 방법을 간곡히 얘기했건만, 마음 내는 사람이 없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온갖 욕망을 쫓아 봤자 그 과보로 아득한 나락에 떨어져 다시 헤맬 뿐인데도. 

“사람들은 어찌 덧없고 너절한 세상일을 뒤로 미루지 않는가? 젊고 건강할 때 힘을 다해 선정을 닦고 정진하여 생사의 고해를 벗어나려 않는가? 어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큰 도를 구하지 않는가?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어떤 즐거움을 바라는가?”

 

 강소연/ 중앙승가대 교수 hyunbulnews@hyunbul.com 기자의 다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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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