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 수라상에서도 귀한 대접… 뽀얀 쌀밥 한 그릇
-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
등록일 2019.04.24 19:32
-
게재일 2019.04.25
황광해의 경북의 멋과 맛을 찾아서
제사·손님맞이·잔치 외엔 쓰지 못했던 백미
열 살 무렵, 시골에 살았다. 어느 날 이웃집에 놀러 갔다. ‘계란밥’이 나왔다. 쌀 조금에 보리쌀과 좁쌀을 잔뜩 넣은, 가난한 집의 식사였다.
노란 좁쌀이 달걀과 비슷한 색깔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계란밥’ 타령을 했다. 그나마 밥은 먹고 살 정도의 중농. 할머니는 철없는 손자의 ‘계란밥’ 타령을 듣다못해 말씀하셨다. “쟈, 저러다 병나겠다. 고마, 계란밥인지, 좁쌀밥인지 해조라.”
그로부터 몇 번 ‘계란밥’을 먹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오래지 않아 그게 달걀이 아니라 좁쌀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렸다. 밥그릇에 담긴 작고 노란 좁쌀 알갱이. 당연히 좁쌀이 어떤 의미를 지닌 지도 몰랐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중국에서 샤오미[小米, 소미]라는 회사가 나올 줄은 짐작도 못 했다.
◇ 쌀을 먹은 역사? 그리 오래지 않았다
이밥에 고깃국? 북한이 김일성 시대부터 내걸었던,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구호다. 쌀밥 한번 마음껏 먹어보자. 만만치 않다.
우리 ‘쌀밥 역사’도 그리 길진 않다. 수탈의 일제강점기에는 언감생심 힘들었다. 한국전쟁 후에는 전쟁의 상처로 먹고살기 힘들었다. 1970년대 혼식과 분식의 시대를 지났다. 힘들었던 시절, 정부는 아이들의 도시락까지 검사했다. ‘식량 자급자족’은 쌀밥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먹어보자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쌀밥 마음껏’을 이루었고 북한은 실패했다.
그 이전, 조선 시대에는 가능했을까? 당연히 불가능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4년(1458년) 6월26일의 기사다. 제목은 ‘도승지 조석문, 우승지 한계미에게 제향 외에는 갱미를 쓰도록 명하다’이다.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냄비밥. 가난한 시절의 냄비밥은 추억이 됐다.
임금이 도승지 조석문, 우승지 한계미에게 이르기를, “내가 항상 스스로 검약하여서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넉넉하고 유족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음식을 조금도 검찰하지 않으니, 반미(飯米)는 지극히 정(精)하고 지극히 희게 할 필요가 없다. 금후로는 제향(祭享) 이외에는 세갱미(細粳米)를 쓰지 말게 하고, 대개 중미(中米)를 쓰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조석문이 대답하기를, “중미는 지극히 거칠으니 진공(進供)하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갱미(粳米)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세갱미〉갱미〉중미’ 순서다. 중미보다 더 거친 쌀은 ‘조미(<7CD9>米)’다. 말 그대로 아주 거친 쌀이다. 조선 건국 후 60년이 지났을 시점이다. 나라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세조는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절대군주다. ‘반미(飯米)’는 밥쌀이다. 절대군주가 먹는 밥상의 쌀을 반쯤 쓿은 것으로 사용하라는 명령이다. 지금의 현미보다 덜 쓿은, 거친 쌀이었을 것이다. 세갱미는 완전히 쓿은 쌀이다. 오늘날의 백미(白米)와 흡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역시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제향(祭享)’은 제사와 잔치다. 제사 모시는 일과 손님맞이 잔치 이외에는 귀한 백미를 쓰지 말라는 지시다. 임금도 일상적으로 백미를 먹기 힘들었다.
조선 시대, ‘쌀’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쌀[米]과는 다르다. 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지금 우리가 먹는 쌀은 대미(大米)다. ‘소미(小米)’도 있다. 좁쌀이다. 좁쌀도 쌀이다.
쌀만 일용하는 곡식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메밀도 일상적인 ‘밥의 재료’ 곡물이었다. 메밀을 구황작물로 여기지만 그렇지는 않다. 메밀은 흉년에 먹는 구황작물이면서, 일상적으로 재배하고, 식량으로 삼았던, 중요한 곡식 중의 하나였다. ‘메밀 쌀’도 있었다.
곡식은 두 종류로 나누었다.
정곡(正穀)과 잡곡(雜穀)이다. 사전에는 “쌀, 찹쌀 이외에는 모두 잡곡”이라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의 ‘경세유표_제12권_지관수제_창름지저3’의 일부다. 정곡과 잡곡의 종류, 곡식의 종류를 정확하게 기록했다.
정곡 여섯 가지는, 첫째 대미(大米: 즉, 볍쌀), 둘째 소미(小米: 즉, 좁쌀), 셋째 벼(租: 즉, 稻), 넷째 조(粟: 즉, 稷), 다섯째 대맥(大麥), 여섯째 대두(大豆)이다(벼 중에는 혹 산도(山稻)라는 것이 있고, 조 중에는 혹 늦차조가 있음).
이밥에 고깃국은 옛날 사람들의 소박하면서도 큰 소망이었다.
잡곡 여섯 가지는, 첫째 패자(稗子: 吏文에는 잘못 稷이라 함), 둘째 수수(<85A5>黍: 이문에는 그릇 唐이라 함), 셋째 귀밀[雀麥: 이문은 그릇 耳牟라 함], 넷째 메밀[蕎麥: 이문에는 잘못 木麥이라 함], 다섯째 소맥(小麥: 이문에는 그릇 眞麥이라 함), 여섯째 소두(小豆: 녹두는 진제(賑濟)와 군량 양쪽에 마땅한 데가 없으니 그 이름을 열두 가지 중에서 없앰이 마땅함)이다.
정곡은 대미(쌀), 소미(좁쌀), 벼(예전 멥쌀), 조[粟, 속, 기장으로 추정], 대맥(보리), 대두(콩) 등이다.
잡곡은, 패자(피), 촉서(수수). 귀밀(귀보리), 교맥(메밀), 소맥(밀), 소두(팥) 등이다. 녹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진제(구휼 정책)와 군량 양쪽에 모두 큰 쓰임이 없다.
쌀과 더불어 좁쌀, 메밀 쌀, 기장, 보리 등을 널리 ‘쌀’로 사용했다.
다산 정약용의 시대, 즉 정조대왕이 통치하던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다. 비교적 안정적이고 넉넉하던 시절이다. 이 시대에도 ‘이밥에 고깃국’은 여전히 힘들었다. 쌀 대신에, 오늘날 우리가 잡곡으로 여기는, 보리, 좁쌀, 기장, 콩 등을 밥 짓는 곡물로 사용했다. 쌀만 쌀이 아니라, 여러 잡곡도 쌀로 여겼다.
출처: 경북메일
오피니언 칼럼 황광해의 경북의 멋과 맛을 찾아서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13683
임금님 수라상에서도 귀한 대접… 뽀얀 쌀밥 한 그릇 - 경북매일
열 살 무렵, 시골에 살았다. 어느 날 이웃집에 놀러 갔다. ‘계란밥’이 나왔다. 쌀 조금에 보리쌀과 좁쌀을 잔뜩 넣은, 가난한 집의 식사였다.노란 좁쌀이 달걀과 비슷한 색깔이었다. 그 후 오랫
www.kbmaeil.com